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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 못 읽은 거물들 줄줄이 낙마

민심 못 읽은 거물들 줄줄이 낙마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총선 개표가 한창 진행 중이던 4월 15일 저녁 “거참 시원치 않네”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당사를 떠났다. 3김 가운데 마지막으로 남은 현역 정치인이자 정치 9단으로 불리는 그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그는 1961년 서른다섯의 나이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 초대 부장이 됐고, 박정희 시대 내내 2인자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3공화국의 종말과 신군부 등장,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그는 당 총재와 국무총리를 역임하며 ‘거물’ 정치인으로 생명을 유지했다.

JP의 정치인으로서의 이력은 무려 43년이나 된다. 자신이 창당한 자민련이 지역구 4석, 정당 득표율 2.8%에 그침으로써 10선 의원이라는 그의 희망은 좌절됐다. 그의 퇴장을 지켜본 원로 정치인 남재희씨는 “거물이란 말은 그야말로 ‘큰 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곧 물러나야 할 사람이란 뜻도 담겨 있다”며 JP의 퇴장이 역사적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순리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번 4·15 총선은 정치 구도를 뒤바꿨다는 점에서 이른바 ‘정초선거’(founding election)로 불린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함으로써 1987년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여대야소’ 구도를 만들어냈다.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입함으로써 ‘노동 배제의 정치’에서 ‘노동 참여의 정치’가 시작됐다. 당선자 면면을 볼 때 우선 가장 뚜렷하게 감지되는 변화는 정치 주도 세력의 ‘세대 교체’다.

처음으로 국회에 진출하는 초선 의원은 1백88명으로 전체 의원의 63%다. 이는 초선 의원 수로는 역대 선거사상 최다다. 16대 현역 의원 가운데 다시 당선된 사람은 27.3%인 76명에 불과했다. 총선시민연대가 진행한 ‘낙천·낙선운동’ 해당자 중 63%인 1백29명이 탈락의 쓴 잔을 마셔야 했다. 개혁성과 참신성을 무기로 한 정치 신인들은 구정치의 거물들을 대거 퇴장시켰다.

야당인 한나라당의 투톱을 이뤘던 최병렬·홍사덕 의원도 ‘물갈이 바람’을 피해 가지 못했다.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는 선거 전에 일찌감치 퇴출의 운명을 맞았다. 지난해 6월 대선 패배의 후유증을 앓고 있던 한나라당의 재건 사령탑으로 선출된 그는 불법 대선자금 수사 과정에서 터져나온 ‘차떼기 정당’ 등 잇따른 악재로 정치적 위기에 빠졌다. 결국 그는 지난 2월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회로부터 공천 불가라는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았다. 일각에서 재·보궐 선거를 준비하고 있다거나 부산시장에 도전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으나 총선 결과로 나타난 변화의 바람을 수월하게 넘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경기도 고양 일산갑 선거구에 출마했던 국회부의장 출신의 홍사덕 의원은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회 결정에 따라 지역구를 옮겨 6선에 도전했으나 결국 한명숙 전 환경부 장관에게 패배했다. 그는 연초부터 “바보 국민이 대통령을 잘못 뽑았다”는 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고, 촛불 시위에 대해서도 “촛불 시위에 나선 젊은이들과 30, 40대가 모두 단단한 직장을 갖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가 호된 비난을 받아야 했다. 중진의원으로 높은 지명도에도 불구하고 그가 낙마한 것은 민심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한 탓이 크다는 지적이 많다.

홍의원과 함께 탄핵 주역들이 대거 탈락한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탄핵을 주도했던 민주당 지도부는 회복 불능의 치명상을 입었다. 이번 총선의 최대 이슈였던 탄핵은 박근혜 의원이 한나라당 대표로 선출되면서 불었던 ‘박풍’(朴風)이나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으로 촉발된 ‘노풍’(老風)의 파고를 막아냈다. 당내 일부 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탄핵안을 밀어붙였던 조순형 전 민주당 대표는 대구 수성갑에서 3위를 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역시 탄핵을 주도했던 유용태 민주당 원내총무도 열린우리당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다. 탄핵에 유보적 태도를 보였던 민주당 이낙연 의원이나 한나라당 남경필·원희룡 의원이 당선된 것과는 대조적인 결과다. 탄핵소추위원인 김기춘 한나라당 의원은 상대적으로 높은 인물 지명도와 지역주의를 배경으로 경남 거제에서 여당 후보를 앞질렀다.

대통령 탄핵을 공론화한 당사자인 조순형 전 대표는 이미지가 급격하게 나빠진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그는 분당 이후 위기에 빠진 민주당을 구출할 간판 스타로 떠올랐지만 한나라당과의 공조, 탄핵안 추진 등 잇따른 정치적 실책을 범했다. 그 과정에서 ‘미스터 쓴소리’라는 자신의 긍정적 이미지도 급격하게 실추됐다. 결국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 강북을을 버리고 대구 출마라는 배수진을 쳤으나 유권자들은 냉담했다. 그는 탄핵 역풍으로 민주당이 고사하고 자신마저 낙선함으로써 관리자로서나 정치인으로서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민주당의 선거대책위원장으로 ‘3보1배’를 통해 민주당의 부활을 기원했던 추미애 의원은 개표가 시작된 4월 15일 저녁 기자들을 따돌리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개표가 시작되면서 민주당사는 낙담한 당직자들이 대거 자리를 비워 썰렁하다 못해 황량했다. 추의원은 자신의 낙선에 대해 “나 혼자 당선되고 다른 사람들이 낙선하는 것보다 마음이 편하다”고 담담히 말했으나 개표 방송을 보고 있는 그녀의 눈시울은 이미 젖어 있었다. 2002년 대선 당시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후단협) 소속이었던 민주당 구주류 의원들도 역시 몰락했다.

민주당내 최대 조직이었던 중도개혁포럼의 수장 정균환 의원, 역시 후단협 멤버였던 박상천 전 대표, 김대중 전 대통령 비서 출신으로 동교동계 의원인 김옥두 의원도 퇴출됐다. 열린우리당에서 거물 정치인으로 낙선한 인물은 이부영 의원이다. 3선의 이의원은 탄핵 역풍이라는 호재에도 불구하고 같은 대학 후배인 김충환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3선 의원으로 시민단체로부터 대표적인 철새 의원으로 꼽혔던 김원길 한나라당 의원도 결국 떨어졌다. ‘젊은 철새’인 한나라당의 전용학 의원, 민주당의 김민석 후보도 마찬가지 신세가 됐다.

4·15 총선으로 17대 국회는 그 어느 때보다 젊어졌다. 여야 모두에서 학생운동권 출신 386 세대가 대거 의회에 진출해 향후 정국에서 이들이 실질적인 주도 세력을 이룰 것으로 전망된다. 열린우리당의 압승과 민주노동당의 의회 진출로 ‘개혁과 진보’의 축이 형성됐으며, 한나라당의 재기 성공으로 견제 세력으로서 ‘보수’도 만만치 않은 위상을 부여받게 됐다. 16대 국회에서 불과 16명에 지나지 않던 여성 의원이 이번 총선에서 39명으로 늘어나 전체 의원의 13%를 차지한 것도 주목할 만한 변화다.

이번 총선은 2002년 대선의 완결판이라는 지적이 많다. 지난 대선을 통해 표출된 변화에 대한 열망이 의회 권력의 교체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지역주의에 기반했던 3김 정치와 3김의 정치적 영향권 내에 놓여 있던 정치인들이 퇴출됐고, 박정희 시대 이후 계속된 반공이데올로기도 퇴조의 기색이 역력하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는 “4·15 총선은 구정치의 퇴장과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이 나타난 결과”라며 “탈냉전적 사고를 지닌 20∼40대가 전체 유권자의 70%를 차지하고 있고, 이들의 지역주의 타파와 진보정치에 대한 기대, 물갈이 욕구가 이번 총선에서 강하게 표출됐다”고 분석했다. 극우보수에 가까운 정형근·김용갑 의원이 이번 총선에서 당선됐지만 선거 국면에서 전면에 부상하지 못하고 잠행에 가까운 선거운동을 한 것도 이런 변화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편 김종필 총재는 19일 “노병은 죽진 않지만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라며 정계를 은퇴했다. 김총재는 “43년간 정계에 몸담으면서 나름대로 죄가 됐다”며 패장의 소회를 밝혔다. 그는 5·16 군사 쿠데타로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고, 공교롭게도 자신이 무력화한 4·19 혁명 기념일에 퇴장했다. 그의 퇴장을 계기로 ‘3김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정치 9단들의 시대, 거물들의 시대는 저물고 이제 젊고 새로운 정치 시대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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