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 객원기자의 공개하지 못한 취재수첩] 첫 방북 때 조카에게 신고 갔던 운동화 벗어줘
[이호 객원기자의 공개하지 못한 취재수첩] 첫 방북 때 조카에게 신고 갔던 운동화 벗어줘
독자들의 성원에 정세영 명예회장의 비록을 한 번 더 게재합니다. 정세영 명예회장의 첫 북한 방문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마무리 글을 싣습니다. 다시 한번 ‘고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비록’을 애독하고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이 기사는 조만간 더욱 알찬 내용을 추가해 단행본으로 발행될 예정입니다. 〈편집자> 1998년 6월. 고 정세영 회장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꿈에도 사무치는 고향, 강원도 송전에 가게 됐기 때문이다. 형(고 정주영 명예회장)을 잘 둔 덕분에 다른 실향민들보다 고향을 먼저 가보게 됐다는 생각이 들 때는 판문점을 훌쩍 지나온 뒤였고, 그땐 솔직히 재벌이 좋다는 생각도 했다. 고향을 찾은 정 회장은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53년 만의 고향 방문이라는 사실 앞에서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아직도 수복되지 않은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태어나 소학교 6년을 마칠 때까지 고향에서 자랐다. 맏형인 왕회장의 아호가 아산(峨山)인 것은 고향을 가슴에 묻어놓고 싶어하는 애틋한 심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어린 정세영은 부모님과 식구들이 모두 서울로 떠나던 1941년, 소학교를 다 마쳐야 전학이 된다는 교육정책 때문에 고향에 남아야 했다. 혼자 남은 그는 부모님을 무척 원망했다. 큰형이 서울에서 쌀장사와 자동차 수리공장을 하면서 돈을 굉장히 벌었다니 그 위세를 앞세워서라도 한두 번쯤은 아산에 내려오리라 믿었다. 그런데 자신이 심상소학교를 마칠 때까지도 부모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열 밤만 자면 온다고 해놓고….” 떠날 때 남기고 간 어머니의 위로가 열흘 뒤 오시겠다는 거였다. 어린 아들은 그 말을 믿었다. 그런데 열흘이 1년이었다. 북한에는 해당화로 유명한 명사십리가 있지만 그보다도 이름이 더 알려진 송전(松田)은 말 그대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빼곡한 솔밭이었다. 그곳 해변에서 어린 아들은 눈두덩이 퉁퉁 붓도록 울면서 혼자 남게 한 부모를 수없이 미워했던 것이다.
“그 사이에 53년이 지나버렸어”
천하에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고향 동네에서 최고의 개구쟁이였다. 그는 다행히 막내 삼촌 집에서 건강하게 달음박질해가며 외로움을 달랬고, 다음해에 얼른 서울로 왔다. “아이고 살았다!” 솜이불보다 더 푸근한 어머니를 보면서 숨을 쉰다는 그것만으로도 어린 세영이에게는 행복이었다. 어릴 적 세영은 두 번 다시 고향을 찾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어리면 어린 대로, 늙으면 늙은 대로 까닭 없이 그리워지는 것이 고향이다. 마침 해방이 되던 45년. 벌써 18세가 된 세영은 서울 쌀밥을 먹는 것도 자랑할 겸, 아버지 환갑잔치 행사도 있고 해서 고향을 찾아갔다. 고향은 변하지 않았다. 친구들도 코밑에 더덕 뿌리처럼 잔수염이 나있는 것을 빼고는 예전과 여전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미 마을 어귀에 붉은 깃발이 보이고 생전 들어보지도 못했던 당 부녀회니, 사상학습회의니 이상한 소리들이 난무하더니 남북 사이에 길이 막혀버렸다. “그 사이에 53년이 지나버렸어….” 정 회장은 53년 만에 고향을 둘러보게 되는 그 감회를 무엇으로도 담아내기 힘들어했다. 발걸음 하나 옮길 때마다 기대와 흥분이 출렁거렸다. 사실 방북 허가는 통일부가 하고 있다. 북한의 문을 여는 것은 북한 당국이지만 들어가도 좋다는 허가권은 통일부가 쥐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방북의 결정도, 방북의 허가도 내용상으로 보면 현대의 몫이었다. 그것이 ‘현대의 힘’이었는지 모른다. 현대에는 이른바 ‘특명반’이 있었다. 왕회장 특명에 따라 움직이는 김윤규(전 현대아산 부회장)팀을 가리킨다. 팀장 격인 김윤규 전 부회장은 베이징과 서울을 핫라인으로 연결해 놓고 베이징에서 다시 평양으로 선을 놓아 대북사업을 추진했다. 정 회장은 고향 방문이 실현됐다는 보고를 받고 이내 깊숙이 눈을 감았다. 반세기가 넘어서 고향을 가게 된다는 그 감흥은 숨길 수 없었지만 막상 가게 된다고 하자 막연한 불안과 숱한 심정들이 뒤엉키는 거였다. 그 심정은 어떤 화가도 그려내지 못할 것 같았다. “어떻게 가는 거야?” 가는 방법을 몰라서 묻는 게 아닐 것이다. 이미 모든 절차와 스케줄과 승용차 몇 대가 어떻게 준비된다는 것까지 실무적인 문제들이 완벽하고 충분하게 세부적으로 짜여 있을 텐데 최고의 로열 패밀리가 가는 방법을 몰라서 걱정하고 있을 리는 없었다. “돌아오시는 것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냥 편하게 가시면 됩니다. 여기서 어떤 예상을 해도 막상 현지에 가시게 되면 전혀 다른 상황을 접하게 될지 모릅니다.”(김윤규) “그런가…. 그랬어? 준비는 뭘 하지?”(정세영) “특별히 준비하실 건 없겠습니다.” “명예회장님(왕회장)은 준비하시는 게 뭐요?” “없습니다. 한라의 정인영 명예회장님은 몸이 불편하셔서 이번에 빠지겠다고 하셨고. …특별히 준비 안 하셔도 되겠습니다. 돈은 한 5000달러 준비하면 되겠고, 북한에서 100달러짜리는 쓰실 데가 없으실 겁니다. 팁으로 주실 수 있게 잔돈이 좋습니다.” “뭣이? 팁으로 5000달러나 필요하단 말이오!”
“비아그라 사왔으면 좋았겠다” 정 회장은 반사적으로 소파에 기댔던 상체를 앞으로 당겼다. 줄곧 침착했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평소의 표정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사실 그는 소금 중에서도 왕소금이라고 할 정도로 짠 회장이었다. 미국에서 유학을 했던 탓인지 그는 돈 쓰는 것만큼은 영수증 없는 지출은 일전도 안 된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럼, 그 많은 돈을 어디다 다 써?” “평양에 가시게 되면 미술관을 안내받게 돼 있습니다. 거기서 그림 한두 점을 사주셔야 되지 않겠나 싶고요. 반드시 사야 된다는 건 아닙니다만, 중요한 분들이 방문하면 꼭 그쪽으로 안내를 한답니다. 그림 한 점에 보통 1000달러 정도 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체육관에 가면 회장단 일행을 환영할 때 격려금을 좀 주시는 게 어떨까 싶고요.” “명예회장님이나 다른 형님이 주시겠지 뭐.” “예? 그건 뭐….” 나중에 서울에 돌아왔을 때 정 회장의 짐 속에 북한의 그림은 한 점도 없었다. “다 둘러봤는데 살 만한 게 없던데 뭘….” 세계의 언론은 소떼를 몰고 가는 왕회장의 기상천외한 발상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많은 가축 중에 소를 선택했다는 아이디어에 박수를 보냈다. 우리 국민은 왕회장이 소년 시절 키우던 송아지를 몰고 집을 나왔다는 그 사연을 알고 있었지만 외국인들은 화면에 나타나는 모습만으로 ‘세기의 카우보이’라면서 박수를 쳤다. 북측 관계자들의 환대는 대단했다. 당연히 방문단의 주역인 큰형을 최대로 끌어안았지만 정 회장을 맞이하는 태도도 큰형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평양에 도착했을 때는 ‘비아그라’라도 가지고 갔으면 좋았겠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로 접대가 상상했던 그 이상으로 훌륭했다. 그러나 역시 북한 당국은 계산이 있었다. 정 회장은 긴장했다. 더구나 셋째 형 정순영 성우그룹 명예회장, 동생 정상영 KCC 명예회장도 있는데 북측의 고위 간부들이 줄곧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하는 게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저는 듣는 재주만 있습니다. 하하….” 분위기를 느낀 정 회장은 슬쩍 몸을 뺐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의도적으로 농담처럼 받아넘기면서 오히려 더 적극적이었다. 김용순 조선아태평화위원장은 비어있는 잔에 주스를 가득 채웠다. “주스를 받으시려면 몸을 앞으로 더 가까이하셔야 되시겠지요? 하하.” 모두 웃었지만 김용순은 극존칭을 써가며 화술도 간단치 않았다. 엉덩이 빼지 말고 진지하게 나오라는 주문이었다. 김용순 위원장은 많은 준비를 한 것 같았다. 그들의 화법은 결론부터 내밀고 배경 설명을 풀어놓는 식이었다. 주변 환경이 어떻고 생산성이 어쩌고 경제성이 있다 없다는 등의 설명은 거추장스럽다는 식이었다.
“솔직하게 털어놓겠습니다. 우리 공화국의 전력 사정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평양에 최소 10만㎾급 화력발전소 한 곳만 건설해 주셨으면 합니다.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워낙 전력 사정이 형편없어서….”(김용순) 큰형 옆에서 결국 상체를 세운 것은 정 회장이었다. 그러자 김 위원장도 눈빛을 살피는 기민함을 보였다. 숨막히는 신경전이었다. 김용순은 선수를 치듯 너스레를 피웠다. “우리는 정 회장 선생님 형제분들이 힘을 보태주시면 안 될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도자 동지께서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정 회장은 긴 호흡을 했다. 형들의 표정을 엿볼 필요도 없이 김용순의 요구는 이미 내부 회의를 거쳐 준비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고 그렇다면 무서운 강요로 봐야 했다. 개인적으로는 북한의 입장을 이해하고 주민들의 처지를 동정해 발전소를 건설해주고 싶다 해도 정부 당국하고 논의하지 않은 문제는 어떤 형태가 되었건 긍정적인 답변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제안을 하신 거니까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김윤규 사장하고 현대 실무팀들이 김 위원장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열심히 검토를 합니다.” 이 자리에서 결론은 내려 줄 수 없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 성과 없는 제안을 할 사람은 처음부터 아니었을 것이다. “호상 간에 논의는 해야 되겠지요. 우리는 정 회장 선생님의 의지를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김용순) 왕회장에게 승부수를 던진 셈이었다. “그건 말씀을 하자면 말이지요…. 우리 정세영 회장이 정답을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검토와 논의를 해봐야지요. 그런데 저의 의지를 알고 싶다 하시니까 말씀을 드리겠는데, 제가 여기에 올 때는 큰 목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번에는 고향을 방문한다는 목적으로 왔습니다만 제가 움직일 때는, 이를테면 북한을 도와 우리 민족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통일의 길을 찾고, 그런 노력을 해볼 생각으로 북한을 방문하는 거지요.” 갑자기 박수가 터졌다. 그러나 왕회장은 웃음을 보일 뿐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도울 조건이 되면 도와 드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제 의지입니다, 하하항….” 김 위원장은 알듯 모를 듯한 표정을 잠시 보이더니 팔을 크게 벌려 손바닥을 탁탁 쳤다. 어떻게 해석을 했건 얼른 넘어가는 게 상책이다. 정 회장도 그랬고 모두가 흡족하다는 듯이 웃어보이며 빨리 자리를 털자는 표정들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북측이 내놓은 요구사항들은 발전소 건설 외에도 중유 제공을 비롯해 공단 건설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것을 합쳐 일단 19가지에 달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분명하게 합의서를 작성하는 일은 없었다.
조부모 墓까지 급조하는 등 ‘칙사 대접’ 비로소 핏줄의 땅, 고향이었다. 사실 북한 당국에서는 왕회장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해왔었다. 조부의 산소를 꾸미고 묘비까지 세운 것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급조한 탓인지 비문의 형식도 낯설었지만 조부의 이름이 잘못 새겨져 있었다. ‘정수학(鄭守學)’이라고 되어 있지 않고 붉은색 한글로 ‘고 정성학 묘’라고 새겨 놓은 것이다. 주변에 형제들만 있었으면 한바탕 웃었을 것이다. “네가 세영이로구나!….” 여든여덟 된 숙모가 정 회장을 맞이할 때 여기가 분명 고향이었다. 그리고 막내 정상영 회장의 어릴 적 이름을 부르며 “너들은 모른다. 너들은 몰라, 내가 너들 생각을 얼마나 했는데”하면서 끌어안을 때는 이미 눈물바다였다. 친인척들이 모여 앉아 서로 눈빛을 맞추며 어색한 웃음을 나누고 안부를 물어나갈 때 우선 핏줄을 확인하는 것부터 조마조마했다. 셋째 형과 막내도 마찬가지였고 정 회장도 여든여덟 살이 된 막내 숙모와 두 살 아래인 사촌형 외에는 전혀 기억에 없는 친척들이었다. 숙모와 삼촌이 일일이 소개를 하고 ‘얘는 누구 아들’ ‘얘는 누구 손자’라고 했으나 남쪽의 식구들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특별한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참으로 50년 세월은 이처럼 잔인하고 무서운 거였다. 다음날은 금강산 관광이었다. 고향이 금강산 끝자락에 붙어 있었지만 정 회장은 안내원의 설명이 없었다면 금강산의 관광 코스가 22곳이라는 것을 모르고 돌아왔을 뻔했다. 이날따라 금강산은 완전히 안개에 파묻혀 있었다. 계곡으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와 안개가 소용돌이치듯 물살에 휘감기며 빨려들어가는 광경은 대단한 장관이었다. 그러나 그 안개 때문에 금강산 관광은 망쳐버렸다. 산의 형체만 느껴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산을 밟아는 봐야겠다고 모두 배를 내밀면서 나섰다. “아무래도 큰형님은 안 되겠지요?” 위험할 것 같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산길이 미끄럽고 앞을 분간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 봤어!” 모두 웃었다. 위험해서 가지 않는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 왕회장이었다. 일행은 여자 안내원과 큰형을 남겨놓고 금강산 품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금강산은 좋은 시절에 다시 오라는 듯 몇 걸음 받아주지 않고 이내 일행을 내보냈다. 산행에 익숙한 정 회장조차 도저히 안개를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 정순영 회장은 입고 있던 점퍼를 조카에게 벗어주었다. 정 회장은 잠시 망설이더니 신었던 운동화를 벗었다. “한 번밖에 안 신은 거야!” 그러자 옆에 있던 막내 동생 정상영 KCC 명예 회장이 해설을 달았다. “비싼 돈 주고 샀는데 아깝다는 소리여.” 모두 웃었다.
故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1928년 8월 강원도 통천생 1953년 고려대 정치학과 졸업 1957년 미국 마이애미대 정치외교학과 석사 1967∼87년 현대자동차 사장 1977∼95년 한·영 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 1982∼94년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부회장 1987∼97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부회장 1987∼95년 현대그룹·현대자동차 회장 1996∼99년 현대자동차 명예회장 1999∼2005년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2005년 5월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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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그라 사왔으면 좋았겠다” 정 회장은 반사적으로 소파에 기댔던 상체를 앞으로 당겼다. 줄곧 침착했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평소의 표정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사실 그는 소금 중에서도 왕소금이라고 할 정도로 짠 회장이었다. 미국에서 유학을 했던 탓인지 그는 돈 쓰는 것만큼은 영수증 없는 지출은 일전도 안 된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럼, 그 많은 돈을 어디다 다 써?” “평양에 가시게 되면 미술관을 안내받게 돼 있습니다. 거기서 그림 한두 점을 사주셔야 되지 않겠나 싶고요. 반드시 사야 된다는 건 아닙니다만, 중요한 분들이 방문하면 꼭 그쪽으로 안내를 한답니다. 그림 한 점에 보통 1000달러 정도 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체육관에 가면 회장단 일행을 환영할 때 격려금을 좀 주시는 게 어떨까 싶고요.” “명예회장님이나 다른 형님이 주시겠지 뭐.” “예? 그건 뭐….” 나중에 서울에 돌아왔을 때 정 회장의 짐 속에 북한의 그림은 한 점도 없었다. “다 둘러봤는데 살 만한 게 없던데 뭘….” 세계의 언론은 소떼를 몰고 가는 왕회장의 기상천외한 발상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많은 가축 중에 소를 선택했다는 아이디어에 박수를 보냈다. 우리 국민은 왕회장이 소년 시절 키우던 송아지를 몰고 집을 나왔다는 그 사연을 알고 있었지만 외국인들은 화면에 나타나는 모습만으로 ‘세기의 카우보이’라면서 박수를 쳤다. 북측 관계자들의 환대는 대단했다. 당연히 방문단의 주역인 큰형을 최대로 끌어안았지만 정 회장을 맞이하는 태도도 큰형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평양에 도착했을 때는 ‘비아그라’라도 가지고 갔으면 좋았겠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로 접대가 상상했던 그 이상으로 훌륭했다. 그러나 역시 북한 당국은 계산이 있었다. 정 회장은 긴장했다. 더구나 셋째 형 정순영 성우그룹 명예회장, 동생 정상영 KCC 명예회장도 있는데 북측의 고위 간부들이 줄곧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하는 게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저는 듣는 재주만 있습니다. 하하….” 분위기를 느낀 정 회장은 슬쩍 몸을 뺐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의도적으로 농담처럼 받아넘기면서 오히려 더 적극적이었다. 김용순 조선아태평화위원장은 비어있는 잔에 주스를 가득 채웠다. “주스를 받으시려면 몸을 앞으로 더 가까이하셔야 되시겠지요? 하하.” 모두 웃었지만 김용순은 극존칭을 써가며 화술도 간단치 않았다. 엉덩이 빼지 말고 진지하게 나오라는 주문이었다. 김용순 위원장은 많은 준비를 한 것 같았다. 그들의 화법은 결론부터 내밀고 배경 설명을 풀어놓는 식이었다. 주변 환경이 어떻고 생산성이 어쩌고 경제성이 있다 없다는 등의 설명은 거추장스럽다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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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모 墓까지 급조하는 등 ‘칙사 대접’ 비로소 핏줄의 땅, 고향이었다. 사실 북한 당국에서는 왕회장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해왔었다. 조부의 산소를 꾸미고 묘비까지 세운 것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급조한 탓인지 비문의 형식도 낯설었지만 조부의 이름이 잘못 새겨져 있었다. ‘정수학(鄭守學)’이라고 되어 있지 않고 붉은색 한글로 ‘고 정성학 묘’라고 새겨 놓은 것이다. 주변에 형제들만 있었으면 한바탕 웃었을 것이다. “네가 세영이로구나!….” 여든여덟 된 숙모가 정 회장을 맞이할 때 여기가 분명 고향이었다. 그리고 막내 정상영 회장의 어릴 적 이름을 부르며 “너들은 모른다. 너들은 몰라, 내가 너들 생각을 얼마나 했는데”하면서 끌어안을 때는 이미 눈물바다였다. 친인척들이 모여 앉아 서로 눈빛을 맞추며 어색한 웃음을 나누고 안부를 물어나갈 때 우선 핏줄을 확인하는 것부터 조마조마했다. 셋째 형과 막내도 마찬가지였고 정 회장도 여든여덟 살이 된 막내 숙모와 두 살 아래인 사촌형 외에는 전혀 기억에 없는 친척들이었다. 숙모와 삼촌이 일일이 소개를 하고 ‘얘는 누구 아들’ ‘얘는 누구 손자’라고 했으나 남쪽의 식구들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특별한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참으로 50년 세월은 이처럼 잔인하고 무서운 거였다. 다음날은 금강산 관광이었다. 고향이 금강산 끝자락에 붙어 있었지만 정 회장은 안내원의 설명이 없었다면 금강산의 관광 코스가 22곳이라는 것을 모르고 돌아왔을 뻔했다. 이날따라 금강산은 완전히 안개에 파묻혀 있었다. 계곡으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와 안개가 소용돌이치듯 물살에 휘감기며 빨려들어가는 광경은 대단한 장관이었다. 그러나 그 안개 때문에 금강산 관광은 망쳐버렸다. 산의 형체만 느껴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산을 밟아는 봐야겠다고 모두 배를 내밀면서 나섰다. “아무래도 큰형님은 안 되겠지요?” 위험할 것 같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산길이 미끄럽고 앞을 분간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 봤어!” 모두 웃었다. 위험해서 가지 않는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 왕회장이었다. 일행은 여자 안내원과 큰형을 남겨놓고 금강산 품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금강산은 좋은 시절에 다시 오라는 듯 몇 걸음 받아주지 않고 이내 일행을 내보냈다. 산행에 익숙한 정 회장조차 도저히 안개를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 정순영 회장은 입고 있던 점퍼를 조카에게 벗어주었다. 정 회장은 잠시 망설이더니 신었던 운동화를 벗었다. “한 번밖에 안 신은 거야!” 그러자 옆에 있던 막내 동생 정상영 KCC 명예 회장이 해설을 달았다. “비싼 돈 주고 샀는데 아깝다는 소리여.” 모두 웃었다.
故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1928년 8월 강원도 통천생 1953년 고려대 정치학과 졸업 1957년 미국 마이애미대 정치외교학과 석사 1967∼87년 현대자동차 사장 1977∼95년 한·영 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 1982∼94년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부회장 1987∼97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부회장 1987∼95년 현대그룹·현대자동차 회장 1996∼99년 현대자동차 명예회장 1999∼2005년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2005년 5월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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