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단체장을 찾아서] 김세웅 무주군수… 공장 유치 목소리 잠재운 ‘역발상’
[CEO단체장을 찾아서] 김세웅 무주군수… 공장 유치 목소리 잠재운 ‘역발상’
신문배달 소년, 버스 승무원, 민주투사, 환경운동가, 그리고 군수. 김세웅 무주군수의 이력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전라도 ‘깡촌’의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 그것도 열두 형제 중 열한 번째로 태어나 50년을 넘게 살아온 ‘인생역전’이다. 그의 말대로 “3박4일 동안 해도 끝이 안 나는 얘기”가 나올 법하다. 그는 대뜸 이렇게 물었다. “학비를 못내 매일 집으로 쫓겨오는 형들을 본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토록 극한 경험을 체험한 사람은 아무리 험난한 시대를 살았던 50대라도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중학교 보낼 능력이 안 된다는 아버지의 말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국졸? 그는 어린 나이에도 이 학력으로는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돈벌어 중학교 진학” 그게 어린 나이에 돈벌이에 나선 이유였다. “신문배달에, 아이스크림·찹쌀떡 장사 등 안 해 본 것이 없다”는 그다. 그리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중학교에 진학했다. “내가 번 돈으로 산 교복을 입자 하늘을 날 것 같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그의 이력서에 정규 학력은 ‘중졸’이다. 20대 때 삶의 대 반전을 경험한다. 막노동해 번 돈으로 운전 면허를 땄다. 당시 꿈은 버스 기사. 그러나 ‘퇴짜’였다. 경험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버스 기사 일을 하고 싶었던 그는 경험을 쌓기 위해 버스 승무원 일을 시작했다. 그때 신군부가 등장한 것이다. 광주항쟁을 겪으며 그는 졸지에 버스 승무원에서 민주투사의 길로 들어섰다. 구타, 연금, 투옥…. 그는 “너무나 외로웠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빨갱이’ 낙인이 찍히고 경찰서를 오가던 중졸의 버스 승무원 출신 실업자를 누가 만나줬을까? 혼자 산과 내를 오가던 그가 환경운동에 눈을 뜬 것은 당연한 이치였을까? 1980년대 후반 천혜의 덕유산을 파헤치던 무주리조트 사업에 결사항쟁해 “난개발을 친환경개발로 이끈 성과”를 거뒀다. 이때부터 그는 환경운동가로 세인의 뇌리에 각인됐다. 95년 그런 그가 무주군수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무주는 제 삶과 비슷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했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빠져나올 수 없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어르신들이 ‘꼭 가난을 없애 달라’고 할 때마다 새롭게 각오를 다지게 되더군요.” ‘가난으로부터의 탈출’. 그 자신이나 고향이나 목표는 같았다.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그는 이 목표를 상당 수준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인구 3만 명, 그것도 65세 이상 인구가 22%에 달하는 외지고 작은 마을에 한 해 관광객이 480만 명이나 온다. 이들이 한 해에 뿌리는 돈 수백억원은 그대로 무주주민의 젖줄이다. 거기에 무주에서 생산하는 농산물은 “없어서 못팔 정도”다. 성공을 위해 그가 달려온 10년의 세월은 지난했다. 그는 장기적으로 봤다. 어차피 수십 년 계속된 가난이었다. 짧은 시간에 극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장기적인 시각에서 그가 가장 중시했던 것은 ‘브랜드’. “좋은 브랜드는 그 자체만으로도 상품을 팔리게 만들지 않느냐”며 “하지만 좋은 브랜드 만들기만큼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도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브랜드 전략이 핵심” 그의 브랜드 전략에 그의 CEO 마인드가 숨어 있다. ‘발상의 전환’이 첫째다. “무주가 왜 가난했는지를 봅시다. 80년대까지는 공장 하나가 중요했습니다. 취임 직후에도 주민들로부터 ‘큰 공장 하나만 유치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요. 하지만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공장 하나만 들어와도 무주는 망했을 것입니다. 청정지역의 이미지가 송두리째 망가졌을 테니까요.” 그는 ‘역발상’을 했다. ‘공장이 없어 가난했던 지역’이 ‘공장이 없어 부자가 될 수 있는 지역’으로 탈바꿈될 수는 없을까? ‘저발전의 원인’을 ‘발전의 동력’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환경운동을 하며 선진국 사례를 많이 참고했다”는 그는 “공장이 없는 청정지역이라는 이미지로 가난을 탈출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어떻게 이 같은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을까? 여기서 그의 두 번째 성공 요인이 나온다. 바로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다. “청정지역이 뜰 것으로 확신한 것은 피터 드러커나 앨빈 토플러 등 세계 석학들의 책들을 탐독한 결과”라고 말한다. “인간은 오염된 곳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이 ‘먹거리’였다. 시간이 갈수록 현대인의 식탁은 불안해질 테고 ‘공장 없는 청정 무주’의 먹거리가 식탁을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셋째가 ‘전략’이다. “무주의 먹거리는 다른 지역보다 확실히 좋지만 이를 알리는 것이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브랜드 전략을 도입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주군을 상징하는 확실한 브랜드 하나만 있어도 상당한 수준의 실적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다음 단계. 철저한 조사다. 무주군을 대표할 수 있는 상징, 그것은 청정지역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했다. 이 ‘브랜드’를 찾기 위해 그는 무주의 역사에서 청정지역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반딧불이였다. “반딧불이를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청정지역에서만 살지요, 따뜻하고 정감어린 느낌을 주지요, 게다가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던 반딧불이의 주요 서식지가 바로 무주였던 것입니다.” 그가 97년 이후 반딧불이 축제를 해 온 것은 다른 지역의 축제와는 다소 다르다. 관광객 유치나 무주의 홍보 외에 더 큰 목적이 있다. 바로 반딧불이라는 브랜드의 홍보였다. 그는 이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반딧불이 축제는 한 해 6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많은 이에게 무주는 반딧불이를 연상시키게 됐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목표가 잡히고 있다. ‘반딧불이’ 상표를 붙인 무주 먹거리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15kg짜리 무주산 사과 박스는 비싸지만 없어 못판다”고 설명한다. 브랜드 전략의 개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는 자신의 인생역정에서 확실하게 배운 철학을 그대로 군행정에 적용시키고 있다. ‘준비와 기회가 만나면 100% 성공’이라는 인생관이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온다. 문제는 그 기회를 잡을 준비를 했느냐다”라고 말하는 그의 행정에는 늘 이 철학이 자리잡고 있다. 준비, 준비, 준비…. 끝없이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최근 연타석 홈런을 날렸다. 태권도공원과 환경레저형 기업도시 등 두 가지 국책사업을 따낸 것이다. 특히 태권도 공원은 세계 태권도의 성지 역할을 담당할 곳으로 세계 태권도인의 발길을 끌어당길 것이 확실하다. 김 군수는 이 공원을 유치하기 위해 무주구천동(九千洞)의 본래 이름이 무주구천둔(九千屯)이었다는 사실까지 밝혀냈다. 삼국시대부터 9000명의 무인들이 주둔하며 무술을 연마해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때 무술은 태권도의 시조다. 그는 또 하나의 기회를 잡았다. 김치, 생선, 닭 등 먹거리에 불안이 커진 지금이 바로 반딧불이 먹거리를 알릴 좋은 기회다. 그는 지난해 말부터 대대적인 반딧불이 홍보를 시작했다. 소비자의 불안심리를 파고들어 무주 먹거리의 장점을 알리고 브랜드 가치를 높이겠다는 의도다. 그의 10년 된 준비가 또다시 기회를 잡게 될 것이다. 무주는 최근 부동산 값이 가장 많이 오른 지역으로 꼽힌다. 주민들의 집과 논밭 값이 오른 것이고 그만큼 자산 가치가 뛴 것이다. 이제 무주는 완전히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태세다.
김세웅 무주군수 1953년생 1972년 무주중 졸업 1995년 한국방송대 졸업 2004년 한양대 행정학 박사 1991년 전북도의원 1995·1998·2002년 무주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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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벌어 중학교 진학” 그게 어린 나이에 돈벌이에 나선 이유였다. “신문배달에, 아이스크림·찹쌀떡 장사 등 안 해 본 것이 없다”는 그다. 그리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중학교에 진학했다. “내가 번 돈으로 산 교복을 입자 하늘을 날 것 같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그의 이력서에 정규 학력은 ‘중졸’이다. 20대 때 삶의 대 반전을 경험한다. 막노동해 번 돈으로 운전 면허를 땄다. 당시 꿈은 버스 기사. 그러나 ‘퇴짜’였다. 경험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버스 기사 일을 하고 싶었던 그는 경험을 쌓기 위해 버스 승무원 일을 시작했다. 그때 신군부가 등장한 것이다. 광주항쟁을 겪으며 그는 졸지에 버스 승무원에서 민주투사의 길로 들어섰다. 구타, 연금, 투옥…. 그는 “너무나 외로웠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빨갱이’ 낙인이 찍히고 경찰서를 오가던 중졸의 버스 승무원 출신 실업자를 누가 만나줬을까? 혼자 산과 내를 오가던 그가 환경운동에 눈을 뜬 것은 당연한 이치였을까? 1980년대 후반 천혜의 덕유산을 파헤치던 무주리조트 사업에 결사항쟁해 “난개발을 친환경개발로 이끈 성과”를 거뒀다. 이때부터 그는 환경운동가로 세인의 뇌리에 각인됐다. 95년 그런 그가 무주군수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무주는 제 삶과 비슷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했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빠져나올 수 없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어르신들이 ‘꼭 가난을 없애 달라’고 할 때마다 새롭게 각오를 다지게 되더군요.” ‘가난으로부터의 탈출’. 그 자신이나 고향이나 목표는 같았다.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그는 이 목표를 상당 수준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인구 3만 명, 그것도 65세 이상 인구가 22%에 달하는 외지고 작은 마을에 한 해 관광객이 480만 명이나 온다. 이들이 한 해에 뿌리는 돈 수백억원은 그대로 무주주민의 젖줄이다. 거기에 무주에서 생산하는 농산물은 “없어서 못팔 정도”다. 성공을 위해 그가 달려온 10년의 세월은 지난했다. 그는 장기적으로 봤다. 어차피 수십 년 계속된 가난이었다. 짧은 시간에 극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장기적인 시각에서 그가 가장 중시했던 것은 ‘브랜드’. “좋은 브랜드는 그 자체만으로도 상품을 팔리게 만들지 않느냐”며 “하지만 좋은 브랜드 만들기만큼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도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브랜드 전략이 핵심” 그의 브랜드 전략에 그의 CEO 마인드가 숨어 있다. ‘발상의 전환’이 첫째다. “무주가 왜 가난했는지를 봅시다. 80년대까지는 공장 하나가 중요했습니다. 취임 직후에도 주민들로부터 ‘큰 공장 하나만 유치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요. 하지만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공장 하나만 들어와도 무주는 망했을 것입니다. 청정지역의 이미지가 송두리째 망가졌을 테니까요.” 그는 ‘역발상’을 했다. ‘공장이 없어 가난했던 지역’이 ‘공장이 없어 부자가 될 수 있는 지역’으로 탈바꿈될 수는 없을까? ‘저발전의 원인’을 ‘발전의 동력’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환경운동을 하며 선진국 사례를 많이 참고했다”는 그는 “공장이 없는 청정지역이라는 이미지로 가난을 탈출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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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웅 무주군수 1953년생 1972년 무주중 졸업 1995년 한국방송대 졸업 2004년 한양대 행정학 박사 1991년 전북도의원 1995·1998·2002년 무주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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