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이 된 만화소설
Comic Relief
만화책의 힘을 조금이라도 의심한다면 귀담아 들어라. 만화책은 이제 미래에 미군을 이끌어갈 주역들이 반드시 읽어야 한다. 뉴욕주 웨스트 포인트에 위치한 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려면 올 9월 4학년이 되는 생도들부터 마제인 사트라피의 만화소설(graphic novel) ‘퍼시폴리스’(Persepolis)를 공부해야 한다. 이란 혁명을 무대로 한 이 ‘성장 소설’을 학교 측이 참고 독서 목록에 집어넣은 일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토록 훌륭한 책이래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저자의 가족사를 간명한 틀로 담아내 그 어떤 학술서나 신문 기사, 전략 보고서보다 생도들이 이란을 더 잘 이해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퍼시폴리스’는 이란 사람들을 깃발을 흔드는 광신자나, 히잡으로 온몸을 감싼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재미 있고, 인간적이며, 주변에서 등장하는 이상하고 강력한 세력을 종종 두려워하는 개인들로 묘사한다. 파리의 작업실에서 만난 사트라피는 “나는 정치인도, 사회학자도, 역사가도 아니다”면서 “그러나 많은 사람이 현재 우려를 표시하는 곳에서 많은 일들을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만화는 자신의 이야기를 전 세계 독자에게 전하기에 적합한 매체라며 “그림은 국제적 언어”라고 덧붙였다.
만화는 판매 수치와 지위 격상을 고려하면 분명 국제적 인기를 누린다. 전 세계 출판사들은 만화소설이 2004년 최고 전성기를 누렸으며 2005년엔 훨씬 더 급성장한다고 예측했다. 엄청난 인기의 일본 ‘망가’에서부터 ‘퍼시폴리스’, 아트 스피겔만의 ‘무너진 타워(쌍둥이 빌딩)의 그늘에서’(In the Shadow of No Towers), 조 사코의 ‘전쟁의 끝’(War’s End) 등 모든 만화소설이 이에 해당한다. 미국의 만화책 판매액은 2001년 7500만 달러에서 2004년 2억700만 달러로 늘었다.
미국·영국·독일·이탈리아·한국의 출판사들은 만화소설을 성장률이 가장 높은 분야 중 하나로 간주한다. 미 굴지의 연쇄 서점인 보더스에선 지난 3년간 만화소설 판매량이 매년 100% 이상 늘었다. 만화책이 출판의 주류가 된지 오래 된 프랑스에선 판매가 기록적으로 늘었다(2004년엔 전년도보다 13.8% 늘어난 4330만 권이 팔렸다). 실제로 지난해 프랑스의 베스트셀러 10위 중 5권이 만화였다. 망가는 이미 일본 출판시장의 20%를 차지하며 한국·태국 등지로 급속히 확산 중이다. 영어 공부를 위해 아예 원본의 영어판을 구하는 경우도 흔하다.
스파이더맨은 이제 길을 비켜라. 만화소설은 마침내 취미용품 가게에서 벗어나 주류로 부상했다. 초자연적 능력을 가진 영웅을 주제로 한 팬터지는 한물가고 이젠 현실에 뿌리박은, 보다 대담하고 구체적 메시지가 담긴 작품이 인기다. 미국과 유럽의 학자들은 아예 만화를 문학의 한 형태로 가르친다. 사코의 ‘팔레스타인’(Palestine)과 ‘안전지대: 고라즈데’(Safe Area: Gorazde), 기 델리슬의 ‘평양’, ‘퍼시폴리스’ 등과 같은 만화소설은 단지 훌륭한 문학으로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 갈등 지역에 관한 훌륭한 안내서 대접을 받는다.
폴란드의 만화가들은 자유노조 ‘솔리대리티’ 창립 25주년을 신간 만화 여러 권의 간행으로 축하할 예정이다. 한때 군소 출판사의 영역인 만화는 이제 뉴욕의 판테온과 런던의 조너선 케이프 같은 대형 출판사의 영역으로 탈바꿈했다. 뉴욕의 휘트니, 런던의 현대미술관 등 박물관들도 파격적인 최신 만화를 일종의 ‘예술품’으로 전시한다.
르노 도네디외 드 바브르 프랑스 문화부 장관은 지난 5월 최초로 만화책을 국가적 차원에서 치켜세우며(다시 말해 프랑스에서 공식 인정받는 아홉 가지 예술 분야 중 하나가 됐다) 일본·프랑스·벨기에 출신 만화가들에게 기사 작위까지 수여했다. 도네디외 장관은 “나는 이처럼 창조적인 분야에 대한 애착을 표시함과 동시에 만화의 아름다움과 역설, 간혹 드러나는 흉포성, 그리고 그 영원한 상상력에 경의를 표한다”고 밝혔다.
사실 만화엔 규칙이나 경계가 없다. ‘만화소설’이란 표현은 윌 아이스너에 의해 보편화됐다. 그는 뉴욕의 아파트에 살던 어린 시절을 다룬 1978년 작 ‘하나님과의 계약’(A Contract with God)을 통해 만화를 종이로 된 오락물 이상으로 격상시켰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출판사와 서점들은 대개 단행본 만화를 마블(Marvel)이나 DC 코믹스(DC Comics) 등 대규모 출판사가 내놓는 시리즈 만화와 구별하기 위해 ‘만화소설’이란 표현을 쓴다. 그러나 만화가 중 상당수는 ‘만화’란 말에 함축된 ‘비주류’ 지위를 더 좋아한다[대니얼 클로우스의 신간 만화소설 ‘얼음 피난처’(Ice Haven)에는 만화책 비평가 해리 네이보스가 ‘만화’라는 표현이 “마케팅 업계에서 쓰는 ‘만화소설’이라는 저속한 말”보다 월등하다고 힘주어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림 자체뿐 아니라 전쟁·탄압·테러·인종차별주의 등 주제에서도 점점 더 세련됐다. 시카고에서 억눌려 사는 4세대의 남자들 이야기를 다룬 ‘지미 코리건: 세계에서 가장 영특한 아이’(Jimmy Corrigan: The Smartest Kid on Earth)의 작가 크리스 웨어는 이렇게 말했다. “만화는 수십년간 아동의 점심값을 훔치기 위한 또 하나의 상업적 도구에 불과했다. 그것이 서서히 바뀐다. 진정 예술적 사고를 가진 작가들이 만화를 그리는 경우가 늘고, 만화 주제 자체가 할리우드 영화의 소재가 된다.”
만화책에 기초한 새 영화도 매달 개봉되는 듯하다.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 같은 시리즈 만화의 판매 감소로 만화가 영화화의 길을 걷게 된 점은 역설적이다. 새로운 디지털 기술을 과시하려는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사들은 앞다투어 초 영웅 소재를 다루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존 만화 팬들을 그대로 영화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등장인물의 대규모 노출은 동시에 더 많은 사람을 서점의 만화 코너로 끌어들였다(그들은 이곳에서 일본의 망가나 ‘만화소설’에 주목했다). 이제 이런 장르는 영화에서도 보다 비중 있게 다뤄진다. 프랭크 밀러의 ‘씬 시티’(Sin City), 클로우스의 ‘판타스틱 소녀백서’(Ghost World), 맥스 앨런의 ‘더 로드 투 퍼디션’(The Road to Perdition), 살인마 이야기를 다룬 앨런 무어의 ‘프롬 헬’(From Hell) 등 최근 영화화된 만화가 대표적 예다.
진지한 ‘그림 문학’의 등장은 새로운 현상이라기보다는 잊혀진 문학으로의 회귀에 가깝다. 독일의 삽화가 로돌프 퇴퍼는 1800년대 초 유럽 최초로 글과 그림이 한데 섞인 작품을 내놓아 괴테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찰스 디킨스의 초기 작품에도 그의 삽화가 사용됐다. 다른 많은 분야에서처럼 현대 만화도 발명은 유럽인이 했지만 상업화는 미국인의 몫이었다. 20세기 초 만화는 이미 미국 신문들에 연재되며 인기를 끌었고, 새 이민자들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만국 공통어인 만화를 이용했다. 유럽에선 만화가 고급 예술에 속했지만 영미권에선 읽은 뒤 버려지는(그래서 생선 포장에나 쓰이는) 대중물에 불과했다.
그래서 1986년 부모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 퓰리처상을 수상한 스피겔만의 만화소설 ‘마우스’(Maus)의 출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유대인은 쥐로, 독일인은 고양이로 묘사됐다). 사트라피는 “만화 속엔 영웅 이야기만 나오는 줄 알았다. ‘마우스’를 보면서 ‘이런 만화도 있나? 하긴, 안될 이유도 없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적어도 10년 동안은 ‘마우스’만큼 의미 있는 만화소설이 나오지 않았다.
이제 그런 만화소설이 쏟아져 나온다는 사실은 만화 문학의 대부 스피겔만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준다. 그는 수년간 훌륭한 만화 잡지를 출판하고, 웨어·클로우스·사트라피와 같은 최고의 미술가들을 가르치면서 만화에 대한 좋은 인식을 퍼뜨렸다(뉴요커지의 표지 담당 책임자인 프랑스인 아내 프랑수아즈 물리의 도움도 컸다). 만화가들은 만화란 장르가 문화 엘리트들의 인정을 받게 된 데 대해 상반된 감정을 보인다.
무엇보다 만화는 전통적으로 비주류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스피겔만은 학자들이 만화에 대해 토론하고 중산층이 일반 서점에서 만화를 사보는 현실은 “장기적으론 손해일지 몰라도 이제 만화는 적어도 문학의 어엿한 양식이 됐으며 그 지위는 더 많은 사람이 만화를 보도록 한다”고 설명했다.
그림 문학의 인기는 갈수록 복잡해지는 요즘의 정치·사회 문제를 신선하게 논평할 방법이 필요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요즘 만화가 왜 인기냐는 질문에 스피겔만은 농담으로 “그 이유가 [미] 행정부와는 무관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분명 유명 작가들 중 최초로 9·11 테러를 다룬 작가였다. 그가 그린 논란 많은 일련의 만화는 여러 신문·잡지사에서 거부당하다 결국 ‘무너진 타워의 그늘에서’란 만화소설로 출간됐다.
다른 작가들이 9·11 테러 이야기를 회피할 때 그는 무너지는 건물을 묘사하고, 부시 정부를 풍자했다. 사트라피는 만화가 가진 힘을 이렇게 말했다. “만화는 ‘진지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무슨 말이든 하게 해준다. 게다가 사진이 아닌 그림을 이용하기 때문에 민감한 주제를 냉소적이지 않게 다루는 데 필요한 거리 확보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물론 만화책은 우리가 글만큼이나 영상에 의존해 의사소통을 하는 시각적 세계에 살기 때문에 인기가 있다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만화는 디지털 시대에 지극히 적합하면서도 동시에 ‘장인정신’도 내포돼 있다. 만화의 이 같은 특성은 의사소통이 압도적으로 가상공간에서 이뤄지는 시기에 더욱 매력적이다. 스피겔만은 “책이란 매체가 주는 즐거움 중 하나는 바로 ‘물질성’이다.
만화소설은 그 조건에 딱 들어맞는다”고 역설했다. 일례로 ‘무너진 타워의 그늘에서’는 두꺼운 종이로 만든 아동용 책처럼 열두 장의 무거운 카드보드지에 인쇄됐다. 빅토리아식 정교함에 가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세부 묘사를 자랑하는 만화책 ‘지미 코리건’은 소설이라기보다 흡사 예술작품처럼 느껴진다. 이런 책들을 만드는 일은 집필보다는 조각에 더 가깝다. 도판 한 장 한 장을 손으로 그려야 하고, 작품 완성에 10년 넘게 걸리기도 한다. 사트라피는 “수도사의 작업에 가깝다”고 말했다.
만화 세계의 지속적 확대는 불을 보듯 뻔하다. 클로우스의 ‘얼음 피난처’(‘판타스틱 소녀백서’에 나타난 청소년기 고뇌와 만화 ‘심슨 가족’식의 사회 풍자를 합쳐놓은 듯하다)와 사트라피의 ‘자수’(Embroideries)(이란 여성의 성생활을 솔직하게 다룬 만화) 등 수많은 신간 만화가 날개돋친 듯 팔린다. 스피겔만은 10월 ‘마우스’ 출판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원작의 스케치와 배경 그림 모음집인 ‘메타 마우스’를 출간할 계획이다.
신간 확보를 위한 경쟁도 치열하다. W. W. 노턴사는 작가 R 크럼이 성경의 창세기를 각색한 만화에 거액의 선금을 지불했다고 한다. 일본 만화 출판사 도쿄팝은 최근 큰 인기를 끄는 미국의 10대용 잡지 코스모걸에 만화를 연재키로 계약했다. 경쟁사인 다크 호스 측도 ‘할리퀸’류의 10대 연애소설을 시리즈로 펴낼 계획이다.
영화도 계속 쏟아져 나온다. 나탈리 포트먼, 샤를리즈 테론, 니컬러스 케이지 등 스타들은 곧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에 출연할 예정이다. 올 가을 개봉 영화 중엔 테러리스트들이 점령한 전체주의 런던을 거북할 정도로 실제에 가깝게 묘사한 앨런 무어의 가상 소설을 원작으로 한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도 있다.
‘아트 스쿨 컨피덴셜’(Art School Confidential)은 미국에서 9월 개봉된다. 한편 사트라피는 ‘퍼시폴리스’의 프랑스어 만화영화를 제작 중이며 미국 영화사들과도 영어판 제작 가능성을 타진 중이다. 그녀는 “만화로 들려줄 이야기는 아직 무궁무진하다. 만화는 비교적 새로운 매체이지만 앞에는 길고 아름다운 미래가 기다린다”고 말했다.
With TRACY MCNICOLL in Paris,
MARY ACOYMO in London, MARK RUSSELL
in Seoul and KAY ITOI in Tokyo
강태욱·정민숙 tkang@joongang.co.kr
만화책의 힘을 조금이라도 의심한다면 귀담아 들어라. 만화책은 이제 미래에 미군을 이끌어갈 주역들이 반드시 읽어야 한다. 뉴욕주 웨스트 포인트에 위치한 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려면 올 9월 4학년이 되는 생도들부터 마제인 사트라피의 만화소설(graphic novel) ‘퍼시폴리스’(Persepolis)를 공부해야 한다. 이란 혁명을 무대로 한 이 ‘성장 소설’을 학교 측이 참고 독서 목록에 집어넣은 일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토록 훌륭한 책이래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저자의 가족사를 간명한 틀로 담아내 그 어떤 학술서나 신문 기사, 전략 보고서보다 생도들이 이란을 더 잘 이해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퍼시폴리스’는 이란 사람들을 깃발을 흔드는 광신자나, 히잡으로 온몸을 감싼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재미 있고, 인간적이며, 주변에서 등장하는 이상하고 강력한 세력을 종종 두려워하는 개인들로 묘사한다. 파리의 작업실에서 만난 사트라피는 “나는 정치인도, 사회학자도, 역사가도 아니다”면서 “그러나 많은 사람이 현재 우려를 표시하는 곳에서 많은 일들을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만화는 자신의 이야기를 전 세계 독자에게 전하기에 적합한 매체라며 “그림은 국제적 언어”라고 덧붙였다.
만화는 판매 수치와 지위 격상을 고려하면 분명 국제적 인기를 누린다. 전 세계 출판사들은 만화소설이 2004년 최고 전성기를 누렸으며 2005년엔 훨씬 더 급성장한다고 예측했다. 엄청난 인기의 일본 ‘망가’에서부터 ‘퍼시폴리스’, 아트 스피겔만의 ‘무너진 타워(쌍둥이 빌딩)의 그늘에서’(In the Shadow of No Towers), 조 사코의 ‘전쟁의 끝’(War’s End) 등 모든 만화소설이 이에 해당한다. 미국의 만화책 판매액은 2001년 7500만 달러에서 2004년 2억700만 달러로 늘었다.
미국·영국·독일·이탈리아·한국의 출판사들은 만화소설을 성장률이 가장 높은 분야 중 하나로 간주한다. 미 굴지의 연쇄 서점인 보더스에선 지난 3년간 만화소설 판매량이 매년 100% 이상 늘었다. 만화책이 출판의 주류가 된지 오래 된 프랑스에선 판매가 기록적으로 늘었다(2004년엔 전년도보다 13.8% 늘어난 4330만 권이 팔렸다). 실제로 지난해 프랑스의 베스트셀러 10위 중 5권이 만화였다. 망가는 이미 일본 출판시장의 20%를 차지하며 한국·태국 등지로 급속히 확산 중이다. 영어 공부를 위해 아예 원본의 영어판을 구하는 경우도 흔하다.
스파이더맨은 이제 길을 비켜라. 만화소설은 마침내 취미용품 가게에서 벗어나 주류로 부상했다. 초자연적 능력을 가진 영웅을 주제로 한 팬터지는 한물가고 이젠 현실에 뿌리박은, 보다 대담하고 구체적 메시지가 담긴 작품이 인기다. 미국과 유럽의 학자들은 아예 만화를 문학의 한 형태로 가르친다. 사코의 ‘팔레스타인’(Palestine)과 ‘안전지대: 고라즈데’(Safe Area: Gorazde), 기 델리슬의 ‘평양’, ‘퍼시폴리스’ 등과 같은 만화소설은 단지 훌륭한 문학으로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 갈등 지역에 관한 훌륭한 안내서 대접을 받는다.
폴란드의 만화가들은 자유노조 ‘솔리대리티’ 창립 25주년을 신간 만화 여러 권의 간행으로 축하할 예정이다. 한때 군소 출판사의 영역인 만화는 이제 뉴욕의 판테온과 런던의 조너선 케이프 같은 대형 출판사의 영역으로 탈바꿈했다. 뉴욕의 휘트니, 런던의 현대미술관 등 박물관들도 파격적인 최신 만화를 일종의 ‘예술품’으로 전시한다.
르노 도네디외 드 바브르 프랑스 문화부 장관은 지난 5월 최초로 만화책을 국가적 차원에서 치켜세우며(다시 말해 프랑스에서 공식 인정받는 아홉 가지 예술 분야 중 하나가 됐다) 일본·프랑스·벨기에 출신 만화가들에게 기사 작위까지 수여했다. 도네디외 장관은 “나는 이처럼 창조적인 분야에 대한 애착을 표시함과 동시에 만화의 아름다움과 역설, 간혹 드러나는 흉포성, 그리고 그 영원한 상상력에 경의를 표한다”고 밝혔다.
사실 만화엔 규칙이나 경계가 없다. ‘만화소설’이란 표현은 윌 아이스너에 의해 보편화됐다. 그는 뉴욕의 아파트에 살던 어린 시절을 다룬 1978년 작 ‘하나님과의 계약’(A Contract with God)을 통해 만화를 종이로 된 오락물 이상으로 격상시켰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출판사와 서점들은 대개 단행본 만화를 마블(Marvel)이나 DC 코믹스(DC Comics) 등 대규모 출판사가 내놓는 시리즈 만화와 구별하기 위해 ‘만화소설’이란 표현을 쓴다. 그러나 만화가 중 상당수는 ‘만화’란 말에 함축된 ‘비주류’ 지위를 더 좋아한다[대니얼 클로우스의 신간 만화소설 ‘얼음 피난처’(Ice Haven)에는 만화책 비평가 해리 네이보스가 ‘만화’라는 표현이 “마케팅 업계에서 쓰는 ‘만화소설’이라는 저속한 말”보다 월등하다고 힘주어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림 자체뿐 아니라 전쟁·탄압·테러·인종차별주의 등 주제에서도 점점 더 세련됐다. 시카고에서 억눌려 사는 4세대의 남자들 이야기를 다룬 ‘지미 코리건: 세계에서 가장 영특한 아이’(Jimmy Corrigan: The Smartest Kid on Earth)의 작가 크리스 웨어는 이렇게 말했다. “만화는 수십년간 아동의 점심값을 훔치기 위한 또 하나의 상업적 도구에 불과했다. 그것이 서서히 바뀐다. 진정 예술적 사고를 가진 작가들이 만화를 그리는 경우가 늘고, 만화 주제 자체가 할리우드 영화의 소재가 된다.”
만화책에 기초한 새 영화도 매달 개봉되는 듯하다.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 같은 시리즈 만화의 판매 감소로 만화가 영화화의 길을 걷게 된 점은 역설적이다. 새로운 디지털 기술을 과시하려는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사들은 앞다투어 초 영웅 소재를 다루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존 만화 팬들을 그대로 영화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등장인물의 대규모 노출은 동시에 더 많은 사람을 서점의 만화 코너로 끌어들였다(그들은 이곳에서 일본의 망가나 ‘만화소설’에 주목했다). 이제 이런 장르는 영화에서도 보다 비중 있게 다뤄진다. 프랭크 밀러의 ‘씬 시티’(Sin City), 클로우스의 ‘판타스틱 소녀백서’(Ghost World), 맥스 앨런의 ‘더 로드 투 퍼디션’(The Road to Perdition), 살인마 이야기를 다룬 앨런 무어의 ‘프롬 헬’(From Hell) 등 최근 영화화된 만화가 대표적 예다.
진지한 ‘그림 문학’의 등장은 새로운 현상이라기보다는 잊혀진 문학으로의 회귀에 가깝다. 독일의 삽화가 로돌프 퇴퍼는 1800년대 초 유럽 최초로 글과 그림이 한데 섞인 작품을 내놓아 괴테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찰스 디킨스의 초기 작품에도 그의 삽화가 사용됐다. 다른 많은 분야에서처럼 현대 만화도 발명은 유럽인이 했지만 상업화는 미국인의 몫이었다. 20세기 초 만화는 이미 미국 신문들에 연재되며 인기를 끌었고, 새 이민자들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만국 공통어인 만화를 이용했다. 유럽에선 만화가 고급 예술에 속했지만 영미권에선 읽은 뒤 버려지는(그래서 생선 포장에나 쓰이는) 대중물에 불과했다.
그래서 1986년 부모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 퓰리처상을 수상한 스피겔만의 만화소설 ‘마우스’(Maus)의 출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유대인은 쥐로, 독일인은 고양이로 묘사됐다). 사트라피는 “만화 속엔 영웅 이야기만 나오는 줄 알았다. ‘마우스’를 보면서 ‘이런 만화도 있나? 하긴, 안될 이유도 없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적어도 10년 동안은 ‘마우스’만큼 의미 있는 만화소설이 나오지 않았다.
이제 그런 만화소설이 쏟아져 나온다는 사실은 만화 문학의 대부 스피겔만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준다. 그는 수년간 훌륭한 만화 잡지를 출판하고, 웨어·클로우스·사트라피와 같은 최고의 미술가들을 가르치면서 만화에 대한 좋은 인식을 퍼뜨렸다(뉴요커지의 표지 담당 책임자인 프랑스인 아내 프랑수아즈 물리의 도움도 컸다). 만화가들은 만화란 장르가 문화 엘리트들의 인정을 받게 된 데 대해 상반된 감정을 보인다.
무엇보다 만화는 전통적으로 비주류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스피겔만은 학자들이 만화에 대해 토론하고 중산층이 일반 서점에서 만화를 사보는 현실은 “장기적으론 손해일지 몰라도 이제 만화는 적어도 문학의 어엿한 양식이 됐으며 그 지위는 더 많은 사람이 만화를 보도록 한다”고 설명했다.
그림 문학의 인기는 갈수록 복잡해지는 요즘의 정치·사회 문제를 신선하게 논평할 방법이 필요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요즘 만화가 왜 인기냐는 질문에 스피겔만은 농담으로 “그 이유가 [미] 행정부와는 무관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분명 유명 작가들 중 최초로 9·11 테러를 다룬 작가였다. 그가 그린 논란 많은 일련의 만화는 여러 신문·잡지사에서 거부당하다 결국 ‘무너진 타워의 그늘에서’란 만화소설로 출간됐다.
다른 작가들이 9·11 테러 이야기를 회피할 때 그는 무너지는 건물을 묘사하고, 부시 정부를 풍자했다. 사트라피는 만화가 가진 힘을 이렇게 말했다. “만화는 ‘진지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무슨 말이든 하게 해준다. 게다가 사진이 아닌 그림을 이용하기 때문에 민감한 주제를 냉소적이지 않게 다루는 데 필요한 거리 확보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물론 만화책은 우리가 글만큼이나 영상에 의존해 의사소통을 하는 시각적 세계에 살기 때문에 인기가 있다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만화는 디지털 시대에 지극히 적합하면서도 동시에 ‘장인정신’도 내포돼 있다. 만화의 이 같은 특성은 의사소통이 압도적으로 가상공간에서 이뤄지는 시기에 더욱 매력적이다. 스피겔만은 “책이란 매체가 주는 즐거움 중 하나는 바로 ‘물질성’이다.
만화소설은 그 조건에 딱 들어맞는다”고 역설했다. 일례로 ‘무너진 타워의 그늘에서’는 두꺼운 종이로 만든 아동용 책처럼 열두 장의 무거운 카드보드지에 인쇄됐다. 빅토리아식 정교함에 가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세부 묘사를 자랑하는 만화책 ‘지미 코리건’은 소설이라기보다 흡사 예술작품처럼 느껴진다. 이런 책들을 만드는 일은 집필보다는 조각에 더 가깝다. 도판 한 장 한 장을 손으로 그려야 하고, 작품 완성에 10년 넘게 걸리기도 한다. 사트라피는 “수도사의 작업에 가깝다”고 말했다.
만화 세계의 지속적 확대는 불을 보듯 뻔하다. 클로우스의 ‘얼음 피난처’(‘판타스틱 소녀백서’에 나타난 청소년기 고뇌와 만화 ‘심슨 가족’식의 사회 풍자를 합쳐놓은 듯하다)와 사트라피의 ‘자수’(Embroideries)(이란 여성의 성생활을 솔직하게 다룬 만화) 등 수많은 신간 만화가 날개돋친 듯 팔린다. 스피겔만은 10월 ‘마우스’ 출판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원작의 스케치와 배경 그림 모음집인 ‘메타 마우스’를 출간할 계획이다.
신간 확보를 위한 경쟁도 치열하다. W. W. 노턴사는 작가 R 크럼이 성경의 창세기를 각색한 만화에 거액의 선금을 지불했다고 한다. 일본 만화 출판사 도쿄팝은 최근 큰 인기를 끄는 미국의 10대용 잡지 코스모걸에 만화를 연재키로 계약했다. 경쟁사인 다크 호스 측도 ‘할리퀸’류의 10대 연애소설을 시리즈로 펴낼 계획이다.
영화도 계속 쏟아져 나온다. 나탈리 포트먼, 샤를리즈 테론, 니컬러스 케이지 등 스타들은 곧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에 출연할 예정이다. 올 가을 개봉 영화 중엔 테러리스트들이 점령한 전체주의 런던을 거북할 정도로 실제에 가깝게 묘사한 앨런 무어의 가상 소설을 원작으로 한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도 있다.
‘아트 스쿨 컨피덴셜’(Art School Confidential)은 미국에서 9월 개봉된다. 한편 사트라피는 ‘퍼시폴리스’의 프랑스어 만화영화를 제작 중이며 미국 영화사들과도 영어판 제작 가능성을 타진 중이다. 그녀는 “만화로 들려줄 이야기는 아직 무궁무진하다. 만화는 비교적 새로운 매체이지만 앞에는 길고 아름다운 미래가 기다린다”고 말했다.
With TRACY MCNICOLL in Paris,
MARY ACOYMO in London, MARK RUSSELL
in Seoul and KAY ITOI in Tokyo
강태욱·정민숙 t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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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중요"…손흥민 마음 속 새 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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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준 "코스피 안 망한다"…'대주주 기준 상향'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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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켓인]IPO 실패시 회수 어떻게?…구다이글로벌 CB 투자 딜레마
성공 투자의 동반자마켓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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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면 200만원 주식 선물', 팜이데일리 8월 행사 시작
바이오 성공 투자, 1%를 위한 길라잡이팜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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