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하는 진보세력, 도전하는 보수세력
부상하는 진보세력, 도전하는 보수세력
이화여대 행정학과 김석준 교수는 보수를 표방하는 시민단체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참여정부 등장 이후의 한국 사회를 ‘내전상황’에 비유한다. 지난해 촛불시위에서부터 최근의 송두율 교수 파문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가 “좌경화하고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김교수는 “보수세력은 시대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분열했기 때문에 대선에서 패배했다”며 “중도좌파 성향의 노무현 정부가 한국 사회를 바꾸고 있다”고 우려했다.
지난 2월 뉴스위크는 노무현 정부의 출범을 ‘희망과 불안’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한 바 있다. ‘희망’은 진보세력이 가졌던 것이고, ‘불안’은 보수세력이 느꼈을 법한 감정이다. 보수가 주류였던 사회를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참여정부의 등장은 뭔가 새로운 변화가 시작될 것이라는 기대를 안겨줬다. 동시에 그것은 그동안 축적된 기득권 체제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김석준 교수의 말은 ‘불안’의 기류를 반영한다. 물론 ‘내전상황’이라는 그의 과장된 진단에는 쉽사리 동의하기 어렵다.
하지만 최근 나타난 여러 현상들을 보면서 그의 말을 한 보수지식인의 기우로 치부하기 힘든 것 또한 사실이다. 지난해 중앙일보의 ‘의원·국민 정책이념 조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대선 후보 가운데 가장 진보적 인사로 꼽혔다. 참여정부가 역대 정부 가운데 가장 진보적인 성향이라는 데 별로 이견이 없다. 노무현 정부 등장 이후 가장 뚜렷한 변화는 그동안 침묵했던 보수세력이 ‘커밍아웃’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3월 1일 대규모 시위 이후 보수단체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앞세우고 인공기를 불태우며 거리에 나서고 있다.
1946년 미군정청 여론국이 한국인 8천4백5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사회주의를 지지한 국민은 70%, 공산주의는 7%였으나 자본주의는 불과 14%에 불과했다. 좌파이념의 선호도가 무려 77%에 달했던 것이다. 사정은 한국전쟁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남한에서는 보수이념이 득세했고, 북한에서는 좌파이념에 따라 국가를 구성했다. 운동권 내에서 진행됐던 ‘체제 논쟁’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 남한 내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탈냉전이 시작된 지금 당시와 같은 ‘좌·우’ 구분이 현실에 맞지 않다는 의견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탈냉전시대의 이념 구분은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하는 ‘좌·우’개념보다 ‘진보-보수’라는 구분이 더 현실적이라는 얘기다.
한국에서 무엇이 보수이고 진보인가를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김용민 외국어대 정외과 교수는 “반통일·사대주의·친미·반북을 추구하면 보수이고, 통일·민족자주·반미·친북을 추구하면 진보로 규정된다”고 말한다. 보수세력의 전위대를 자처하는 모임은 ‘반김반핵’(반김정일·반북핵)을 내세우며, 대북 화해정책을 펼쳤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지난해 여중생 추모로 시작된 촛불시위는 ‘반미시위’로 번져 나가면서 진보세력의 대중적 입지를 강화시켰다. 지난주 뉴스위크 한국판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국민 의식의 ‘보수화’는 ‘한·미관계’와 ‘국가보안법’ 항목에서 두드러졌다. 북한과 한·미동맹은 진보-보수를 나누는 확실한 구분선인 셈이다.
연초부터 불거진 사회적 논란도 다분히 이념 갈등의 요소를 안고 있었다. 참여정부 출범 직후 벌어진 화물연대의 파업은 노무현 정부의 친노동적 성격을 보여주면서 보수언론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파문’은 전교조와 교총이라는 교육계 안팎의 진보-보수간 대결양상으로 치달았다. 송두율 교수 파문이나 고교평준화를 둘러싼 논란도 이념 대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당초 진보적일 것이라 기대됐던 노대통령은 후보 시절 보여줬던 ‘동등한 한·미관계’ 입장이 방미 과정에서 후퇴하고, 친노동적 성향에서 벗어나면서 지지층으로부터 보수화됐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인터넷 신문인 독립신문의 신혜식 대표는 이른바 ‘청년보수’의 대표격인 인물이다. 그는 보수세력 집회에서 인공기를 불태우며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는 과격한 보수주의자다. 3·1절 집회, 6·25 기념 집회, 8·15 국민대회 등 올들어 세차례나 서울 시청앞에서 열린 대규모 보수집회를 주도했던 그는 “지난 8개월을 거치면서 보수세력은 빠르게 조직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보수세력의 등장은 진보세력의 성장이라는 변화에 대한 반작용이다. 새만금 반대 삼보일배에 참가했던 민주노동당 노회찬 사무총장은 새만금 방조제 건설 강행을 주장하는 보수세력의 시위대와 부닥쳤을 때 “평생 데모를 해온 내가 데모를 당해보기는 처음이었다”고 털어놨다.
진보와 보수간의 이념 갈등이 이전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념 갈등의 부상은 독재정권 시절의 ‘민주 대 반민주’라는 구도, 3김시대의 종식과 무관하지 않다. 군사독재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보다 중요한 과제였던 것이고, 김영삼·김대중 등 지역 맹주들이 좌우하는 지역주의 체제에서 정치적 이념의 차이는 그리 뚜렷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영명 한림대 교수는 “이념 갈등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한국은 지금 주류 보수가 아닌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강경보수에서 온건보수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념적 다양성이 나타날 조짐이 보이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진단한다.
홍윤기 동국대 철학과 교수는 한국의 이념지형을 “보수할 것이 없는 보수주의와 진보의 전망을 상실한 진보주의”라는 말로 정리한다. 군사독재 하에서 기득권에 안주해온 보수세력은 지켜야 할 보수의 내용이 빈곤하고, 진보세력은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사상적 지표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상황만을 놓고 보자면, 최근 상황은 진보의 부상과 보수의 위축이라는 현상이다. 특히 50년간 한국의 주류를 형성해온 보수세력은 자기 경신을 하지 못한 채 잇따라 대선에서 패배했다.
진보적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한국에는 건전하고 합리적인 보수가 없다”고 단언한다. 기득권에 집착하는 수구와 보수가 뒤섞인 게 보수세력의 뒤틀린 모습이라는 것이다. 보수를 자처하는 인사들조차 이같은 진단에 동의한다. 김석준 이화여대 교수는 “개발독재세력이 저지른 수많은 잘못 때문에 진정한 보수가 나타나기 어렵다. 보수세력은 기득권에 안주하면서 스스로 개혁을 하지 못했다. 젊은 세대는 물론 대중으로부터도 멀어졌다.
수구와의 결별과 함께 보수의 새로운 혁신과 조직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보수층이 대부분 고령층에 집중돼 있다는 것도 한국의 보수세력이 탈피해야 할 과제다. 여성문제나 환경문제 등과 같은 새로운 이슈를 계속 진보세력에 선점당하고 있는 점도 보수세력의 상상력 빈곤을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된다.
반면 진보주의는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다양한 이슈들을 제기하며 점차 분화해가고 있다. 환경생태주의와 인권문제·여성문제·정보화 시대의 문제 등을 적극 이슈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진보적 가치를 아우르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진 못하고 있다. 대표적 보수논객인 송복 교수가 “진보세력은 박정희식 성장모델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성장모델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현재 참여정부는 보수와 진보 양쪽으로부터 비난받고 있다. 보수세력은 노대통령을 친북세력이라고 비난하고, 진보세력은 개혁적 열망을 저버리고 있다고 공격한다. 실제 노대통령의 정책은 확연하게 진보-보수의 프리즘으로 진단하기가 어렵다. 이라크 파병은 미국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하고, 노동·경제정책 역시 노동자층으로부터 화염병 세례를 받고 있는 것이다. 북핵문제로 교착상태에 빠진 대북관계도 속시원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한 정치평론가의 말을 빌리면 “진보적 색채를 갖고 출발했지만 보수로 선회했고, 개혁을 외치다 이제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갈등 조정기구로서의 국가 기능은 제대로 발휘되고 있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념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는 것은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정당이 보수정당체제라는 것은 정치학자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지난주 뉴스위크 한국판은 ‘의원·국민 정책이념 조사’를 통해 4당체제의 이념 격차가 뚜렷해지고 있다는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지역주의 정당체제에서 벗어나 이념정당의 출현 가능성이 한층 더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각 당 소속 의원들의 성향으로는 뚜렷이 구분되는 정당의 색깔이 실제 각당의 정강·정책에서는 별다른 차이를 보여주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의회 내 모든 정당이 한결같이 보수정당이라는 점도 문제다. 민주노총과 보수단체가 각기 거리에 나서는 까닭도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줄 정당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국민의 이념 성향도 강한 진보에서부터 강한 보수까지 다양하다. 뉴스위크 한국판이 지난주 공개한 국민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스스로 진보 성향이라 답한 국민은 22.7%다. 하지만 이들 국민의 성향은 기존 보수정당체제에서 소외돼 있다. 이에 반해 보수 성향의 국민은 기존 정당에서 ‘과잉대표’돼 있다. 기존 정당 모두가 뉴스위크 한국판 조사에서 32.6%로 나온 보수층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기존 정당은 국민의 성향과 서로 엇갈려 있는 것이다.
김용민 교수는 “민주주의가 발전하려면 거리의 정치가 의회정치로 승화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사회의 이념갈등은 정당을 통해 반영되면서 정책 등을 통해 의회 내에서 해결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거리시위를 통해 문제를 제기하는 거리의 정치는 의회정치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 기존의 지역정당체제에서 국민 사이의 이념 격차를 반영하는 정당체제로 바뀌어야 한다”고 진단한다. 지역정당체제에서 이념정당의 형태로 바뀌어야만 지지기반에 바탕을 둔 정책대결도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분출하는 이념 갈등이 과격시위로 치닫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 정당체제의 재편이 불가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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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뉴스위크는 노무현 정부의 출범을 ‘희망과 불안’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한 바 있다. ‘희망’은 진보세력이 가졌던 것이고, ‘불안’은 보수세력이 느꼈을 법한 감정이다. 보수가 주류였던 사회를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참여정부의 등장은 뭔가 새로운 변화가 시작될 것이라는 기대를 안겨줬다. 동시에 그것은 그동안 축적된 기득권 체제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김석준 교수의 말은 ‘불안’의 기류를 반영한다. 물론 ‘내전상황’이라는 그의 과장된 진단에는 쉽사리 동의하기 어렵다.
하지만 최근 나타난 여러 현상들을 보면서 그의 말을 한 보수지식인의 기우로 치부하기 힘든 것 또한 사실이다. 지난해 중앙일보의 ‘의원·국민 정책이념 조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대선 후보 가운데 가장 진보적 인사로 꼽혔다. 참여정부가 역대 정부 가운데 가장 진보적인 성향이라는 데 별로 이견이 없다. 노무현 정부 등장 이후 가장 뚜렷한 변화는 그동안 침묵했던 보수세력이 ‘커밍아웃’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3월 1일 대규모 시위 이후 보수단체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앞세우고 인공기를 불태우며 거리에 나서고 있다.
1946년 미군정청 여론국이 한국인 8천4백5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사회주의를 지지한 국민은 70%, 공산주의는 7%였으나 자본주의는 불과 14%에 불과했다. 좌파이념의 선호도가 무려 77%에 달했던 것이다. 사정은 한국전쟁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남한에서는 보수이념이 득세했고, 북한에서는 좌파이념에 따라 국가를 구성했다. 운동권 내에서 진행됐던 ‘체제 논쟁’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 남한 내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탈냉전이 시작된 지금 당시와 같은 ‘좌·우’ 구분이 현실에 맞지 않다는 의견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탈냉전시대의 이념 구분은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하는 ‘좌·우’개념보다 ‘진보-보수’라는 구분이 더 현실적이라는 얘기다.
한국에서 무엇이 보수이고 진보인가를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김용민 외국어대 정외과 교수는 “반통일·사대주의·친미·반북을 추구하면 보수이고, 통일·민족자주·반미·친북을 추구하면 진보로 규정된다”고 말한다. 보수세력의 전위대를 자처하는 모임은 ‘반김반핵’(반김정일·반북핵)을 내세우며, 대북 화해정책을 펼쳤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지난해 여중생 추모로 시작된 촛불시위는 ‘반미시위’로 번져 나가면서 진보세력의 대중적 입지를 강화시켰다. 지난주 뉴스위크 한국판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국민 의식의 ‘보수화’는 ‘한·미관계’와 ‘국가보안법’ 항목에서 두드러졌다. 북한과 한·미동맹은 진보-보수를 나누는 확실한 구분선인 셈이다.
연초부터 불거진 사회적 논란도 다분히 이념 갈등의 요소를 안고 있었다. 참여정부 출범 직후 벌어진 화물연대의 파업은 노무현 정부의 친노동적 성격을 보여주면서 보수언론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파문’은 전교조와 교총이라는 교육계 안팎의 진보-보수간 대결양상으로 치달았다. 송두율 교수 파문이나 고교평준화를 둘러싼 논란도 이념 대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당초 진보적일 것이라 기대됐던 노대통령은 후보 시절 보여줬던 ‘동등한 한·미관계’ 입장이 방미 과정에서 후퇴하고, 친노동적 성향에서 벗어나면서 지지층으로부터 보수화됐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인터넷 신문인 독립신문의 신혜식 대표는 이른바 ‘청년보수’의 대표격인 인물이다. 그는 보수세력 집회에서 인공기를 불태우며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는 과격한 보수주의자다. 3·1절 집회, 6·25 기념 집회, 8·15 국민대회 등 올들어 세차례나 서울 시청앞에서 열린 대규모 보수집회를 주도했던 그는 “지난 8개월을 거치면서 보수세력은 빠르게 조직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보수세력의 등장은 진보세력의 성장이라는 변화에 대한 반작용이다. 새만금 반대 삼보일배에 참가했던 민주노동당 노회찬 사무총장은 새만금 방조제 건설 강행을 주장하는 보수세력의 시위대와 부닥쳤을 때 “평생 데모를 해온 내가 데모를 당해보기는 처음이었다”고 털어놨다.
진보와 보수간의 이념 갈등이 이전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념 갈등의 부상은 독재정권 시절의 ‘민주 대 반민주’라는 구도, 3김시대의 종식과 무관하지 않다. 군사독재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보다 중요한 과제였던 것이고, 김영삼·김대중 등 지역 맹주들이 좌우하는 지역주의 체제에서 정치적 이념의 차이는 그리 뚜렷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영명 한림대 교수는 “이념 갈등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한국은 지금 주류 보수가 아닌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강경보수에서 온건보수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념적 다양성이 나타날 조짐이 보이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진단한다.
홍윤기 동국대 철학과 교수는 한국의 이념지형을 “보수할 것이 없는 보수주의와 진보의 전망을 상실한 진보주의”라는 말로 정리한다. 군사독재 하에서 기득권에 안주해온 보수세력은 지켜야 할 보수의 내용이 빈곤하고, 진보세력은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사상적 지표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상황만을 놓고 보자면, 최근 상황은 진보의 부상과 보수의 위축이라는 현상이다. 특히 50년간 한국의 주류를 형성해온 보수세력은 자기 경신을 하지 못한 채 잇따라 대선에서 패배했다.
진보적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한국에는 건전하고 합리적인 보수가 없다”고 단언한다. 기득권에 집착하는 수구와 보수가 뒤섞인 게 보수세력의 뒤틀린 모습이라는 것이다. 보수를 자처하는 인사들조차 이같은 진단에 동의한다. 김석준 이화여대 교수는 “개발독재세력이 저지른 수많은 잘못 때문에 진정한 보수가 나타나기 어렵다. 보수세력은 기득권에 안주하면서 스스로 개혁을 하지 못했다. 젊은 세대는 물론 대중으로부터도 멀어졌다.
수구와의 결별과 함께 보수의 새로운 혁신과 조직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보수층이 대부분 고령층에 집중돼 있다는 것도 한국의 보수세력이 탈피해야 할 과제다. 여성문제나 환경문제 등과 같은 새로운 이슈를 계속 진보세력에 선점당하고 있는 점도 보수세력의 상상력 빈곤을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된다.
반면 진보주의는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다양한 이슈들을 제기하며 점차 분화해가고 있다. 환경생태주의와 인권문제·여성문제·정보화 시대의 문제 등을 적극 이슈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진보적 가치를 아우르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진 못하고 있다. 대표적 보수논객인 송복 교수가 “진보세력은 박정희식 성장모델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성장모델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현재 참여정부는 보수와 진보 양쪽으로부터 비난받고 있다. 보수세력은 노대통령을 친북세력이라고 비난하고, 진보세력은 개혁적 열망을 저버리고 있다고 공격한다. 실제 노대통령의 정책은 확연하게 진보-보수의 프리즘으로 진단하기가 어렵다. 이라크 파병은 미국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하고, 노동·경제정책 역시 노동자층으로부터 화염병 세례를 받고 있는 것이다. 북핵문제로 교착상태에 빠진 대북관계도 속시원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한 정치평론가의 말을 빌리면 “진보적 색채를 갖고 출발했지만 보수로 선회했고, 개혁을 외치다 이제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갈등 조정기구로서의 국가 기능은 제대로 발휘되고 있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념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는 것은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정당이 보수정당체제라는 것은 정치학자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지난주 뉴스위크 한국판은 ‘의원·국민 정책이념 조사’를 통해 4당체제의 이념 격차가 뚜렷해지고 있다는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지역주의 정당체제에서 벗어나 이념정당의 출현 가능성이 한층 더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각 당 소속 의원들의 성향으로는 뚜렷이 구분되는 정당의 색깔이 실제 각당의 정강·정책에서는 별다른 차이를 보여주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의회 내 모든 정당이 한결같이 보수정당이라는 점도 문제다. 민주노총과 보수단체가 각기 거리에 나서는 까닭도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줄 정당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국민의 이념 성향도 강한 진보에서부터 강한 보수까지 다양하다. 뉴스위크 한국판이 지난주 공개한 국민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스스로 진보 성향이라 답한 국민은 22.7%다. 하지만 이들 국민의 성향은 기존 보수정당체제에서 소외돼 있다. 이에 반해 보수 성향의 국민은 기존 정당에서 ‘과잉대표’돼 있다. 기존 정당 모두가 뉴스위크 한국판 조사에서 32.6%로 나온 보수층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기존 정당은 국민의 성향과 서로 엇갈려 있는 것이다.
김용민 교수는 “민주주의가 발전하려면 거리의 정치가 의회정치로 승화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사회의 이념갈등은 정당을 통해 반영되면서 정책 등을 통해 의회 내에서 해결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거리시위를 통해 문제를 제기하는 거리의 정치는 의회정치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 기존의 지역정당체제에서 국민 사이의 이념 격차를 반영하는 정당체제로 바뀌어야 한다”고 진단한다. 지역정당체제에서 이념정당의 형태로 바뀌어야만 지지기반에 바탕을 둔 정책대결도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분출하는 이념 갈등이 과격시위로 치닫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 정당체제의 재편이 불가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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