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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음악 세계화도 좋지만 서구식 잣대로 하면 안돼요”

“우리 음악 세계화도 좋지만 서구식 잣대로 하면 안돼요”

북, 장구, 꽹과리, 징. 흔하게 접하는 이 네 개의 악기로 뿜어내는 생동감 있는 리듬과 활력이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덩실덩실 어깨춤이 절로 나오고 흥에 겨워 무대 밖 사람들까지 하나가 된다. 1978년 김덕수 씨에 의해 서민적 정서를 대변하는 국악 장르로 만들어진 ‘사물놀이’. 25년이 흐른 지금 사물놀이팀이 없는 초등학교가 없고, 전문공연단체만 300여 개, 아마추어 단체까지 합치면 2,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예술의 대중화란 이런 것이 아닐까? 고리타분하게만 인식되는 국악을 이처럼 생생하게 우리의 삶에 접목시켜 놓은 것이 또 있을까? 그 매력이 어디에 있는지, 사물놀이를 어떤 생각과 동기에서 시작한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김덕수 씨를 찾았다.
김덕수 씨는 사물놀이가 생긴 이래 25년 동안 근 4,500회의 공연을 해왔다. 1년에 150회 내지 200회의 공연을 한 셈이다. 그 자그마한 체구에서 그만한 정열과 힘이 나왔다니. 특별한 체력관리 비결은 있는지 물었다.
“특별한 운동은 필요 없습니다. 연주 자체가 운동인 셈이지요. 공연 자체에 신체리듬과 움직임이 담겨 있습니다. 연주를 통해 신명이 나고 활력을 갖게 될 때는 정신수련도 함께 된다고 생각합니다.”

연주면서 운동이라. 연주에 몰입하면서 신체적 ·정신적인 수련도 함께한다는 뜻이리라. 그야말로 예술과 내가 일체를 이루는 순간을 즐기는 것이라는 말인 것 같다. 그의 이력이 이 말을 실감나게 한다. 김덕수는 1952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71년 서울 국악예술고등학교 졸업, 73년 단국대 요업공학과 2년 수료라는 학력의 이면에 현장과 함께 한 그의 국악 인생이 더욱 시선을 끈다. 5세 때인 57년 아버지 김문학에 의해 남사당에 입문했고, 7세 때인 59년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그 후 64년까지 남운용 ·송순갑 등의 명인으로부터 남사당 전종목을, 71년부터 85년에 이르기까지 지영희 ·김숙자 ·김석출 명인으로부터 경기도도당굿, 동해안 별신굿을 전수받는 등 다양한 국악을 섭렵했다. 서민적인 국악을 바탕으로 78년 사물놀이를 만들었고, 이것이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지난해에는 부천에 전통예술공연 전용극장인 ‘김덕수의 난장극장’을 설립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연희과 학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95년 국악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이룬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했고, 국가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이수자(경기도 도당굿)로 지정됐다.
유치원에 다닐 나이인 5세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남사당에 입문했다는데, 당시 거부감 같은 것은 없었는지 궁금했다.

“저희 집이 9남매였고, 저는 그 중 여섯째였습니다. 아버지는 예인이셨고, 어머니가 살림을 주로 하셨어요. 아버지의 지적으로 제가 아버지의 길을 잇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 당시 제가 들어갔던 남사당은 전문유랑예인집단으로 서민들 속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연희단 가운데 하나였고, 최고 대우를 받는 집단이었습니다. 아이들 속에서도 최고 대우를 받았습니다. 또 그때는 많은 무대가 있기도 했어요. 전국농악경연대회와 같은 전국대회들이 있었고, 미8군의 문화프로그램에서도 공연을 하곤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예인 기질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너무 어려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까. 많은 이들이 외면하고 그에 따른 충분한 보상이 주어지는 길도 아니었을 텐데, 청소년기로 오면서 생각의 변화는 없었을까.
“청소년기에는 남사당의 민족연희에 대한 본격적인 수업이 이루어졌지요. 남사당에는 탈춤 ·인형극 ·줄타기 등 여섯 개 종목이 있는데, 그때의 현장 교육이 제 국악 인생에서 뿌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국악예고에 진학을 해서는 체계적인 이론과 실제를 겸비하는 교육을 받았어요. 당시 기산 박헌봉 교장선생님의 배려로 학교에서 자취를 하면서 집중적인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해외공연을 시작했고, 1년의 반을 외국에서 그리고 현장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특히 제가 주로 한 연희라는 분야가 국악에서도 가장 기초적이고 원형적인 것이라는 자부심과 사명감을 갖고 공연에 임했습니다.”

“타악기는 민중이 사랑한 진정한 우리 악기”

이쯤 되면 타고난 예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투철한 소명의식이 ‘사물놀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국악 장르를 만들어내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또 국악에서 원형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국악을 민족예술이라고 하는데 그 속에서도 차별이 있습니다. 소리꾼과 무대공연은 대우를 해주지만, 생활 속 현장에서 이뤄지는 연희꾼들은 천대시하는 풍조가 있습니다. 제가 소속된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연희과에서는 무속 ·탈춤 ·풍물 ·남사당 공연 등을 위주로 하는 곳입니다. 저는 이것들이 국악의 원형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남도의 무속에서 민요도 나오고 판소리도 나오는 것이지요. 제 나이 36세 때 사물놀이를 만들었는데, 이런 원형적인 것을 바탕으로 전문 예인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본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사물놀이는 농악 가락이 기본이고, 농악에 사용되는 악기들로만 이뤄진다. 농악에서 그 모티브를 찾게 된 것이 바로 서민들의 생활 속에 담겨 있는 예술정신의 계승이라는 관점이었느냐고 물어보았다.
“꽹과리 ·징 ·북 ·장구는 우리나라 어느 마을이건 항상 비치돼 있던 악기였습니다. 진정으로 서민들의 생활과 함께 한 악기였습니다. 농악뿐 아니라 회갑이나 백일 그 밖의 마을 잔치가 있을 때마다 사용돼던 악기였지요. 심지어는 전쟁에서도 사용했다 합니다. 그러던 것이 70년대 중반 이후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생활방식이 변하고 우리의 관혼상제 문화가 달라짐에 따라 전통 문화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 대안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고민을 하게 됐고, 무대를 우리네 마당처럼 생각하고 그 위에서 공연하는 놀이를 만들어내자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꽹과리나 징과 같은 악기를 우리네 전통적인 악기로 강조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우리네 고유 정서와 일치하는 그것들만의 고유한 특색이 있는 것 같았다.
“가야금이나 거문고와 같은 일반 선율악기는 사대부의 악기이고, 당이나 송으로부터 전래된 외래적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타악기들은 우리 것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들을 민족적인 악기 또는 서민적인 악기라고 말합니다. 우리 땅, 우리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미에서입니다. 특히 징 같은 악기에는 12고개를 넘는 독특하고 고유한 울림이 있다고들 합니다.

음들이 끊어지지 않는 연속이고, 상승과 하강의 반복을 통해 무한대로 향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이것을 곡선적인 호흡에 의한 리듬 가락이라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둥글게 우리를 감싸는 우리의 자연을 상징하는 우리만의 악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악기들이 갖고 있는 독특함과 매력이 전통의 계승발전을 이뤘다. 또 사물놀이를 우리의 대표적 문화상품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지만 보다 더 발전된 형태로의 변화가 있어야 경쟁력을 갖춘 문화상품으로서 자리매김하지 않을까 생각돼 그 대책을 물어봤다.

“처음에는 이 땅에서 만들어진 악기가 무시당하는 상황에 대한 오기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전통과 현대의 접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대가 변했고 사람들의 귀도, 감성도 달라졌기에 거기에 맞추기 위한 방법으로 다른 음악 장르들과 접목하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탈춤 ·농악장단 ·무속장단을 바탕으로 하면서 오케스트라와 같이 협연을 할 수 있는 협주곡의 형태를 15곡 정도 만들었고, 군악대와 협연을 하는 것도 있습니다. 특히 농악에는 군악의 요소가 많이 있다는 점에서 군악대와의 협연이 아주 잘 맞습니다. 젊은이들의 음악인 록이나 힙합과 협연하는 프로그램도 개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본질적 기운 같은 것, 즉 연주자의 몸에 밴 신명과 사람들이 흥미를 갖게 하는 것이 바탕에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초 ·중·고생 때부터 우리 전통 가락 가르쳐야”

신명과 흥을 기본으로 다방면 확산을 시도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예술의 생활화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마도 이런 생각에서 그가 지난해에 ‘김덕수의 난장극장’을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이름에 하필 ‘난장’이라는 말을 붙였을까.
“난장은 본래 우리 선조의 부정기적인 시장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그곳은 상업적인 거래가 이뤄지는 곳이기도 하지만, 이벤트와 축제의 장이었습니다. 또 제가 데뷔한 것도 난장이었고요. 그곳은 인간의 모든 행위가 있는 곳입니다. 소싸움, 도박, 공연 그 밖의 모든 축제적인 요소들이 있는 곳이며 사람 냄새가 넘쳐흐르는 곳이기도 합니다. 혼란과 소요만이 있는 것 같지만, 사람들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질서와 같은 것이 느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난장의 정신은 카오스 속의 질서라는 것이다. 부대끼는 사람들 간의 소통과 시끌벅적함에서 새로운 예술의 기운도 찾아 볼 수 있지 않겠나라는 생각인 것 같다. 전통의 진정한 계승이면서 예술의 대중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제 사물놀이를 포함한 전통연희 공연이 많이 보급됐고, 외국인 가운데에도 마니아들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해야 하는 것은 단지 눈요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듣고 체험하면서 진정한 연희의 정수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에서 극장을 만들게 됐죠.

극장 구조도 우리의 울림을 담을 수 있는 공간 구조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원형의 텐트 구조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공연이 주로 마당에서 이루어진다는 특색을 최대한 살릴 수 있게 하기도 했고요. 또 무엇보다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초겵?고 학생들을 위한 문화 프로그램입니다. 우리 것을 제대로 알고 할 수 있도록 수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 문화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하고, 미래의 문화인구를 만들어내자는 것입니다.”

인터뷰 내내 가졌던 생각은 그는 역시 장인으로서 예술가이고 명인이며, 현장의 살아있는 예술인이라는 점이었다. 그런 그가 문화계 전반에 대해 불만이나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을까.
“세계화라는 말이 유행처럼 퍼져나가고 있는데 필요하기도 하지만 위험한 발상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으면 합니다. 서구적인 틀과 잣대 속에 우리 것을 넣다 보면 잃는 것이 더 많은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59년 서울대에 국악과가 생기고 서양의 음악과 기초적 이론에 우리 것을 맞춰 나가는 이론화 작업이 진행되면서 많은 것을 잃게 된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음은 흔드는 것, 즉 연속성과 자연스러운 떨림을 생명으로 하는데 분절의 음을 기본으로 하는 건반악기에 맞춘다는 것이 우리 음악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또 예술문화계 일각에서 보이는 현상이지만 기초에 너무 불성실하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너무 빨리 뛰려고 하고 날려고만 합니다. 뭔가 가시적인 성과가 금방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문화에는 더욱 기초가 필요한데 말입니다.” 유행처럼 번져나가는 세계화의 맹점 그리고 눈앞의 이익과 가시적인 성과, 순간에 집착하는 한탕주의가 예술문화계에도 번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은근하게 숙성되고 다듬어지는 과정이 담긴 문화의 저력이 필요한 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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