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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主事’ 아들은 ‘곰’

아버지는 ‘主事’ 아들은 ‘곰’

일러스트·박용석 (parkys@joongang.co.kr)
"친구들은 저를 곰이라고 부릅니다. 키가 1백80㎝가 넘는데 이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요?” 김남구(40) 동원금융지주 대표의 별명은 ‘곰’이다. 12년째 증권업에 몸담고 있는 2세 최고경영자(CEO)의 별명치고는 조금 어색하게 들린다. 증권가에서 곰은 약세장(弱勢場)의 상징 동물이기 때문이다. 혹시 김대표는 곰이라는 자신의 닉네임에 섭섭해하지는 않을까. 오히려 정반대다. “대만족한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다. 김대표의 말대로 1백83㎝의 거구 때문에 붙은 애칭이지만, 곰이 그런 것처럼 “한번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무조건 지킨다”는 그의 경영원칙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김대표의 아버지인 김재철(68) 무역협회장은 협회에서 ‘주사’로 통한다. 자신이 세운 동원그룹은 물론 협회에서도 근엄한 ‘회장님’인 그는 왜 중급공무원 수준인 주사(主事)로 강등(?)된 것일까? 역시 그의 업무 스타일에서 비롯된다. 지난 1999년 무역협회장에 취임한 김회장은 4년째 협회를 이끌면서 다소 느슨했던 조직에 경영 마인드를 도입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그는 과감한 구조조정을 통해 협회 조직을 절반 수준으로 날씬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김회장은 구조조정 스케줄을 줄줄이 꿰어차거나, 어지간한 경제수치를 바로바로 외우는 등 빈틈없는 성격을 ‘발휘’했는데, 여기서 붙은 별명이 바로 ‘김주사’다. 별명처럼 두 사람의 경영 스타일도 사뭇 대조적이다. 김회장이 A부터 Z까지 꼼꼼히 챙기는 스타일이라면, 김대표는 대담하면서 시원시원한 경영 스타일로 주목받는다. 그러나 김대표에게 아버지는 “둘도 없는 스승”이다.

별명을 알면 경영 스타일이 보인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기업에서 오너 경영자의 별명을 부르는 것은 일종의 ‘불경죄’에 해당한다. 실제로 ‘나를 이렇게 불러달라’고 말하는 CEO도 드물 뿐더러, ‘왕회장=고(故) 정주영 현대 회장’ 정도를 빼면 오너의 별명은 부하 직원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불리는 수준이다. 그러나 ‘주사=야무진 일 처리’ ‘곰=약속을 지키는 듬직함’에서 보는 것처럼 CEO의 별명을 보면 경영 스타일을 짐작할 수 있다. 별명 하나에 경영 스타일이 그대로 녹아 있는 것이다. 국내 최고 기업의 총수인 이건희(61) 삼성 회장.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뉴스가 될 만큼 이회장은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다.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에 출근하는 일이 드물고 대부분의 시간을 한남동 자택에서 칩거하기 때문이다. 이래서 얻은 별명이 ‘은둔의 카리스마’다. 은둔도 은둔이지만, 이회장의 진면목은 카리스마에 있다. 삼성 관계자는 “임직원만 5만명이 넘는 삼성전자가 그렇게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도 회장님의 카리스마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특히 한번 침묵을 깨고 나오면 그의 말은 곧 ‘화두’가 된다. 93년 이른바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는 신경영 때가 그랬고, 지난해 계열사 사장단을 불러들여 “잘 나갈 때 더욱 긴장하라”며 일침을 놓은 것도 유명하다. 최근 이회장은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천재경영론을 새로운 화두로 제시하고 있다. 이회장의 장남인 이재용(35)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는 아직 별명이 없다. 나이도 젊은데다 뚜렷한 퍼포먼스가 없는 탓이다. 회사 안팎에서는 이상무의 영문 이니셜을 따 ‘JY’라고 부른다. 서울 남대문로 CJ(옛 제일제당) 본사 로비에는 고 이병철 창업주의 활동 모습을 담은 부조(浮彫)가 있다. 이 부조를 매일 매일 보면서 출근하는 사람이 바로 이재현(43) CJ 회장이다. 이재용 상무의 사촌이자 이병철 회장의 맏손자인 이회장은 ‘리틀병철’로 통한다. 체격부터 생김새, 말투까지 할아버지와 ‘닮은꼴’이어서 이런 별명을 얻게 됐다고. 그런 반면 살아 생전 이병철 회장의 별명은 ‘독일병정’이었다. 이병철 회장의 라이벌이자 재계의 또 다른 거목인 정주영 현대 창업주는 ‘불도저’ ‘사막의 신화’ ‘왕회장’ 등으로 유명하다. 경부고속도로부터 시작해 주베일 항만공사·울산조선소 건설 등 숱한 ‘기적’이 만들어낸 별명이다. 정몽구(65) 현대자동차 회장은 영문 이니셜인 ‘MK’로 불린다. 지난 2000년 이른바 왕자의난 이후 워낙 많이 등장하다 보니 ‘MK=몽구 회장’이라는 등식이 생겼다. 아울러 기자들 사이에서 정회장은 ‘몽돌이’로 불린다. “무대포로 밀어붙인다” 싶을 정도의 과감한 추진력 때문에 얻은 별명이다. 형제간 경영권 분쟁에다 가끔씩 어눌한 말투로 구설에 오르지만 그는 현대가(家)의 장자(長子)로서 가족들에게 남다른 면모를 보여왔다. 작고한 동생 몽우씨의 장남 정일선(33) BNG스틸 부사장을 현대차그룹에 포진시키고 있으며, 지난달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사망했을 때에도 가장 먼저 현장에 달려갔다. 장례식 때도 하관식이 끝날 때까지 상주인 어린 조카 영선(18)군 곁에서 자리를 지켰다. 이런 정회장의 가족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특유의 ‘돌쇠’ 기질과 비슷하다는 것. ‘직설화법의 달인’ ‘재계의 입’ ‘사이버 CEO’…. 박용성(63) 두산중공업 회장(대한상의 회장)은 별명이 많다. 주5일 근무제·노조사태 등 주요한 경제계 이슈에 대해 에두르지 않고 할 말을 다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재계의 입’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메일로 업무를 처리해 사이버 CEO로 불린다. 밤 2시에 질문을 보내면 다음날 새벽 5시면 답장 메일을 받아볼 정도다. 박회장의 친형인 박용곤(71) 두산그룹 명예회장은 워낙 말수가 적어 ‘크렘린’으로 불린다. 반면 현재 두산을 이끌고 있는 박용오(66) 회장은 빼어난 패션감각·논리적인 말투 등으로 ‘국제신사’로 통한다.

아직까지는 ‘불경죄’ 지난 96년 3세 체제로 전환한 코오롱 오너 부자의 별명도 눈길을 끈다. 현역에서 은퇴해 지금은 화가로 유명한 이동찬(71) 명예회장의 별명은 ‘자장면 회장’이다. 늦깎이로 골프에 입문하면서 매일 몇시간씩 연습을 했는데 이때 식사하러 나갈 시간이 모자라 자장면을 시켜 먹으면서 얻은 별명이다. 그만큼 자린고비라는 뜻도 된다. 실제로 그가 자주 찾는 음식점은 서울 무교동 사옥 앞에 있는 국수집이다. 장남인 이웅열(47) 회장도 비슷한 별명이 있다. 사내에서 그는 ‘3박 4일’로 불린다. 무슨 일이든 한 번 빠지면 끝장을 본다는 뜻이다. 아버지가 식사를 배달시킬 정도로 한 일에 몰두했다면, 아들은 한술 더 떠(?) 식사도 잊은 셈이다. 이회장은 재계에서 보기 드물게 별명이 많은 편이다. 그는 스스로 ‘CVC’라고 불리길 원한다. 자신의 홈페이지에 “나는 스스로 CEO로 불리기보다는 CVO(Chief Visionary Officer·최고비전경영자)나 CVC(Chief Vision Creator)로 불리기를 원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각 계열사의 경영을 책임지는 것은 사장을 포함한 임직원의 몫이며, 자신은 미래를 위한 그림을 그리겠다는 것이다. 이회장은 또 전경련 e비즈니스위원장을 맡으면서 ‘e비즈니스 전도사’, 벤처 투자를 활발히 벌이면서부터는 ‘벤처 감별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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