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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숙 기자의 여성리더 탐구(17)] “남녀차별을 전화위복 삼아 성공”

[박미숙 기자의 여성리더 탐구(17)] “남녀차별을 전화위복 삼아 성공”

회사 창립 6년 만에 무려 다섯 번의 인수 합병(M&A)을 시도한 회사가 있다. 이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는 기업합병 전문가도 아니고 베테랑 경영인도 아니다. 과학자 출신의 배은희(47) 리젠 대표다. 그는 2000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선임연구원으로 있을 당시 재생의학 전문 바이오벤처기업인 리젠바이오텍을 설립했다. 재생의학이란 자신의 세포가 증식해 스스로 치료가 가능한 기술을 말한다. 그는 2년 뒤에는 KIST의 선임연구원직을 과감히 버리고 사업가의 길을 택했다. 안정적인 대학이나 연구소에 한 다리를 걸치고 사업은 곁다리로 하는 일부 ‘벤처 박사 사장’들과 비교하면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연구실에서 기술 개발한 것을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었어요. 사업화 말고는 해답이 없더라고요.” 그는 41세까지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순수학문을 했던 여성 과학도였다. 사업을 하기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았다. 첨단 기술개발을 비즈니스와 연관시키기가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던 것. 연구까지 10%의 자원이 필요했다면, 상품화 과정에서는 90%의 자원이 필요한 것이 국내 바이오업계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2002년 벤처 투자 열풍이 줄어들고 거품이 빠지면서 그는 심각한 자금난 위기를 맞았다. 이때 그가 위기 극복으로 선택한 카드가 인수 합병이었다. 본인의 지분은 줄어들지만 회사를 살릴 수 있는 최선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2003년 유젠바이오와 합병을 시작으로 이노테크메디칼(2004년), IT 기업인 삼우통신공업(2005년)과 합병했다. “작은 파이의 큰 퍼센트보다는 큰 파이의 작은 퍼센트가 절대적인 양으로 따지면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회사를 위하는 일이 저에게도 이익이 되리라는 걸 깨달았던거죠.” 배 대표는 오는 6월 ‘툴젠’ ‘팬젠’과 합병도 준비 중이다. 재생의학 전문인 리젠이 유전자 치료 기술력을 확보한 툴젠, 단백질 치료 기술력을 가진 팬젠과 합병하면 유전자·단백질·세포치료제에 대한 모든 핵심 기술과 제품군을 갖추면서 통합 바이오기업으로 거듭나게 된다.

수석 졸업자에 추천서 안 써줘 그는 98년 탤런트 김자옥씨와 함께 항균섬유린스 CF 모델로 출연한 경력도 있다. KIST 선임연구원 시절 박사급 주부 컨셉트의 모델로 발탁됐었다. CF 모델 경력을 자랑하듯 그는 40대 중반을 훌쩍 넘은 나이가 무색할 만큼 아름다웠다. 인터뷰 내내 잘 웃었고 말투도 조용한 ‘천상 여자’였다. M&A 시도를 수차례 했던 대범한 여성 CEO의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배 대표와 대학동기였던 노승권 유진사이언스 사장은 아직도 배 대표를 ‘얼굴 예쁘고 공부 잘했던 참한 여학생’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워낙 예뻐서 옆 건물 공대와 약대, 법대 선배들이 소개시켜 달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공부도 잘했어요. 노력파였죠. 학부도 수석 졸업해 동료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는 학부시절 한번 연구실에 들어가면 조교가 쫓아낼 때까지 연구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열심히 노력해서 나오는 결과를 보는 재미가 쏠쏠해 공부를 마치 게임처럼 즐겼단다. 하지만 그도 ‘남녀차별’이란 보이지 않는 장벽을 피해가진 못했다. 대학 졸업 직후 취직을 할 뻔했으나 교수는 그가 수석졸업자임에도 불구하고 추천서를 써주지 않았다. 여러 명의 남자 동기들과 동시에 신청했는데 자리는 한정돼 있었다. 교수는 남학생을 선택했다. “여성은 결혼하면 바로 직장을 그만두고 생활에 안주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좌절 뒤에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왔다. 같은 공대 출신의 남편과 미국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귀국할 수 있었던 것. 처음엔 부부가 동시 입학이 되지 않아 남편만 공부를 시작하게 됐었다. 남편이 아내를 위해 자진해서 학과장과 인터뷰 자리를 주선해 준 덕분에 배 대표는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아이 둘을 키우며 평범한 주부로 생활하던 그에게 KIST의 연구원이 될 수 있도록 해준 것도, 창업을 망설일 때 용기를 준 것도 남편이었다. 남편 역시 현재 사업가의 길을 걷고 있다. 그래서 그는 ‘새옹지마’라는 말을 좋아한다. 어떤 안 좋은 상황이 일어났을 때 그로 인해 오히려 더 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긍정적 믿음이 있다. 대학 입시를 앞둔 고3 때 몸이 많이 아팠었단다. 겨우 대학 입시를 봐서 서울대에 합격했지만 몸 상태가 학교에 다닐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1년 휴학계를 내고 집에서 몸을 추슬러야 했다. “어떻게 보면 엄청난 좌절을 안겨 줄 수도 있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마음을 낙천적으로 먹었어요. 몸도 추스르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면서 건강을 챙길 수 있는 시간으로 삼았어요. 어느 경우든 가장 최악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죠.”

음경확대술 개발로 세계 특허 “기술개발이 주력인 바이오회사는 인간관계가 중요합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이끌어 나가기 참 힘든 부분이 많죠. 연구하고 고민하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책상 앞에 앉아 있다고 모든 직원이 일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릴 수 없습니다. 직원들의 솔선수범은 결국 CEO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거겠죠.”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사람들을 실험실에 붙들어 매는 일 역시 배 대표의 몫이다. 평소엔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한없이 자상하다가 어려울 땐 누구보다 강해지는 ‘외유내강’ 이미지는 직원들로부터 신뢰를 쌓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김소형 한국바이오벤처협회 사무처장의 말을 들어보자. “겉으로 보기엔 매우 여성스러운 분이지만 판단할 땐 대범하신 분이죠. 본인 지분을 양보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웬만한 남성 경영자들도 가지고 있지 않은 판단력과 대범함을 갖춘 분이세요. 리젠 직원들에게 배 대표를 존경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어요.” 리젠 사람들은 회사를 떠나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는다. 회사가 어려울 때 일부 임원은 사재를 털어 자금 지원을 해주기도 했다. 배 대표의 평소 인간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바이오벤처협회의 김완주 회장 역시 그를 준비된 경영자로 인정했다. “배 대표는 경영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죠. 특히 위기를 돌파하는 능력이 탁월해요.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회사와 합병하는 기업 노하우는 높이 평가할 만하죠. 그의 경영능력은 거저 나온 것이 아닙니다.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전경련 경영자과정 등 경영자 대학원에 가보면 어김없이 배은희 대표가 앉아 있더라고요.” 올해도 리젠은 정부 지원금으로 1억원을 받았다. 투자금이 없으면 기업을 운영하기 힘들 정도로 바이오 산업은 어렵다. “바이오 산업이 거품이 많다고 말들을 합니다. 하지만 거품으로 인한 순기능도 있었다고 봅니다. 다 없어진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연구원들의 개발 능력으로 축적이 돼 있다고 생각해요. 투자가 없으면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는 게 이쪽 분야입니다.” 이미 조직공학을 이용한 음경확대술 개발로 세계적 특허를 받은 배 대표다. 그는 체외 인공장기 개발을 꿈꾸고 있다. 과학자 CEO의 자존심을 건 도전이다. 그가 험난하고 가파른 사업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배은희 리젠 대표 1959년생 83년 서울대 미생물학과 졸업 92년 뉴욕주립대 세포분자생물학 박사학위 취득 98~2002년 KIST 의과학연구센터 선임연구원 2000년 리젠바이오텍㈜ 창업 2006년 현재 리젠 대표이사 겸 단국대 분자생물학과 겸임교수, 한국바이오벤처협회 부회장

㈜리젠은? 2005년 7월 코스닥업체인 삼우통신공업㈜과 리젠바이오텍㈜이 포괄적 주식교환을 통해 탄생했다. 2005년 12월 삼우통신공업은 완전 자회사로 분할됐으며, 2006년 1월 리젠바이오텍의 배은희 대표가 ㈜리젠의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리젠은 세포 치료용 지지체(Scaffold) 등 원천기술을 다수 보유하고 있으며, 국내외 IP 등록 및 출원이 100여 건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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