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성차별을 넘어 고활용으로
이제 성차별을 넘어 고활용으로
새천년에 접어들며 한국 여성의 사회 진출은 눈부셨다. 역사상 최초의 여성 법무부 장관·헌법재판관·대법관·법원장·부장검사가 탄생했고 최초의 여성 지방경찰청장과 직업 외교관 출신의 첫 여성 대사는 각각 제주도와 튀니지로 발령을 받았다. 금녀의 영토로 여겨지던 서울대 법대에 여성 교수가 처음 임용됐고, 과학문화재단 이사장에 여성이 임명되면서 학계도 경사를 맞았다. 반만년 만에 여군 장성이 등장했고, 어린 여군 소위는 여자를 절대 태우지 않는다던 커다란 해군 함정에 올랐다. 첫 여성 해양경비정장, 첫 여성 특수용접사, 첫 여성 아이스하키 심판, 첫 여성 비뇨기과 교수도 있었다. 게다가 2005년 외무고시 합격자는 처음으로 절반 이상이(52%) 여성이었고, 행정·사법고시에서도 5년 새 10% 안팎의 증가세를 보였다. 그런데 2005년 유엔개발계획(UNDP)은 한국의 여성권한척도(GEM)가 겨우 59위밖에 안 된다고 발표했다. 그나마 전년 대비 9단계 도약했다는 성적이 이랬다. 여성 의원·행정관리직·전문기술직 비율과 남녀 소득격차 등 네 항목을 종합 평가하는 GEM은 해당 국가 여성의 지위 수준을 가장 유효하게 설명하는 잣대라 일컬어진다. 같은 해 5월 세계경제포럼(WEF)이 내놓은 ‘여성의 권리:글로벌 남녀 불평등 조사’ 보고서에서도 한국은 7점 만점에 3.18로 이집트·터키·파키스탄·요르단에 이어 최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에 28개 신흥시장 국가를 더한 58개 나라 중 54위를 기록하면서 남녀 차별이 타 문화권보다 심하다고 여겨지는 이슬람권 정도의 수준으로 평가돼 충격을 더해줬다. 스웨덴·노르웨이·아이슬란드 북유럽 3개국이 1~3등을 차지했고 중국은 33등, 일본은 38등이었다. 그렇다면 한국 여성의 사회 진출이 어느 정도인지 조목조목 따져보자. 우선 통계청의 2005년 ‘경제활동 인구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여성 경제활동 인구는 전체 여성의 50.2%로 미국보다 15% 정도 낮다(경제활동 인구는 만 15세 이상 취업자나 취업 의사가 있는 실업자를 합친 수다). 학력별 경제활동 참가율을 OECD 국가 평균과 비교해 보면 국제적 수준과 얼마나 간극이 깊은지 깨닫게 된다. 그래프(오른쪽)에서 보듯이 우리나라 대졸 이상 남녀의 경제활동 참가율 격차는 약 35%로 OECD 회원국 평균인 7%의 다섯 배에 이른다. 2004년 대학졸업생 성별 분포는 여성 49.4%, 남성 50.6%였다. 따라서 교육의 성별 차이는 거의 없으나 경제활동 참가율의 차이는 매우 심각하다. 의사결정의 지위에 여성이 얼마나 진출해 있느냐는 문제는 고사하고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 자체가 매우 저조한 형편이다. 세계적인 컨설팅기업 매킨지는 2001년 ‘우먼 코리아 보고서’에서 한국 경제의 핵심 대안은 여성 인력의 활용이라고 주장했다. 삼성경제연구소 강우란 수석연구위원은 199'0년대 기업 내 여성 인력의 이슈가 ‘성차별’(discrimination)이었다면 21세기의 화두는 ‘저활용’(underutilization)이라고 말했다. 국제노동기구(ILO)에 따르면 97년 한국 여성 관리자(과장급 이상)가 전체 관리직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4%였다. 40%가 넘는 미국은 논외로 치더라도 필리핀(30%)이나 거의 20%에 육박하는 칠레·말레이시아·멕시코 등과 비교해도 명함조차 못 내밀 형편이었다. 여성 차별적 고용 관행으로 유명한 일본의 9%에도 한참 뒤졌다. 같은 해 정무 제2장관실의 자료에 따르면 50대 그룹(586개 기업)의 수치는 훨씬 낮아 과장급 이상 11만96명 가운데 여성은 729명으로 1%도 안 됐다. 그럼 2000년대에는 좀 나아졌을까. 전혀 아니다. 노동부 ‘임금구조 기본통계조사’(1999~2001)에 따르면 민간 부문에서 과장급 이상은 7000~8000명이며 전체 관리자의 4~5%로 거의 변함이 없었다. 그나마 공공 부문은 중앙인사위원회가 ‘양성 평등 채용 목표제’를 시행해 2004년 공무원 채용시험에서 남성 27명, 여성 65명이 목표제의 적용을 받았다. 또한 5급 이상 여성 임용 목표제를 실시해 48개 중앙부처 기관 중 과장급 이상에 여성이 있는 곳이 2003년 말 27개에서 2005년 40개(83%)로 대폭 증가했다. 또한 과학기술부의 ‘여성 과학기술 인력 채용 목표제’와 교육인적자원부의 ‘국공립대 여성 교수 채용 목표제’ 등이 실시 중이다. 전문가들은 관리직 여성 공직자 증가가 고시 합격자 증가 등 여성 스스로 개척한 부분도 있지만 성별 균형을 꾀하는 정부의 균형인사도 도움이 됐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민간 부문의 사정은 매우 열악하다. 앞서 말했듯이 기업의 여성 관리자 비율은 5%가 채 되지 않는다. 더욱이 500인 이상의 대규모 사업체로 갈수록 여성 관리자 비율은 더욱 낮아진다. 실제로 삼성·LG·현대차·SK·한진·롯데·GS·한화·현대중공업·금호아시아나 등 10대 그룹의 오너 일가를 제외한 여성 임원은 모두 24명으로 전체 임원 수 3875명의 0.6%에 지나지 않는다(LG가 11명으로 가장 많고 현대차·현대중공업·롯데·두산은 0명이다). 여성의 고위직 진출은 여러 가지 요인으로 방해를 받는다. 우선 ‘유리 천장’과 ‘유리 벽’의 존재다. 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막는, 보이지 않는 인위적 장벽을 유리 천장이라 한다면 유리 벽은 여성이 핵심 임원직으로 상승할 수 있는 전략적 분야로 배치되지 못하도록 막는, 보이지 않으나 인위적인 장벽이다. 실제로 어느 국책은행 여성 간부에 따르면 “남자들이 하기 싫어하고 열심히 해도 빛이 안 나는 그런 자리만” 여성에게 돌아간다. 또 그런 현상은 직급이 올라갈수록 더 심해진단다. 한국노동연구원 이주희 연구위원은 저서 ‘유리 천장 깨뜨리기’에서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중요한 직무의 기회가 여성에게 차별적으로 주어진다”며 “기존 관리자들이 여성보다 남성이 조직에의 기여도가 높다는 차별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흔히 술자리로 끈끈하게 맺어지는 남성 중심의 기존 관행에 거부감을 표하는 여성이 많다. 이런 과정에서 다수의 남성은 소수의 여성을 이기적인 존재로, 혹은 리더십이 부족한 존재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물론 변화를 도모하는 기업들이 전혀 없지는 않다. 삼성SDS는 선후배 간 멘토링 공간으로 인터넷 여성 커뮤니티를 운영한다. 그러나 이 회사 역시 여성 인력이 전체의 16%에 지나지 않으며 관리자 비율은 5%도 채 안 된다. 하지만 여성 공채가 90년대 초반에 시작된 만큼 앞으로 승진 인사가 대거 발표되리라는 기대가 있다. 저출산 고령화 시대로 여성 인력 활용이 절실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 가지만 다수의 한국 기업은 여전히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에 거부감을 보인다. 대체로 관리직은 업무 성격상 연속성이 중요하고 몇 개월만 자리를 비워도 회사나 개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다. 이런 기업의 입장에 관리직 여성들도 어느 정도 공감을 표한다. 다국적 기업의 한 여성 임원은 “사실 3개월씩 자리가 비면 문제가 있다. 기업이 이런 비용을 부담할 이유가 없다. 사실 이건 여성에게 불리한 정책이다. 기업이 고용을 기피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또 대기업의 한 여성 부장은 “육아휴직을 쓰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1년씩 직무를 놓는다면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환경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데… 나중에 다시 적응이나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정부 역시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으로 발생하는 비용을 기업에 전적으로 부담시키면 여성의 직무를 비정규직화하는 불이익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정부는 올해부터 90일의 산전후 휴가기간 중 기업의 60일 임금부담분을 중소기업부터 없앤다. 대기업의 임금부담분도 2008년 이후면 없어질 전망이다. 한편 지난해 말 ‘적극적 고용 개선조치’(AA)의 도입을 뼈대로 한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정부는 2008년까지 GEM 35위권 진입을 목표로 올 3월 시행에 돌입했다. 이에 따라 사업주는 직종별·직급별 남녀 근로자 현황을 노동부에 제출해야 한다. 만약 동종산업 유사 규모 기업과 비교해 여성을 현저히 적게 고용했거나 여성 관리직 비율이 낮으면(80% 미만) 개선방안을 마련해 시행하고, 그 결과를 노동부에 보고해야 한다. 대상은 상시 근로자 1000인 이상 기업 540개소, 정부 투자기관 14개소, 정부 산하기관 92개소다. 경영자총연합회 관계자는 “기업의 행정적 부담이 가중됨은 물론이고 할당고용제 비슷하게 강제하면 오히려 역차별의 소지가 있다”며 “여성 노동시장의 단절은 사회적 책임인데 기업에만 부담을 준다. 공공 보육시설 확대 등을 통해 여성 근로관계가 단절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녀 고용 평등은 임신·출산·육아와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문제는 그 모두가 여성만의 일이라는 인식 때문에 각종 차별이 생긴다. 예를 들어 현재 노동법상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은 모두 모성보호제도의 일환이다. 따라서 한국여성개발원 김영옥 인적자원연구실장은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 김 실장은 “육아를 모성의 전유물로 인식하는 게 문제다. 부성도 육아의 권리가 있다. 육아의 행복함을 느낄 권리가 아버지에게도 있다”고 말했다. 육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이뤄질 때 유리 벽과 유리 천장이 깨져 나갈 것이라는 얘기다. ikk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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