print

보수 한진號에 脫권위 새 바람

보수 한진號에 脫권위 새 바람

한진그룹의 조양호 신임 회장
지난 2월18일 대구 지하철 참사 직후 열린 한진그룹 임원회의에서 신임 회장은 “이번 참사는 운송 전문 그룹인 우리에게도 시사점이 적지 않은 만큼 모든 부서가 철저하게 안전점검을 다시 하라”고 지시했다. 과거 조그마한 안전불감증이 그룹 전체에 치명타를 입혔던 기억들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그는 안전을 다른 어떤 것보다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CEO로 꼽힌다. 그가 평소 강조하는 서비스 품질·성장성(장기비전)·이익 중심 경영 등 3대 경영 방침보다도 안전이 먼저 다뤄져야 한다는 결심을 한 지는 이미 오래다. 조양호(54) 한진그룹 회장 겸 대한항공 회장. 고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의 장남인 그는 선친이 타계한 지 3개월여만인 지난 2월14일 회장 자리에 올라 이제 ‘한진號’의 미래를 양 어깨에 짊어졌다. 한데 발렌타인데이라고 해서 서울 시내가 떠들썩했던 이날, 자산규모 24조원, 재계 8위 그룹인 한진그룹의 신임 회장 취임식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그룹 전자게시판 ‘노츠’에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이 한진그룹 회장이 됐다’는 짤막한 내용의 공지사항만이 올라왔을 뿐이다. 이 내용을 보도자료로 언론사에 돌린 게 전부다. 그룹 회장 취임사도 없었다. 통상적으로 다른 그룹을 보더라도 신임 그룹 회장이 취임할 때면 임직원들이 모인 가운데 그룹 깃발을 흔들며 행사를 갖는 게 관례다. 하지만 조회장 취임 때는 그런 게 아예 없었다. 조양호 회장은 그런 거추장스런 ‘형식’을 싫어한다. 이에 대해 그는 “별다른 이유는 없고, 이젠 그룹 회장이 갖는 의미도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고 그룹 관계자들은 전한다. 과거 그룹 회장은 전권을 쥐고 계열사를 일사불란하게 통솔했지만, 이젠 전체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필요할 때 독려하는 리더로서의 역할만 하면 된다는 뜻에서다. ‘공지사항 하나로 그룹 회장에 취임한 사실’은 그의 소탈한 성격과 무관치 않다. 그는 외국 출장을 갈 때도 비서 없이 혼자 간다. 대신 노트북PC와 카메라는 반드시 챙긴다. 노트북은 외국에서 이메일 결제를 하기 위한 것이고 카메라는 취미생활인 사진촬영을 위해서다. 컴퓨터에 능한 그는 전세계 어디에 있든 24시간 내내 이메일 결제를 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임원들에게도 굳이 찾아와서 결제를 받는 ‘형식’을 버리라고 주문한다. 회장이 필요한 경우에만 임원을 불러서 물어보면 된다는 합리적인 업무 스타일이 몸에 배어 있다. 대항항공의 전세계 지점으로 출장을 갈 때도 마찬가지다. 현지 지점장을 비롯해 직원들이 여럿 마중나오면 당장 불호령이 떨어진다. 지점장 한 명이 회장을 마중나오는 것은 이해하지만 직원 여럿이 몰려 나오는 건 시간 낭비라는 것이다. 나머지 직원들은 그 시간에 ‘회장 마중’보다 고객만족을 위해 뛰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대한항공에서 잔뼈가 굵었다. 경복고·미국 커싱 아카데미고·인하대 공업경영학과를 나와 지난 74년 대한항공에 입사하면서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92년 대한항공 사장에 올라 항공전문 CEO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대한항공의 계속된 항공 사고로 지난 99년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대외적인 업무를 주로 담당하는 대한항공 회장직을 맡았다가 4년만에 그룹 회장직에 올랐다. 그룹 회장 취임 이후 그가 임직원들에 던진 첫째 화두는 ‘한진그룹=세계 최고의 종합 물류그룹’이다. 선친의 ‘수송보국’ 경영철학을 이어받아 제2의 창업을 각오로 한국 수송물류산업의 선진화와 국제경쟁력 강화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문했다. 오는 2010년까지 한진그룹이 항공여객운송 세계10위·항공화물운송 세계1위·해상운송 세계3위·국내 육운1위를 달성해야 한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그는 이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전문화·글로벌화·책임경영을 들고 나왔다. 이중 특히 역점을 두는 것은 책임경영이다. 지난 1월 대한항공에 사업본부별 소사장제를 도입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여객·화물·기내식·항공우주·호텔면세 등 5개 사업본부의 소사장들은 실질적으로 별개의 회사처럼 기획·예산·인력 등에서 자율권을 부여받으며, 사업 성과에 대한 책임도 진다. 한데 그는 책임경영을 계열사 사장이나 소사장에게 요구하면서도 장기 비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단기적인 성과에 치우치는 소사장제와 책임경영은 결국 실패작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 때문이다. 책임경영제·이익중심(profit center)의 경영이라고 해서 모든 걸 이익 위주로 따지면 안 된다는 지적이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 기업들에 바로 그런 ‘단기적 성과’라는 폐해가 크다고 말한다. 미국 기업들은 월스트리트 애널리스트들의 요구가 드세, 그들이 요구하는 스타일이 아니면 CEO가 될 수 없었고, CEO들은 월스트리트 입맛을 맞출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월스트리트가 요구하는 게 단기 차익이고, CEO들은 회사의 장기 비전보다는 재임 기간 동안 많은 이익을 내는 데 치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안그러면 3개월만에 쫓겨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분식회계로 주가를 올리고 이익을 내는 척 해서 성과급을 지급했던 것이다. 조회장은 바로 이런 점을 경계하고 있다. 아무리 책임경영제·이익중심이라고 하지만 CEO라면 단기 성과보다는 장기 비전에 시간을 투자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소사장들을 평가할 때는 서비스 품질·성장성·이익 등의 순으로 평가하겠다고도 말한다. 그는 DJ정권 시절 유난히 굴곡 있는 삶을 살았다. DJ정권 초기인 99년에 항공기 사고가 일어나면서 대한항공 사장에서 물러나 회장에 올랐고, 이어 세무조사를 받고 구속되기까지 했다. 이어 지난해 11월17일 부친상을 치뤘다. DJ정권 말인 12월31일의 사면 복권을 거쳐 이번에 그룹 회장에 취임하게 됐다. 그는 항공전문 CEO다. 항공사업 성공의 요체는 원가절감 내지는 효율성에 있다고 주장한다. 항공사업이 엄청나게 남는 장사가 아니라는 얘기다. 항공사업은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실리가 없고 신경써야 할 것은 많은 복잡한 산업이란 얘기다. 그가 대항한공의 글로벌화를 가속화하기 위해 국제항공동맹체(Sky Team)을 2000년 6월에 주도적으로 결성한 것이나, 사업본부별 책임경영제도를 2001년 11월에 도입한 것은 모두 ‘원가절감이 대한항공 도약의 요체’라는 이론을 실무화시킨 결과다. IMF 시절부터 그가 드라이브를 건 항공기 현대화와 기종 단순화 프로젝트도 같은 맥락이며, 동시에 그의 ‘역작’이기도 하다. 총 9개 기종을 10년간에 걸쳐 최종적으로 B747·B777·A330·B737 등 4개 기종으로 줄인다는 계획이다. 이는 장기적으로 연료비·정비비·인건비·이자 비용 등의 절감을 가져올 전망이다. 이미 어느 정도 성과는 드러나고 있다. 대항항공은 지난해 3년만에 흑자를 냈다. 오는 3월에는 직원들에 대한 특별상여금도 기대된다. 그는 요즘도 오전 7시 반에 서울 공항동 대한항공 김포빌딩으로 출근한다. 왕회장(창업주인 고 조중훈 회장) 시절부터 지켜온 오랜 습관이다. 예전에 오전 8시에 임원회의가 있고, 왕회장이 불시에 하는 질문에 대답하려면 새벽부터 업무 파악 등의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1백83센티미터의 장신이지만 술은 거의 못한다. 와인 한잔이나 맥주 한잔이면 끝이다. 휴일에도 조용히 지내는 편이다. 자녀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책을 읽으며 보낸다. 그는 합리적이지만 샤이(부끄러움을 잘 타는 성격)한 측면도 있고, 조용하지만 급한 성격도 갖고 있다. 전반적으로 ‘젊은’ 성격이라고 한다. 임직원들에게도 젊은 사고를 요구한다. 대한항공과 한진그룹의 잠재고객과 현재고객 중에는 어린이와 젊은 층이 많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그는 이런 말도 즐겨 한다. “나는 대한항공 임원의 피지컬 리타이어먼트(육체적 연령에 따른 퇴직)는 65세라고 얘기하지만 늘 30대의 젊은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외국어와 IT는 필수라고 강조한다. 실제 그의 행동은 젊다. 휴대폰도 그는 컬러링을 한 휴대폰을 사용한다. 컬러링를 하지 않은 젊은 직원들에게는 “젊은 사람이 개성도 없는, 그런 휴대폰을 사용하면 되겠냐”며 일침을 놓곤 한다. 그는 선친이 일구어 놓은 교육사업(인하대·항공대)은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며, 선친의 부암동 사저는 기념관·수송박물관 등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형제들도 동의를 한 상태다. 조회장의 자녀는 1남2녀인데, 큰딸 현아(28)씨는 미국 코넬대에서 호텔경영학을 전공하고 현재 대한항공에서 호텔, 면세사업분야의 팀장을 맡고 있다. 장남 원태(27)씨는 미국으로 유학해 MBA 과정을 밟을 예정이며, 막내 현민(19)씨는 미국 남가주대에게 재학 중이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업무효율 저하 부담에…대기업 10곳 중 3곳만 60세 이상 고용

2尹대통령 내외 사리반환 기념식 참석…"한미관계 가까워져 해결 실마리"

3 대통령실, 의료계에 "전제조건 없이 대화 위한 만남 제안한다"

4이복현 금감원장 "6월 중 공매도 일부 재개할 계획"

5정부 "80개 품목 해외직구 전면차단 아니다…혼선 빚어 죄송"

6 정부 'KC 미인증 해외직구' 금지, 사흘 만에 사실상 철회

7"전세금 못 돌려줘" 전세보증사고 올해만 2조원 육박

8한강 경치 품는다...서울 한강대교에 세계 첫 '교량 호텔' 탄생

9서울 뺑소니 연평균 800건, 강남 일대서 자주 발생한다

실시간 뉴스

1업무효율 저하 부담에…대기업 10곳 중 3곳만 60세 이상 고용

2尹대통령 내외 사리반환 기념식 참석…"한미관계 가까워져 해결 실마리"

3 대통령실, 의료계에 "전제조건 없이 대화 위한 만남 제안한다"

4이복현 금감원장 "6월 중 공매도 일부 재개할 계획"

5정부 "80개 품목 해외직구 전면차단 아니다…혼선 빚어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