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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치마킹]“준비된 위기는 기회다”

[벤치마킹]“준비된 위기는 기회다”

한국셀석유(주)의 부산공장. 한국쉘석유는 자동차 윤활유와 선박용 윤활유를 주로 생산하고 있다.
천재지변의 발생을 인력(人力)만으로 막을 수 있을까? 우리는 안타깝게도 ‘노’(No)라고밖에는 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는 있을까’라는 물음에는 모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어느 정도는 천재지변이 발생할 곳을 미리 예측하고 사전에 대처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자연현상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다면, 그것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복잡한 비즈니스 환경에 대해서는 좀 더 수월하게 대비할 수 있지 않을까? 대답은 다행스럽게도 ‘예스’(Yes)다. 다국적 석유회사인 로얄더치쉘(Royal Dutch/Shell)이 바로 ‘예스’에 해당하는 기업이다. 쉘은 다가올 환경 변화를 수동적으로 방어하는 차원을 넘어, 사전에 예측하고 준비하는 과학적인 시나리오 경영기법을 성공적으로 활용해 초일류기업의 반열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장수기업은 위기를 먼저 안다 사실 쉘의 시나리오 경영은 역사가 오래 됐다. 1973년 1차 오일쇼크가 발생하기 훨씬 이전 당시 미국은 중화학공업을 기반으로 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전 세계 경제도 이런 미국 경제의 성장에 힘입어 힘차게 동반 성장하고 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세계 경제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전혀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쉘은 석유산업의 특성상 여러 가지 환경변수에 의해 자사의 사업이 큰 영향을 받을 수 있으며, 또한 그런 환경 변화를 쉽게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경영환경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었지만 쉘은 언제 급변할지 모르는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시나리오 경영’이라는 첨단기법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쉘은 먼저 75년 이상 생존한 기업들이 어떻게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연구했다. 30개의 우량 기업들을 선정한 후 그들의 생존비결을 분석했고, 환경 변화에 대처한 그들만의 법칙을 파악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오랫동안 생존한 기업들은 사전에 어떠한 위기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사실을 경쟁자들보다 먼저 알아차리고 빠르고 효과적으로 대처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쉘은 바로 이 대목에서 ‘시나리오 경영’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 위기 상황이 있을 것이라 가정하고, 각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만든 것이다. 쉘의 시나리오는 확률상 추론에 의한 것이었다. 위기 상황이 일어날 즈음 발생하는 현상들에 대한 리스트를 만들어놓은 다음, 그런 상황과 비슷한 현상들이 관찰된다면 위기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데 착안했다. 쉘이 도입한 시나리오 기법은 원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공군의 작품이었다. 적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 발생 가능한 모든 변수들을 고려해 적이 어떠한 형태로 공격해 올 것인지 등에 대해 가상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보는 작업이 승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사실 경영 환경 또한 이같은 전시 상황과 다를 바 없다. 거시·미시적으로 모두 급변하는 상황은 그 변화의 폭과 복잡성이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넓어지고 높아졌다. 물론 이런 상황은 기업경영을 더 어렵게 하고 있다. 특히 기업이 이런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힘든 것 중 하나가 ‘대응 속도’다. 적응을 한다 해도 변화가 닥친 뒤 움직이기 시작하면 이미 늦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기업은 여러 상황을 가정한 준비된 대안을 갖고 보다 신속하고 유연하게 상황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시나리오 기법인 것이다. 쉘은 이런 전략적 사고를 바탕으로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즉 전쟁·석유 공급 중단 등을 가상한 시나리오를 만들고 경우에 따른 구체적인 대응전략을 짰다. 다음에는 사내 최고경영자들이 시나리오 경영의 사고에 익숙할 수 있도록 모의실험까지 수차례 실시했다. ‘워 게임’(War game)이라는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개발, 불시에 원유공급 중단 사태가 발생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도 대비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2백60여개에 달하던 사업부에 권한을 대폭 위임하는 등 조직 체계를 신속한 환경대처가 가능한 체질로 바꿔놓았다.

‘6일 전쟁’으로 급부상 이런 쉘의 시나리오 경영은 크게 네 단계로 이뤄져 있다. 1단계에서는 쉘의 의사결정과 관련된 상황 이슈들을 고려해 발생 가능한 시나리오들을 정리한다. 2단계에서는 기술·브랜드·고객 등 사업 전반에 걸쳐 경쟁사를 고려한 자사의 위상을 정확히 파악한다. 3단계에서는 사업의 중·장기적 비전을 합리적으로 수립하고, 마지막으로 4단계에서는 첫 단계에서 구성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상황에 적합한 최종 전략을 수립한다. 여기에는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가능한 전략 대안들을 탐색하고, 적합성을 평가하는 과정이 포함돼 있다. 쉘의 이러한 치밀한 준비는 세계 제1차 오일쇼크 때 진가를 발휘했다. 쉘은 유가가 안정세를 보였던 68년 당시 그 누구도 유가상승을 예상하지 못하던 때에 위기 상황을 시나리오에 반영했다. 그 시나리오에는 미국의 석유 비축량이 바닥을 보일 수 있고, 아랍 산유국들이 서방세계의 이스라엘 지원에 대한 반발로 정치적 결속을 다지면서 에너지 위기가 현실화될 것이라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쉘은 향후 유가가 지속적으로 안정되기 위해서는 아랍 이외의 지역에서 새로운 유정이 발견돼야 하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발생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유가 재협상에 들어가는 75년 이전에 에너지 위기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결론은 정확했다. 73년 10월6일 중동전쟁이 발발하면서 전 세계에 에너지 위기가 닥쳤고, 그동안 에너지 위기 시나리오에 만반의 대비를 했던 쉘만이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대응해 세계 정유업계 7위에서 2위로 단숨에 올라설 수가 있었다. 물론 다른 석유회사들도 오일쇼크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예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스피드였다. 쉘은 남들보다 훨씬 전에 오일쇼크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실제 위기 상황이 발생하자마자 일사천리로 대응했다. 쉘의 체계적이고 신속한 대응은 경쟁자들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다. 급속한 원유공급 중단 사태는 미리 연습해 봤던 시나리오 중 하나였기 때문에 대응전략도 탄탄하게 준비돼 있었다. 그 결과 경쟁업체들이 쉽게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쉘은 순식간에 업계 선두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불안한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신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쉘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여러 가지 발생 가능한 상황을 설정하고, 과학적 이론을 기반으로 만든 시나리오를 구축해 거기에 걸맞은 대응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급변하는 환경 변화에 적극 대처해 나가야 하는 오늘의 경영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현명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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