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소비자에게 물어보라
먼저 소비자에게 물어보라
자동차든, 장난감이든, 패스트푸드든 기업이 신제품을 선보이기 전 소비자들에게 먼저 물어보는 사례가 많아졌다.
제너럴 모터스(GM)는 올 봄 스포츠 유틸리티 차량(SUV) 허머 H3(Hummer H3)를 선보인다. 허머 H3는 다른 신차와 달리 운전자들의 의견이 설계에 반영됐다. 2001년 6월 GM은 소비자들의 의견을 직접 들어보기 위해 캘리포니아주 남부에 있는 텅 빈 박람회장 건물로 운전자 481명을 초대했다. 운전자들은 H3의 초벌 모델 6가지를 평가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들은 사흘에 걸쳐 5개 집단으로 나뉘어 초대됐다. 디자이너들은 H3의 내장과 외장 스케치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커튼 뒤에서 열심히 받아 적었다. GM의 디자인 담당 존 앨버트(Jon Albert)는 “설계를 어느 정도까지 개선할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고 말했다.
초대받은 소비자들은 숱한 개선사항을 주문했다. 그들은 다임러크라이슬러의 지프 체로키(Jeep Cherokee), GM의 시보레 블레이저(Chevrolet Blazer) 같은 SUV를 이미 소유하고 있어 허머에 관심이 많았다. 미군 전투 차량을 민수용으로 개발한 SUV치고는 전면이 너무 ‘귀엽다’는 의견도 있었다. 몇몇은 그릴이 지프 체로키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GM으로서는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임러크라이슬러가 H2 그릴이 지프 체로키를 모방한 것이라며 고소했기 때문이다. GM의 디자이너들은 소비자들의 의견이 반영된 디자인을 이튿날 다른 집단에 보여줬다. GM의 시장조사 담당 짐 로크리(Jim Lochrie)는 “옛날 같았으면 몇 달 걸릴 일이 지금은 며칠 만에 끝난다”고 말했다.
소비자들은 3만 달러가 넘는 H3에서 몇몇 변화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며칠 동안 소비자와 디자이너 사이에 오간 의견이 반영된 결과다. 그릴이 축소되면서 좀더 강인한 인상을 주는 대신 지프 체로키 냄새는 덜해졌다. 헤드라이트가 좀더 평평해지면서 세단 크기의 H3도 당당한 위용을 갖췄다. 도어에 약간의 세공을 가미해 단조로운 느낌도 사라졌다.
허머의 판매가 고객들 안목에 힘입어 호전될 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시장조사업체 JD파워 앤 어소시에이츠(J.D. Power & Associates)는 지난해 H2 매출이 28% 줄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고객 참여에 반대하던 일부 임원이 생각을 바꾼 것은 사실이다. GM은 이런 접근법으로 설계에서 출시까지 걸리는 시간을 6개월로 단축하고 수백만 달러도 절감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업이 아마추어들에게 자사 제품을 디자인하도록 유도하는 게 옳은 일일까. 하지만 일리는 있다. 기업들은 자동차 ·보험상품 · 패스트푸드 ·완구 ·가전에 대한 아이디어를 소비자에게 얻고 있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일지 모르지만 생산주기를 단축하고 신상품의 높은 실패율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이다. 올해 미국 시장에 쏟아져 나올 3만6,000개 이상의 신상품 가운데 80%가 실패작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고객의 의견을 참고하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도 그랬다. 인터넷과 군소 컨설팅업체의 등장으로 소비자 의견 청취가 어느 때보다 쉬워졌다. 컨설팅업체들은 응답자를 선별하고 소비자가 디자인 제작이나 변경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시제품을 구현해 보이는 소프트웨어도 만든다. 이로써 기업은 소비자에게서 얻은 데이터를 즉각 분류 ·평가할 수 있다. 신제품에 관해 토의할 소비자 그룹이 디지털 시대를 만난 것이다.
가전업체 월풀(Whirlpool)은 소비자들의 온라인 커뮤니티를 활용한다. 소비자들은 PC로 가전제품의 새로운 가상 디자인을 변경하고 월풀에 아이디어도 제안할 수 있다. 컨설팅업체 스미스 다머 어소시에이츠(Smith-Dahmer Associates)의 조앤 스미스(Joan Smith) 사장은 조사 시간을 한 달 정도 줄이고 비용도 최소 30%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프랑스 파리 소재 식료품 제조업체 다논 그룹(Groupe Danone)의 계열사인 다논 USA(Dannon USA)는 2003년 8월 소비자 의견 청취에 나섰다. 당시 다논의 저지방 요구르트 라이튼 핏(Light’n Fit)이 경쟁 제품들로부터 큰 압박을 받고 있었다. 뉴욕주 화이트플레인스 소재 다논 USA의 시장조사 담당 패트리샤 피로 펠드버그(Patricia Pirro-Feldberg)는 제품이 갖춰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 빨리 파악해야 했다.
그녀는 매사추세츠주 월샘에 있는 제품 개발 기술 관련 솔루션 제공업체인 아피노바(Affinnova)에 도움을 요청했다. 아피노바는 소비자 4만 명에게 e메일을 발송했다. 신상품 개발을 도와 달라며 설문 응답자들에게 총 1만 달러의 상금도 약속했다. 응답률은 11%였는데, 그 중 705명에게서 제대로 된 답변을 얻어냈다. 다논은 식이요법에 관심이 많은 요구르트 소비자들 특히 주부들을 찾았다. 아피노바는 제품명 ·용기 디자인 ·성분 표시 ·용기 크기 등을 조합한 다양한 견본을 제시해 의견을 들었다. 그리고 가장 많이 선택된 특징들을 재조합했다. 더 많은 사람이 테스트에 참가하면서 내용도 바뀌었다. 이윽고 가장 인기 있는 조합이 결정됐다.
인터넷으로 이뤄진 테스트에 걸린 기간은 6일이다. 프로젝트가 끝날 무렵 아피노바는 제품명을 ‘카브 컨트롤(Carb Control)’로 정했다. 붉은 용기에 4온스(110g)짜리 컵 4개를 함께 담으라고 권했다. ‘설탕을 80% 줄이고 탄수화물이 3g’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테스트가 시작된 지 6개월 만에 신상품이 선보였다. 피로 펠드버그는 “신제품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고 전했다. 지난해 11월 28일까지 52주 동안 신제품 매출은 7,050만 달러에 이르렀다.
완구 제조업체 RC2는 다른 접근법을 취했다. 일리노이주 오크브룩에 있는 RC2는 수년 동안 성인용 모형 레이싱 카를 제조해 왔으며 99년부터 아동용 ·유아용 만들기 시작했다. RC2는 유아 정보를 더 얻기 위해 매사추세츠주 워터타운 소재 커뮤니스페이스(Communispace)가 관리하는 자문 집단에 소속된 엄마와 아이들의 도움을 받았다. 올해 RC2는 장난감 ·소매 프로그램을 통해 무려 250가지 사항을 결정한다.
그때마다 뉴저지주 이스트브런즈윅에 사는 나이디 탠던(34) 같은 주부들이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이들 소비자는 지난해 RC2의 25개 신제품을 심사했다. 이들은 지난해 7월에 출시된 남아용 자석 블록쌓기 장난감인 클릭 브릭스(Click Bricks) 디자인에 한몫했다. 지난해 2월 주부 150명이 인터넷을 통해 클릭 브릭스의 색상을 비평했다. 이후 RC2는 주부들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3차원 시제품들을 만들어 그 가운데 30명에게 보냈다.
주부들은 2~4세인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이들은 아이가 언제, 어떻게, 몇 차례나 플라스틱 블록을 갖고 놀았는지 2주 동안 꼼꼼히 기록했다. 게다가 RC2에서 보내준 일회용 카메라로 아이가 노는 장면을 찍어 보냈다. RC2는 상품명 ·가격 ·포장에 대한 의견도 물었다. 탠던은 색상이 더 밝았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그녀는 “엄마라면 색상이 선명치 않은 장난감을 고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RC2는 엄마들의 의견을 제품에 반영했다. 그리고 블록의 모양?개수를 늘리고 질감도 가미했다. 이런 식으로 RC2는 제품 생산까지 걸리는 시간을 8주 앞당길 수 있었다. RC2의 CEO 커티스 스톨팅(Curtis Stoelting)은 “2~3년 전만 해도 테스트 없이 제작했다”며 “외부 의견을 참고하지 않은 채 출시했다면 더 많은 실수가 나타났을 것”이라고 만족스러워했다.
그렇다면 소비자가 항상 옳은 걸까. GM의 시장조사 담당 제프리 하틀리(Jeffrey Hartley)는 디자인 부문 책임자였던 제리 파머(Jerry Palmer)에 관한 일화를 들려줬다. 파머는 소비자에게 의견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바보 같은 짓이라고 여겼다. 그는 “차라리 소비자에게 직접 디자인을 맡기라”며 발끈했다. 하지만 마지못해 ‘실험적인’ 프로젝트에 동의했다.
생활용품 제조업체 유니레버(Unilever)의 임원진은 보디 스프레이 액스(Axe) 광고를 젊은 소비자들에게 먼저 심사하게 한 뒤 잡지에 싣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유니레버에서 향수 사업부 부사장으로 일하는 에스더 렘(Esther Lem)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젊은이들과 자주 접촉한다. 젊은 남성들이 겨드랑이털을 드러낸 선정적인 광고에 매료된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마케팅 담당 사장과 최고운영책임자(COO)가 한마디씩 했지만 렘은 “일에 관여하지 말라”며 “중요한 것은 젊은 소비자들의 의견”이라고 버텼다. 렘의 판단은 옳았다.
소비자들이 기업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경우도 있다. 패스트푸드 업체 욤 브랜즈(Yum Brands)의 타코 벨(Taco Bell) 사업부는 인기 좋은 부리토(burrito ·고기와 치즈를 옥수수빵으로 말아 구운 멕시코 요리)를 만들기 위해 소비자들에게 물었다. 소비자들은 ‘건강에 이로운’ 부리토를 원했다. 타코 벨은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컨설팅업체 소크래틱 테크놀로지스(Socratic Technologies)의 도움으로 e메일 1만200통을 발송했다. 최종 선발된 소비자 1,155명은 세 종류의 닭과 11가지의 소스 등으로 이뤄진 10가지 재료에서 선택했다. 택한 재료를 혼합해 요리하는 장면이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으로 재현됐다. 소크래틱은 가장 인기 있는 혼합을 찾아냈다. 그리고 몇 주 후 결과를 타코 벨에 보냈다.
타코 벨의 영양사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응답자 대다수가 저칼로리 부리토 대신 치즈를 세 차례나 입힌 고칼로리 부리토에 눈을 돌린 것이다. 가격도 상관하지 않았다. 타코 벨의 소비자 동향 담당 데브라 카사리얀(Debra Kassarjian)은 “애초 2달러짜리 부리토를 생각했지만 20센트 더 얹은 가격으로도 팔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때로 소비자가 재앙을 미리 막아줄 수 있다. 보험사 스테이트 팜(State Farm)은 최근 안전 운전자의 보험요율을 깎아주자는 아이디어에 대한 의견을 자사가 운영하는 새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물었다. 대신 고객은 차에 ‘블랙 박스’를 장착하도록 했다. 고객들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운전하는지 감시당할 것을 염려했다. 스테이트 팜의 리서치 담당 낸시 암스트롱(Nancy Armstrong)은 “고객이 사생활 침해로 간주하며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아피노바의 CEO 데이비드 안도니안(David Andon-ian)은 “소비 대중의 의견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면서도 “하지만 어느 정도 한계는 있다”고 지적했다.
소비자들의 반응을 정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e메일로 들어온 응답 가운데 필요 없는 내용은 걸러내야 한다. 많은 소비자를 참여시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월샘에 있는 시장조사업체 어플라이드 마케팅 사이언스(AMS)는 매사추세츠공과대(MIT)의 슬론 경영대학원과 손잡고 웹 툴을 개발했다. 아이디어 창안 과정을 흥미진진한 게임으로 바꾸는 툴이다. 게임에서 다른 참가자들의 제안을 응용하면 현금이나 현물로 바꿀 수 있는 점수가 주어진다.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특수 인쇄기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마크 앤디는 최근 AMS 프로그램을 활용해 수축 포장용 라벨 인쇄에 대한 소비자의 의견을 구했다.
조사 과정에서 얻은 아이디어나 제품 혹은 서비스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응답자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컬럼비아대학 경영대학원의 조교수 올리비에 투비아는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고 참가자들로부터 지적재산권과 관련해 동의도 받아내야 한다”고 충고했다. 대다수 기업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까.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제품개발 업체 세컨드에디슨(2ndEdison)의 창업자 크리스 브래들리(Chris Bradley)는 프로듀서 마이클 호프와 함께 TV쇼를 제작하고 있다. 제품이 안고 있는 일상적인 문제들을 생산업체가 시청자의 도움으로 해법을 찾을 수 있도록 모색하는 프로그램이다.
할리우드는 영화의 결말을 팬들이 택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TV 시리즈물의 등장인물들 운명이 시청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과 유사하다.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활동할 무렵 e메일이 있었다면 그 역시 더 많은 독자에게 의견을 물었을 것이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너럴 모터스(GM)는 올 봄 스포츠 유틸리티 차량(SUV) 허머 H3(Hummer H3)를 선보인다. 허머 H3는 다른 신차와 달리 운전자들의 의견이 설계에 반영됐다. 2001년 6월 GM은 소비자들의 의견을 직접 들어보기 위해 캘리포니아주 남부에 있는 텅 빈 박람회장 건물로 운전자 481명을 초대했다. 운전자들은 H3의 초벌 모델 6가지를 평가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들은 사흘에 걸쳐 5개 집단으로 나뉘어 초대됐다. 디자이너들은 H3의 내장과 외장 스케치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커튼 뒤에서 열심히 받아 적었다. GM의 디자인 담당 존 앨버트(Jon Albert)는 “설계를 어느 정도까지 개선할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고 말했다.
초대받은 소비자들은 숱한 개선사항을 주문했다. 그들은 다임러크라이슬러의 지프 체로키(Jeep Cherokee), GM의 시보레 블레이저(Chevrolet Blazer) 같은 SUV를 이미 소유하고 있어 허머에 관심이 많았다. 미군 전투 차량을 민수용으로 개발한 SUV치고는 전면이 너무 ‘귀엽다’는 의견도 있었다. 몇몇은 그릴이 지프 체로키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GM으로서는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임러크라이슬러가 H2 그릴이 지프 체로키를 모방한 것이라며 고소했기 때문이다. GM의 디자이너들은 소비자들의 의견이 반영된 디자인을 이튿날 다른 집단에 보여줬다. GM의 시장조사 담당 짐 로크리(Jim Lochrie)는 “옛날 같았으면 몇 달 걸릴 일이 지금은 며칠 만에 끝난다”고 말했다.
소비자들은 3만 달러가 넘는 H3에서 몇몇 변화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며칠 동안 소비자와 디자이너 사이에 오간 의견이 반영된 결과다. 그릴이 축소되면서 좀더 강인한 인상을 주는 대신 지프 체로키 냄새는 덜해졌다. 헤드라이트가 좀더 평평해지면서 세단 크기의 H3도 당당한 위용을 갖췄다. 도어에 약간의 세공을 가미해 단조로운 느낌도 사라졌다.
허머의 판매가 고객들 안목에 힘입어 호전될 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시장조사업체 JD파워 앤 어소시에이츠(J.D. Power & Associates)는 지난해 H2 매출이 28% 줄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고객 참여에 반대하던 일부 임원이 생각을 바꾼 것은 사실이다. GM은 이런 접근법으로 설계에서 출시까지 걸리는 시간을 6개월로 단축하고 수백만 달러도 절감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업이 아마추어들에게 자사 제품을 디자인하도록 유도하는 게 옳은 일일까. 하지만 일리는 있다. 기업들은 자동차 ·보험상품 · 패스트푸드 ·완구 ·가전에 대한 아이디어를 소비자에게 얻고 있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일지 모르지만 생산주기를 단축하고 신상품의 높은 실패율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이다. 올해 미국 시장에 쏟아져 나올 3만6,000개 이상의 신상품 가운데 80%가 실패작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고객의 의견을 참고하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도 그랬다. 인터넷과 군소 컨설팅업체의 등장으로 소비자 의견 청취가 어느 때보다 쉬워졌다. 컨설팅업체들은 응답자를 선별하고 소비자가 디자인 제작이나 변경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시제품을 구현해 보이는 소프트웨어도 만든다. 이로써 기업은 소비자에게서 얻은 데이터를 즉각 분류 ·평가할 수 있다. 신제품에 관해 토의할 소비자 그룹이 디지털 시대를 만난 것이다.
가전업체 월풀(Whirlpool)은 소비자들의 온라인 커뮤니티를 활용한다. 소비자들은 PC로 가전제품의 새로운 가상 디자인을 변경하고 월풀에 아이디어도 제안할 수 있다. 컨설팅업체 스미스 다머 어소시에이츠(Smith-Dahmer Associates)의 조앤 스미스(Joan Smith) 사장은 조사 시간을 한 달 정도 줄이고 비용도 최소 30%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프랑스 파리 소재 식료품 제조업체 다논 그룹(Groupe Danone)의 계열사인 다논 USA(Dannon USA)는 2003년 8월 소비자 의견 청취에 나섰다. 당시 다논의 저지방 요구르트 라이튼 핏(Light’n Fit)이 경쟁 제품들로부터 큰 압박을 받고 있었다. 뉴욕주 화이트플레인스 소재 다논 USA의 시장조사 담당 패트리샤 피로 펠드버그(Patricia Pirro-Feldberg)는 제품이 갖춰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 빨리 파악해야 했다.
그녀는 매사추세츠주 월샘에 있는 제품 개발 기술 관련 솔루션 제공업체인 아피노바(Affinnova)에 도움을 요청했다. 아피노바는 소비자 4만 명에게 e메일을 발송했다. 신상품 개발을 도와 달라며 설문 응답자들에게 총 1만 달러의 상금도 약속했다. 응답률은 11%였는데, 그 중 705명에게서 제대로 된 답변을 얻어냈다. 다논은 식이요법에 관심이 많은 요구르트 소비자들 특히 주부들을 찾았다. 아피노바는 제품명 ·용기 디자인 ·성분 표시 ·용기 크기 등을 조합한 다양한 견본을 제시해 의견을 들었다. 그리고 가장 많이 선택된 특징들을 재조합했다. 더 많은 사람이 테스트에 참가하면서 내용도 바뀌었다. 이윽고 가장 인기 있는 조합이 결정됐다.
인터넷으로 이뤄진 테스트에 걸린 기간은 6일이다. 프로젝트가 끝날 무렵 아피노바는 제품명을 ‘카브 컨트롤(Carb Control)’로 정했다. 붉은 용기에 4온스(110g)짜리 컵 4개를 함께 담으라고 권했다. ‘설탕을 80% 줄이고 탄수화물이 3g’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테스트가 시작된 지 6개월 만에 신상품이 선보였다. 피로 펠드버그는 “신제품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고 전했다. 지난해 11월 28일까지 52주 동안 신제품 매출은 7,050만 달러에 이르렀다.
완구 제조업체 RC2는 다른 접근법을 취했다. 일리노이주 오크브룩에 있는 RC2는 수년 동안 성인용 모형 레이싱 카를 제조해 왔으며 99년부터 아동용 ·유아용 만들기 시작했다. RC2는 유아 정보를 더 얻기 위해 매사추세츠주 워터타운 소재 커뮤니스페이스(Communispace)가 관리하는 자문 집단에 소속된 엄마와 아이들의 도움을 받았다. 올해 RC2는 장난감 ·소매 프로그램을 통해 무려 250가지 사항을 결정한다.
그때마다 뉴저지주 이스트브런즈윅에 사는 나이디 탠던(34) 같은 주부들이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이들 소비자는 지난해 RC2의 25개 신제품을 심사했다. 이들은 지난해 7월에 출시된 남아용 자석 블록쌓기 장난감인 클릭 브릭스(Click Bricks) 디자인에 한몫했다. 지난해 2월 주부 150명이 인터넷을 통해 클릭 브릭스의 색상을 비평했다. 이후 RC2는 주부들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3차원 시제품들을 만들어 그 가운데 30명에게 보냈다.
주부들은 2~4세인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이들은 아이가 언제, 어떻게, 몇 차례나 플라스틱 블록을 갖고 놀았는지 2주 동안 꼼꼼히 기록했다. 게다가 RC2에서 보내준 일회용 카메라로 아이가 노는 장면을 찍어 보냈다. RC2는 상품명 ·가격 ·포장에 대한 의견도 물었다. 탠던은 색상이 더 밝았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그녀는 “엄마라면 색상이 선명치 않은 장난감을 고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RC2는 엄마들의 의견을 제품에 반영했다. 그리고 블록의 모양?개수를 늘리고 질감도 가미했다. 이런 식으로 RC2는 제품 생산까지 걸리는 시간을 8주 앞당길 수 있었다. RC2의 CEO 커티스 스톨팅(Curtis Stoelting)은 “2~3년 전만 해도 테스트 없이 제작했다”며 “외부 의견을 참고하지 않은 채 출시했다면 더 많은 실수가 나타났을 것”이라고 만족스러워했다.
그렇다면 소비자가 항상 옳은 걸까. GM의 시장조사 담당 제프리 하틀리(Jeffrey Hartley)는 디자인 부문 책임자였던 제리 파머(Jerry Palmer)에 관한 일화를 들려줬다. 파머는 소비자에게 의견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바보 같은 짓이라고 여겼다. 그는 “차라리 소비자에게 직접 디자인을 맡기라”며 발끈했다. 하지만 마지못해 ‘실험적인’ 프로젝트에 동의했다.
생활용품 제조업체 유니레버(Unilever)의 임원진은 보디 스프레이 액스(Axe) 광고를 젊은 소비자들에게 먼저 심사하게 한 뒤 잡지에 싣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유니레버에서 향수 사업부 부사장으로 일하는 에스더 렘(Esther Lem)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젊은이들과 자주 접촉한다. 젊은 남성들이 겨드랑이털을 드러낸 선정적인 광고에 매료된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마케팅 담당 사장과 최고운영책임자(COO)가 한마디씩 했지만 렘은 “일에 관여하지 말라”며 “중요한 것은 젊은 소비자들의 의견”이라고 버텼다. 렘의 판단은 옳았다.
소비자들이 기업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경우도 있다. 패스트푸드 업체 욤 브랜즈(Yum Brands)의 타코 벨(Taco Bell) 사업부는 인기 좋은 부리토(burrito ·고기와 치즈를 옥수수빵으로 말아 구운 멕시코 요리)를 만들기 위해 소비자들에게 물었다. 소비자들은 ‘건강에 이로운’ 부리토를 원했다. 타코 벨은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컨설팅업체 소크래틱 테크놀로지스(Socratic Technologies)의 도움으로 e메일 1만200통을 발송했다. 최종 선발된 소비자 1,155명은 세 종류의 닭과 11가지의 소스 등으로 이뤄진 10가지 재료에서 선택했다. 택한 재료를 혼합해 요리하는 장면이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으로 재현됐다. 소크래틱은 가장 인기 있는 혼합을 찾아냈다. 그리고 몇 주 후 결과를 타코 벨에 보냈다.
타코 벨의 영양사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응답자 대다수가 저칼로리 부리토 대신 치즈를 세 차례나 입힌 고칼로리 부리토에 눈을 돌린 것이다. 가격도 상관하지 않았다. 타코 벨의 소비자 동향 담당 데브라 카사리얀(Debra Kassarjian)은 “애초 2달러짜리 부리토를 생각했지만 20센트 더 얹은 가격으로도 팔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때로 소비자가 재앙을 미리 막아줄 수 있다. 보험사 스테이트 팜(State Farm)은 최근 안전 운전자의 보험요율을 깎아주자는 아이디어에 대한 의견을 자사가 운영하는 새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물었다. 대신 고객은 차에 ‘블랙 박스’를 장착하도록 했다. 고객들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운전하는지 감시당할 것을 염려했다. 스테이트 팜의 리서치 담당 낸시 암스트롱(Nancy Armstrong)은 “고객이 사생활 침해로 간주하며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아피노바의 CEO 데이비드 안도니안(David Andon-ian)은 “소비 대중의 의견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면서도 “하지만 어느 정도 한계는 있다”고 지적했다.
소비자들의 반응을 정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e메일로 들어온 응답 가운데 필요 없는 내용은 걸러내야 한다. 많은 소비자를 참여시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월샘에 있는 시장조사업체 어플라이드 마케팅 사이언스(AMS)는 매사추세츠공과대(MIT)의 슬론 경영대학원과 손잡고 웹 툴을 개발했다. 아이디어 창안 과정을 흥미진진한 게임으로 바꾸는 툴이다. 게임에서 다른 참가자들의 제안을 응용하면 현금이나 현물로 바꿀 수 있는 점수가 주어진다.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특수 인쇄기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마크 앤디는 최근 AMS 프로그램을 활용해 수축 포장용 라벨 인쇄에 대한 소비자의 의견을 구했다.
조사 과정에서 얻은 아이디어나 제품 혹은 서비스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응답자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컬럼비아대학 경영대학원의 조교수 올리비에 투비아는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고 참가자들로부터 지적재산권과 관련해 동의도 받아내야 한다”고 충고했다. 대다수 기업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까.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제품개발 업체 세컨드에디슨(2ndEdison)의 창업자 크리스 브래들리(Chris Bradley)는 프로듀서 마이클 호프와 함께 TV쇼를 제작하고 있다. 제품이 안고 있는 일상적인 문제들을 생산업체가 시청자의 도움으로 해법을 찾을 수 있도록 모색하는 프로그램이다.
할리우드는 영화의 결말을 팬들이 택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TV 시리즈물의 등장인물들 운명이 시청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과 유사하다.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활동할 무렵 e메일이 있었다면 그 역시 더 많은 독자에게 의견을 물었을 것이다.
스노보드의 비밀 |
세컨드에디슨의 창업자 크리스 브래들리는 시코 스노보드(Sikko Snowboard)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열었다. 인터넷에서 자신만의 스노보드 디자인을 주문해 갖고 싶어 하는 청소년들에게 눈 돌린 것이다. 가격은 50달러. 지난해 시코는 좋은 실적을 올렸지만 스노보드 덕이 아니다. 많은 소비자처럼 스노보더들도 맞춤 제작에 관심이 없다. 지금까지 시코가 스노보드 외양 디자인 덕에 올린 성과는 미미하다. 1만 명 정도에 이르는 스노보드광은 마케팅 담당자들이 파악하는 데 애먹고 있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시코 사이트에서 최장 9시간 동안 자신들의 취미와 구매 습관을 얘기하고 전문 디자이너가 만든 스노보드 외양에 순위도 매겼다. 이들 정보는 시코가 더 인기 있는 디자인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시코 사이트는 브래들리에게 또 다른 사업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브래들리는 시코 사이트 방문자들의 접근권과 정보를 스노보드광에 대한 정보를 애타게 원하는 기술 및 패키지 상품 업체들에 넘겼다. 사이트 방문자 대다수는 남성이며 평균 연령이 23세다. 시코의 고객들은 오프라인 매장보다 온라인 매장을 선호한다. 그들 가운데 20%는 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를 원하며 가격에 민감하다. 3M과 휼렛패커드(HP)처럼 잘 알려진 브랜드를 기피하는 것이다. 브래들리는 올해 시코의 매출 가운데 60%가 시장조사 차원에서 자사 고객정보를 활용하는 기업들로부터 창출될 것이라고 말했다. 온라인 리서치는 어떤 색상의 운동화가 인기를 끌지, 고객이 차량용 위성위치 확인시스템(GPS)과 시트 히터 중 어느 것을 선호할지 예측하는 차원에서 이미 벗어났다. 차를 고르기 위해 오토초이스어드바이저닷컴(autochoiceadvisor.com)에 들어가는 소비자 3만 명 정도의 데이터가 다달이 GM으로 전달된다. GM에서 알고자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기름값 상승이 소비자의 자동차 구매 대상 우선 순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 시기다. 이로부터 GM은 인센티브 고안, 생산 일정 변경, 그리고 향후 모델 개발에서도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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