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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자본 국적보다 투명성” 강조한 분

[삶과 추억] “자본 국적보다 투명성” 강조한 분

오호근 회장을 처음 만난 기억은 마치 어제처럼 또렷하다. 외환위기로 경제 전반이 어둡던 시절, 기업구조조정 방법론으로 ‘워크아웃’이 막 거론되던 그 무렵이었다. 1998년 6월 하순 금융감독위원회의 서근우 박사가 내게 프린트 몇 장을 건네줬다. 소위‘기업구조조정협약’으로 워크아웃의 기초가 되는 금융기관들의 합의서였다. 이를 근거로 기업구조조정위원회가 출범했다. 부실기업의 채무조정에는 금융기관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친다. 워크아웃 관행이 정착되지 않은 당시로선 중재자인 위원회의 공정한 역할이 구조조정의 성패를 좌우할 참이었다. 그래서 위원장이 누구냐는 매우 중요했다. 초대 위원장으로 채권단이 뽑은 인물이 바로 세계경영전략원의 오호근 회장. 사실 이력서 외엔 나로선 아는 게 없었다. 그 다음날 오 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자, 나는 나이보다는 어려보이니 쉽게 찾을 거다”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약속 장소에서 한눈에 알아봤다. 작지만 강단 있는 체구, 큰 일을 앞두고도 차분하다는 게 첫 인상이었다. 면담 전 나는 나름대로 이해당사자 간 손실분담 원칙을 분명히 했다. 모든 것은 ‘상업적인 베이스’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 등 구조조정의 원칙을 정리해 갔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필요가 없었다. 오 회장은 어쩌면 나보다 더 유연한 시장주의자였다. 코드가 맞아서인지 무려 6시간이나 이야기를 했다. 그 사이 몇 가지 색다른 모습을 봤다. 첫째는 볼보코리아 등 유수 외국기업에 어드바이저를 했으며, 특히 자동차에 관한 한 전문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는 나중에 대우자동차 매각에서 감각적으로 큰 보탬이 되었다. 또 하나는 그분의 영어가 무척 유창하다는 것. 이것도 대우의 해외채권 매입협상에서 분위기를 잡아나가는데 빼어난 실력으로 기능을 하게 된다. 아무튼 숨겨진 상당한 내공의 소유자임을 직감했다. 남은 일주일을 서두른 결과 7월 첫날 한국투신빌딩에 위원회 사무국을 출범시킬 수 있었다. 몸에 밴 습관인지 오 위원장은 비용에도 철저했다. 위원회가 금융기관들의 합의기구인 만큼 소수의 은행 파견인력만으로 사무국을 단출하게 꾸려나가도록 주문했다. 재벌기업을 신속히 워크아웃하려면 은행마다 관련부서를 만들지 말고 사무국에 인력을 한데 모아서 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었다. 각 은행들의 실력을 믿을 수 없고, 자칫 외압에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오 위원장의 의견은 단호했다. ‘워크아웃 작업은 주채권은행이 맡아서 해야 한다. 위원회는 합의된 모범적 관행을 지켜내는 울타리 역할이면 충분하다. 그래야 워크아웃 노하우가 채권은행에 쌓이고 위원회가 없어도 자율 구조조정의 관행이 시장에 정착될 것이다.’

최초의 해외채권 탕감 기록 당시 대기업들은 워크아웃에 의구심이 있었다. ‘Workout’의 발음이 ‘걸어 나간다’는 ‘Walk out’과 비슷하다 보니 퇴출 절차로 오해했다. 7월 중순 고합그룹 계열 4개사가 워크아웃 1호로 신청을 했다. 주채권은행인 한일은행에 신고된 채권 규모는 무려 4조5000억원. 대우계열 다음으로 가장 큰 규모였다. 이어 4조원대의 동아건설이 워크아웃 2호로 기록됐다. 이후로도 짧은 기간 동안 거평·벽산·신호제지 등 굵직한 재벌기업들이 워크아웃에 몰려들었다. 첨예한 이해다툼으로 구조조정위원회가 빈번히 열렸으며, 사무국은 덩달아 바빠졌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위원회가 부실기업의 생사 여탈을 좌우하는 줄로 알았다. 하지만 정작 내막은 복잡한 채권채무관계를 정돈하고 손실분담의 원칙을 판단해야 하는 지루한 법률적, 기술적 작업을 주로 했다. 그러다 보니 회의요령이 필요했다. 이 점에서 오 위원장은 상당히 탁월했다. 매번 쟁점 위주로 간결하고 분명하게 결론을 도출했다. 조정위원들로 하여금 종종 도시락과 햄버거로 저녁을 때우게 했다. 나중에는 조정위원들 스스로 돈을 내 정례모임을 열 정도로 관심과 열의를 보였다. 초기 채무조정의 수준은 충분하지 못했다. 가령 기업부채가 100이라고 하면 추정된 적정채무가 50이라고 할 때 약 20 정도만 털어냈다. 자기자본 부족으로 충분한 채무조정의 여력이 없었던 채권단과 재벌 오너들의 낙관적인 전망 사이에 이해관계가 들어맞은 결과였다. 그래서 언젠가 2차 채무조정은 ‘예상된 수순’이었다. 오 위원장은 혜안을 가지고 사무국에 두 가지를 준비시켰다. 하나는 2차 채무조정을 위한 절차를 마련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5대 그룹 계열사의 보증채무 해소작업이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99년 상반기에 2차 채무조정이 쏟아졌다. 이번에는 다 털지 못했던 과다채무를 덜어냈다. 그 사이 은행들도 공적자금 투입과 후순위채 발행을 통해 추가여력을 마련한 덕분이었다. 오 위원장은 전부터 친분 있는 재벌 총수도 더러 있었지만, 첫 인상 그대로 단호했다.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늘 똑같았다. “죽으려는 자는 살고, 살려고 하는 자는 죽는다.” 마음을 비웠다고 말하면서 욕심을 부려 빚어진 어리석은 도산의 결과를 나 역시 여러 차례 목격했다. 그런 와중에 오 위원장에게 일복이 하나 더 터졌다. 소위 ‘빅딜’이 그것. 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의 사업교환, 반도체 통합, 항공·철도차량·석유화학 등 구조조정 등을 중재하고 결론을 내려야 하는 ‘사업구조조정추진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오 위원장에게는 더 큰 시한폭탄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대우그룹의 워크아웃이었다. 99년 여름이 다 지나갈 무렵, 대우그룹 12개 계열사가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대우계열 부실채권 규모는 무려 65조원에 달했다. 이 중 ㈜대우가 35조원을 차지했다. 그동안 이루어진 워크아웃 총 채권이 35조원이니 그 크기는 가히 상상을 넘어섰다. 우리 경제가 대우그룹의 처리에 달려있었다. 먼저 채권단은 계열사 간에 얽힌 고리부터 풀어야 했다. 다행히 선견지명으로 미리 작업을 한 보증채무 해소가 일의 절반을 덜어줬다. 지분관계도 끊고, 서로 주고받은 자금 대차관계도 정리했다. 그동안 정립된 워크아웃 관행이 또 나머지 일의 절반을 덜어줬다. 결국 그간의 워크아웃 작업이 대우를 위해 예행연습을 한 셈이었다. 애초 18개월만 일해주고 떠난다던 오 위원장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대우계열 구조조정추진협의회 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에도 또 두 가지 과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면한 과제는 대우 해외채권 협상이었다. 국내 금융기관이 보유한 대우채권은 85% 수준에 불과, 이를 95% 비중까지 끌어올려야만 공평한 손실분담하에 워크아웃이 가능했다. 결국 해외채권과 대우가 시장에서 발행해 조달한 CP(기업어음) 및 회사채를 채권단에 포함하지 않는 한 어려운 상황이었다. 오 위원장은 해외채권 협상에 직접 나섰다. 지루한 협상 끝에 1달러짜리 해외채권을 평균 39센트에 사오게 됐다. 우리 경제사상 해외채권 탕감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산관리공사가 할인된 가격에 해외채권을 사들이고 채권단에 액면가로 신고했다. 두 번째 작업인 대우차 매각은 결코 쉽지 않았다. 2000년도 내내 포드, GM, 다임러크라이슬러 등 3군데를 놓고 협상을 벌였다. 가격을 가장 높게 쓴 포드가 우선매각협상자로 선정되고 수순 대로 진행되는가 싶더니만 추석 무렵 비보가 날아왔다. 포드가 매각협상을 포기한 것. 파악된 배경은 포드의 익스플로러 차량에 장착된 파이어스톤 타이어의 치명적 결함으로 거액의 소송에 휘말려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오 위원장으로선 역부족인 상황이었다. 결국 대우자동차 협상을 GM으로 넘기고 손을 뗐다. 그러나 대우그룹은 기업분할의 결과 ㈜대우에서 건설과 무역이 살아났고, 대우중공업은 종합기계와 조선이 분할되어 워크아웃을 졸업했다. 만 2년간에 걸친 구조조정 과제를 마감했다. 이후 나는 국민은행으로, 오 위원장은 싱가포르에 있는 라자드아시아의 회장으로 되돌아갔다. 2004년 가을 다른 사건으로 오 위원장과 한 번 더 조우하게 됐다. SK글로벌의 분식회계 사건이 터지고 채무조정에 들어가자 국민은행은 애초 하이닉스에서 보였던 원칙에 따라 CBO(Cash Buy-out) 방식으로 관련 채권을 장부에서 모두 털어냈다. 이어 해외펀드인 소버린은 SK㈜에 대해서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문제 삼아 경영권 분쟁에 뛰어들었다. 즉,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을 살리고자 SK텔레콤과 함께 SK㈜가 희생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였다. SK그룹은 방어에 나섰고, 이사회의 개편 등 향후 지배구조의 획기적 개선을 시장에 약속했다. 반면에 소버린은 불투명한 오너체제에 제동을 걸었다. 오 회장의 라자드를 통해 의결권 다툼을 벌였다. 왜 소버린을 대변하느냐는 여론의 지적을 받자 오 회장은 내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대우계열 때도 그랬듯이 구조조정 원칙은 계열사 간 부실의 고리를 끊고 독자생존이 가능하게 하는 일이다. 그런데 3개사가 사업적으로 필요 이상 묶여있다는 것이다. 자본의 국적보다는 투명성 제고가 논쟁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오너체제와 펀드 중 누가 더 주주를 위한 기업가치 제고에 순기능을 하느냐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결국 오 회장으로선 KT&G, 포스코 등 이후 몇 년 뒤의 추세를 예견한 셈이었다. 오호근 회장은 멘토로서 내게 삶의 지혜를 가르쳐줬다. 개인적으로 중대한 의사결정을 해야 할 때면 꼭 찾아가 의견을 구하곤 했다. 언제나 현실에 입각한 냉철한 판단으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한번은 내게 포커게임에서 가장 기억나는 순간이 있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긴 게임만을 추억하는 경향이 있다. 오 회장은 풀하우스를 잡고도 막판 베팅에서 과감하게 포기한 적이 있다고 했다. 상대방이 포카드라는 직감에 카드를 내려놓았다고 한다. 패를 확인은 못했지만, 지금도 가장 잘한 결정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또 “권한은 인식에서 나온다”는 이야기를 했다. 권한은 누가 부여하거나 규정 때문에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 채권단이 만든 구조조정위원회도 법적 근거가 아니라 채권단의 믿음 때문에 그 권위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위기는 꼭 찾아오게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원칙과 능력, 리더십이 있는 탁월한 해결사가 있는가다. 어쩌면 환율·유가·금리가 심상치 않고 은행마저 너나없이 대출경쟁에 나서고 있는 요즘 위기의 씨앗이 싹트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위대한 해결사 한 분을 너무 일찍 떠나보냈다. 소득 2만 달러 시대에 걸맞은 뉴패러다임 속으로 들어가라고 우리 등을 떠밀면서 구조조정의 한 사이클을 종언한 뒤 가버린 그분의 시대적 의미를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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