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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숙 기자의 여성리더 탐구③] 김예리 ㈜팜스 회장 … “딸은 쌀장수, 손녀는 물장수라고 아버지가 놀리지만 대견해해요”

[박미숙 기자의 여성리더 탐구③] 김예리 ㈜팜스 회장 … “딸은 쌀장수, 손녀는 물장수라고 아버지가 놀리지만 대견해해요”

김예리 (주)팜스회장.
97년 당시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왼쪽)와 김예리 회장.
박미숙 이코노미스트 기자.
쌀 등 농협 농산물을 위탁 공급하는 ㈜팜스의 김예리 회장. 그는 아직도 김종필(JP) 전 자민련 총재의 맏딸이라고 해야 사람들이 더 쉽게 알아본다. 그는 JP의 1남1녀 중 맏딸. 올해 쉰넷이다. 어머니인 박영옥(76·고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 여사의 외모를 빼닮았다. JP 옆을 지키는 박 여사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김 회장이 어머니와 정말 똑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단아한 모습 그대로다. 김 회장은 요즘도 팔순을 바라보는 어머니와 하루에도 20~30통씩 전화하며 끈끈한 모녀의 정을 나눈다고 한다. 김 회장은 1987년부터 최근까지 17년간 JP의 정치활동을 도왔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기자들에게 떡을 대접’하는 등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른바 ‘반정치인’이던 그가 지난해 설립된 팜스를 올해 6월 인수, 사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이 회사는 각 지역 단위농협으로부터 운송된 농산물을 중간상을 안 거치고 바로 대형 마트에 공급해 주는 유통업체다. 롯데마트에 다음달 ‘원적미’ 납품을 대표 상품으로 내세워 전국의 친환경 농산물을 공급한다. “얼마 전 아버지(JP)가 점심을 사주시면서 그러시더라고요. 이제 나도 네 덕 좀 보고 살자고요.” 김 회장에게 사업에 뛰어든 이유를 묻자 대뜸 “순전히 먹고 살기 위해서죠”라며 “아버지가 정치를 그만뒀으니 이제는 저도 먹고 살아야죠”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JP는 “다 타고 재만 남았다”며 정계 은퇴를 선언한 바 있다. “50이 넘은 이 나이껏 적금통장 하나 없이 친정의 도움을 받고 살았어요. 어떻게 보면 참으로 대책 없는 삶이었죠. 저도 살 궁리를 해야 할 것 같더라고요. 정치인 집안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죠.” 김 회장은 사업 초기 단계라 아직 우왕좌왕하고 있다고 했다. 본인 말을 빌리자면 ‘겁도 없이 뛰어든 사업’이다. “팜스가 대형마트에 거래처 물건을 납품할 때 거래처에서 대형마트에 보증금을 겁니다. 만약 중간에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을 온전히 팜스가 책임져야 하는 거죠. 아직 거래처 선정에 미숙해 법정 소송까지 걸려 있는 것도 있어요. 사업이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아버지(JP)가 네 덕 보자고 해” “JP 딸이 아닌 김예리라는 이름을 찾기까지 5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그는 이번 사업 시작이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로부터 독립’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기자는 솔직히 김 회장과 한 약속을 어겼다. 처음에 그는 인터뷰 요청을 정중히 거부했었다. 하지만 JP의 딸이 아닌 사업가 김예리로 초점을 맞춰 기사를 써준다면 응하겠다고 해서 성사됐다. 오후 3시부터 11시까지 무려 8시간 동안 술자리까지 이어지면서 인터뷰가 이뤄졌다. 그런데 그가 한 말 중 상당 부분이 ‘아버지 JP’였다. 본인 스스로는 ‘JP 딸’이라는 꼬리표를 거부했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처럼 보였다. 그는 이야기 보따리를 허기진 사람처럼 풀어 놨다. 처음 만난 기자 앞에서 서너 차례 눈물도 보였다. 힘든 정치판 이야기를 꺼내면서 참을 수 없는 설움이 복받쳐 오르는 듯했다. 육사를 졸업한 JP가 육본 정보참모부 기획과장을 지내면서 박정희 소장과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해가 61년이다. 김 회장 나이 10세 때다. “우리 집엔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어요. 한밤중 자다가도 사람들이 오면 자던 방을 내줘야 했죠. 그런데 아버지의 정치생명이 위태로워지면 우리 집을 매일 찾아오던 사람들이 갑자기 발길을 뚝 끊죠. 그런 것을 지켜보는 것이 가장 가슴 아팠어요.” 배신당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는 김 회장. 정치만큼 험난한 사업을 제대로 헤쳐나갈 용기는 어디서 났을까. 사업이 정치판만큼 만만하지 않다고 기자가 먼저 운을 뗐다. 그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사래를 쳤다. “말도 마세요. 사업이 정치판보다 더 험하지는 않을 것으로 봐요. 요즘도 저는 주위에서 정치하겠다고 하면 도시락 싸들고 말리고 싶어요. 아버지 옆에서 배운 게 정치인데 왜 정치 안 하고 사업을 하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저는 정치판에서 그 정도 고생했으면 됐다고 말하죠. 그쪽(정치)으로는 이제 눈도 돌리고 싶지 않아요.” 김 회장은 정치인 집안 딸로서 가택수사까지 받은 사람은 자기밖에 없을 거라고 말했다. 80년 JP가 신군부에 의해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부정축재자로 지목됐을 때다. 당시 김 회장의 집도 가택수사를 받았다. “식구들을 한방에 몰아넣고 ‘숟가락, 젓가락 하나’까지 어디서 났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때 죄인 취급당하면서 취조당했던 심정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요.” 어린 시절부터 김 회장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봤던 큰아버지의 장손인 사촌오빠 김인태(현 팜스 기획실장)씨가 보는 김 회장은 어떤 모습일까? “예리는 똑 부러지게 할 말을 하고 적극적인 여자 아이였지만 감수성이 풍부하고 여린 아이이기도 했어요. 부친의 잦은 정치적 외유로 어릴 때부터 가장 노릇을 했죠. 그래서인지 외로움을 많이 타고 내성적이었어요. 김 회장은 이화여대 미대 조소학과를 나왔다. 그는 미대 연극반 활동을 할 정도로 감수성이 풍부하고 내면에 끼가 넘쳤다. 아버지가 정치를 안 했다면 예술가로 살았을 것이라고도 했다. “대학에 다니던 70년대 초반 시절은 아버지가 총리를 했던 때였어요. 항상 경호원이 저를 따라다녔죠. 교문 앞에서 데모하면 영문도 모르고 경호원을 따라 뒷문으로 빠져 나와야 했어요.” 대학시절 친구들과 나팔바지 입고 명동에 가는 게 그의 소원이었다. 미팅 한번 마음 편하게 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친구들도 김 회장을 항상 따돌렸다. 경호원이 멀찍이 쫓아 오는 데 같이 다니자고 할 친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그때의 울적함을 승마로 달랬다. 중학교 때부터 대학까지 장애물 넘기 승마선수였다. 이화여고와 이대의 승마부를 만든 주인공이기도 했다. “장애물 넘기를 하려면 말을 타고 달려야 해요. 가슴 속 응어리가 쌓일 때마다 말을 타면서 기분전환했어요.” 숨 한번 제대로 편히 쉬어 보는 게 소원이었다는 그가 세상에 나오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다. “87년 대통령 선거 때 아버지가 TV 토론에 나오는데 짓궂은 카메라맨이 방청석에 앉아 있던 저를 클로즈업했어요. 선거 때문에 이리저리 얼굴이 알려지자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기 시작한 거죠.” 그는 이후 시장에서 마음 편하게 생선 가격 한번 물어보지 못했다고 하소연한다. 백화점에도 잘 가지 않는다. 누군가 알아보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김 회장은 동대문시장과 홈쇼핑을 이용해 주로 옷을 산다. 인터뷰 당일 입고 나온 옷도 8년 전 사입은 정장이라고 했다. 김 회장이 사업을 시작한 건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84년 토털 홈 인테리어 사업을 시작했었다. 하지만 막내인 영진이 생후 1년6개월 때 소아암 판정을 받는 바람에 채 일년도 안 돼 사업의 꿈을 접어야 했다. “제 힘으로 한번 일 해보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운명이 저를 그렇게 놔두지 않더라고요.” 그때 소아암 판정을 받았던 영진이는 지금 키가 175㎝인 건장한 23세의 청년으로 자랐다. 가망이 없다고 했던 아이였다. 김 회장은 막내 얘기가 나오자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다. “아버지가 안 계셨더라면 막내를 살리지 못했을 거예요. 아버지가 미국에서 외유를 하셨을 때였는데 마침 스탠퍼드 아동대학 병원에 미국의 5대 암 권위자로 꼽히는 교수가 있었어요. 아버지는 한밤중에 그분이 사는 집 주소를 들고 찾아가 문을 두드리셨답니다. 내가 한국의 국무총리를 지낸 사람이다. 내 손자가 죽어가고 있으니 나를 한 번만 만나달라고 했대요.” JP는 훗날 그 얘기를 딸에게 전하며 본인 입으로 국무총리를 판 일은 전무후무하다고 말했다. 조부모의 정성 덕인지 막내 영진이는 8년 만에 완쾌했다. 면역력이 없는 영진이의 입 속에 흰 곰팡이가 나자 JP가 손수 손가락으로 일일이 그 곰팡이를 걷어낸 일을 그는 잊지 못한다고 했다. “아이 일을 겪으니 무서울 게 없더라고요. 죽은 애를 살렸으니 앞으로 두려울 일이 뭐가 있겠어요.”

10·26 땐 청와대 상가 음식 날라 남편 이야기를 묻자 “아예 꺼내지 말자”고 했다. 현재 김 회장은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 큰딸 영화(31)와 영덕(27), 영진 형제다. 영화씨는 미국 유타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재원이다. 대학 졸업 이후 메릴린치증권 등 미국의 유수 금융기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지만 엄마 곁에 있기 위해 모든 기회를 포기하고 2003년 귀국했다. 17세 때부터 외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엄마와 함께한 시간이 많지 않은 딸이다. 김 회장과 인터뷰하던 중 영화씨도 합석했다. “엄마를 이해하기 시작한 건 할아버지(JP) 밑에서 2년여 동안 정치 일을 함께 도와 본 다음이었어요. 그때의 2년은 어떻게 견뎌냈나 싶을 정도로 괴로웠어요. 하지만 엄마는 불평 한마디 없이 17년 동안 그 일을 하셨잖아요. 제겐 엄마가 참 위대해 보이더라고요.” 영화씨 역시 최근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현재 그는 ‘진새벽 코페레이션’이라는 회사를 차려 슬로바키아의 생수 수입 사업을 하고 있다. “엄마처럼 할아버지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어요. 회사 차린 지 2년째인데 아직도 판매망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어요. 할아버지 도움을 받았다면 벌써 해결됐을 일이에요. 할아버지, 할머니는 우스갯소리로 엄마는 쌀장사, 딸은 물장사한다고 놀리시면서도 모녀의 자립갱생에 대견해 하시는 눈치예요.” 김 회장은 술을 곧잘 했다. 노래도 간드러지게 부르고 춤도 잘 췄다. 넘치는 열정은 나이를 잊게 한다고 했다. 김 회장이 술을 배운 건 87년 대선 때 JP를 따라다니면서부터였다. JP는 소주를 물컵으로 마셨던 정치인이다. 그 뒤를 따라다닌 딸이었으니 주량이 느는 건 당연했을 것이다. “아버지 지역구인 충청도에 내려가면 어르신들이 한 잔 두 잔 따라 주셨어요. 그 분들은 한 잔이지만 저는 주는 술잔을 다 받아 마셨으니… . 앞에서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었지만 차만 타면 정신을 잃는 거예요. 응급실에도 여러 번 실려갔죠.” 당시 선거 운동을 같이하러 다녔던 김인태 실장이 기억하는 김 회장의 모습은 더 사실적이다. “87년 대선 하루 전인 12월 17일은 비가 많이 왔어요. 그날 오전 9시 충남 서산에서 유세를 시작해 서울 송파구에서 새벽 1시쯤 끝났죠. 저는 충북 음성쯤에서 이미 지쳐서 뻗었는데 예리는 JP를 보좌하며 새벽 3시까지 소주를 마셨다고 해요. 술도 못하는 아이였는데 정신력 하나로 버텼던 거죠.” 김 회장은 대선 때 JP의 홍보를 전담했었다. 은박지 풍선의 앞에는 ‘아이 러브 JP’, 뒤에는 JP 얼굴을 붙여 홍보를 했다. 당시 JP 홍보가 제일 좋았다는 평가도 받았다고 자랑했다. “아버지는 종교·정치·문학·골프 등 각 분야에서 전문가를 능가하는 대단한 분이셨어요. 엄청나게 책을 읽는 것으로 유명하시죠. 지금도 주무시기 전에는 꼭 책을 보시니까요. 총리 시절 때 일본에 가셨는데 일정보다 하루 늦춰 오셨어요. 일본인이 쓴 마오쩌둥(毛澤東) 책을 다 읽고 오시려고 일정을 늦추셨던 거예요.” JP는 30대 중반부터 40년이 넘게 정치를 했다. 하지만 최고 권력에 오르지 못하고 언제나 2인자의 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능력은 있으면서도 대권과는 인연이 없는 불운의 연속이었다. “아버지가 정치가 아닌 사업을 하셨다면 잘하셨을 텐데…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안타까워요.” 김 회장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지만씨와 5촌간이다. 그는 얼마 전 지만씨의 아들 세현군이 태어났을 때 보러 갔다. 당시 지만씨는 김 회장을 보자 아이에게 “할머니 누나가 왔다”고 농담을 건넸단다. 김 회장은 아직도 지만씨만 생각하면 연민의 정이 앞선다고 했다. “저보다 더 수줍어하고 숫기없는 아주 여린 사람입니다. 10·26이 일어나던 날 오전에 당시 육사생도였던 지만씨가 도고온천에 놀러갔다가 삽교천 준공식에 참석한 아버지(박정희 대통령)와 스쳐 지나갔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아버지에게 야단맞을까봐 모른 척하고 지나갔대요. 그때 아버지를 아는 척 안 한 게 후회된다며 문상 때 저를 잡고 통곡을 하더라고요.” 김 회장은 10·26 당시 경황이 없던 청와대에 상가 음식을 마련해 손수 나르기도 했다.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새벽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육군 수도병원에 가셨죠. 피투성이가 된 채 누워 있던 박 대통령을 보고 오신 후 어머니는 위 무력증이 걸려 몸져 누우셨어요. 문상을 받아야 하는 데 청와대에 밥 차려줄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편찮으신 어머니와 친척들이 만드신 아침·점심·저녁 음식을 저희 집(청구동)에서 청와대까지 해다 날랐습니다. 상이 끝나고 저도 과로로 쓰러졌죠.” 김 회장은 자신의 사업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아버지의 농촌에 대한 사랑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아버지가 70년대 초 총리로 계실 때 경제개발 5개년, 10개년 계획을 다 만들어 놓으신 분 아닙니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농촌의 비닐하우스와 2모작, 4모작을 도입하신 분입니다. 박 대통령이 벌인 새마을운동의 틀을 만들고 실제로 추진한 건 아버지의 공적입니다. 아버지는 농촌을 정말 사랑했어요. 농촌에 꿈을 걸었어요.”

직원 정리해고한 일 가슴 아파 김 회장이 이른바 ‘쌀장사’를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아버지의 꿈과 일맥상통한다는 설명이다. “내가 농업 사업을 한다고 하자 사람들이 다 말렸어요. 힘들게 왜 그런 걸 하느냐고요. 그런데 근대화·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우리의 농촌은 피폐했어요. 어려운 농촌의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고 우리 아이들에게는 친환경 먹을거리를 마련해 주고 싶습니다.” 김 회장은 매월 14개 여성잡지와 시사지 등을 읽으며 정보를 얻는다고 했다. 산지에 직접 내려가 친환경 재배 농산물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최적의 청정구역이라는 강원도 양구를 방문했다. 올 겨울엔 그곳에서 수확한 무공해 제품인 산나물·콩 등을 팜스에서 전량 공급할 계획이라고 했다. “처음 회사를 인수하고 보니 자금 사정이 생각보다 심각하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영업실적이 안 좋은 직원들을 정리해고한 일이 가장 가슴 아파요. 남은 직원들에겐 초창기 힘든 시절만 잘 버텨보자고 했어요. 영업실적이 오르면 전 직원들을 소액 주주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직 사업 초기 단계지만 김 회장의 꿈은 크다. “이름만 걸어 놓고 앉아서 사업한다는 소리를 듣기 싫습니다. 아버지는 정치인으로서 꿈을 다 못 이뤘지만 저는 사업가로서 꿈을 반드시 이뤄보고 싶어요.” 김 회장은 “사업가로 성공한 다음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나의 아버지 JP’라는 책을 쓰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사람들이 아버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해와 편견을 걷어내고 싶다”고 덧붙였다. 소아암 환자를 돕는 사회사업에도 힘을 쏟고 싶다고 했다. 힘든 정치판 속에 몸을 부대끼고 살다 보니 얻은 병이 편두통과 관절염, 다발성 류머티즘이다. 벌써 25년째 앓고 있단다. 사업이라고 시작하니 이래저래 신경 쓸 일이 많아 요즘은 아플 겨를도 없다고 했다.

김예리 ㈜팜스 회장
1951년생
1974년 이화여대 조소학과 졸업
2005. 6월 팜스 회장


팜스는...

농협유통과 협력 계약을 체결해 농산물을 위탁 공급하고 있다. 올해 6월 설립된 팜스는 이달 중 롯데마트를 통해 ‘원적미’ 공급을 시작할 예정이다. 앞으로 백화점과 대형 마트에 본격적인 우리 농산물을 공급할 계획이다. 또 전국 대리점과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서도 판매망을 다각화할 방침이다. 운송·배송 전문회사인 ‘팜스 물류’ 설립도 추진 중이다. 현재 팜스는 한 달 매출이 1억원 수준이지만 내년 매출액은 30억~40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직원은 17명. 회사 홈페이지는 www.farms-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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