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JP의 골프이야기] 장원 식당 모르면 실력자에 못 끼어

[JP의 골프이야기] 장원 식당 모르면 실력자에 못 끼어

▶1973년 방한한 로저스 미 국무장관이 김종필 전 국무총리와 함께 안양 골프장에서 골프를 친 뒤 이야기 하고 있다.

“은퇴한 후 다리 힘 있을 때까지 공이나 쳤으면 좋겠다.” “친구들과 세계 명 코스를 찾아다닐 수 있을 정도의 여유만 있었으면….” 주말 골퍼들은 어쩌다 라운딩 기회라도 갖게 되면 들뜬 마음에 카트에 앉아 종종 이런 대화를 나누곤 한다. 일상에 쫓기듯 살아온 그들에겐 ‘골프’가 ‘여유’와 동의어인 셈이다. “골프나 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은 “삶의 여유를 찾고 싶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골프 애호가들에겐 JP가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여간 행운이 뒤따르지 않으면 JP처럼 골프를 즐길 순 없다. 건강과 생활의 여유, 풍부한 인간관계라는 삼박자가 딱 들어맞지 않으면 불가능한 게 골프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골프를 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경영이 잘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선뜻 라운딩에 응해주는 동반자가 없다면 골프는 정말 쓸쓸한 운동이다. 휠체어에 앉아 친구들의 라운딩을 바라본다면 씁쓸한 웃음이 나오지 않을까. 세계의 특이한 골프장을 많이 다녀본 JP는 미국의 하프문베이 골프클럽도 기억에 남는 곳 중 하나라고 말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쪽으로 70마일 정도 떨어진 이 골프장은 해변에 위치해 누드족을 쳐다보며 라운딩할 수 있는 곳이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중반에 누드가 크게 유행한 적이 있어요. 하프문베이란 해변에 골프장이 있는데, 파5 롱 홀이 누드족들의 본거지야. 골프를 치면서 그쪽을 안 보려고 해도 안 볼 수 있나. 다들 그 홀에만 가면 골프가 엉망이 되지. 프랑스 리베라 해안의 칸에도 그래요. 송림 사이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들이 선탠을 하고 있으니 골퍼들이 그걸 보느라 공을 맞히지 못해요. (하하)” 국내에서는 배터리로 움직이는 전동 카트를 알지도 못했던 60년대 초, JP는 미국에서 처음 카트를 타고 골프를 쳐봤다고 한다. 그에게 경제적으로 발전한 미국은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낙후된 한국이 가야 할 길이었다. “1962년 미국 뉴저지에 갔을 때 처음 카트를 타봤어요. 아마 우리나라 골퍼 중에서 나보다 먼저 카트를 타 본 사람은 몇 없을 거야. ‘이지 고(EZ GO)’라는 카트였는데, 배터리가 시원찮아 18홀도 채 돌지 못했지. 그런데 지금은 36홀을 돌아도 배터리가 남아요. 당시 우리나라에는 카트가 다 뭐야. 골프장 하나 있는 것도 갈아엎어 콩밭 만들자고 하던 판인데. 골프와 관련된 것 하나만 봐도 당시에 비해 지금 우리나라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 수 있지요.” 73년 정월에 JP가 유신을 설명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 닉슨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온 후 박정희 대통령은 마음이 놓였던지 JP를 불러내 뉴코리아CC에서 라운딩을 했다. 공을 친 후 예비역 육군대령이 운영하는 벽제의 소문난 갈빗집에서 식사하기로 하고 차를 몰았다. 대통령 전용차가 먼저 가고 JP 차가 그 뒤를 따랐다. 가는 도중에 벽제 화장터 입구에 붙여놓은 현수막 하나가 JP의 눈에 들어왔다. 그 현수막에는 ‘유신! 살 길은 이 길 뿐이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JP는 차를 세우고 고양군수를 불러냈다. “죽은 사람 화장하러 가는 길에 ‘살 길은 이 길뿐’이라는 현수막이 어울리느냐고 야단을 쳤지요. 슬픔에 젖은 사람들이 그걸 보면 어떤 생각을 하겠어. 그랬더니 고양군수가 ‘내무부에서 사람 많은 곳에 붙이라는 지령이 내려와 직원들이 그곳에 현수막을 붙인 모양입니다’라고 대답하더군요. 아무리 밑에 있는 사람이 그랬다고 해도 책임자가 챙겨야 한다고 타이른 후 당장 제거하라고 지시하고 대통령을 뒤따라 갔지요. 내가 조금 늦게 도착하자 박 대통령이 이유를 묻더군요.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대통령이 막 웃으시면서 ‘관료들의 사고가 그렇게 경직되어 있구먼’ 하셨어요. 나중에 고양군수에게 다시 전화해 ‘아무 일 없을 것이니 걱정 말고 열심히 일하라’고 안심시켰어요. 행정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국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신중하게 생각하고 처신해야 하는 겁니다.” 서울 지방경찰청 후문 쪽에 장원(莊園)이라는 한정식집이 있다. 생긴 지 56년 된 이 집은 과거 주씨 부인이 청진동 종로구청 앞에서 운영하다가 지금은 딸 문수정씨가 이어받아 이곳에서 경영하고 있다. 이 집은 한 시절을 풍미했던 정·관·재계 인사들이 바쁜 일상을 접고 풍류를 접했던 곳이다. JP는 토속적인 이 집 음식 맛이 좋아 팔순이 된 지금도 가끔 찾고 있다. 장원의 음식 맛을 직접 관리하는 주씨 부인은 가장 오래된 단골손님인 JP가 찾아오면 마치 식구가 온 것처럼 반긴다. 장원이 청진동에 있을 때는 골프경기에 참가했던 30~40명의 인원이 골프장 식당을 이용하지 않고 곧장 장원에 모여 식음을 즐기곤 했다. “그 당시에는 장원을 모르면 실력자 축에도 못 끼었어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도, 정일권 전 총리도 이 집을 좋아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 적이 있지요. 어머니가 하던 음식점을 딸이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는데. 그 딸이 참 대단해요. 시대에 밀려 쇠락하던 음식점을 살려보겠다고 팔을 걷고 나섰으니…. 나는 이 집의 호남식 장아찌나 나물 같은 토속적인 음식을 좋아해요.” JP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음식을 잘 먹는 편이지만 대단한 미식가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요리 솜씨가 뛰어난 부인 박영옥 여사의 내조 덕분이기도 하다. “자랑은 아니지만 우리 집사람 음식 솜씨가 무척 좋아요. 지금도 음식 간은 직접 본답니다. 특히 육개장을 잘 만들어요. 박 대통령 내외분도 가끔 우리 집에 찾아오셔서 집사람이 만든 음식을 드시곤 했지요. 박 대통령이나 나나 음식을 가리진 않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밥 먹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고맙고 행복하다는 생각이 뇌리에 박혀 있어요. 지금은 웬만한 사람들도 고급 양주와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됐지만 옛날에는 박 대통령도 선사 받은 시바스리갈 양주를 책장에 감춰두고 마셨어요. 가끔 애쓰는 장관들을 불러 한 잔씩 따라주곤 했지요. 그렇게 가난했던 나라를 이만큼 부강한 나라로 만든 것은 어제의 사람들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그 고마움을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JP가 요즘 즐겨 마시는 양주는 발렌타인 17년짜리다. 한때는 두주불사였지만 지금은 얼음에 타서 마신다. 과거 전두환 군사정권에 의해 정계에서 쫓겨나 고초를 겪었던 아픈 기억도 이제는 컵에 담긴 얼음처럼 녹아있다. “옛날에는 이렇게 좋은 양주를 마실 수 있었나요. 기껏 마신다는 게 싸구려 보드카 스미르노프에 그레이프 프루츠 주스를 타서 마시곤 했지. 그 칵테일을 그레이하운드라고 해요. 좋은 양주는 조금씩 입 안에 넣고 혀로 음미하며 마셔야 하는 거예요. 그런 양주를 전두환 일당은 목마른 소가 구정물 마시듯 벌컥벌컥 마셔댔지요. 그것을 폭탄주라고 하던가? 지금은 다 지난 일이지만. (하하)”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주)유림테크, 대구국가산단 미래차 부품공장 신설에 1,200억 투자

2포항시 "덴마크에서 해상풍력과 수산업 상생방안 찾는다"

3日 도레이, 구미사업장에 5,000억 투입해 첨단소재 생산시설 확충

45만원권 위조지폐 대량으로 유통한 일당 18명 검거

5‘사생활 유포·협박’ 황의조 형수에…검찰, 항소심서 징역 4년 구형

6 국내서 쌓은 ‘삼성전자 포인트’ 이제 미국서도 쓴다…‘국가 호환’ 제도 도입

7이지스자산운용, 취약계층 상생 위한 '행복한 바자회' 개최

8마스턴운용. “사모 리츠에도 개인 투자자 참여 기회 제공"

9새마을금고중앙회, 베트남협동조합연맹과 ‘상생협력’ 위한 업무협약

실시간 뉴스

1(주)유림테크, 대구국가산단 미래차 부품공장 신설에 1,200억 투자

2포항시 "덴마크에서 해상풍력과 수산업 상생방안 찾는다"

3日 도레이, 구미사업장에 5,000억 투입해 첨단소재 생산시설 확충

45만원권 위조지폐 대량으로 유통한 일당 18명 검거

5‘사생활 유포·협박’ 황의조 형수에…검찰, 항소심서 징역 4년 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