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흙냄새 느껴지는 풀바디 와인

흙냄새 느껴지는 풀바디 와인

해질 무렵 오사카(大阪) 시내에서 택시를 탔다. 조수석 뒤편에 ‘VAN GOGH’란 글자가 선명하게 쓰여진 손바닥만한 크기의 광고지가 눈에 들어왔다. ‘고독했던 화가의 풍경, 고흐전.’ 두 장을 뜯어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날 아침 와인숍 탐방을 제쳐두고 오사카(大阪) 국립국제미술관에 가기 위해 택시에 올랐다. 나이듬직한 기사에게 광고지를 보여주자 대뜸 아내가 고흐를 좋아한다며 알려줘 고맙다고 반긴다. 60대 중반이 넘어 보이는 기사 부부가 미술관을 간다는 데 내심 놀랐다.


놀랄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개관시간 10시에 맞춰 미술관에 다다르자 이미 사람들이 100여 m 넘게 줄을 서서 입장하고 있었다. 지하 2층 전시실로 내려가면서 관람객의 ‘밀밭’에 섞여버렸다.
전시회에는 그의 그림과 관련 자료 등이 진열돼 있었다. 서서히 그림 속으로 빠져들면서 눈에 익혀온 1890년 전후의 후기 작품이 금방 눈에 잡혔다.

초기작 <열려진 성경이 있는 정물> (유화?885년)과 함께 그림의 소재가 된 성경책이 앞에 놓인 것부터 전시회 준비가 예사롭지 않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30여 점의 유화를 비롯해 모두 120점이 넘는 자료도 함께 있어서 ‘고흐’를 이해하는 데 더 없는 자리였다.

특히 <슬픔> (1881년) · <죽음의 침대 위 여자> (1883년) · <옷감 짜는 사람> (1884년) · <오래된 구두> (1886년) · <슬퍼하는 노인> (1890년) 등 어둡고 칙칙한 당시 사회상을 옮긴 그림들이 스케치 등과 함께 전시돼 있어 서서히 감동이 일기 시작했다. 파리에 살던 시절을 거쳐 1882년 아를르로 이주한 후 그만의 세계로 꾸며진 독창적이고도 유토피아적인 작품들은 쉽사리 ‘영원과 무한의 세계’로 인도했다.

천천히 한바퀴를 도니 한 시간이 흘렀다. 다시 거꾸로 가며 크지 않은 크기의 진짜 고흐를 한 점씩 새겨갔다. 처음부터 관심 작품만 골라 그림을 뚫어지게 보았다. 몸 어느 구석엔가 절반만이라도 각인될까 하고…. 두어 시간 만에 나오니 더 많은 인파가 몰려 다시금 고흐와 일본인을 생각하게 했다.
백화점 와인 코너에서 호기를 부려 부르고뉴 와인 한 병을 샀다. ‘몽자르 뮈네레 그랑 에쉐조(Mongeard-Mugneret Grands Echezeaux) 2002’다.

5,000평 남짓한 포도밭에서 6,000병 정도 나오는 소량 생산품으로 ‘에쉐조’란 작은 동네는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다. 몇몇 지인들이 같이 왔기에 자랑과 함께 이를 내놓았다. 가뭄 속의 소나기에서 묻어나는 흙냄새가 느껴지는 풀바디의 와인. 길고 긴 여운은 고흐를 다시 떠올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전시회 마지막 장을 장식했던 오베르 시절의 작품 속 풍경이 보였다. 쾌적한 마을 거리와 이엉을 얹은 오두막집, 황금 물결치는 넓은 보리밭과 해바라기가 있는 풍경, 우체부, 룰랑 부인, 의사 고셰, 그리고 마지막 자화상에 이르기까지. 그는 사물에 정직하게 다가가려 했던 것 같다. 그의 불행했던 짧은 생이 오버랩돼 그의 작품 감상에서 한 예술가의 정신적 자세를 음미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들고 온 화집을 펼쳐보며 굳이 비유를 하려는 건 아니지만 이생진의 시 <그리운 바다 성산포> 의 한 구절이나 읊어보고 싶어졌다.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사람 빈 자리가 차갑다 /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 그 사람 빈자리가 차갑다 /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 살아서 술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에쉐조는 취하지 않으면서도 고흐의 색채 속으로 끌어가고 있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K-패션 잠재력을 진단하다… ‘K-브랜딩 컨퍼런스’ 성료

2국민이주㈜, 유학 미국투자이민 포럼 26일 열려....

3'여중·여고' 사라진다...저출생 여파에 남녀공학 전환 속도

4LG전자, 3분기 영업이익 7519억원...분기 비교 역대 네 번째

5손병두 前 한국거래소 이사장, 토스인사이트 신임 대표 선임

6이재명 妻 김혜경, '법카 유용' 벌금 300만원 재구형

7유일 '통신 3사' 우승 반지 보유…허도환, LG 떠난다

8"참사 반복해선 안돼" 경찰, 핼러윈 대비 안전인원 집중 배치

9SM그룹 경남기업, ‘광주태전 경남아너스빌 리미티드 공급

실시간 뉴스

1K-패션 잠재력을 진단하다… ‘K-브랜딩 컨퍼런스’ 성료

2국민이주㈜, 유학 미국투자이민 포럼 26일 열려....

3'여중·여고' 사라진다...저출생 여파에 남녀공학 전환 속도

4LG전자, 3분기 영업이익 7519억원...분기 비교 역대 네 번째

5손병두 前 한국거래소 이사장, 토스인사이트 신임 대표 선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