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3세가 일본문화 를 바꾼다
재일동포 3세가 일본문화 를 바꾼다
Hyphenating Japan
그는 일반적인 일본인 2세들과는 약간 다르다. 이육철(李育鐵)씨의 양친은 한국인으로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그러나 고교시절을 이민족 사회인 런던에서 지낸 이씨는 차츰 의문을 품게 됐다. 어째서 양친은 자신들의 민족성을 숨기려 한 것일까.
마침내 마음을 굳힌 그는 양친의 호적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내 관료주의와의 오랜 싸움 끝에 한국명으로 다시 호적등록을 하는데 성공했다.
이씨는 지금 리윤이라는 예명으로 친구인 곽정훈(예명 제웡)씨와 랩듀오 ‘KP’를 결성해 일본에서 음악활동을 하고 있다. 이씨는 자신이 차세대의 모델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한다. “내 아이가 성인이 될 때쯤에는 김씨나 이씨 성이 ‘쿨’해진다면 좋겠다.”
이씨는 한국인이며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일본인이며 그에 대한 자부심도 갖고 있다.
이씨의 양친처럼 재일(在日) 한국·조선인(젊은 세대는 ‘재일 코리안’이라는 호칭을 선호한다)으로 일본 귀화를 신청하는 사람은 매년 9천명을 넘는다. 이대로 간다면 이른바 ‘재일 코리안’(2차대전이 끝나기 전부터 일본에서 살던 한반도 출신의 사람들과 그 자손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특별영주자’ 자격을 인정받고 있다)은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지금은 재일 코리안이 약 60만명에 달하지만 이대로 귀화나 일본인과의 결혼, 출생률 감소가 진행되면 50년후에는 사라질지 모른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민족성을 적극적으로 나타내려 하고 있다. 재일대한민국민단(民團)의 청년회에서 일하는 강사치코씨에 따르면 이씨는 분명 그녀가 ‘뉴 재일’(在日)이라고 부르는 유형에 속하는 사람이다. 구세대 재일 코리안들을 괴롭혀 왔던 편견과 열등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새로운 의식을 가진 젊은이들이다.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차별 경험도 비교적 적은 ‘뉴 재일’. 한편 젊은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이들이 이질적이기는커녕 오히려 ‘쿨’하다는 인식도 확산되고 있다.
이들은 귀화하거나 일본인과 결혼해도 민족명을 유지하고, 한글을 배우며, 사라져가는 재일 코리안의 문화를 되살리려 하고 있다. “‘뉴 재일’은 자신의 뿌리에 자부심을 갖지만 부모 세대처럼 국적이나 핏줄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들은 이같은 유연한 태도로 ‘단일민족국가’에 대한 일본의 집착을 바꿔갈 것”이라고 강씨는 말한다.
정치의 세계에서는 일본과 한반도의 관계가 여전히 삐걱대고 있다. 북한과의 관계는 완전히 냉각돼 있으며, 한국과의 사이에도 독도 영유권 문제 및 신사참배 문제 등 대립의 불씨가 여전히 남아 있다.
특히 북한 문제는 북한 국적의 재일 코리안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북한의 친인척과 재일 코리안 사이를 연결해주는 만경봉호에는 엄격한 현장 검사가 실시되고 있으며, 각지의 지자체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朝總連) 관련의 건물에 적용돼 왔던, 고정자산세의 감세조치 폐지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민간 차원에서는 ‘최대의 소수민족’에 대한 일본인의 자세가 과거보다 훨씬 좋아졌다. 일본이 제국 건설이라는 명분으로 한국인들을 강제노역에 징발하던 시대는 지나간지 오래다. 오늘날 도쿄는 남북한을 무시할 수 없는 지역강국으로 보고 있다. 일본의 많은 젊은이들은 1988년 올림픽을 주최한 나라, 일본과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공동개최한 나라, 일본에서 노래와 연기로 성공한 TV 및 팝스타들의 본향인 한국을 ‘쿨’하게 여긴다. 한국 음식도 커다란 인기를 끌고 있다.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한국식 이자카야(선술집)의 유행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특히 월드컵 이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많은 일본인들이 가슴을 울리는 한국의 드라마를 즐겨 시청하며 오키나와(沖繩)를 방문하듯 부담없이 제주도 여행을 계획한다. “특히 젊은이들이 여러가지로 서로 이해를 많이 하고 있다. 우리들은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다”고 인재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는 야마오카 다이키(山岡太樹·27)는 말한다.
재일 코리안의 다수는 내심이 어쨌든 동화의 길을 선택해 왔다. 예를 들어 밖에서는 일본인 이름으로 통하지만 집안에서는 민족명을 사용한다.
이것은 일본어와 일본명의 사용을 강요해온 식민지 시대의 잔재이기도 하다. 전후, 일본 국적을 상실한 재일 코리안에게는 버젓한 직장에 취직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자영업의 길을 선택해 파친코방이나 불고기집을 경영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세대의 재일 코리안이 품고 있던 목표는 단 하나, 자손들이 보다 더 나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도쿄 시부야(澁谷)의 젊은이에게 인기있는 패션빌딩 109의 뒤쪽에 ‘고이부미요코추’(戀文橫丁)라고 불렸던 골목길이 있다. 과거 작은 음식점이 몰려 있던 이 장소에서 꿈을 실현한 재일 코리안 여성이 있다.
일본 식민지 시대의 제주도에서 끼니 걱정을 할 정도로 어렵게 생활하던 김병효(金柄孝·81)씨는 일본에 건너가 12세 때부터 오사카(大阪)의 군복 봉제공장에서 일했다.
그리고 전후 도쿄에 진출해 고이부미요코추에서 중화요리점을 개업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용모와 성실한 자세로 많은 손님을 끌어모았다.
귀가시간은 오전 4시. 갓난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2시간 정도 눈을 붙인 뒤 다시 가게 문을 여는 하루하루가 계속됐다. 마침내 식당이 궤도에 올라 이제는 7명의 조리사와 10명의 웨이트리스를 고용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김씨는 말한다.
실제로 그녀는 식당을 경영해 9명의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은 제주도와 시부야에 여러개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 일본에서 성공을 거둔 김씨지만 자신의 아이들이 일본에 귀화하거나 일본인과 결혼한다면 몹시 가슴아플 것이라고 말한다.
손자인 부덕주(夫德住)씨는 그런 말을 듣고 나니 속마음을 털어놓기가 조심스러운 모양이다. “할머니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겪었다”고 부씨는 말한다. “그 고통을 지금 세대에서 끝내고 싶다. 내 세대가 일본을 좋아하게 돼서 일본인과 결혼하고, 일본 국적을 취득하면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할머니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국적 취득은 특정 축구팀에 가입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정체성과는 별개 문제라고 부씨는 생각한다. 하지만 재일 코리안 사회에서 일본에 귀화하고 싶다고 떠벌리는 것은 터부시되고 있다. 특히 연장자 세대로부터 “민족적 긍지를 버리려느냐”, “굴욕을 견뎌온 선조의 고난을 잊었느냐”는 꾸지람을 듣기 일쑤다. 그리고 자신도 그런 의문을 떨치기 힘들다.
귀화할 때 담당 관청으로부터 일본명으로 변경하라는 압력을 받기도 하고, 일본 국적의 취득은 한민족으로서의 뿌리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일본 국적을 갖고 있다고 다른 재일 코리안으로부터 ‘배신자’ 취급을 받았다며 KP의 리윤은 이렇게 덧붙였다. “차별받는 것보다 더 괴로웠다.”
귀화 수속 자체도 상당히 힘들고 까다롭다. 행정서사인 정천수(鄭千壽)씨에 따르면 경우에 따라서는 1년여의 기간과 약 50만엔의 비용이 든다고 한다. 일본에 ‘동화’하겠다는 의사를 확인하기 위한 배경조사도 거쳐야 한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귀화를 결심하는 재일 코리안은 많다. 귀화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다수는 자녀의 취직이나 결혼을 위해 민족적 자긍심을 버리고 귀화를 택한다. “원치는 않지만 다른 도리가 없다”고 정씨는 말한다. “미국에서는 귀화가 축하할 일이라지만 재일 코리안은 비밀로 하는 경우가 많다. 축하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재일 코리안의 지식인 사이에서도 귀화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차별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적어졌다”고 ‘재일 한국인의 종언’의 저자인 도쿄도립대학의 정대균(鄭大均) 교수는 말한다.
‘조국’ 한반도에 대한 애착이 희박해지고 있는 지금 언제까지나 귀화를 부정하는 것은 합리적이 아니라고 그는 주장한다. 실제로 정교수는 얼마 전 귀화 신청을 마쳤다.
한편 도쿄대학의 강상중(姜尙中) 교수처럼 민족적 정체성과 국적은 별개 문제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객도 있다.
단일민족국가라는 환상의 바탕 위에 그 두 문제가 거의 구별되지 않고 있는 일본의 현 상황에서 귀화는 사실상 ‘동화’를 선택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그는 지적한다.
어쨌든 젊은 세대는 귀화를 선택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귀화가 반드시 동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본인과 재일 코리안 양쪽의 피를 다 물려받은 강사치코씨는 ‘야마자키 사치코’라는 이름으로 일본 국적을 갖고 있다. 하지만 23세 때 민단의 청년부에서 일하면서부터 한국 성을 따르고 조부모의 배경에 관한 조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소수민족이 자신들의 민족성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일본을 만들고 싶다”고 강씨는 말한다.
일본인 사이에서도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늘고 있다. “다른 것에 대해 편견을 갖는 일본의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강씨의 친구인 도히 이쿠미(土肥郁美)는 말을 잇는다. “나는 일본에서는 일본인으로서 다수파에 속할지 모르지만 예들 들어 여성으로서 또는 다른 측면에서 소수파가 될 가능성은 상존한다.” 그녀는 서울의 한국어 학당에서 강씨를 처음 만나 알게 되면서부터 일본의 다른 한국인들에게도 관심을 갖게 됐다. 그리고 지금은 다양한 재일 코리안 친구들과 만나고 있다. “그들은 아주 긍정적이고 외향적이다. 그들이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고 민족적 정체성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일본인인 나는 왜 그렇지 못한지 의아하게 생각된다.” 그녀의 말이다.
한국 문화에 대해 관심이 고조된 지금, 한국과 북한의 뿌리를 가진 것에 재일 코리안이 자긍심을 갖기 시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보아나 윤손아처럼 한국 출신의 가수 및 탤런트가 일본에서 성공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일본의 연예계에서는 예전부터 많은 재일 코리안이 활약해 왔지만 그 다수는 자신의 뿌리를 숨겨왔다. 하지만 시코쿠(四國) 출신의 젊은 인기가수 소닌(한국명 성선임)은 그런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소닌은 잡지 퀵 재팬과의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그것은 전혀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민족학교에서 차별의 역사를 배웠지만 어렸을 때부터 줄곧 민족명으로 생활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차별을 받은 경험은 없다고 그녀는 밝혔다. “사실은 울타리 따위는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 한국인이라고 해도 타국인 일본에서 살고 있는 나 자신이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하다.”
하지만 소닌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재일 코리안들도 있다. 그들은 지금도 차별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문제라고 지적한다. 일본기업뿐 아니라 재일 코리안이 경영하는 ‘민족계’ 회사에서조차 한국 이름을 가진 사람을 채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어떤 젊은 재일 코리안은 말한다.
도쿄의 오쿠보(大久保)에서 무역 및 이벤트 관련 회사를 경영하는 김재호(金在浩·27)씨에 따르면 ‘뉴 재일’은 “일본인들이 듣기 좋은 말만 한다.”
정말로 직접 차별을 겪었거나 역사를 배웠다면 윗세대는 자신의 민족성에 지나치게 얽매인다든가, 자신이 재일 코리안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는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김씨는 주장한다. “다양성을 갖고 상호 존중한다는 식의 (피상적인) 태도는 딱 질색이다.” 김씨의 네살짜리 조카딸은 보육원에서 일본인 친구로부터 “일본인으로 태어나서 다행”이라는 말을 면전에서 들었다고 한다. 그는 “아직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상생활에서는 별로 의식하지 않고 지낸다 해도 취직이나 결혼, 새로운 아파트를 찾는 등 “인생의 중요한 고비에서 차별받는 경우가 많다”고 민단의 배철은(裵哲恩)씨는 지적한다.
재일 코리안에 대한 차별을 없애는 것이 조총련과 민단 설립목적의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런 당초의 목적이 모호해져 개인주의적인 젊은 세대가 조직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며 배씨는 “조직으로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고 걱정한다.
그렇지만 민족단체의 내부에도 ‘뉴 재일’은 있다. 민단 오카야마(岡山)현 지방본부의 청년단장 이보창(李寶彰)씨는 “일본인 친구들에게 억지로 재일 코리안의 역사를 알리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더욱이 그는 한달에 1~2회 조총련 사람들과 술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 오랫동안 대립해온 두 민족조직의 단원들이 이런 형태로 교류하는 것은 과거에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현재의 조직은 재일 코리안 개개인의 현실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횡적인 네트워크를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이씨는 말한다.
얼마 전에도 이씨의 모친이 경영하는 음식점에서 그들의 친목 모임이 열렸다. 그들은 막걸리를 마시면서 상대방 조직의 결점을 서로 꼬집는다. 그러나 연애나 결혼, 그리고 한반도 통일에 관해서도 서로 털어놓고 이야기한다. “윗세대는 이런 식으로 술자리를 함께 하지 않겠지만 우리들로서는 가까워지기가 훨씬 쉽다”고 이씨는 말했다.
재일 코리안 중에는 한반도가 통일되면 언젠가는 한국에 가서 살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젊은 재일 코리안 대다수는 좋든 싫든 자신들의 미래는 일본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나름대로 일본 사회를 개선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
그들은 이미 일부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세의 하야사키 와타루(早坂涉)도 그중 하나다. “KP는 코리안 프라이드(의 두문자)잖아요. 멋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어째서 우리들에게는 재팬 프라이드가 없지요? 그래도 앞으로 생길지도 모르죠.”
KP의 매니저 다부 노부히로는 다민족 도시 뉴욕을 예로 든다. “거기서는 얼굴이 같은 아시아인이라도 어느 누구도 어디 출신인지 알지 못할 뿐더러 신경도 쓰지 않는다. 서로 다른 민족집단이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문화를 형성하고 성숙한 사회를 만들어간다. 그것을 일본에 바라고 싶다.”
KP의 리윤에게는 그런 미래가 확실히 보이고 있다. “관공서에서 개명 수속을 전부 마쳤을 때 일본 정부가 발행한 나의 패스포트에는 나의 민족명이 적혀 있었다”며 그는 말을 이었다. “나는 ‘맞아, 이것이야말로 코리안 재패니즈의 길이야’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한가지 대안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현재 재일 코리안의 다양한 정치관이나 철학관·꿈을 생각한다면 훨씬 더 많은 방법론이 도출된다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기사제공: Newsweek Japan)
긍지 회복을 위해 싸운 1세기 |
정부에 농락당한 재일 코리안은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계속 싸워왔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합병. 그후 일본어 교육, 창씨개명 등 동화정책이 진행돼 한반도로부터 일본으로의 이주가 본격화. 1923년: 관동대지진 후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아 재일 코리안들이 학살된다.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재일 코리안 대다수는 한반도로 돌아갔지만 약 60만명이 일본에 그대로 남는다. 1948년: 대한민국과 북한 정부 수립. 1952년: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 재일 코리안은 국적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은 채 일본 국적을 상실. 1965년: 일본과 한국이 국교를 회복. 한국 국적의 재일 코리안에 한해 영주권이 인정된다. 1974년: 히타치제작소의 입사시험에 합격한 후 외국인이라는 것을 이유로 해고된 한국 국적의 재일 코리안이 회사를 고소해 승소. 1981년: 난민조약의 비준에 따라 출입국관리 및 난민인정법이 제정돼 한국 국적의 재일 코리안에게도 영주권이 인정된다. 1992년: 외국인등록법이 일부 개정돼 재일 코리안에 대한 지문날인이 폐지된다. 2000년: 재일 코리안 3세인 소닌이 본명으로 가수 데뷔. 2003년: 도쿄대학 및 교토(京都)대학 등 일부 국립대학에서 대입검정을 받지 않은 한국학교 출신자에게도 개별 심사로 수험자격을 인정하기로 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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