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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놔라”“막아라”… 90년대 본격화

“내놔라”“막아라”… 90년대 본격화

일러스트 이정권
몇 년 전 M&A 전문가 S씨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대뜸 “㈜SK만 인수하면 SK그룹을 통째로 먹을 수 있다”는 말을 꺼냈다. 그 땐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M&A전문가라지만 대기업을, 그것도 재계 주요 그룹을 쉽게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허풍처럼 들릴 수밖에 없었다. S씨는 1995년 6월 ‘삼성그룹도 적대적 M&A의 이방지대가 아니다’라는 간행물을 냈던 인물이다. 그는 대기업 경영권도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을 미리 예고했던 것이다. 대기업에 대한 적대적 M&A는 SK가 처음이다. SK에 대한 적대적 M&A는 공격자가 외국인이고, 방어자가 대기업이라는 점에서 그 충격은 더욱 컸다. 그러나 그 동안 한국에서도 적대적 M&A 사례가 적지 않았다. 94년 10월 동해종금의 공개매수부터 시작해 숱한 사례가 있다. 주로 공개매수를 통한 사례가 많았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M&A의 전개과정은 어땠을까? 어떤 사건이 있었고 거기에 쓰인 기법은 무엇이었을까? ▶첫 적대적 M&A 동해종금, 그리고 공개매수(TOB)=한국에서 최초의 적대적 M&A는 한솔제지가 동해종금을 인수한 것이다. 동해종금 사건은 94년 하반기 증권시장을 뜨겁게 달궜다. 공개매수(TOB:Take-Over-Bid 또는 Tender Offer)가 처음으로 M&A 수단으로 사용된 사례이기도 하다. 사건은 94년 6월 한솔제지측이 동해종금 주식 9.9%를 보유하고 있다고 증권감독원에 신고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최대주주 김진재씨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김씨측은 당황한 나머지 위장지분을 증권관리위원회에 신고했다. 그러나 위장지분에 대해 의결권을 인정받지 못했다. 오히려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경제명령’과 옛 증권거래법 위반으로 매각명령을 받게 됐다. 한솔제지측이 공개매수를 신청한 것은 94년 10월26일이었다. 11월9일부터 11월28일까지 20일동안 대우증권을 통해 당시 시가보다 16.2% 높은 주당 3만2천7백원에 45만주(지분 1.5%)를 사들이겠다는 것이었다. 공격자의 행동이 공개매수라는 M&A 수단으로 구체화되자 최대주주였던 김씨측은 두차례 대책회의를 했을 뿐 속수무책이었다. 공개매수 결과는 55만주나 신청, 매수예정주식수인 45만주를 넘어서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경남에너지 경영권 공방과 백기사(White Knight)=94년 8월12일 경남에너지가 증권거래소에 상장됐다. 당시 지분은 1대주주 원진이 13.09%, 2대주주인 가원이 10.10%로 근소한 차이였다. 경남에너지 경영권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원진측에서 4개월 뒤 12월28일에 공개매수를 하겠다고 공시했다. 95년 1월11일부터 2월2일까지 18만주(지분 10.59%)를 주당 4만9천5백원에 사들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동해종금처럼 만만치 않았다. 황급했던 가원측은 대웅제약을 우호세력(White Squire 또는 White Knight)으로 끌어들였다. 대웅제약이 시장에서 경남에너지 주식을 집중적으로 사들이자 주가는 치솟았고, 공개매수가격인 4만9천5백원을 넘겼다. 일반투자자로선 시장에서 높은 가격이 형성돼 있는데, 굳이 낮은 가격의 공개매수를 신청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원진측의 공개매수는 공개매수 신청주식수가 거의 없어 실패하고 말았다. ▶항도종금과 대구종금… 역(逆)공개매수=팩맨방어전략(Pac-Man counter-tender offer)이라는 M&A 방어기법이 있다. 공격자의 공개매수에 대해 방어자가 맞불작전으로 대항공개매수하는 것을 말한다. 동해종금 사례에서 공개매수가 성공했고, 경남에너지에선 백기사를 동원 공개매수를 무력화시켰다. 그 뒤에 나온 M&A 기법이 팩맨방어전략이다. 항도종금에 대해 효진과 서륭이 경쟁적으로 공개매수를 한 것이 첫 사례다. 96년 11월 효진은 항도종금 주식 64만주(지분 16%)를 주당 3만1천원에 공개매수하겠다고 신고했다. 이에 대응해 서륭은 항도종금 68만주(17%)를 1천원 더 비싼 3만2천원에 공개매수하겠다며 역공개매수를 했다. 결국 효진과 서륭은 화해를 함으로써 적대적 M&A는 끝나게 됐다. 이후 효진은 다시 주당 3만7천원에 28만주를 공개매수해 항도종금 지분 24.44%를 확보, 최대주주가 됐다. 대구종금의 사례도 비슷하다. 97년 1월이었다. 태일정밀이 독점적인 경영권을 확보하기 위해 51만주(지분 15%)를 주당 4만원에 사들이겠다고 신고했다. 이에 맞서 2대주주인 화성산업이 60만주(17.65%)를 주당 4만1천원에 공개매수하겠다며 맞불을 놓았다. 다급해진 태일정밀은 공개매수 기간 동안 다시 정정신고를 내 공개매수가격을 주당 4만8천원으로 높였다. 결국 태일정밀이 32.75%까지 지분을 높였고 두 대주주는 화해했다. ▶미도파, CB와 BW를 둘러싼 법정공방=96년 말 성원그룹이 외국인 펀드와 성원건설 등 우호세력과 손잡고 미도파백화점 주식을 매집했다. 미도파백화점 경영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뜻도 공식적으로 밝혔다. 경영권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미도파백화점은 사모전환사채(CB)를 발행해 경영권을 방어하려 했다. 그러나 법원이 사모사채발행금지 가처분결정을 내려 무산됐다. 그런 중에 성원건설은 미도파백화점 주식 9.67%를 외국인으로부터 자전거래 형식으로 매입했다. 다급해진 미도파백화점은 직접공모방식으로 신주인수권부사채 4백억원어치를 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성원그룹의 우호세력인 외국인은 이에 대해 이의신청을 제기했고 법원은 가처분결정을 내렸다. 당시 성원그룹과 그의 우호세력은 약 37%의 미도파 지분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존 대주주인 대농그룹의 보유지분 약 31%보다 앞서고 있었다. 이를 의식해 미도파백화점은 경영권 방어수단으로 5백억원어치의 사모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대농그룹의 우호세력인 모재벌기업에 배정시켰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적대적 M&A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공동대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성원그룹과 대농그룹이 미도파백화점을 공동경영하기로 합의함으로써 분쟁은 마무리됐다. 이후 성원건설은 보유주식을 대농그룹에 시장가격보다 비싼 가격에 넘겼다. ▶공개매수와 공동보유자 논란… 신성무역=97년 5월부터 7월까지 증권감독원에는 공개매수신고서가 네차례나 접수됐다. 명동에 있는 사보이호텔이 신성무역을 공개매수하겠다는 것이다. 사보이호텔은 사업다각화를 위해 신성무역을 표적으로 삼았다. 대주주 지분이 낮고 자본금이 적기 때문에 적대적 M&A를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사보이호텔은 신성무역 1대주주인 김모씨의 지분 23%를 웃도는 24%까지 매수했다. 그 와중에 개인투자자 임모씨가 신성무역 주식 9%를 사들여 3대주주로 부상했다. 이에 대해 1대주주인 김모씨는 경영권 방어에 나섰다. 김씨는 사보이호텔과 임모씨가 공동보유자로서 보유주식을 합산신고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 자사주취득으로 대응했다. 이에 사보이호텔측은 공개매수로 맞섰다. 그러나 증권감독원은 사보이호텔과 임모씨가 공동보유자라고 판명했다. 사보이호텔은 신고하지 않은 공동보유자 임모씨의 지분을 처분했다. 이후 재차 공개매수를 시도했고 결국 네차례에 걸친 공개매수(정정신고 포함) 끝에 신성무역의 경영권을 손에 쥐었다. ▶또 다시 고개드는 공개매수… 나모인터랙티브=신성무역 이후 커다란 분쟁까지 몰고온 공개매수는 거의 없었다. 공개매수제도도 많이 바뀌었다. ‘50%+1주’를 공개매수해야 하는 의무공개매수제도가 생겼다 없어지기도 했다. 97년 4월에는 증권거래법 200조의 주식대량소유제한제도가 폐지됐다. 이에 따라 적대적 M&A가 활기를 띨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지만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으로 별다른 경영권 분쟁이 없었다. 다만 대한방직 소액주주들이 주주총회에서 경영권을 장악하려 했던 사건 정도였다. SK에 대한 적대적 M&A가 마무리되기 전인 2003년 4월17일. 코스닥 등록기업인 나모인터랙티브의 2대주주 김홍준씨가 최대주주가 되기 위해 공개매수 신고서를 제출했다. 결국 한국의 M&A는 공개매수를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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