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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금운용기구 개편, 증시 투입 놓고 치열한 논쟁… 4700만의 ‘내돈’ 국민연금 대해부 “어디에 쓸까?”

기금운용기구 개편, 증시 투입 놓고 치열한 논쟁… 4700만의 ‘내돈’ 국민연금 대해부 “어디에 쓸까?”

지난 1983년 11월 안승철 당시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이 대통령에게 취임 업무보고를 하는 자리. 안원장과 서상목 부원장은 청와대에 들어가 전두환 대통령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안원장은 “국민연금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는 제언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면박만 듣고 나와야 했다. 우리 경제는 아직 그만한 여력이 없으며, 자칫 과도한 복지정책을 펼 경우 이른바 영국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지적이었다. 오기의 발로였을까? 서부원장은 곧바로 KDI 안에 ‘연금 프로젝트팀’을 가동했다. 그로부터 6개월 뒤, 김만제 경제부총리와 사공일 경제수석은 ‘국민연금 도입안’을 들고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냈다. 대통령이 유럽 순방길에 나서던 비행기 안에서였다. 대통령의 기분이 ‘업’(UP)됐을 때 뚝심 좋은 경제관료들이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국민연금은 ‘소득의 3%만 내면 평균소득의 70%를 보장한다’는 특례조항을 두고 88년부터 국민들로부터 연금보험료를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1889년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근대적 개념의 국민연금을 도입한 지 99년, 73년 국민연금 논의가 시작된 지 15년 만의 일이다.

비행기에서 사인한 국민연금 불과 16년 만에 자금시장의 큰손이 된 국민연금이 수술대에 올랐다. 지난 11월7일 정부가 종합투자계획, 이른바 ‘한국형 뉴딜’에 연기금을 끌어다 쓰겠다고 발표한 것이 발단이다. 정부는 당·정·청 경제 워크숍에서 “내년도 5% 성장률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요 진작책이 필요하며 사회간접자본(SOC) 등에 재정과 연기금 8조~10조원 규모를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주식시장 활성화, 상장·등록사의 경영권 방어 등에도 연기금을 활용하겠다는 방안이 나왔다. 연기금 사용 계획은 대부분 운용자금이 129조원에 이르는 국민연금을 염두에 둔 것이다. 논란의 도화선은 ‘김근태 쇼크’다.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이 11월19일 복지부 홈페이지에 ‘애초 취지에 맞지 않게 국민연금 기금을 잘못 사용하면 제도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글을 올리면서 재정경제부 주도의 연기금 활용계획에 대해 반대의 뜻을 밝힌 것이다. 주식·SOC 등에 연기금을 투입한다는 내용의 기금관리기본법 개정안에다 ‘적게 내고 많이 받는’ 설계구조로 고치자는 국민연금법 개정안 심의가 시작된 11월 초부터는 정치권의 입씨름이 더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당장 ‘국민연금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가 문제가 됐다. 김장관의 발언이 촉매가 돼 결국 19~21일 긴급 당·정·청 대책회의를 한 끝에 재경부·기획예산처·복지부와 60% 이상의 민간전문가가 참여하는 기금운용위원회를 독립 상설화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또 그 밑에 국민연금관리공단 기금운용본부를 따로 떼어내 자산 운용을 전문으로 하는 투자회사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정부·여당안은 기금운용위원회를 상설화하고 위원장도 현행 복지부 장관에서 민간전문가로 바꿔 기금 운용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강화한다는 측면에서 진일보한 내용이다. ‘기금위원회를 상설화하고 위원장도 민간인으로 바꾸자’는 한나라당 안과 ‘정부로부터 완전히 떼어내자’는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의 요구를 감안하면 ‘절묘한 절충안’이기도 하다. 기금운용위원회는 정부와 민간인이 함께 참여하는 기금운용위원추천위원회가 추천하는 인물들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형태가 된다. 가능한 정부의 입김을 배제하고 독립적으로 기구화한다는 취지다. 투자기구를 따로 두려는 것은 연기금의 주식투자를 원칙적으로 허용하는 내용의 기금관리기본법 통과에 주력해 온 우리당이 한나라당의 요구사항인 투자회사 설립 방안을 수용했기에 가능했다. 투자회사안을 받아주는 만큼 기금관리기본법 통과에 ‘딴죽’을 걸지 말아달라는 뜻이다.기금 운용 ‘수술’은 이렇게 정리되는 듯 보이지만 ‘진통’은 계속되고 있다. 야당의 반대가 거세고 당·정 내부에서조차 불협화음이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은 이런 당·정 합의에 “무늬만 독립”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기금운용위원회의 명칭을 어떻게 할지, 위원장은 어떻게 뽑을지, 위원은 누구로 임명할지에 대한 논의도 진척되지 않고 있다. 봉합도 엉망이지만 부처 간 앙금도 여전하다. ‘김근태 파문’이 커지자 이헌재 경제부총리는 “그동안 수차례 회의 때는 한마디도 않다가 느닷없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비난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병원 재경부 차관보는 “수많은 관계부처와 협의를 거치지 않고는 개정안이 국회에 올라갈 수 없다”며 마치 복지부와 사전 협의를 거치지 않은 듯한 뉘앙스를 풍긴 데 대해 섭섭함을 표시했다. 오죽 답답했으면 “최근의 연기금 논란은 마치 유령과 싸우고 있는 기분”이라는 말도 나왔을까. 재경부 관계자는 “가뜩이나 ‘저금리 딜레마’에 빠져 있는 연기금 운용에 숨통을 터줘 복지부로서는 환영할 일인데 오히려 화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김장관은 지난달 자신의 발언에 대한 사과로 국민연금 파문이 가라앉을 조짐을 보이자마자 느닷없이 “국민연금 운용을 재경부가 맡으면 안 된다”고 말해 부처 간 밥그릇 싸움을 재점화했다. 김장관은 11월24일 MBC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해 “연금 운용에 대한 최종 책임과 관리감독을 정부에서 한다는 것이 당·정·청 회의 결과”라며 “그러나 재경부는 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게 국민의 여론”이라고 못 박았다. 복지부 고위 관계자는 “정부가 연금을 ‘주머니 돈’(국가예산)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엄연히 국민의 돈이고, 이 돈을 투자하는 데는 엄정한 절차가 필요한데도 정부가 앞질러 ‘동원 계획’을 밝히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재경부와 복지부의 밥그릇 싸움은 지난해 여름에 이어 제2라운드로 돌입한 형국이다. 지난해 두 부처는 기금운용위원회를 상설화하자는 데는 어렵게 합의했으나 이 기구를 어디에 둬야 할지를 놓고 치졸한 공방을 거듭했다. 김장관의 ‘재경부 불가론’은 “경제부처가 국민의 적금통장을 마음대로 쓰려고 한다는 인상을 줘선 안 된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의 주장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그러나 오는 2035년께면 적립금이 680조원, 많게는 1,715조원에 이를 정도로 거대해질 국민연금을 국가경제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는 경제부처의 논리도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두 부처의 이견은 좁혀질 기미가 없다. 평행선이다.

밥그릇 싸움 끝에 ‘절묘한 절충안’ 기금 운용기구·운용방향에 대한 수술도 수술이지만 설계도 자체를 ‘수술’하는 일도 급하다. 국민연금이 직면한 또 다른 문제는 재정을 안정시키기 위한 보험료율과 연금지급률을 조정하는 것이다. ‘더 내고 덜 받는’ 방향으로 법을 바꾸자는 내용이다. 당장의 문제는 늘어나는 자금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있지만 앞으로 문제는 고갈되는 자금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나 정치권이나 국민연금의 본질을 놔두고 운용 방법이나 의결권 행사 여부 등 ‘부수적인 문제’들이 마치 문제의 전부인양 물고 늘어지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다. 김진수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여야가 국민연금 수술은 뒤로 제쳐두고 ‘주식 투자가 되네 안 되네, 운용은 너는 안 되고 나여야만 해’ 하는 식의 힘겨루기에 함몰된 것은 전형적인 ‘왝 더 독’(Wag The Dog: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것을 빗댄 말) 현상”이라고 꼬집었다. 몸통은 연금 설계도를 수술하는 것이다. 국민연금은 가장 기초적인 노후 보장수단이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전되고 있다. 저출산 문제도 심각해 부양세대의 부담은 갈수록 늘어난다. 현 추계대로라면 2036년 수급구조가 역전되고, 2047년에는 적립금이 완전 고갈된다. 이후는 전액 국민 부담이다. ‘더 많이 내고 덜 받아가도록’ 제도를 바꾸자는 논의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88년 처음 시행될 당시 국민연금은 특례조항이 적용돼 소득의 3%만 내면 연금급여는 평생소득의 70%를 보장해줬다.새 제도에 대한 저항을 달래기 위해 보험료는 적게, 연금액은 높게 설계한 것이다.

‘왝 더 독’(Wag The Dog) 연금급여율이 조정된 것은 지금까지 딱 한번이다. 97년 국민연금제도개선기획단이 만들어지면서 소득대체율을 40%로 줄이기로 했으나 복지부가 55%로 바꿨다. 정작 국회에서는 하루 만에 60%로 올랐다. 표심을 잃으면 ‘배지’를 잃을 수 있기 때문에 적당히 타협한 결과다. 16대 국회에서도 개정안이 올라왔지만 ‘없던 일’이 돼 버렸다. 현재 복지부는 보험료율은 2010년부터 5년마다 1.38%포인트 높이고, 연금급여율은 2007년까지 55%, 2008년부터는 50%로 낮추는 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상태이지만 통과 여부는 미지수다. 정부와 여야가 국민연금의 운용이나 보유주식의 의결권 행사 여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것은 연금의 장래를 위해 어떻게든 치러야 할 ‘홍역’으로도 볼 수 있다. 문제는 이 싸움의 끝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 의도가 순수해야 하는데,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큰 줄기랄 수 있는 연금 수술은 뒤로 제쳐둔 채 기금 운용·의결권 행사 여부 등 곁가지에만 매달린다면 후세대들의 부담만 높아질 게 확실하다. 이대로라면 나중에 현세대의 아들·딸 혹은 손자 손녀들이 소득의 절반 정도를 국민연금으로 내야 할지도 모른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보다 정치적 이해 득실만을 따지는 현 세대 정치인들의 피해자다. 당장의 문제는 홍역일 수 있지만 그 다음은 ‘재앙’일 수 있다.

국민연금 운용 개편을 둘러싼 말 말 말…



“연기금 등을 활용한 한국형 뉴딜정책 펴겠다.”

-11월7일 당·정·청 워크숍에서.



“경제부처가 너무 앞서간다. 이러면 ‘내 돈을 정부 마음대로 하는 것 아니냐’하는 의구심이 증폭된다. 콩 볶아 먹다가 가마솥 깨뜨릴 수 있다.”

-11월19일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에서.



“국민연금의 운영상 제약을 풀어줘야 한다.”

-11월19일 이헌재 경제부총리 정례브리핑.



“재경부·예산처·복지부·민간 전문가가 포함된 자산운용위원회를 독립 상설화한다. 자산 운용기구를 분리해 별도의 투자전문회사를 설립한다.”

-11월21일 당·정·청 긴급 대책회의.



“국고와 연기금은 서로 다른 회계이고 통장인데, 두 개를 섞어 놓으면 국민이 신뢰하지 않는다. 재경부는 국민연금을 관리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국민 여론이다.”

-김근태 장관 11월24일 MBC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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