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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옥의 객석에서] 희한한 것과 희한하지 않은 것 차이?

[임선옥의 객석에서] 희한한 것과 희한하지 않은 것 차이?

"희한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희한하지 않은데 희한하게 생각하면 희한한 게 세상에는 참 많습니다.” 무대 위 남자가 말한다. 맞는 말이다. 주위를 둘러싼 평범한 일상이 어느 날 모두 희한하게 보일 때가 있고, 수많은 사람을 만나도 모래사막을 혼자 걷고 있는 희한한 느낌에 사로잡히는 때가 있으니 말이다. 그럼 진짜로 희한한 일을 당하면 오히려 희한하지 않게 여겨질까. 연극 속 남자는 그런 희한한 일을 당하는데, “더 희한한 것은 희한한 생각을 하던 안 희한한 내가 희한한 상황에 익숙해지면서 희한해져 버렸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시작된 연극‘모래여자’는 일본 작가 아베 고보의 소설 『모래의 여자』를 고선웅이 재창작하고 연출한 작품이다. 고선웅은 13년 전 원작소설을 읽고 연극으로 만들 꿈을 꾸었다고 한다. 오랜 숙성기간을 거친 이 작품은 ‘희한한 것과 희한하지 않은 것’ ‘안과 밖’ ‘산 것과 죽은 것’이 같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관념상으로는 동의되는 점이 어떻게 공감을 일으키느냐가 공연의 관건이다. 이야기는 남자가 곤충채집을 갔다가 모래마을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중 한 노인을 만나는 데서 시작된다. 하룻밤 유숙할 곳을 찾는 남자는 노인의 안내를 받아 모래집에 도착한다. 모래 구덩이 속에 있는 집에는 집이 모래에 파묻히지 않도록 모래만 퍼내며 사는 모래여자가 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머물기를 거부하던 남자는 결국 사다리를 타고 20m 아래 모래집으로 내려온다. 하지만 끝내 그 모래집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게 이 남자가 겪는 희한한 일이다. 무대는 기묘하다. 남자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온 무대 위 모래집은 분명히 지층의 높이를 생각하면 지하에 있는데, 객석과 같은 높이의 무대에 모래집을 배치해 객석의 관객들도 모래집 공간 안에 있게 된다. 남자와 함께, 관객도 모래집 안에서 모래여자와 함께 갇혀 있는 양상이다. 모래집에는 끊임없이 모래가 흘러내리고 스며드는 듯한 소리가 들려 객석에도 모래가 서걱거리며 쌓이는 느낌이다. 모래 흘러내리는 소리의 음향과 모래여자의 “시시시시(…) 세세세세(…)” 노래가 극장 안을 감돈다. 무대 위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당황하고, 이해할 수 없어 하고, 분노하다, 마침내 수용하는 남자와 함께 관객 또한 공연 내내 꼬박 모래집에 갇힌다. 가끔 모래 구덩이 위쪽에서 얼굴을 내밀고 물과 술과 담배를 내려주는 노인의 존재가 모래 구덩이 안에서의 삶이 있듯이 모래 구덩이 밖에서의 삶도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모래 구덩이 밖도 모래 구덩이 안처럼 모래가 계속 쌓인다고 한다. 결국 모래 구덩이 바깥도, 안과 같은 상황임을 알린다. 연극은 처음부터 호기심을 자극했다. 주위의 일상적인 것들이 희한하다고 하는 남자의 대사는 대사 내용만으로 웃음지으며 공감하게 했다. 아베 고보라는 작가가 빚어낸 원작의 힘에 고선웅이 빚어낸 자연스러운 대사는 이상하지만 진짜일 수도 있다고 설득당할 마음을 갖게 한다. 남자가 겪게 되는 이 희한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지켜보면서… 연극은 마지막 반전을 시도한다. 남자가 모래집을 빠져나가려고 할 때, 그동안 남자가 만났던 모래여자는 몇 년 전에 죽은 신기 있던 여자였고, 남자는 신문기사를 통해 실종되었다가 죽은 자신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는다. 분명 살아있는데 죽었다는 상황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던 남자는 때마침 무대 안쪽에서 강한 푸른색 조명을 받으며 나타난 모래여자에게로 간다. 남자가 여자에게 가자 모래가 폭포처럼 무대 위로 쏟아져 내리고 연극은 끝난다. 소설 원작과 가장 차별화되는 연극의 마지막 반전은 공연의 말미에 강한 인상과 웅장한 장면을 제공한다. 하지만 그 반전으로 인해 공연 내내 유지했던 철학적 성찰의 끝을 현대판 전설의 고향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큰 아쉬움이다. 제목 : ‘모래여자’ 원작 : 아베 고보 일시 : 2006.6.2 ~ 7.30 (화·수·목·금 오후 8시/ 토 오후 4시·8시 / 일, 공휴일 오후 2시·6시) 장소 : 대학로 사다리아트센터 세모극장 문의 : 극단 마방진 02-3676-7845

필자 임선옥(46)씨는 성균관대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불문학 석사 및 박사를 마친 이후 프랑스 파리-소르본대학교 박사 준비 과정을 거쳤다. 서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를 역임한 후 현재 성균관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 대진대학교 강사를 맡고 있다.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이사이기도 하다. 2005 여석기 연극 평론가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연극평론집 『21세기 연극 서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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