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도를 꿈꾸는 불굴의‘철강맨’
새로운 인도를 꿈꾸는 불굴의‘철강맨’
라탄 타타는 오랜 전통만큼이나 고리타분한 인도의 대표적 복합기업 타타 그룹을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인도 동북부 구릉지 위를 프로펠러 비행기로 스치듯 지나다 보면 야생 코끼리 ·호랑이 ·원숭이는 아니지만 논과 캐슈나무 ·번석류(蕃石榴) 농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 타타 그룹(Tata Group)의 대규모 철광석 광산 가운데 하나가 있다. 이 광산은 오랜 전통과 현금 보유액을 자랑하는 타타 스틸(Tata Steel)의 가치사슬이 시작되는 곳이다. 으리으리한 고층 빌딩, 섬광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증권거래소가 들어선 상업 중심지와 다른 인도의 옛 모습 그대로다.
옛 인도와 현대 인도라는 두 세계에 걸쳐 있는 인물이 포브스가 ‘2004 올해의 아시아 기업인’으로 선정한 라탄 타타(Ratan Tata ·67)다. 그가 거느리고 있는 가족경영 복합기업 타타 그룹(매출 143억 달러)은 ‘인도주식회사’의 어제와 오늘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지난 10여 년 사이 타타 그룹의 매출을 2배 이상 끌어올렸다. 싼 노동력과 기술을 접목시켜 어떤 강력한 경쟁업체와도 맞설 수 있는 현대 기업으로 이끌어 온 것이다.
인도 경제가 붐을 탄 덕에 타타 그룹의 전체 매출 가운데 77%가 여전히 내수시장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타타 그룹은 지난해 인도에서 벗어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한 네 번의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지난해 타타 스틸은 싱가포르의 철강업체 냇스틸(NatSteel)을 인수했다. 중국 ·호주 ·동남아시아 시장을 겨냥한 조치다.
타타자동차(Tata Motors)는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미국 주식예탁증서(ADR)를 상장했다. 한국의 트럭 제조업체 대우상용차도 인수해 중국 ·한국 ·태국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통신 ·인터넷 서비스업체 VSNL은 고속 데이터 네트워크로 세 대륙을 하나로 연결했다. 미국 타이코(Tyco)의 방대한 해저 케이블망을 인수하고 여기에 싱가포르와 인도 타밀나두주 마드라스를 잇는 링크까지 덧붙인 것이다. 타타 컨설턴시 서비시스(TCS)는 세계적인 아웃소싱 붐에 편승해 떠들썩한 기업공개(IPO)를 단행했다.
타타 그룹의 이런 움직임들은 53년 동안 회장직에 머물렀던 JRD 타타(J.R.D.Tata)가 라탄 타타에게 지휘봉을 건네준 1991년만 해도 생각지 못할 일이었다. JRD 타타는 86세에 물러나면서 먼 친척인 라탄 타타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능력을 발휘한 라탄 타타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당시 인도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라탄 타타가 그룹 회장으로 부임한 지 두 달 후 인도 재무 당국이 보유하고 있던 금을 연이은 차관에 대한 담보로 영국 런던에 실어나르는 굴욕적인 일도 있었다. 인도의 외환 보유액은 겨우 2주 동안 수입대금을 결제할 수 있는 수준까지 떨어졌다. 인도는 자립형 계획경제 체제로 굴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처럼 암울한 상황에 옛 소련까지 무너지면서 인도의 지도자들은 시대가 바뀌었음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타 그룹 사옥에도 옛 인도와 현대 인도의 모습이 뒤섞여 있다. 라탄 타타는 아침마다 전임자와 창업자 잠셋지 타타(Jamshetji Tata)의 흉상 옆을 지난다. 두 흉상은 사옥 ‘봄베이 하우스’의 로비를 굽어보고 있다. 봄베이 하우스는 뭄바이(옛 봄베이)의 유서 깊은 건축물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에 있는 회장실로 올라가면 인도의 현대 회화 작품으로 가득하다. 빨강 ·하양 ·검정 미니멀 장식으로 치장한 작품들은 어두운 원목 가구 ·놋쇠 비품 ·샹들리에와 대조적이다. 미국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라탄 타타는 62년 가족사업 경영을 위해 인도로 다시 호출되기 전까지 미국에서 잠시나마 건축업에 손대기도 했다.
타타 그룹은 수십 년 동안 거북이 행보를 보였다. 그 중에서도 ‘찬밥’신세였던 라탄 타타는 그룹 계열사들 가운데 가망 없어 보이는 곳만 맴돌았다. 그룹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가전 사업부에서 10년이나 썩었다. 그는 자신이 “문제 있는 업체를 바로잡는 일에만 투입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경험은 회장이 되기 위한 좋은 훈련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전임 회장이 라탄 타타에게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면 지금의 타타 그룹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탄 타타가 회장으로 지명됐을 당시 그룹 상황은 그야말로 ‘경악할’ 만했다.
라탄 타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얘기했다. “그룹은 경쟁 없는 환경에서 운영되고 있었다. 수년 동안 신규 진입이 막히다시피 한 무풍지대에서 사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룹 산하의 둔감한 기업들은 경쟁과 비용을 전혀 걱정하지 않고 새로운 기술도 모색하지 않았다.
상당수는 시장점유율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외부에 빗장이 열리자 주변 세계가 변했음을 알게 됐다. 그동안 세상과 동떨어진 경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탄 타타는 취임 후 ‘귀하신 몸’과 먼저 씨름해야 했다. 90개를 웃도는 타타 그룹 산하 기업들은 각기 다른 거물급이 경영하고 있었다. 대다수가 70세 이상인 그들은 회장의 지시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타타 그룹의 지주회사인 타타 선스(Tata Sons)는 당시만 해도 지분이 얼마 되지 않았다. 라탄 타타가 그나마 회장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전통 때문이었다.
그룹 내부에서 전면전이 전개됐다. 먼저 산하 수십 개 기업을 같은 방향으로 진군하게 해야 했다. 라탄 타타는 이를 위해 지주회사뿐 아니라 주요 계열사 총수로도 취임했다. 회장직을 회수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라탄 타타를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세력도 있었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그는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당시 죽쑤고 있던 타타 그룹 주식을 대거 사들였다.
라탄 타타는 연로한 거물 상당수가 개혁조치에 따르지 않자 사퇴를 강요했다. 그는 이들과의 충돌을 “여러 차례 총격전이 있었다”고 표현했다. 타타 스틸도 예외는 아니었다. 타타 스틸은 그룹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사업부 중 하나로 그룹의 가장 중요한 버팀목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라탄 타타가 타타 스틸에서 회장 수업을 쌓을 때와 달랐다. 인도가 영국 통치 아래 있던 1868년 잠셋지 타타는 무역회사를 세운 뒤 인도 최초로 제철소 설립에 나섰다.
그는 민족주의자로 인도가 산업화 ·자급자족,더 나아가 독립을 이룩하려면 철강 ·전기 생산 체제는 물론 기술교육 제도도 갖춰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인도인이라는 이유로 뭄바이의 한 호텔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적이 있다. 그 사건 이후 1902년 호화 호텔 체인 타지마할(Taj Mahal)을 설립했다. 잠셋지 타타가 타계한 뒤 유산 중 일부로 인도 최초의 대학인 인도과학대학(IIS)이 세워졌다. 그의 꿈 하나가 실현된 셈이었다.
인도는 철광석 매장량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나라다. 1904년 잠셋지 타타는 0.5루피에 제철소 건설 라이선스를 얻었다. 그리고 철광석이 매장된 거대한 구릉지 인근에 제철소를 세웠다. 1912년 이곳에서는 인도 최초로 철강이 생산됐다. 이 소도시는 나중에 잠셋지 타타의 이름을 따 잠셰드푸르(Jamshedpur)로 이름이 바뀌었다. 오늘날 타타 스틸이 생산단가가 매우 낮은 철강업체가 된 것은 철광석 광산 소유권 덕이다.
지난 93년 라탄 타타는 75세의 전 회장으로부터 타타 스틸을 인수받았다. 당시 타타 스틸의 자부심은 여전했지만 라탄 타타가 회장으로 취임한 뒤 개최한 첫 회의에서 그럴 만한 자격이 없음을 깨달았다.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운송비 상승으로 2,600만 달러의 적자가 예상된다고 보고했다. 과거 같았으면 철강 가격을 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신임 회장 라탄 타타는 오찬 모임에서 비용을 8% 절감하라고 지시했다. 경영진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에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그때만 해도 비용이 해마다 상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는 이사들도 있었다.” 당시 제철소를 감독하다 현재 타타 스틸의 부사장으로 있는 트리디베시 무케르지(Tridibesh Mukherjee)가 전한 말이다.
타타 스틸의 충격요법은 타타 그룹의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라탄 타타는 사외 컨설턴트들에게 실적이 형편없는 인도 업계 대신 해외 업계를 벤치마킹해달라고 요구했다. 타타 스틸은 산하에 대규모 업체를 6개나 거느리고 있었다. 타타 스틸의 B 무투라만(B. Muthuraman) 대표이사는 이렇게 술회했다. “컨설팅업체 아서 리틀(Arthur D. Little)이 타타 스틸을 0점으로 평가했다. 설비의 질이 낮고 공정도 형편없다. 인력이 너무 많고 마케팅도 잘못됐으며 세계 시장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정말 가혹한 평가였다.”
라탄 타타는 제너럴 일렉트릭의 잭 웰치(Jack Welch) 전 회장을 모방했다. 업계 1~3위 안에 들지 못하는 그룹 산하 기업은 매각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타타 스틸이 컨설팅업체 매킨지(McKinsey)의 ‘살생부’에 오른 것은 분명했다. 라탄 타타는 사석에서 컨설턴트들에게 “타타 그룹의 간판 기업인 타타 스틸을 매각할 수는 없다”며 “차라리 타타 그룹을 파는 게 낫다”고 발언했다. 그는 매킨지가 경영진에 불길한 소식들을 전하도록 했다. 라탄 타타는 “그 결과 약간의 긴장감을 조성할 수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전술은 먹혀들었다. 추가 비용 없이 생산량이 늘고 같은 해 말 손익분기점에 도달한 것이다. 몇 달 전 라탄 타타와 함께 한 오찬에서 경영진 모두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일이다.
그 뒤 타타 스틸은 23억 달러나 들여 노후한 공장을 폐쇄하는 대신 광산겙퍊제강소를 현대화하고 용광로를 신설했다. 타타 스틸은 또 다른 거대한 난관에 봉착했다. 7만9,000명에 이르는 인력을 줄이는 일이었다. 인도 법에 따라 정리해고가 어려운 데다 비용과 시간도 많이 들어간다.
라탄 타타는 가전업체를 되돌아봤다. 그는 “돈 먹는 TV 사업부에서 손떼기로 결정했을 때 한솥밥을 먹던 1,000명의 직원을 어떻게 내보내야 할지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라탄 타타는 당시 한 가지 아이디어를 짜냈다. 모든 퇴직 자원자에게 정년까지 지급할 급여를 당시 임금 수준으로 지급하겠다는 제안이었다. 인도에서는 임금에 주택 구입 보조금 ·정기 상승분 ·인플레 조정분이 포함되고, 조기 퇴직금을 지급하는 데만 3년이 걸린다. 라탄 타타는 “잡음없이 정리해고가 진행됐다”며 “직원들을 거리로 내몰았다는 죄책감 같은 것은 없었다”고 회고했다.
타타 스틸도 비슷한 접근법을 취했다. 현재 타타 스틸의 인력은 4만1,000명에 불과하다. 1993~2004년 근로자 1인당 연간 철강 생산량은 78t에서 264t으로 급증했다. 이는 정리해고 덕만이 아니었다. 공장 업그레이드로 생산량이 늘고 제품 불량률은 줄었다.
그러나 다른 인도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타타 스틸도 고질적인 인프라 문제에 여전히 발목이 잡혔다. 타타 스틸 제철소에서 뭄바이까지 철강 1t을 운송하는 데 60달러가 들어간다. 뭄바이에서 미국 시카고와 중국에까지 실어 나르는 데는 각각 40달러?5달러가 든다. 그러나 치솟는 철강 가격 덕에 매출 26억 달러, 세후 순이익 3억8,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타타 그룹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현재 타타 스틸은 그룹의 대다수 기업과 마찬가지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무투라만은 “타타 스틸은 세계적인 기업이지만 규모 면에서는 얘기가 다르다”고 자평했다. 타타 스틸은 오는 2010년까지 연간 조강량을 현재의 3배인 1,500만t으로 늘릴 계획이다. 그래 봐야 한국 포스코의 절반, 세계 최대 철강업체 아르셀로르(Arcelor)의 33% 수준이다. 타타 스틸은 2009년 완공 목표로 인도 오리사주(州)에 연간 생산능력 600만t의 새 공장을 짓고 있다. 방글라데시의 한 제철소(연간 240만t)를 7억 달러에 인수할 계획도 갖고 있다. 지난해 4월 냇스틸 인수로 타타 스틸의 조강 능력은 200만t 늘었다. 이란과 우크라이나에서도 제철소 인수가 진행되고 있다.
철강이든 업무 지원 소프트웨어든, 심지어 차(茶)든 대담한 계획에는 리스크가 따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라탄 타타는 밀어붙였다. 타타 티(Tata Tea)는 2000년 4억3,000만 달러에 영국의 테틀리 티(Tetley Tea)를 인수했다. 그는 자신이 “타타 그룹에 지나치게 비판적인 사람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하지만 최고가 되려면 비판적인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라탄 타타는 이사의 정년을 70세로 못 박았다. 이제 그가 회장 자리에 앉아 있을 시간도 3년밖에 남지 않았다. 퇴직하면 취미인 비행기·헬기 조종을 즐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많아질 것이다.
라탄 타타는 건축설계에 대한 관심도 잃지 않았다. 그는 뭄바이에 있는 자신의 별장을 직접 설계했다. 최근에는 타타 자동차의 새 트렁크 밑그림도 그렸다. 회장에서 물러난 뒤 조그만 제품 디자인 회사를 세우겠다는 꿈이 있다. 오래전 인도로 호출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미국에서 디자인을 계속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라탄 타타가 꿈꾸는 것은 새로운 인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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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동북부 구릉지 위를 프로펠러 비행기로 스치듯 지나다 보면 야생 코끼리 ·호랑이 ·원숭이는 아니지만 논과 캐슈나무 ·번석류(蕃石榴) 농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 타타 그룹(Tata Group)의 대규모 철광석 광산 가운데 하나가 있다. 이 광산은 오랜 전통과 현금 보유액을 자랑하는 타타 스틸(Tata Steel)의 가치사슬이 시작되는 곳이다. 으리으리한 고층 빌딩, 섬광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증권거래소가 들어선 상업 중심지와 다른 인도의 옛 모습 그대로다.
옛 인도와 현대 인도라는 두 세계에 걸쳐 있는 인물이 포브스가 ‘2004 올해의 아시아 기업인’으로 선정한 라탄 타타(Ratan Tata ·67)다. 그가 거느리고 있는 가족경영 복합기업 타타 그룹(매출 143억 달러)은 ‘인도주식회사’의 어제와 오늘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지난 10여 년 사이 타타 그룹의 매출을 2배 이상 끌어올렸다. 싼 노동력과 기술을 접목시켜 어떤 강력한 경쟁업체와도 맞설 수 있는 현대 기업으로 이끌어 온 것이다.
인도 경제가 붐을 탄 덕에 타타 그룹의 전체 매출 가운데 77%가 여전히 내수시장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타타 그룹은 지난해 인도에서 벗어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한 네 번의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지난해 타타 스틸은 싱가포르의 철강업체 냇스틸(NatSteel)을 인수했다. 중국 ·호주 ·동남아시아 시장을 겨냥한 조치다.
타타자동차(Tata Motors)는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미국 주식예탁증서(ADR)를 상장했다. 한국의 트럭 제조업체 대우상용차도 인수해 중국 ·한국 ·태국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통신 ·인터넷 서비스업체 VSNL은 고속 데이터 네트워크로 세 대륙을 하나로 연결했다. 미국 타이코(Tyco)의 방대한 해저 케이블망을 인수하고 여기에 싱가포르와 인도 타밀나두주 마드라스를 잇는 링크까지 덧붙인 것이다. 타타 컨설턴시 서비시스(TCS)는 세계적인 아웃소싱 붐에 편승해 떠들썩한 기업공개(IPO)를 단행했다.
타타 그룹의 이런 움직임들은 53년 동안 회장직에 머물렀던 JRD 타타(J.R.D.Tata)가 라탄 타타에게 지휘봉을 건네준 1991년만 해도 생각지 못할 일이었다. JRD 타타는 86세에 물러나면서 먼 친척인 라탄 타타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능력을 발휘한 라탄 타타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당시 인도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라탄 타타가 그룹 회장으로 부임한 지 두 달 후 인도 재무 당국이 보유하고 있던 금을 연이은 차관에 대한 담보로 영국 런던에 실어나르는 굴욕적인 일도 있었다. 인도의 외환 보유액은 겨우 2주 동안 수입대금을 결제할 수 있는 수준까지 떨어졌다. 인도는 자립형 계획경제 체제로 굴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처럼 암울한 상황에 옛 소련까지 무너지면서 인도의 지도자들은 시대가 바뀌었음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타 그룹 사옥에도 옛 인도와 현대 인도의 모습이 뒤섞여 있다. 라탄 타타는 아침마다 전임자와 창업자 잠셋지 타타(Jamshetji Tata)의 흉상 옆을 지난다. 두 흉상은 사옥 ‘봄베이 하우스’의 로비를 굽어보고 있다. 봄베이 하우스는 뭄바이(옛 봄베이)의 유서 깊은 건축물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에 있는 회장실로 올라가면 인도의 현대 회화 작품으로 가득하다. 빨강 ·하양 ·검정 미니멀 장식으로 치장한 작품들은 어두운 원목 가구 ·놋쇠 비품 ·샹들리에와 대조적이다. 미국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라탄 타타는 62년 가족사업 경영을 위해 인도로 다시 호출되기 전까지 미국에서 잠시나마 건축업에 손대기도 했다.
타타 그룹은 수십 년 동안 거북이 행보를 보였다. 그 중에서도 ‘찬밥’신세였던 라탄 타타는 그룹 계열사들 가운데 가망 없어 보이는 곳만 맴돌았다. 그룹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가전 사업부에서 10년이나 썩었다. 그는 자신이 “문제 있는 업체를 바로잡는 일에만 투입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경험은 회장이 되기 위한 좋은 훈련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전임 회장이 라탄 타타에게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면 지금의 타타 그룹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탄 타타가 회장으로 지명됐을 당시 그룹 상황은 그야말로 ‘경악할’ 만했다.
라탄 타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얘기했다. “그룹은 경쟁 없는 환경에서 운영되고 있었다. 수년 동안 신규 진입이 막히다시피 한 무풍지대에서 사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룹 산하의 둔감한 기업들은 경쟁과 비용을 전혀 걱정하지 않고 새로운 기술도 모색하지 않았다.
상당수는 시장점유율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외부에 빗장이 열리자 주변 세계가 변했음을 알게 됐다. 그동안 세상과 동떨어진 경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탄 타타는 취임 후 ‘귀하신 몸’과 먼저 씨름해야 했다. 90개를 웃도는 타타 그룹 산하 기업들은 각기 다른 거물급이 경영하고 있었다. 대다수가 70세 이상인 그들은 회장의 지시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타타 그룹의 지주회사인 타타 선스(Tata Sons)는 당시만 해도 지분이 얼마 되지 않았다. 라탄 타타가 그나마 회장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전통 때문이었다.
그룹 내부에서 전면전이 전개됐다. 먼저 산하 수십 개 기업을 같은 방향으로 진군하게 해야 했다. 라탄 타타는 이를 위해 지주회사뿐 아니라 주요 계열사 총수로도 취임했다. 회장직을 회수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라탄 타타를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세력도 있었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그는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당시 죽쑤고 있던 타타 그룹 주식을 대거 사들였다.
라탄 타타는 연로한 거물 상당수가 개혁조치에 따르지 않자 사퇴를 강요했다. 그는 이들과의 충돌을 “여러 차례 총격전이 있었다”고 표현했다. 타타 스틸도 예외는 아니었다. 타타 스틸은 그룹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사업부 중 하나로 그룹의 가장 중요한 버팀목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라탄 타타가 타타 스틸에서 회장 수업을 쌓을 때와 달랐다. 인도가 영국 통치 아래 있던 1868년 잠셋지 타타는 무역회사를 세운 뒤 인도 최초로 제철소 설립에 나섰다.
그는 민족주의자로 인도가 산업화 ·자급자족,더 나아가 독립을 이룩하려면 철강 ·전기 생산 체제는 물론 기술교육 제도도 갖춰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인도인이라는 이유로 뭄바이의 한 호텔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적이 있다. 그 사건 이후 1902년 호화 호텔 체인 타지마할(Taj Mahal)을 설립했다. 잠셋지 타타가 타계한 뒤 유산 중 일부로 인도 최초의 대학인 인도과학대학(IIS)이 세워졌다. 그의 꿈 하나가 실현된 셈이었다.
인도는 철광석 매장량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나라다. 1904년 잠셋지 타타는 0.5루피에 제철소 건설 라이선스를 얻었다. 그리고 철광석이 매장된 거대한 구릉지 인근에 제철소를 세웠다. 1912년 이곳에서는 인도 최초로 철강이 생산됐다. 이 소도시는 나중에 잠셋지 타타의 이름을 따 잠셰드푸르(Jamshedpur)로 이름이 바뀌었다. 오늘날 타타 스틸이 생산단가가 매우 낮은 철강업체가 된 것은 철광석 광산 소유권 덕이다.
지난 93년 라탄 타타는 75세의 전 회장으로부터 타타 스틸을 인수받았다. 당시 타타 스틸의 자부심은 여전했지만 라탄 타타가 회장으로 취임한 뒤 개최한 첫 회의에서 그럴 만한 자격이 없음을 깨달았다.
1993~2004년 타타 스틸의 근로자 1인당 연간 철강 생산량은 78t에서 264t으로 급증했다. |
타타 스틸의 충격요법은 타타 그룹의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라탄 타타는 사외 컨설턴트들에게 실적이 형편없는 인도 업계 대신 해외 업계를 벤치마킹해달라고 요구했다. 타타 스틸은 산하에 대규모 업체를 6개나 거느리고 있었다. 타타 스틸의 B 무투라만(B. Muthuraman) 대표이사는 이렇게 술회했다. “컨설팅업체 아서 리틀(Arthur D. Little)이 타타 스틸을 0점으로 평가했다. 설비의 질이 낮고 공정도 형편없다. 인력이 너무 많고 마케팅도 잘못됐으며 세계 시장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정말 가혹한 평가였다.”
라탄 타타는 제너럴 일렉트릭의 잭 웰치(Jack Welch) 전 회장을 모방했다. 업계 1~3위 안에 들지 못하는 그룹 산하 기업은 매각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타타 스틸이 컨설팅업체 매킨지(McKinsey)의 ‘살생부’에 오른 것은 분명했다. 라탄 타타는 사석에서 컨설턴트들에게 “타타 그룹의 간판 기업인 타타 스틸을 매각할 수는 없다”며 “차라리 타타 그룹을 파는 게 낫다”고 발언했다. 그는 매킨지가 경영진에 불길한 소식들을 전하도록 했다. 라탄 타타는 “그 결과 약간의 긴장감을 조성할 수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전술은 먹혀들었다. 추가 비용 없이 생산량이 늘고 같은 해 말 손익분기점에 도달한 것이다. 몇 달 전 라탄 타타와 함께 한 오찬에서 경영진 모두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일이다.
그 뒤 타타 스틸은 23억 달러나 들여 노후한 공장을 폐쇄하는 대신 광산겙퍊제강소를 현대화하고 용광로를 신설했다. 타타 스틸은 또 다른 거대한 난관에 봉착했다. 7만9,000명에 이르는 인력을 줄이는 일이었다. 인도 법에 따라 정리해고가 어려운 데다 비용과 시간도 많이 들어간다.
라탄 타타는 가전업체를 되돌아봤다. 그는 “돈 먹는 TV 사업부에서 손떼기로 결정했을 때 한솥밥을 먹던 1,000명의 직원을 어떻게 내보내야 할지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라탄 타타는 당시 한 가지 아이디어를 짜냈다. 모든 퇴직 자원자에게 정년까지 지급할 급여를 당시 임금 수준으로 지급하겠다는 제안이었다. 인도에서는 임금에 주택 구입 보조금 ·정기 상승분 ·인플레 조정분이 포함되고, 조기 퇴직금을 지급하는 데만 3년이 걸린다. 라탄 타타는 “잡음없이 정리해고가 진행됐다”며 “직원들을 거리로 내몰았다는 죄책감 같은 것은 없었다”고 회고했다.
타타 스틸도 비슷한 접근법을 취했다. 현재 타타 스틸의 인력은 4만1,000명에 불과하다. 1993~2004년 근로자 1인당 연간 철강 생산량은 78t에서 264t으로 급증했다. 이는 정리해고 덕만이 아니었다. 공장 업그레이드로 생산량이 늘고 제품 불량률은 줄었다.
그러나 다른 인도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타타 스틸도 고질적인 인프라 문제에 여전히 발목이 잡혔다. 타타 스틸 제철소에서 뭄바이까지 철강 1t을 운송하는 데 60달러가 들어간다. 뭄바이에서 미국 시카고와 중국에까지 실어 나르는 데는 각각 40달러?5달러가 든다. 그러나 치솟는 철강 가격 덕에 매출 26억 달러, 세후 순이익 3억8,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타타 그룹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현재 타타 스틸은 그룹의 대다수 기업과 마찬가지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무투라만은 “타타 스틸은 세계적인 기업이지만 규모 면에서는 얘기가 다르다”고 자평했다. 타타 스틸은 오는 2010년까지 연간 조강량을 현재의 3배인 1,500만t으로 늘릴 계획이다. 그래 봐야 한국 포스코의 절반, 세계 최대 철강업체 아르셀로르(Arcelor)의 33% 수준이다. 타타 스틸은 2009년 완공 목표로 인도 오리사주(州)에 연간 생산능력 600만t의 새 공장을 짓고 있다. 방글라데시의 한 제철소(연간 240만t)를 7억 달러에 인수할 계획도 갖고 있다. 지난해 4월 냇스틸 인수로 타타 스틸의 조강 능력은 200만t 늘었다. 이란과 우크라이나에서도 제철소 인수가 진행되고 있다.
철강이든 업무 지원 소프트웨어든, 심지어 차(茶)든 대담한 계획에는 리스크가 따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라탄 타타는 밀어붙였다. 타타 티(Tata Tea)는 2000년 4억3,000만 달러에 영국의 테틀리 티(Tetley Tea)를 인수했다. 그는 자신이 “타타 그룹에 지나치게 비판적인 사람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하지만 최고가 되려면 비판적인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라탄 타타는 이사의 정년을 70세로 못 박았다. 이제 그가 회장 자리에 앉아 있을 시간도 3년밖에 남지 않았다. 퇴직하면 취미인 비행기·헬기 조종을 즐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많아질 것이다.
라탄 타타는 건축설계에 대한 관심도 잃지 않았다. 그는 뭄바이에 있는 자신의 별장을 직접 설계했다. 최근에는 타타 자동차의 새 트렁크 밑그림도 그렸다. 회장에서 물러난 뒤 조그만 제품 디자인 회사를 세우겠다는 꿈이 있다. 오래전 인도로 호출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미국에서 디자인을 계속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라탄 타타가 꿈꾸는 것은 새로운 인도의 모습이다.
IT 아웃소싱 업계의 ‘숨은 별’ |
가족경영 제국 타타 그룹에서 오랫동안 조용한 스타로 머물고 있는 타타 컨설턴시 서비시스(TCS)는 인도의 정보기술(IT) 아웃소싱 전문 대기업 3곳 가운데 가장 알려지지 않은 기업이다. 최근 연간 매출 16억 달러를 기록한 TCS는 미국 증시에 상장돼 한창 주가가 오르고 있는 인도의 IT 업체 인포시스(Infosys)겴㎸족?Wipro)보다 규모가 크다. 지난 68년 설립된 TCS는 인도의 소프트웨어 서비스 부문을 주도해 왔다. TCS의 엔지니어 3만7,000명은 인도 증시에서 사용하고 있는 전자거래 시스템과 세계 전역에서 은행 고객들이 이용하는 온라인 요금 결제 시스템을 구축했다. 외부에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TCS의 대표적인 인물이 수브라마니안 라마도라이(Subramanian Ramadorai?9겭瑩?다. 라마도라이는 72년 엔지니어로 입사해 96년 CEO에 올랐다. 요즘 TCS가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지난해 8월 TCS는 인도의 민간 상장기업 가운데 시가총액이 가장 컸다. 그러나 투자자들 사이에서 구글 못지않게 관심을 끈 TCS 기업공개(IPO) 당시 유동주 ·시장에서 언제든 매매할 수 있는 주식) 비율은 13%였다. 인도 기업이 해외 증시에 상장하려면 반드시 인도 증시에 먼저 상장해야 한다. 유럽이나 미국 증시 상장은 이듬해 이뤄지는 게 보통이다. TCS의 시가총액은 140억 달러다. TCS는 타타 그룹의 상장 기업 32개를 모두 합친 시장가치 중 45%나 차지하며 그룹에서 이익률이 가장 높은 업체다. TCS는 지난 5년간 연평균 매출증가율 30%를 기록했다. 피로즈 반드레발라(Phiroz Vandrevala) 부사장은 성장세가 계속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TCS는 여기서 만족할 수 없다. 카라무지스는 경쟁업체 가운데에서도 특히 위프로 ·인포시스가 TCS와 벌어진 간극을 좁히며 추격해오고 있다고 전했다. 위프로와 인포시스 모두 연간 매출이 10억 달러를 훌쩍 넘는 데다 마케팅 역량은 TCS보다 강하다. TCS는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TCS가 비교우위를 갖고 있는 부문은 관급 하도급이다. TCS는 지난 5년 동안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프로젝트를 맡아 오고 있다. 그 중 하나가 펜실베이니아 주립 교도소 수감자들의 심리분석 파일과 판결 정보를 추적하는 일이다. 뉴멕시코주에서는 실직자 현황을 조사한다. 전자는 연간 600만 달러, 후자는 3년간 900만 달러 규모다. 영국에서는 TCS의 생명과학 사업부가 IT 서비스 업체들로 이뤄진 한 컨소시엄에 참여하고 있다. 영국 국가의료제도(NHS)의 일부 환자 병력(病歷)을 전산처리하는 컨소시엄 회원사 가운데는 후지쓰 서비시스(Fujitsu Services)와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ricewaterhouseCoopers)도 포함돼 있다. 계약 규모는 16억 달러다. 반드레발라는 TCS가 클레임 처리 솔루션 같은 고수익 범주 ·프로젝트에 계속 성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클레임 처리 솔루션의 경우 한 건에 1,500만~2,000만 달러 규모가 될 수도 있다. TCS의 성장 여부는 향후 실적으로 판가름날 것이다. 반드레발라는 “앞으로 몇 달 뒤면 TCS의 소식을 더 많이 접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 Susan Kitchens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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