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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명의 경제부총리 列傳] 한국 경제 흥망의 열쇠 쥔 주역들

[30명의 경제부총리 列傳] 한국 경제 흥망의 열쇠 쥔 주역들

우리나라에 경제부총리 제도가 생긴 것은 1964년 5월이다. 이후 30명(김대중 정부 때 부총리제가 폐지돼 재경부 장관직만 수행했던 3명 포함)의 ‘경제 수장’이 나라 경제를 이끌었다. 골곡 많은 ‘경제 성장사’만큼 이들 경제부총리들의 면모도 다양하다. 대부분 화려한 경력을 바탕으로 부총리가 됐지만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사실상 경제 대통령으로 불린 이도 있었고, 있으나 마나 했던 부총리도 있었다. 역대 부총리들의 평균 재임기간은 16.3개월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부총리팀이 25.5개월로 가장 길었고,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평균 9.6개월에 불과했다(박스기사 참조). 기간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경제관을 펼치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을 보냈던 부총리들은 그만큼 인색한 평가를 받고 있다. 부총리가 되기 전에는 ‘실력’을 인정받다가 불명예만 안고 낙마한 부총리도 여럿이다. 장관을 이끄는 장관. 국가 경제 흥망의 책임을 고스란히 떠맡아 온 역대 경제부총리들을 살펴봤다.

3, 4공 : 카리스마형 많아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경제부총리들은 후대에 비하면 행복한 자리였다. ‘빈곤의 탈출’이라는 국가적 사명 아래 많은 권한이 주어졌고, 오래 일할 수 있었다. 장수 경제부총리가 그만큼 많았다. 이 시기 경제부총리들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고 경제팀을 이끌었다는 평이다. 초대 경제부총리에 오른 장기영씨(1964.5~67.10)는 남덕우 5대 경제부총리 다음으로 장수한 경제 수장이었다. 약 41개월 동안 박 대통령을 보좌하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진두지휘했다. 장 부총리는 별명이 ‘왕초’라고 불릴 만큼 경제부처를 장악하며 수출 주도의 경제개발 계획을 정립해 나갔다는 평을 받는다. 재임 시절 수출 1억 달러 목표를 달성해냈다. 장기영 부총리 시절 상공부 장관이었던 박충훈씨(1967.10~69.6)가 두 번째 바통을 이어받았다. 박충훈 부총리는 3공화국의 대표적인 ‘경제통’이었다. 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깊숙이 관여했고,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경제계 대부’로 통했다. 적극적인 차관 도입을 강조해 ‘외자도입법’과 ‘자본시장 육성법’ ‘미(美) 추가원조 협정’ 등을 이끌어냈다. 그는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박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종합제철소 프로젝트’와 관련해 재검토 발언을 했다가 부총리 취임 20개월 만에 경질됐다. 그는 1980년 8월 최규하 당시 대통령이 하야한 뒤 12일간 대통령 직무대행을 하기도 했다. 박 부총리가 경질되고 10일 후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받던 김학렬 청와대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이 3대 경제부총리(1969.6~72.1)에 올랐다. 그는 박통의 염원이던 포항제철을 완공하고, 우리 경제의 10대 사건 중 하나로 꼽히는 경부고속도로 개통을 이끌어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본궤도에 오르자 현금 차관을 금지하기도 했다. 그는 임기 중 1972년 1월 3일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4대 경제부총리에 오른 태완선씨(1972.1 ~74.9)는 ‘1차 오일쇼크’ 정국을 무난하게 넘긴 부총리로 기억된다. 부총리에 오르기 전 이미 세 번의 장관을 역임했던 태완선 부총리는 당시 남덕우 장관과 함께 기업의 사채 동결과 금융기관 대출금리를 낮춘 8·3조치를 끌어낸 인물이기도 하다. 8·3조치는 60년대 무리한 외자도입에 따른 부작용으로 기업 부실이 심각해지자 내놓은 특단의 카드였다. 이런 업적으로 그는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 오원철 경제수석, 남덕우 부총리와 함께 70년대의 4대 경제주역으로 꼽히고 있다. 역대 최장수 경제부총리였던 남덕우씨(1974.9~78.12)는 박 대통령의 후반기 경제정책을 이끈 주역이었다. 그는 중화학공업과 강력한 수출진흥책을 폈다. 그는 서강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정부로 들어가 재무부 장관을 지내고, 부총리가 됐다. 그는 지금도 각종 여론조사에서 ‘가장 능력있는 경제관료’ 상위권에 줄곧 이름을 올리고 있다. 후임 신현확 부총리(1978.12~79.12)는 기존 부총리들과는 다른 처방전을 갖고 경제를 이끌었다. 자유당 시절 39세로 최연소 장관이 됐던 그는 9대 국회의원 신분으로 보사부 장관을 지내다 경제부총리에 올랐다. 그는 당시 강경식 경제기획원 차관보와 함께 성장보다는 ‘안정화 정책’을 폈다. 이로 인해 대통령 경제담당 특보로 자리를 옮긴 남덕우 전 부총리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는 박정희 정부 이전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아이디어를 내놓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10·26사태로 박 대통령이 서거한 뒤 경제부총리에 취임한 이한빈 아주대학장. 그는 최규하 대통령 과도체계 5개월 동안 짧지만 선 굵은 정책을 편 것으로 평가된다. 당시 한국경제는 심각한 성장후유증을 겪고 있었다. 물가는 23%에 달했고, 외환보유액은 고갈 직전이었다. 제2차 오일쇼크로 국내 기름 재고는 7일분에 불과했다. 그는 1980년 1·12조치를 통해 환율과 금리를 대폭 인상하고, 유가도 60% 가까이 인상했다. 전기요금과 독과점 품목의 가격인상도 허용했다. 분명 ‘악역’이었지만, 이후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 등으로부터 “오일쇼크를 겪는 국가 중 한국이 가장 교과서적인 조치를 취했다”고 평가를 받기도 했다.

5공 : 3저호황 시대 이끈 주역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5공화국 때는 6명의 경제부총리가 배출됐다. 정권교체기에 4공화국 말기 재무부 장관을 지냈던 김원기씨(1980.5~80.9)가 잠시 경제부총리 자리를 수행한 뒤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던 신병현씨(1980.9~82.1, 83.10~86.1)가 경제 수장이 됐다. 그가 경제부총리에 오르면서 20년간 계속돼 온 ‘성장 우선 정책’은 일대 전환점을 맞는다. 그는 김재익 대통령 경제수석과 함께 ‘경제 안정화 시책’을 밀어붙였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공화국 경제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안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20년간 지속된 성장 위주의 정책을 안정기조로 전환해 뿌리내릴 수 있었던 데에는 신 부총리의 고집스러운 소신과 뚝심 있는 추진력이 그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며 신 부총리를 치켜세웠다. 그는 지금까지도 ‘3저 시대 호황’의 기초를 세운 부총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83년 10월에 다시 경제부총리 자리에 올랐다. 5공화국 2대 경제부총리는 대구은행 창립자이며, 외환은행·산업은행·한국은행 총재를 지낸 김준성씨(1982.1~83.7)가 이어받았다. 금융통이었던 그는 물가안정 시책으로 재계 불만이 높자 금리·법인세 인하 조치를 발표해 무마하고, 취임 직후 터진 ‘장영자 어음사기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경제팀을 무난히 이끌었다는 평이다. 후임 서석준 부총리(1983.7~83.10)는 취임 후 얼마 안 돼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순직했다. 서 부총리가 사망한 뒤 5공화국 초기 경제정책의 틀을 잡았던 신병현씨가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다시 임명되면서 부총리직을 수행했다. 서강대 교수 출신으로 남덕우 전 총리에 이어 ‘서강학파’를 이끈 김만제씨(1986. 1~87.5)는 재무부 장관을 거쳐 부총리에 올랐다. 그는 85년 9월 G5 회담에서 엔화 절상이 합의되면서 개막된 ‘3저 시대’와 맞물려 ‘단군 이래 최대 경제호황’을 이끌어냈다. 그는 77년 이후 적자였던 국제수지를 흑자로 전환시켰고, 12%대의 높은 성장률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3저 호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기업투자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정책기조를 밀고 나갔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때의 설비 과잉과 양적 성장에 치중한 부실이 90년대 후반 한국 경제가 침몰하는 단서였다는 평을 내리기도 한다. 5공화국 후반부 약 10개월을 책임진 정인용 부총리(1987.5~88.2)는 부실기업 정리 등 악역을 맡았지만 특유의 청렴으로 민주화 요구로 뜨거웠던 5, 6공 과도기의 경제팀을 무난히 이끌었다는 평을 받는다. 국민의 민주화 요구 속에 출범한 6공화국은 적극적인 경기부양책을 썼지만, 인기 위주의 경제정책과 흑자관리의 실패, 노사문제 심화 등 한국 경제가 내리막길로 돌아서는 빌미를 제공했다.

6공·YS 경제팀 : 환란 빌미 제공 4명 경제부총리의 면모는 화려했다. 나웅배, 조순, 이승윤, 최각규 등 스타플레이어들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전반적으로 정책기조는 ‘경기 부양’ 이었다. 6공 출범과 함께 경제부총리에 오른 나웅배씨(1988.2 ~88.12)는 ‘금리 인하론자’였고, 이승윤 부총리(1990.3~91.2)는 설비자금 1조원을 앞세워 당시 김종인 청와대 경제수석과 함께 성장 우선 정책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나웅배 부총리를 이어 부총리에 오른 조순 당시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기부양책을 거부하고, 안정론을 고수하다가 정부 여당과 마찰을 빚고 중도 하차하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 마지막 부총리였던 최각규씨(1991.2~93.2)는 금리자유화와 증권시장 개방 등 개방정책을 펼쳤다. 역대 최악으로 꼽히는 김영삼(YS) 정부 경제팀은 7명의 부총리가 평균 9개월씩 맡았다. 개혁과 변화를 주창하면서 금융·부동산 실명제, 세계화 선언 등 의욕적으로 출범했지만 경제의 부실화가 가속화되면서 IMF관리체제를 부르는 빌미를 제공했다. 문민정부의 부총리들은 잇따라 ‘경제개혁 조치’를 발표했다. 하지만 전시성 선언이 많았고, 파괴적 개혁에 치중하면서 “IMF로 가는 시간을 단축시켰다”는 악평을 받았다. 부총리 직전 직업이 유일하게 기업인(한국가스공사)이었던 이경식 부총리(1993.2~93.12)는 신경제 100일 계획 발표, 금융실명제 선언, 후임 정재석 부총리(1993.12~94.10)는 세계화 선언과 공기업·은행 민영화 발표, 홍재형 부총리(1994.10~95.12)는 신경제 장기구상과 부동산 실명제를, 한승수 부총리(1996. 8~97.3)는 노동법 파동, 강경식 부총리(1997.3~97.11)는 경제구조 개혁, 21세기 개혁과제 등을 발표했지만 ‘말은 많고 행동이 없었던’ 정책에 불과했다는 평이다. 결국 YS정부의 마지막 부총리였던 임창열씨(1997.11~98.3)는 취임식장에서 “한국 경제는 IMF의 지원 없이 국제금융계의 도움을 받아서도 회생이 가능하다”고 했다가 이틀 만에 ‘IMF 구제금융 신청’을 발표하는 수모를 겪었다. 전임 강경식 부총리는 이후 ‘환란’의 책임 소재를 놓고 6년간 법적 공방을 벌이기도 했다.

DJ팀 : IMF 탈출 진력 IMF관리체제에서 출범한 김대중(DJ)정부 때는 재정경제부 장관이 부총리를 겸임하는 제도를 없앴다.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경제를 챙기는 모양새였다. 이규성 장관(1998.3~99.5), 강봉균 장관(1999.5 ~00.1), 이헌재 장관(2000.1~00.8) 등은 DJ의 뜻에 따라 증시 부양책, 벤처 진흥책, 신용카드 활성화 대책 등 강력한 경기부양책을 썼다. 이와 함께 기업 구조조정 정책을 펼치면서 ‘IMF탈출’에 안간힘을 쏟았다. DJ는 2000년 1월 정부조직법 개편에 따라 다시 경제부총리 제도를 부활시켰고, 진념(2000.8~02.4), 전윤철 2002.4~03.2) 부총리가 임기 후반 경제정책을 진두지휘했다. 주가지수 300선이 무너지고, 퇴출기업·은행이 속출하는 가운데 빠른 경제회복을 이끌어낸 ‘강봉균-이헌재-진념-전윤철’을 두고 관료사회에서는 조직 내에서 ‘정평이 난 인사로만 구성된 드림팀’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부총리가 아님에도 경제 수장에게 힘이 실리면서 정책 일관성이 유지됐다는 평도 있다. 현 정부 들어서는 김진표 부총리(2003.2~04.2)를 시작으로, 이헌재 부총리(2004.2~05.3), 최근 퇴임이 확정된 한덕수 부총리(2005.3~06.7)로 이어졌다. 모두 쟁쟁한 실력을 인정받은 정통 관료 출신이다. 이헌재 부총리가 ‘386 실세’들과의 잦은 마찰 끝에 부동산 문제로 실각했고, 김진표 부총리와 한덕수 부총리는 ‘정평’은 나 있었지만 모두 ‘조직장악 능력’에 부족을 드러내며 뚜렷한 실적을 내지 못했다. 이들에 대한 평가는 아직 이르다. 14명은 취임 직전 ‘장관’ 87%가 ‘장관급직’ 경험 국무총리 영전은 2명 평균 재임기간 16.3개월 남덕우씨 최장수 52개월 정권 후반 갈수록 관료 선호 3명 중 2명은 서울대 출신 상경계열 전공은 절반 퇴임 후에도 영향력 행사


역대 경제부총리 살펴보니…

취임 때 평균 나이는 55.9세
이코노미스트가 역대 경제부총리 30명의 이력을 조사해 본 결과 절반에 가까운 14명은 부총리로 취임하기 직전 ‘부처 장관’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또 경제부총리가 되기 전에 ‘장관급’직 경험 비율은 86.7%(26명)였다. ‘장관’이 경제부총리로 가는 ‘필수 코스’였던 셈이다. 현 정부 들어서는 이헌재 전 부총리를 제외하면 김진표, 한덕수 전 부총리, 권오규 내정자 모두 경제부처 경험은 차관까지고, 장관급인 국무총리국무조정실장(김진표, 한덕수)이나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권오규)직을 수행하다가 경제부총리가 됐다. 김영삼 정부 출범 때 부총리에 오른 이경식 전 부총리는 유일하게 직전 직업이 기업인(한국가스공사 사장)이었다. 국회의원 임기 중 부총리가 된 인사는 4명, 대학교수(총장)와 대통령비서실장(수석비서관 포함) 출신이 각각 3명이었다. 역대 부총리 가운데 3명 중 2명(20명)은 서울대 출신이었다. 미국·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인사는 6명. 고려대 2명, 연세대·국민대가 각각 1명이었다. 전체 30명 중 22명은 유학 경험이 있었고, 부총리 전 박사학위를 딴 사람은 12명이었다. 석사는 6명이었다. 학부 전공은 상경계열이 14명으로 가장 많았고, 법학 8명, 정치·외교 5명 순이었다. 신병현(9대, 12대), 나웅배(15대, 22대), 이헌재(28대, 32대)씨는 경제 수장 자리를 두 번 역임했다. 조선시대로 따지면 ‘우의정’격인 경제부총리 중 이후 ‘영의정(국무총리)’에 오른 경우는 남덕우, 신현확씨 등 2명뿐이었다. 2대 경제부총리였던 박충훈씨가 국무총리 서리, 9대와 12대 부총리를 지낸 신병현씨가 국무총리 대행을 했다. 경제부총리들은 퇴임 후 국회의원, 정부 관련 기관장, 도지사 등을 포함해 각종 협회장, 이사장, 고문 등으로 활동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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