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삶과 추억 - 고 표세진 전 공정거래위원장 | 기업과 인연 안 맺으려 애쓴 관료

삶과 추억 - 고 표세진 전 공정거래위원장 | 기업과 인연 안 맺으려 애쓴 관료

1996년 1월 제1차 한·미 경쟁정책협의회를 주재하고 있는 생전의 표세진 공정거래위원장(왼쪽에서 둘째). 왼쪽은 당시 정책국장으로 있던 김용 공정경쟁연합회장.
킬리만자로 정상 부근에는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가 하나 있다. 그 높은 곳에서 표범은 무엇을 찾고 있었던 것일까….” (헤밍웨이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 11월 8일 표세진 전 공정거래위원장의 부음을 접하고 나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떠올렸다. 그도 히말라야에서 불귀의 객이 됐기 때문이다. 68세. 표 전 위원장은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왜 에베레스트로 떠났을까? 하늘과 맞닿은 에베레스트의 최정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해발 5545m의 칼라파타르 봉. 그가 이곳에 올라 찾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표 전 위원장의 가족에 따르면 그는 4700m 지점에서 등반자들의 건강을 체크하는 현지 의사로부터 200m만 더 오르라는 권유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그러마’ 하고는 칼라파타르 정상까지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그는 고산병 증세를 일으켰다. 100m쯤 내려오다 정신을 잃었고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히말라야로 날아간 유족들은 평소 고인의 뜻에 따라 현지에서 화장을 하고 유골을 수습해 돌아왔다. 표 전 위원장은 1994년 12월부터 96년 3월까지 제8대 공정거래위원장을 지냈다. 정부조직법 개편 때 중앙 행정기관으로 독립한 공정위의 첫 위원장이었다. 그는 차관급이었지만 준 독립부처의 장으로서 국무회의에 배석했다. 한번은 국무회의에서 업무를 둘러싸고 재정경제원 장관과 의견이 엇갈렸다.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재경원은 부총리 부서이자 분가한 공정위의 친정 격이었다. 회의를 주재하던 이수성 국무총리는 “두 부처의 의견이 팽팽히 대립해 조정이 쉽지 않으니 다시 협의를 해 보라”고 했다. 김용 공정경쟁연합회장(당시 공정위 정책국장)은 “표 전 위원장은 소신껏 업무를 처리했다”며 “비록 상급 부서인 재경원에 대해서도 지적할 것은 당당하게 말했다”고 회고했다. “이 때문에 재경원의 실무자들은 하급 부서인 공정위가 고분고분하지 않다고 수군거렸죠. 하지만 그는 한마디로 선비였습니다.” 그의 재임 시절 한 신문은 “기업들에 대한 불공정 조사와 처벌 강도를 대폭 높여 표 공정위원장은 TV 드라마 속의 명판관 ‘포청천’에 빗대 ‘표청천’이란 별명까지 얻게 됐다”고 썼다. 당시 공정위 출입기자였던 한 중견 기자는 “그는 추상같이 법을 집행했고 정치적으로 타협하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그 무렵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표 위원장은 “기업들은 정부의 규제에 불만”이라는 지적에 “재벌 규제가 우리나라에만 있다고들 하는데 재벌도 우리나라에만 있다”고 응수했다. 표 전 위원장은 95년 봄 10개 중앙 일간지의 부당 경품 제공 등에 대해 전면적인 조사를 벌였다. 당시만 해도 치외법권적인 지위를 누렸던 언론사의 불공정거래 행위에 대한 첫 조사였다. 신문사들은 빡빡하게 구는 공정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조사를 마친 뒤 그는 “모든 일간지가 경품을 제공한 것으로 드러났고 이들 언론사에 시정명령 등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표 전 위원장은 ‘인재 공급 기수’로 통했던 행정고시 7회 출신이다. 기수 중 처음으로 장관을 지낸 이석채 전 정보통신부 장관(현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은 “당시 그는 언론사 조사로 압력도 받았지만 원칙과 소신을 지켰다”면서 “그러다 보니 단명으로 공직생활을 마쳤다”고 털어놓았다. 이 전 장관은 표 전 위원장이 8년 연장자였지만 여행도 함께 다녔다고 밝혔다. 나이에 비해 행정고시 기수가 늦은 것은 그가 젊은 날 외교관이 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고시를 볼 무렵엔 외무직을 뽑지 않았다. 시험을 보기 위해 취직을 미루던 그는 결국 재경직에 응시했다. 그는 표 전 위원장이 경제기획원 총무과장이었을 때의 일화도 들려줬다. “당시 경제기획원 광화문 청사는 홑창이었다. 바깥 소음이 차단되지 않아 시끄러운 데다 겨울이면 안에 있어도 추웠다. 누구나 불편을 느꼈지만 돈이 드는 일이다 보니 아무도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추진력이 강한 표 과장이 나서 이 홑창을 이중창으로 바꿨다. 공사도 빈틈이 없어 나중에 손댈 일이 없었다.” 이 전 장관은 “자리 부탁 한번 하는 일 없는 그에게 상관들은 요직을 맡겼다”고 회고했다. 경제기획원 출신이었지만 국무총리 행정조정실로 보내자 그는 군말 없이 갔다. 때가 되자 돌아왔고 공정거래위원장까지 지냈다. 이 전 장관은 그의 처세로는 오르기 어려운 자리였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청렴·강직하면서도 소탈하고 인간미가 있어 가까워지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평가하면서 안타까워했다. 표 전 위원장은 서울 사당동 집에 오래 살았다. 그는 돈 욕심이 없었고, 경제 관료를 지냈지만 집을 키울 줄도 몰랐다는 게 이 전 장관의 설명이다. 생전에 표 전 위원장의 아버지는 이런 고지식한 아들을 지켜보면서 주변에 “세진이 같이 공부는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처자식이나 겨우 먹여 살리는 공무원의 길이 마뜩지 않았던 것이다. 표 전 위원장은 동시에 갖추기 어려운 여러 미덕을 갖고 있었다. 즉 양립시키기 어려운 것들을 양립시켰다. 그에 앞서 6대 공정거래위원장을 지냈고 행시 7회 중 이 전 장관과 쌍벽을 이뤘던 한이헌 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현 기술신용보증기금 이사장)은 그에 대해 “관료로서 주관이 뚜렷하면서도 모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조화시키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유연한 강직함이죠. 표 전 위원장은 능력도 있고 대인관계도 원만했습니다. 겸손했고 말을 할 땐 늘 웃는 얼굴이었죠.” 역시 행시 7회 출신인 이영탁 한국증권선물거래소 이사장(전 국무조정실장)도 “세상을 아주 반듯하게 살았던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그는 이어 “퇴임 후에도 관변의 후배들 주변에서 기웃거리지 않고 담백하게 살았다”고 덧붙였다. 표 전 위원장이 현직에 있을 때 공보관을 지낸 허선 공정위 사무처장도 “위원장님은 평소 인맥을 쌓거나 굳이 어떤 인연을 맺으려 들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아랫사람에게 화를 내거나 혼낸 적도 없습니다. 결재를 어떻게 할지도 예상할 수 있었죠. 결재가 날 일은 꼭 나고, 안 날 일은 안 났으니까요.”

가문의 희망 뒤엔 가족의 희생 서울대병원에 차려진 그의 빈소는 쓸쓸했다. 기업인들이 보낸 그 흔한 조화 하나 없었다. 공정위의 한 간부는 이런 빈소 풍경을 기업과 인연을 맺지 않으려 한 공직자로서 그의 처세와 연결시켜 해석했다. 표 전 위원장은 경남 함양생으로 진주농고를 나왔다. 서울대 정치학과에 진학해 고시까지 패스한 그는 가문의 희망이었다. 이런 그를 가족들은 희생으로 뒷바라지했던 듯하다. 그는 5남매의 맏이였지만 집안의 대소사에는 무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등학교를 나와 자영업을 하고 있다는 그의 남동생 세창씨는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형님은 끝까지 몰랐다”고 했다. 표 전 위원장의 히말라야 행은 부인밖에 몰랐다는 게 가족들의 설명이다. 친구들도 몰랐다고 한다. 세창씨는 “끝을 보고야 마는 형님의 성격이 화를 불렀다”며 “형님의 고집은 대통령도 못 꺾는다”고 말했다. “칠순이 되기 전에 히말라야를 밟고 싶어했습니다. 사고 소식을 듣고 현지에 갔더니 형님이 셰르파에게 칼라파타르에 오르고 나면 육안에 들어오는 에베레스트의 베이스 캠프까지 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더군요. 기력이 남았다면 아마 거기까지 갔을 거예요.” 세창씨는 형님의 고집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산이 거기에 있기에 오른다’는 말을 남긴 조지 말로리는 24년 여름 최악의 조건에서 동료의 만류를 뿌리치고 앤드루 어빈과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했다. 그들은 그러나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이 만일 성공했다면 최초의 에베레스트 정복자로 기록됐을 것이다. 99년 가을 발견된 그들의 유품 속엔 코닥 카메라가 있었다. 75년 만에 시도된 사진 현상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들의 에베레스트 등정 여부는 다시 역사 속에 파묻혔다. 당시 말로리·어빈 조사단에 참가했던 BBC의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피터 퍼스트브룩은 이 이야기를 책으로 썼다. 이 책의 제목이 바로 『그래도, 후회는 없다』이다. 애초 히말라야 행을 말렸다는 표 전 위원장의 부인 배경수씨는 “남편이 그렇게 떠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했다. 산행을 하면 정상을 밟아야 직성이 풀렸다는 그가 칼라파타르 봉에서 찾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고 표세진 전 공정거래위원장 1937년 경남 함양생 진주 농고·서울대 정치학과 졸, 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1969년 제7회 행정고시 합격, 경제기획원 행정사무관 1984~85년 한국개발연구원 연구관,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실 심사관 1985~94년 국무총리 행정조정실 심의관, 제3, 제4 행정조정관 1994~96년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차관급)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트럼프 2기 앞두고…美, TSMC에 최대 9.2조원 보조금 확정

2종로학원 “서울대 의예 294점·경영 285점…눈치작전 불가피”

3의대생 단체 "내년에도 대정부 투쟁"…3월 복학 여부 불투명

4‘5만 전자’ 탈출할까…삼성전자, 10조원 자사주 매입

5하나은행도 비대면 대출 ‘셧다운’…“연말 가계대출 관리”

6 삼성전자, 10조원 규모 자사주 매입 “주주가치 제고”

7미래에셋증권, ‘아직도 시리즈’ 숏츠 출시…“연금 투자 고정관념 타파”

8대출규제 영향에…10월 전국 집값 상승폭 축소

9“하루 한 팩으로 끝”...농심, 여성 맞춤형 멀티비타민 출시

실시간 뉴스

1트럼프 2기 앞두고…美, TSMC에 최대 9.2조원 보조금 확정

2종로학원 “서울대 의예 294점·경영 285점…눈치작전 불가피”

3의대생 단체 "내년에도 대정부 투쟁"…3월 복학 여부 불투명

4‘5만 전자’ 탈출할까…삼성전자, 10조원 자사주 매입

5하나은행도 비대면 대출 ‘셧다운’…“연말 가계대출 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