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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아들에 기업 빨리 물려 주려다가…”

“외아들에 기업 빨리 물려 주려다가…”

김재록 로비의혹 사건은 마침내 현대차그룹의 계열사인 글로비스 비자금 사건으로까지 비화됐다. 검찰의 칼끝은 이제 현대차그룹의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사장에게까지 겨눠질 태세다. 그렇다면 현대차그룹은 근본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지난 2월 7일. 강철규 전 공정거래위원장이 3년 임기를 마무리하면서 언론사 경제부장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강 전 위원장은 4대 그룹 총수와 만남을 회고했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에 이어 현대차그룹 정몽구 회장이 화제에 올랐다. “정 회장은 출자총액제한제도에 대해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다. 아마 상속 문제로 고심하는 것 같더라.” 강 전 위원장은 이어 “재벌 총수들로선 결국 상속이 제일 심각한 문제라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고 언급했다. 짧게 논평을 한 4대 그룹 총수와 만남 후기였다. 다른 회장들과의 인상깊은 대화 내용은 ‘사회문제, 지배구조 개선, 지주회사’ 등이었다. 유독 현대차그룹만 상속 문제가 언급됐다. 그만큼 현대차는 후계 구도가 급하고 중요했다. 오죽하면 공정위원장을 만나서까지 그런 내색을 했을까? 이미 68세에 이른 정몽구 회장은 체력적으로 왕성하다. 그렇지만 내일 모레면 칠순이다. 자신의 뒤를 생각할 나이다. 하지만 재계 2위인 현대차그룹은 아직 누가 ‘대권’을 이을지 정해지지 않았다. ‘아마’ 외아들인 정의선 기아차 사장이 뒤를 이을지도 모른다. 상속을 해왔던 재벌 그룹의 관행과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유교적인 전통 때문에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재벌의 상속을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정의선 사장의 경영승계를 전제로 문제점을 찾고 비판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일반적인 이런 생각은 그저 추측에 불과하다. 정 사장이 현대·기아차그룹을 지배하는 핵심 계열사에 대한 지분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는 아직 그룹의 대주주는 아니다. 이에 비해 다른 그룹들은 비교적 여유가 있다. 삼성은 이재용 상무의 에버랜드 전환사채 인수 건이 아직 재판 중이긴 하지만 일단 전체적인 구조는 다 짜인 상태다. 지주회사 체제인 LG는 향후 다른 그룹에 비해 상속 문제가 간단하다. SK는 이미 2세가 경영 중이고 최태원 회장이 아직 젊기 때문에 당분간 상속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현대차그룹 지배력 약한 편 재무적 분석을 통해 봐도 현대차는 상속이나 지배 구조 문제가 상대적으로 위태롭다. 서울대 장덕진 교수팀이 1997∼2003년 국내 그룹의 출자 관계 변화를 분석해 수치화한 그룹 지배력에서도 현대차는 29개 상위그룹 중 24위를 차지했다. 장 교수팀은 총수의 그룹 지배력을 0에서 1까지의 범위인 ‘지위비(地位比)’ 개념을 활용했다. 지위비가 1이면 총수 일가가 모든 계열사의 주식을 100%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다. 2003년 말을 기준으로 그룹 지배력이 막강한 상위 5개 그룹은 현대산업개발(0.888), KCC(0.798), 신세계(0.758), 효성(0.754), 대상(0.630) 등이었다. 하위 5개 그룹은 SK(0.053), 두산(0.097), 한화(0.105), 현대중공업(0.125), 현대자동차(0.135) 등이었다. 상대적으로 지배력이 약하기 때문에 더욱더 상속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을 수 있다. 역으로 얘기하면 현대차그룹은 점점 커져 가는데 그 속에서 정씨 일가의 지배력은 상대적으로 점점 작아진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정 회장으로 하여금 상속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했을 수 있다. 정 사장이 정 회장처럼 현대차그룹의 ‘총수’역할을 하기 위해선 현대차, 기아차, 현대모비스 등 이른바 ‘현대차 3총사’중 최소한 한 회사의 지배주주가 돼야 한다. 순환출자로 연결된 이 세 회사는 상호 간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 정몽구 회장은 현대모비스 주식 7.93%를 소유하고 있다. 기아자동차가 18.19%로 최대주주지만 개인으로는 정 회장이 최대주주다. 정 회장은 7.93%의 지분으로 사실상 현대차그룹을 지배하고 있다. 현재 정의선 기아차 사장은 이들 ‘3총사’중 기아차에만 2%의 지분이 있다. 2%의 지분 취득에만 1075억원이 들었다. 지금도 현대차가 최대주주(38.67%)여서 정씨 일가의 지배권에는 문제가 없지만 향후 순환출자 형식의 ‘3총사’에서 안정적인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10%대 정도의 지분은 가져야 한다. 현대캐피탈이 가지고 있는 지분 4.95%까지 합치면 50%가 넘는 최대주주가 돼 기아차를 중심으로 현대차와 현대모비스를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아차 지분율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돈이 든다는 점이다. 지난해 기준으로만 봐도 향후 8%를 더 취득하기 위해서는 최소 4000억원 이상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 사장이 기아차 대주주로 등장할수록 주식 가치는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당연히 지분을 취득하는 데도 더 많은 돈이 들어간다. 이 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가 현대차로서는 가장 큰 골칫거리다. 정몽구 회장의 재산을 물려받으면 되지만 50%에 달하는 상속세를 내야 된다. 정 회장도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지분을 처분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주가 하락 등 손실은 물론이거니와 정 회장의 지배력 약화로 그룹 지배구조 자체가 바뀔 수 있다. 혹 떼려다가 혹 붙이는 격이 될 수 있다.
정상적으로 상속하다 그룹 놓칠 판 답은 뻔하다. 4000억원이 넘는 돈을 상속이 아닌 방법으로, 정 회장의 주식을 팔지 않는 방법으로 만들어야 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글로비스는 이런 고민에서 출발한 회사다. 글로비스뿐 아니다. 위아, 현대오토넷, 엠코, 이노션 등 최근에 등장한 현대차 계열사는 모두 정 사장에게 돈을 벌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업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은 더디다. 이익이 난다고 다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익 규모가 그리 크지도 않다. 기업의 평균 이익률을 10%라고 가정한다면(사실 일부 IT 업체를 제외하면 매년 10% 이익을 내는 것은 쉽지 않다) 4000억원을 벌기 위해서는 4조원짜리 회사가 필요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 더 쉬운 방법은 자본 이득(capital gain)이다. 쉽게 말해 주식 가격이 상승하거나 비상장 기업이 상장되면 자본 이득이 발생한다. 최근에 설립된 글로비스, 엠코, 이노션 등의 회사가 바로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다. 지난 2001년에 설립된 글로비스는 매출이 해마다 평균 70%가량 증가하면서 대주주(지분율 31.88%)인 정의선 사장에게 수천억원의 이득을 안겨줬다. 지난해 말 상장 이전까지 배당금과 주식 매각 대금으로 1447억여원의 이득을 안겨줬다. 상장 이후에는 주가가 큰 폭으로 올라 한때 평가이익이 7000억원대에 이르기도 했다. 최근 주가 하락으로 조금 떨어지기는 했지만 28일 종가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정 사장 몫의 가치는 4700여억원이다.
현대차그룹 내 건설회사인 엠코(정 사장 지분율 25.1%)나 종합광고회사인 이노션(40%) 등도 마찬가지다. 현대차그룹 비상장 계열사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 정의선 사장에게 경영권 승계를 위한 든든한 밑돈을 마련해 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여기서 생긴 돈으로 주력 계열사나 지배구조에 핵심적인 계열사의 지분을 취득하는 형태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광주신세계다. 일반적으로 백화점이 지방에 점포를 내면 지점 형식으로 설립하는 것과 달리 광주신세계는 별도법인으로 설립돼 신세계의 후광을 업고 실적을 늘려갔다. 설립 당시 액면가 5000원에 52% 지분을 확보한 정용진 신세계 부사장은 불과 몇 년 사이에 1000억원이 넘는 평가차익을 올렸다. 또 현대백화점 정지선 부회장은 지난해 현대백화점 주식 215만 주를 정몽근 회장으로부터 증여받으면서 역시 비상장 계열사인 한무쇼핑 지분을 팔아 세금 문제를 해결했다. 삼성그룹의 후계자인 이재용 상무도 에스원이라는 비상장회사를 상장시키면서 지배권 승계를 위한 자금을 마련했다. SK그룹 최태원 회장은 지난 2002년 자신이 대주주인 비상장사 SKC&C에 워커힐 호텔 지분을 넘기고 SK㈜ 지분을 받았다가 가격산정 문제로 유죄를 선고받기도 했다.
서두른 후계작업 ‘일단정지’ 글로비스라는 회사도 현대차 후계 구도에서 앞서 얘기한 회사들과 같은 역할을 한다. 글로비스 비자금 문제가 후계 구도에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전망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글로비스 비자금 문제가 결국에는 주가를 떨어뜨릴 것이고, 수사하다 보면 내부거래 등 각종 의혹들이 불거져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글로비스는 매출액의 80% 이상이 현대차 등 계열사에서 발생한다. 엠코와 오토넷에 합병된 본텍 역시 매출액의 90% 이상이 현대차 계열사 물량이다. 모두 정상적인 경쟁에 의해 성장한 회사라고 보기 힘들다. 정의선 사장이 대주주로 있기 때문에 정 사장에 대한 비난 여론이 불거질 수 있다. 수사 초기 단계에 압수수색 과정에서 현대차 외에 글로비스, 오토넷이 포함됐다는 소식에 전문가들이 “결국은 상속 문제로 가는 게 아니냐”고 관측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번 사태로 일단 현대차의 경영권 승계 계획에는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비자금 수사로 글로비스가 주목을 받게 되고, 대주주로 있는 정 사장도 책임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사 과정에서 각종 의혹들이 추가로 나올 가능성도 있다. 비자금의 용처가 어떻게 밝혀지느냐에 따라 수사의 방향도 달라질 수 있다. 김재록이 어떻게 진술하느냐도 중요한 변수다.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김재록이 부품회사 인수에 깊이 관여했다면 후계 구도에 대해서도 조언을 해 줬을 가능성이 크다. 이 과정에서 정 회장 부자의 경영권 승계 계획도 다 드러날 수 있다. 자칫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로비자금 수사로 시작된 ‘김재록 사건’이 현대차의 가장 큰 고민인 상속 문제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속전속결로 거침없이 달려온 현대차의 후계작업은 일단정지 신호 앞에 멈춰서 있다.


내부 고발자로 다시 본 정몽구식 인사법

‘즉흥인사’가 럭비공 돼서 돌아왔나?
검찰은 이번 김재록 로비의혹을 수사하면서 “내부 제보자의 도움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현대차와 글로비스 압수수색 과정에서도 검찰은 정확한 맥을 짚어 가면서 압수를 했다. 심지어 글로비스 비자금 금고의 번호까지 미리 알고 들어왔다. 내부 제보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상황이다. 비자금과 관련된 수사에 대한 제보자라면 최소한 중간급 이상의 간부라고 예상할 수 있다. 벌써 검찰이나 재계에서는 제보자가 누구라는 얘기가 떠돌고 있다. 누가 제보했든 간에 그간 현대차그룹의 인사 행태를 보면 내부에서 제보자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정 회장의 인사 방식은 ‘럭비공 인사’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돌발적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2004년 6월부터 2005년 8월까지는 평균 40일마다 사장급 인사를 했다. <「이코노미스트」 802호 2005년 8월 22일자 커버스토리 참조·사진> 아무리 ‘상시인사’라고 하지만 지나치게 자주 했고, 이 때문에 즉흥적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조치라고 했지만 임원급 인사를 지나치게 자주 함으로써 화를 자초했다는 측면이 있다. 회사 내 고급 정보를 취득한 임원을 그렇게 쉽게 내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신중하게 선택하면서 일정기간 믿고 맡기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현대차 나름대로 변명이 있다. 공급과잉의 치열한 자동차 산업의 특성상 끊임없는 긴장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상시인사가 필요하다는 논리다. 또 정 회장이 나름대로 인사에 대해 자신이 있었고, 인사는 회장의 고유 권한이라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그간 현대차 인사는 상시인사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불규칙하고, 즉흥적이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일부에서 비판하는 것처럼 럭비공 인사가 된 셈이다. 내부에서 어느 누구도 정 회장에게 직언하거나 정 회장과 긴밀한 협의를 할 수 있는 임원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매출 50조원의 현대자동차가 정몽구 회장 한 명의 손에 좌우된다는 것은 다소 위험한 일일 수 있다. 현대차에서는 ‘2인자로 지목되는 순간 끝이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처럼 회장이 모든 것을 결정하다 보니 ‘라인’과 ‘파벌’이 존재하고 이 사이에서 알력이 생긴다는 것도 문제다. 시스템이 없고, 규칙이 없으면 각종 사조직, 비공식 루트가 활개치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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