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부머의 디자인 혁명 “우리는 남들과 다르다”
베이비부머의 디자인 혁명 “우리는 남들과 다르다”
Design of The Times 1970년대의 어느 날 저녁, 한 술집 문밖의 보도에 커다란 포도주 상자가 버려져 있기에 집으로 끌고 왔다. 어느 쪽이 위쪽인지 알아보도록 검은색 작은 우산 문양이 인쇄돼 있었다. 바닥에 커다란 검은색 바퀴를 달아서 거실 한가운데 끌어다 놓고 보니 커피 테이블로 안성맞춤이었다. 단단한 노란색 널판은 우리가 포도주 마실 때 쓰는 프랑스식 잔의 쟁반을 넣을 만큼 공간이 넉넉했다. 그러나 진짜 용도는 우리 엄마 골려주기였다. 엄마는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아니나 다를까 한마디씩 하셨다. “얘야, 저 테이블이 방을 다 버려놓는다.” 그때마다 상자의 수명은 2년씩 연장됐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았다. 60년대(우리가 최고라는 자부심으로 살았던 그 10년 세월은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한창까지가 절정기였다)에 우리는 기숙사에서 나와 기록적으로 많은 인원이 처음으로 자기 집을 갖게 됐다. 우리의 공간에 우리의 흔적을 남기려고 혈안이 된 이 젊은 세대는 고리타분한 건축 장식을 떼어내고, 우리의 높은 기대에 걸맞은 낙천적인 원색으로 역사에 덧칠을 했다. 자기표현과 저렴한 집세라는 명목 아래 우리는 도시의 개척자가 되어 재래식 주택의 한계를 탐사했다. 빅토리아풍의 대저택을 여러 칸으로 나눈 집, 가게, 볼링장, 그리고 심지어 주유소에서도 살았다. 우리의 열정으로 벽을 도배질했다. ‘보비를 살리자’는 포스터와 ‘샤베즈 만세’라는 포스터가 유행이었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물건에 의미가 담겼으며 우리 개성의 연장을 의미하는 정치의식의 표현이었다. 도노반은 1969년의 노래에서 “I love my shirt”라고 스물네 번이나 되뇌었다. 상상하기 어렵다고? 당신이 스무 살이 된 이래 소유했던 모든 소파와 관련된 감정들을 떠올려 보라. 1946~54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 첫 주자들(3221만7944명 정도)은 찬성보다 반대를 더 많이 했다. 기득권층, 월남전, 그리고 스타일 면에서 보자면 따분하고 물질적인 부모 세대의 가치관이 모두 반대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집과 그들이 자주 찾는 펀바(양치류 식물로 장식한 레스토랑)의 모습은 장식 이상을 뜻했다. 저항의 행위였다. ‘우리는 당신들과 달라요!’ 그 모습은 다른 무엇이기도 했다. 종족을 가르는 뚜렷한 문양처럼 우리의 스타일은 끼리끼리 알아보는 새 방식이 됐다. ‘아! 당신도 나처럼 앞서가는군.’ 유일하게 변치 않는 것이라곤 ㅂ-ㅂ-ㅂ-ㅂ-변화뿐이었던 20년 이상의 세월에 이처럼 편하게 살아가고 적응력이 뛰어난 베이비부머에게 스타일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기다려 보라”고 얀켈로비치, 스켈리 앤 화이트의 저명한 사회 연구가 플로렌스 스켈리는 70년대에 예언했다. “자식은 부모의 그늘을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 사회낙오자가 이 ‘반항아들’처럼 가죽 프라이 부츠를 신고, 엘엘 빈 순모 셔츠를 입고,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는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1968년 5월 냉장고를 사용하는 부르주아 사회에 항의하려고 거리로 쏟아져나온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공감했던 바로 그 20대들은 20년 뒤 대형 붙박이 냉장고의 배치를 놓고 짜증을 부리게 된다. 바람처럼 돌아다니고 느긋하게 살던 그 시절 누가 세기 말에 이르면 베이비부머들이 3조5000억 달러어치의 부동산을 소유하게 되리라는 걸 알았겠는가? 베터 홈스 앤 가든스(BH&G)는 우드스톡의 해인 1969년 가장 잘나가던 가정·가족 잡지로서 50년대의 목가적 가치관을 찬양했다. 그러나 그 잡지 기자들이 아이오와주 데모인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BH&G 독자들의 자식은 이미 거의 다 성인이 되어 반 BH&G적으로 행동했다. 그들은 대학을 갓 졸업한 베이비부머용 잡지를 내기로 결정하고 제목을 아파트먼트 라이프라 지었다. 보도에 있던 포도주 상자를 집에 가져다 놓은 일이 있었을 무렵 나는 그 잡지 편집자가 됐다. 그래서 1981년 그 잡지가 독자들과 함께 성장해 메트로폴리탄 홈으로 바뀌는 모습을 자랑스럽게 보았다. 두 가지 추진력이 한데 모여 60년대의 홈 스타일을 만들었다. 하나는 위트의 승리(갖가지 제스처, 손재주의 대상이 된 집)이고 또 하나는 순전한 모더니즘이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용기만 있으면 무엇이라도 램프가 됐다. 스파게티 여과기나 과일 바구니를 거꾸로 뒤집어놓고 가운데 구멍을 낸 다음 전구·소켓·전선을 연결하면 짜잔~, 내거는 램프가 됐다. 철물점은 우리의 놀이터였다(모든 것을 뽁뽁이로 포장하기 오래전의 이야기다). 번쩍이는 새하얀 PVC 파이프를 만지작거려 마루 램프를 만들거나, 큰돈 안 들이고 찰흙 굴뚝 연통으로 불빛이 천장을 비추는 램프를 만들었다. 그것이 위트이고 스타일이었다. 그것을 만드는 행위는 그 두 가지를 갖췄다는 증거였다. 인간관계나 인습처럼, 파괴되지 않으면 우리가 깼다. 우리의 이미지에 맞게 다시 만들려는 목적이었다. 가짜 마호가니 식탁이야말로 최악이었다. 너무 많은 통나무가 노스캐롤라이나의 많은 가구공장을 거친 뒤 합판을 붙이고 조각 장식을 한 다음 “지중해”라는 아무 의미 없는 상표를 붙여 나온 물건이었다. 운수가 너무 나빠 그런 물건을 만났을 경우 해결책은 단 하나, 흰색으로 칠하면 됐다. 서둘러서. 60년대의 대안은 좀 더 근사했다. 목재소에서 톱질 받침 나무토막 두 개를 구한 다음 그 위에 속이 빈 나무문을 얹으면 됐다. 60년대의 안락의자란, 중고품 할인매장에서 덩치 큰 의자를 구해와 화가들이 쓰는 하얀 페인트 받이용 천을 두어 겹 씌운 다음 가구라 부르면 됐다. 당시에는 실내장식 전문지들이 “벼룩시장에서 찾아낸 횡재”라 부르는 물건이 실제로 존재했다. 밝은 피에스타웨어 접시류, 발톱이 공을 물고 있는 다리가 달린 황색 참나무 탁자, 베벌리 힐스 호텔의 로비에서 보는 특대 야자나무 이파리가 그려진 나무껍질 무늬의 오리지널 천 커튼을 찾아내는 사람은 안목이 있는 사람이었다. 쿠키 통도 나중에 앤디 워홀의 수집품으로 소더비 경매에 부쳐지면 엄청난 융자금이 필요해질 만한 물건이었다. 그런 독특한 물건들은 현대적 디자인이 유행하면서 대세로 자리 잡았다. 현대적 디자인은 건축가 벤 톰슨의 매장인 디자인 리서치에서 처음 일반 고객들에게 팔렸다. 디자인 리서치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마리메코의 핀란드 직물, 직선적인 하얀 소파, 이탈리아에서 나온 새 플라스틱 가구의 명소가 됐다. “실내가구는 건축의 일부라고 생각한다”고 톰슨은 말했다. 더 이상 나무인 체 위장하지 않고 즐겁게 여러 가지 형태를 띠면서 “플라스틱을 플라스틱”으로 당당하게 말하던 때를 생각해 보라. 높이 쌓아둔 조 콜롬보 의자나 아르테마이드 버섯램프가 단연코 압권이었다. 이 모든 것이 1972년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이탈리아, 새로운 가정풍경’이라는 중대한 전시회에서 정식으로 인증됐다. 선조들의 가치관을 부수는 일에 골몰하며 기존사회에 반기를 든 베이비부머들(일명 블루밍데일 히피족)에게는 이제 더 이상 본받고 따를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 굳이 우리의 생활방식을 이끌어준, 우리에게 유치한 60년대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려준 스승을 꼽자면 테렌스 콘란이다. 포도주 잔들이 복숭아처럼 유혹적인 자태로, 또 그처럼 구하기 쉽게 선반에 엄청나게 쌓여 있던 모습을 처음 본 순간이 기억나는가? 그것이 바로 콘란의 새로운, 민주주의적 디자인 개념이었다. 혹은 요란하게 장식한 캐비닛 문 뒤에 얌전하게 숨어 있지 않고 기능미를 찬양하며 당당하게 진열해놓은 요리 도구들에 둘러싸인 평범한 소나무 식탁의 주방을 처음 상상했던 때가 기억나는가? 콘란의 그런 구상은 바뀌어가는 우리의 본능에 딱 어울렸다. 이것이야말로 고상하지 않은 대중적 스타일이었다. 콘란은 1964년 런던 풀햄로드에서 기념비적인 첫 매장 해비탯을 열었다. 70년대 중반께는 10여 개가 더 문을 열었다. 해비탯은 곧 전 세계 디자인 애호가들의 표준이 됐다. 콘란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현대적이면서 동시에 심미적일 수 있는지 가르쳐줬다. 그는 1974년 ‘하우스북’을 출간했다. 온갖 아이디어가 가득한 권위적이고 우아한 안내서라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쓸모가 있다. 70년대의 관념에 가장 어울리는 생활공간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코 다락방이다. 칸으로 쪼개지지 않은 널찍한 마루 공간과 반문화적 예술가의 유혹적 이미지 덕분에 다락방은 당시 우리들 생활방식의 알맞은 비유가 됐다. 어떤 결합의 형태를 고르든 함께 사는 동거가 재래식 결혼보다 중시됐다. 다락방은 끝없는 마루, 벽 없는 공간, 큰 창문을 뜻했다. 어떤 딱지 붙이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방이 무슨 소용인가? 기능만큼이나 역할도 모호해졌다. 혼자 사는 여성은 이제 멀리 있는 주방에서 벽으로 차단된 외톨이 신세가 아니었다. 이제 원하는 사람은 모두 주방장이 될 수 있었다. 점점 강력한 기능을 가진 전문 취사도구가 등장하고 화강암·대리석 같은 강력한 소재가 포마이카(일명 호마이카)를 대치하면서 주방은 깨끗하고 환해져 진짜 거실, 가정의 중심으로 변했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자는 시대정신에서 요리 도구는 모두 만인이 보고 탐내도록 양지로 나왔다. 70년대 후반이 되자 이제 서른 살이 넘은 베이비부머 1세대들은 진짜 집에 안주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주방·식당과 거실 벽을 허물어 소위 큰방이라는 교외 스타일의 다락방을 만들었다. 한편 1978년 캘리포니아주 샌타모니카에서는 프랭크 게리가 티타늄의 큰 꿈을 꾸기 오래전, 단출한 자기 집을 수리했다. “무슨 대단한 선언을 하려는 생각은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여러 가지 발상을 지어보려는 시도였다.” 그 발상들이 잔물결을 일으키며 전국에 번져나가 껍질을 벗긴 욋가지 벽, 골이 진 금속, 사슬고리 등 건자재를 원형 그대로 쓰는 유행을 일으켰다. 겸손하고 대담한 중성미. 1978년에 나온 책 ‘하이테크’는 기능미를 존중해 군더더기를 제외한 설계와 스테인리스의 결합을 연대순으로 편찬했다. 공장에서나 볼만한 조명과 금속의 공업용 선반이 가정에 등장했다. 그 무렵 디자이너 벤 로이드는 “너무 멋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30갤런들이 양철 쓰레기통에 유리를 얹어 식탁을 만들었다. 엉뚱한 곳에서, 그래 사실은 밀라노에서 온 작은 예술가구 의자 역시 멋졌다. 장난스럽게 뾰족한 발톱이 달린 그 의자는 모양이 너무 뒤틀려서 혹시 잘못 앉았다가는 다치기 십상이었다. 예술가구란 전적으로 밀라노의 대건축가 에토레 소트사스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는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멤피스(엘비스 프레슬리의 고향이자 고대 이집트 도시명) 컬렉션을 출범시켰다. 구입은커녕 손으로 만져보기도 쉽지 않을 정도로 비싼 작품들이었다. 멤피스는 워낙 독창적이고 장난스러워 지금도 논쟁의 대상이다. 사람들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어 놓은 뒤 눈을 살그머니 치켜떠 지켜보며 흐뭇해 하는 소트사스의 모습이 상상된다. 70년대가 기술과 현대적 미니멀리즘으로 한층 기울면서 그런 모든 운동의 진짜 함정이 부각됐다. 낡은 이념에 반대한다면서 정작 구속력이 그 못지않은 새 이념을 만들지 않았는가? 매끈함만을 중시하는 이 스타일에 혼은 어디 있는가? ‘홈’에서 사회역사학자 비톨드 리브친스키는 “현대 실내장식은 가정생활의 편의를 추구하던 발전사를 단절시켰다”고 걱정했다. “간소함이 즐거움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그는 우려를 표명했다. 물론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살 생각이 아니었다. 1977년 크리스토퍼 알렉산더는 감정적 디자인을 소재로 한 ‘패턴 랭귀지’라는 제목의 특이한 책을 냈다. “현대 실내장식이 반드시 매끈해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라고 그는 말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의 삶을 말해주는 것, 곧바로 자신의 인생에서 나온 것이 가장 아름답다.” 알렉산더는 정곡을 찔렀다. 아마도 우리는 어차피 쪽매붙임이나 쇠파이프의 미래에는 어울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딱딱한 이념만 있고 드라마는 불충분했다. 또 다른 변화가 필요한 시기였다. 80년대를 위한 시기였다. 경제는 레이건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느냐는 시대가 되면서 갑자기 세금이 낮아지고 공급이 넘쳤다. 이제 40대가 되고 돈을 벌기 시작한 베이비부머들은 스타일의 규제 철폐를 주도했다. 우리가 60년대에 내동댕이친, 속이 꽉 찬 그 모든 가치(그와 동시에 사라진 소파들)가 가슴을 울리며 돌아왔다. 갑자기 가구란 얼마든지 장식해도 좋게 변했다. 역사를 지우느라 보낸 수십 년의 세월은 우리에게 그것을 되풀이하라는 운명을 강요했다. 베이비부머들은 처음으로 역사적 실내장식을 정통으로 대면하게 됐다. 전등갓, 고급 실크, 미술품과 비싼 골동품 등. 소설 ‘허영의 불꽃’에서 톰 울프는 80년대 고급 스타일의 거실을 소개한다. “그것은 거대했지만…소파, 쿠션, 육중한 의자, 무릎방석…이 가득했다. 모두 꼬였고, 술이 달렸고, 띠로 동이고, 테를 두르고…속을 채웠다. 실내장식에 20세기의 흔적조차 없었다.” 이 무렵 로버트 벤투리와 마이클 그레이브스 같은 건축가들(두 사람 모두 미국로마학회 회원으로 이탈리아 찬미주의자였다)은 모더니즘 지상주의의 횡포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건물과 방이나 사물에 고전적 요소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산만한 활력’이라는 벤투리의 구상에 발동이 걸렸고, 그레이브스의 달콤한 르네상스 색상 감각은 우리가 거부했던 것들을 선별적으로 재등장시켰다. 거실에 기둥이 나타났지만 받칠 것이라곤 우리의 역사의식뿐이었다. 옛 뿌리를 표현할 때는 맥락상 관계도 없는 건축 요소가 조심스레 ‘인용’됐다. 마치 건물에서 떨어진 파편처럼 보이는 박공벽이나 기타 화려한 장식 쇠시리 덩어리가 조각으로 변해 벽에 걸렸다. 그런 추세에서 태동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즉시 대중문화에 스며들며 치명적 해를 끼쳤다. 이제는 분홍색과 청색 기둥이 세워진 가련한 은행 건물들의 정면과 상가 테이크아웃 커피점에 남은 그 흉물스러운 유물들만 눈에 보일 뿐이다. 베이비부머들은 이 같은 관념적 변절에, 갑작스러운 돈과 물건의 유입에 위선자가 된 기분을 느꼈을까? 물론이다. ‘보보스 인 패러다이스’에서 데이비드 브룩스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화시간을 온통 자신의 성공을 조롱하는 데 보낸다. 말투는 성공을 과시하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성공에서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이 여피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쉬지 않고 여피족을 비난한다.” 90년대 들어와 우리가 딱히 여피족이 되지는 않았더라도 차이를 구별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그러나 용케도 이젠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됐다. 90년대 들면서 베이비부머들의 독특한 스타일은 막을 내렸다. 원숙했다기보다는 절어 버렸다. 경험과 함께 자신감도 커졌다. 마치 우리의 안목은 충분치 않다는 듯 디자이너나 건축가를 고용하지 못한 평범한 인간들은 접근도 못 하게 차단한 채 일류 디자인 센터의 닫힌 문 뒤에서 최고의 가구가 그냥 썩어가는 일은 이제 사라졌다. 포터리 반, 레스토레이션 하드웨어, 베이커 앤 모스 같은 소매점들이 문을 열면서 우리는 큰 싸움에서 이겼다. 좋은 디자인을 어디서든 구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요즘은 사실상 자기 마음대로 아무 옷이나 입어도 되듯이 집안 모습의 개성도 복합적이다. 이제는 거의 아무거나 통한다. 2000년대 중반이 되면서 베이비부머들은 문화에 용해됐다. 앞으로 나아가며, 독신이 됐다가 재혼하고, 자식들이 자식 낳는 모습을 지켜보고, 옛 집을 떠나 새 집을 짓고, 다른 집을 짓고, 또 다른 집을 지었다. 일부 낡은 인습은 계속 우리 뒤를 따른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거실만 보고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힘들다.
With CAROL HELMS and JAC CHEBATORIS 최한림 parasol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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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스타일 1. 수퍼그래픽: 핀란드에서 나온 대담한 마리메코 직물은 1965년 마이야 이솔라가 디자인했다. 2. 전위적 세계: 핀란드의 이에로 아르니오는 1965년 반짝반짝한 플라스틱으로 만든 글로브 의자를 선보였다. 3. 종이 달: 조각가 노구치 이사무가 만들어 유명한 아카리 램프는 50년대에 처음 나왔다. 4. 우아한 플라스틱: 1967년 쌓아올리는 비코 마지스트레티 테이블 위에 아르테마이드의 네소 램프가 나왔다. 5. 목재소의 멋: 문짝과 톱질 받침대 나무 탁자. 6. 차곡 차곡: 마시모와 렐라 비니엘리가 1964년 헬러사의 의뢰로 이 식기류를 설계했다. 7. 즐거운 날들: 모스가 선보인 데이니즈 포모사 벽걸이 달력은 유명한 이탈리아 디자이너 엔조 마리가 1963년 디자인했다. 8. 북실북실한 융단: 플로카티는 당시 가장 인기있는 깔개였다. 9. 물감 팔레트: 낙천적인 원색, 벤저민 무어의 베리 와인색 벽. 70년대 스타일 1. 돌아온 바우하우스: 콘란이 미에스 반데어 로헤의 1929년 디자인을 응용한 MR 의자는 모더니즘의 상징이 됐다. 2. 공장식: 디자인 위딘 리치가 내놓은 양념병대가 달린 쿠오비스 스테인리스 스틸 이동식 탁자. 3. 하이테크: 공장용으로 디자인한 메트로와이어 선반은 오늘날에도 저장 능률이 높다. 4. 근사한 아이디어: 프로그레스 라이팅의 금속 갓은 공장용인데 가정에서도 사용했다. 5. 벽 예술: 콘란의 자이언트 런던 시계. 6. 저항의 소품: 70년대의 필수품이었던, 독일인 리하르트 사퍼가 1972년 만든 아르테미데의 티지오 램프. 7. 콜라는 가라: 1976년 처음 프랑스에서 수입한 페리에가 생수 열풍을 선도했다. 병은 멋진 꽃병으로도 쓰였다. 8. 멋진 코일: 1970년 이탈리아 디자이너가 만든 아르테미데의 보알룸 램프는 공업용 호스를 꼬아 만들었다. 9. 물감 팔레트: 공장식 녹색. 벤저민 무어의 그래시 필드색 벽. 80년대 스타일 1. 고성의 스타일: 접는 스크린에 손으로 칠한 알파 워크숍의 패널은 어떤 고성의 목공품을 흉내냈다. 2. 네오클래식: 받침대만 있으면 무엇이든 괜찮았다. 특히 색상이 짙은 고대풍의 목제 테이블이라면. 3. 건축적 미세장식: 과수재목 기둥은 프랑스제 콘크리트 항아리의 받침대가 됐다. 4. 내부 장식: 1987년 동히아는 박달나무와 호두나무로 어릿광대 문양의 파리 홀 의자를 만들었다. 5. 궁전 바닥: 특대 사이즈의 헤이스팅스 이탤리언 타일은 이탈리아의 고품격 실내장식을 본떴다. 6. 창문 장식: F 슈마커의 고급 호박단 직물 커튼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7. 금박 시대: 가장자리에 갓을 두르고 금도금으로 마무리한 존 로셀리의 기둥램프는 80년대의 흥청망청 분위기에 잘 어울렸다. 8. 물감 팔레트: 따뜻한 나무, 석양빛이 비치는 직물. 벤저민 무어의 플로리다 오렌지색 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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