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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고령화 시대 업계 판도가 바뀐다

저출산·고령화 시대 업계 판도가 바뀐다

출산율 저하로 조제분유 시장이 줄고 있다. 주부들이 분유를 사고 있다.
장사를 하려면 고객을 알아야 한다. 이런 이치는 구멍가게부터 대기업까지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최근 불거지고 있는 ‘출산율 감소’ ‘고령화 사회 진입’ 등은 기업들에는 밥그릇이 줄어든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민감한 기업들은 벌써 이런 추세에 대응하고 있다. 지난 2월 2일 오후 4시 롯데백화점 잠실점 3층. 매장 한쪽의 숙녀복 코너에서 중년 여자 두 명이 옷을 고르고 있다. 이것저것 입어 보다 스웨터 하나를 골라 쇼핑백에 담은 뒤 카드로 결제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아주머니다. 하지만 이들은 손자·손녀가 있는 60대 초반의 할머니라고 이 매장 점원은 귀띔해 줬다. 1995년부터 ‘실버들을 위한 패션’을 표방하고 있는 부인복 브랜드 ‘리베도’의 주관득 영업담당 이사는 “90년대까지만 해도 자녀들이 부모를 모시고 와 옷을 사드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에는 친구나 부부끼리 직접 와서 옷을 사가는 경우가 더 많다”며 최근 바뀐 실버세대의 구매력에 대해 설명했다. 주 이사는 “실버패션의 경우 백화점 시장만 연간 1000억원 규모는 될 것”이라며 “최근 2~3년간 꾸준한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버패션 7년 새 3배 매출 실버세대의 구매력이 시장에서 위력을 발하고 있는 징후는 곳곳에서 나타난다. 98년부터 롯데백화점에서 실버패션 매입을 담당해온 김재홍 과장은 “7년 전에 불과 150억원의 매출을 올리던 실버패션이 지난해에는 40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고 말했다. 최근 백화점의 매출 감소세를 감안하면 두드러진 성장이다. 고객 연령도 7년 전 평균 55세에서 지금은 평균 64세로 높아졌다. 구매력 있는 실버들이 점점 늘고 있다는 얘기다. 김 과장은 “지난해 부인복 매출이 10.7% 감소한 반면 실버패션은 10% 정도 성장했다”며 “백화점에서는 향후 실버 패션의 전망을 밝게 보고 있다”고 밝혔다. 실버산업의 단초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여행 상품 중에는 실버층을 타깃으로 내 놓은 상품이 이미 여럿 있다. 코리아월드트레블은 2001년부터 ‘실버투어’ 상품을 개발해 판매해 오고 있다. 55세 이상만 이용할 수 있는 이 상품은 지금까지 2000명이 이용한 대표적인 실버상품이다. 이 회사의 고은혜 마케팅 팀장은 “원래 여행은 은퇴자나 실버들이 주 고객층”이라면서 “이 상품은 그중에서도 나이를 실버층에 맞추고 그들에게 맞는 특화된 서비스를 제공해 인기를 끌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회사 외에도 하나투어·와우효도 등이 비슷한 상품을 내놓고 있다. 여행업계에서는 “앞으로 10년 정도 지나면 실버여행 시장은 지금보다 10배 이상 성장할 수 있다”고 내다보고 있다. 지금은 자식들이 돈을 모아 여행을 보내주는 경우가 많지만 현재 40, 50대들이 실버세대가 되는 10년 후에는 자기 돈으로 여가를 즐기는 사람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아직은 성공적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작긴 하지만 실버타운도 향후 실버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평가된다. 송도병원을 기반으로 하는 서울시니어스타워는 서울 약수동과 발산동, 경기도 분당 등지에 실버타운을 건립해 운영하고 있다. 경기도 기흥에 2001년 개원한 삼성노블카운티도 성공적인 실버타운의 사례로 꼽힌다. 이들 시설에는 방마다 공기 순환장치와 건강관리 센서가 부착돼 있고, 수영장·월풀 사우나·가라오케 등 각종 편의·오락시설이 구비돼 있다. 또 정기적인 건강검진 등 노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강관리 서비스도 제공된다. 문제는 돈이다. 보통 수억원에 이르는 분양금이나 보증금 등이 필요해 일부의 실버만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다. 지금까지 실버산업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것은 사실상 실버산업에 맞는 소비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버 세대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60대의 경우 국민연금이나 개인연금 등 각종 연금 제도가 발달하기 전에 은퇴한 세대다. 당연히 일부 부유층 외에는 매달 쓸 수 있는 가처분 소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이르면 10년, 늦어도 20년 내에는 확 바뀔 전망이다.

구매력 있는 실버 10년 내 등장 88년 시작된 뒤 99년 도시지역 주민으로까지 확대된 국민연금의 수혜자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려면 최소 5~10년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예상 연금액이 갈수록 낮아지면서 국민연금이 노후 생활자금으로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은퇴한 노인에게 매달 지급되는 현금이 나올 경우 노인층의 소비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여기에 94년부터 실시된 개인연금 제도의 첫 수혜자가 지난해에 나왔다. 금융기관에서 파는 개인연금의 경우 10년 이상 납부한 55세 이상의 가입자에게 연금을 지급하기 때문에 향후 10년 정도 지나면 본격적인 연금 수혜자가 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푸르덴셜생명보험의 오종윤 라이프플래너(CFA)는 “200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가입자가 늘어난 개인연금 상품의 수혜자인 40, 50대들이 실버층으로 편입될 경우 구매력을 갖춘 실버 소비자들이 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해 말 금융권별 가입금 잔액은 생명보험이 13조7854억원(49.1%)으로 가장 많고 은행 9조1345억원(32.5%), 손해보험 4조880억원(14.5%), 투신 1조976억원(3.9%) 순이다. 이 잔액 중 일부가 노년층으로 흘러들어 가게 되면 돈을 쓰는 실버 세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실버 산업이 비즈니스 태동 단계라면 출산이나 유아 관련 산업은 몸집을 줄여가는 형국이다. 이미 많은 업체들이 기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특히 상대적으로 시장지위가 탄탄한 1등 기업보다는 2, 3등 기업에서 발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수요층 자체가 줄어들 경우 1등 이외의 기업부터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줄어든 시장에서 1등과 더 격렬한 경쟁을 하는 것보다 새로운 기회를 만드는 것이 후발주자로서 역전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분유 회사들 “음료로, 음료로” 남양유업과 함께 분유업계의 양강으로 꼽히는 매일유업은 산모용 건강음료 출시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올해 하반기에 출시될 한방 건강음료에 이어 점차 당뇨병·콜레스테롤 등 성인병 음료로 제품을 확대할 계획이다. 매일유업의 홍종일 이사는 “일단 분유 등 기존 분야에서 CRM 등을 강화해 고객 충성도를 높일 계획이지만 새로운 분야 제품을 개발해 저출산에 대비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매일유업은 이미 당뇨 등 성인병 음료의 경우 임상시험을 하고 있다. 김용기 유아식품 팀장은 “이미 물량 기준으로는 2000년대 들어오면서 분유시장이 꺾였다”면서 “고급화와 다각화 등 다양한 대응을 하지만 회사 내에 위기감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한방음료·성인음료 등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제품 개발뿐 아니라 유아 이유식 노하우를 활용해 노인을 위한 제품을 만드는 것 등도 아이디어 차원에서 검토되고 있다. 고령화에 저출산이 급속도로 진행되다 보니 유아 분유 전문회사가 노인을 위한 제품을 만들어내는 시대까지 된 것이다. 비단 매일유업뿐 아니라 많은 분유·우유 회사가 주스·커피 시장 등에 진출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인구 변화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분유업계 양강인 남양유업도 줄어드는 분유 시장의 하락세를 감안해 발효유 시장과 음료 시장을 적극 공략해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다. 남양유업은 올해 음료 사업 매출 목표를 1500억원으로 대폭 늘려잡고 영업망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해 남양유업의 음료 사업 매출은 1100억원. 전체 매출액의 15% 수준인 음료 비중을 올해 20%까지 높여 음료 제조업체 5위권에 진입하는 게 목표다. 남양유업 성장경 상무는 “80년대 80%를 웃돌았던 분유 판매 비중이 이제는 20%대까지 떨어졌다”며 “발효유 음료 등 다른 품목의 판매를 늘리는 데 힘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유아복 업계도 출산율 감소에 맞춰 지난해부터 대대적으로 ‘방향 전환’에 나서고 있다. 0∼3세를 위한 유아복과 유아용품을 만들던 업체들이 점점 아동복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다. 더 이상 신규고객은 만들기가 어려워지는 데 따라 아동으로 자라나는 기존 고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회사 변신도 시도하자는 것이다. 아가방은 지난해부터 각 브랜드에 4∼6세까지(토들러)의 아동복 제품을 추가하고 있다. ‘엘르뿌뽕’ ‘애뜨와’ 등 다른 유아 전문 브랜드도 4∼6세 제품을 선보였다. 아가방은 브로슈어나 카탈로그 등에도 갓난아기 대신 4∼6세 어린이 모델을 등장시키고 있다. 아가방의 유형우 마케팅 이사는 “70년대에 100만명 수준이던 연간 출생인구가 지난해 49만명으로 줄었다”면서 “아기용품이나 아기옷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저출산이 외식·육아 산업 키울 것” 유아복 시장의 이런 경향은 이미 대세로 굳어지고 있다. ‘해피랜드’ ‘파코라반베이비’ 등의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EFE도 지난해 ‘리바이스키즈’브랜드의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해 올 가을부터 아동복을 선보인다. ‘쇼콜라’를 인수한 보령메디앙스도 올해 미국의 유명 아동복 브랜드인 ‘오시코시비고시’를 론칭할 계획이다. 오시코시비고시는 토들러는 물론 14∼15세인 주니어까지 제품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유아복 업체의 전반적인 방향이다. 출산율 하락으로 신규 소비자 유입에 한계가 온 것이 원인이다. 출산율 저하와 고령화는 산부인과의 비즈니스 행태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과거에는 출산 자체가 산부인과의 주된 업무였다면 이제는 출산과 관련된 비즈니스가 늘고 있다. 제대혈 보관, 인공수정, 불임클리닉, 산후조리원 등 출산 전후로 각종 비즈니스들이 발달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의학기술 발달과도 관련이 있지만 저출산에 따른 고객들의 소비행태 변화로도 볼 수 있다. 차병원의 이민호 팀장은 “저출산으로 산부인과의 경우 특화 진료 과목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면서 “병원들이 서비스를 개선하고 고급화·대형화되는 것은 출산율이 떨어지면서 경쟁이 치열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최숙희 수석연구원은 “인구 구조가 변하면 처음에는 유아산업과 실버산업에만 영향을 미치겠지만 점차 금융산업과 건강·웰빙산업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은퇴 후 생존 기간이 늘어나면서 금융산업도 자산관리 위주로 바뀔 것이라는 얘기다. 최 연구원은 또 “저출산이 계속돼 인구가 줄면 노동력도 감소하게 되고 이는 여성 노동력의 확충으로 이어진다”면서 “이렇게 되면 집안일과 관련된 서비스업도 급팽창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외식산업이나 육아산업 등이 급팽창할 수 있다는 얘기다. 고객의 변화에 따라 비즈니스가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징후를 일찍 감지한 기업들은 벌써 몸을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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