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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땅 잃는 한국 원전

설땅 잃는 한국 원전

몇 달 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원자력국으로부터 원자력발전소 정례 보고서 초안을 받아든 서균렬 서울대 교수(원자핵공학과)는 눈을 의심했다. 한국이 만든 신형 경수로 ‘APR1400’ 원전이 일본 제품으로 소개됐기 때문이다. APR1400은 한수원이 한국 표준형 원전 ‘OPR1000’을 토대로 1992년부터 10년간 2300여억원을 들여 개발한 신형 노형이다. 원천 기술은 미국에 있으나 개발 주체는 엄연히 한국이다. 우리가 수출에 주력하는 노형이기도 하다. 서 교수는 OECD에 연락을 취해 한국 제품으로 바로잡았다. 정례 보고서 초안은 OECD 내 원전 전문가가 작성한다. 일반인도 아닌 원전 전문가가 한국 제품을 일본산으로 오인했다는 말이다. 결국 국제사회에 ‘APR 1400=한국 원자로’라는 인식이 자리 잡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홍보가 덜 된 탓이다. 서 교수는 10년간 공들여 만든 신형 원전을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이 국제사회에 제대로 홍보를 못했나 싶어 마음이 무척 무거웠다고 돌이켰다. 한국 원자력산업은 “홍보에서 수출까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자세로 일하는 기업가 정신이 필요한 단계”라고 그는 말했다. 한국은 1978년 고리원전 1호기 완공 이후 총 20기의 원전을 건설하면서 인력과 기술을 키워왔다. 따라서 한국 원전의 평균 이용률이나 원전 운영 경험은 세계적 수준이다. 80년대 이후 원전 건설이 없었던 유럽·미국과 달리 한국은 90년대 들어서만 11기를 건설하고 가동해 본 경험이 있다고 유승봉 한수원 해외사업처장은 밝혔다. 그 노하우를 바탕으로 원전 부품과 인력 수출에서도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앞으로 국내에 더 지을 원전은 많아야 7~8기뿐이다. 따라서 지금의 산업 규모와 기술력을 계속 유지하려면 반드시 원전 수출이 활발해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는 한국 원전의 중국 진출에 최근 몇 년간 지나칠 정도로 집착해 왔다(관계기사 22쪽 참조). 하지만 한국은 플랜트 수출의 전제조건인 원천기술이 없고, 도시바의 웨스팅하우스 장악으로 부품 수출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한국 원전산업의 가장 큰 위협은 세계 원전업계의 재편이다. 한국의 몇몇 원전 전문가는 지난 2월 일본 도시바의 미국 웨스팅하우스 소식을 접하곤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미국의 대표적 가압경수로 공급업체인 웨스팅하우스는 지난 2월 일본의 도시바에 54억 달러에 매각됐다. 도시바는 2015년까지 원전산업을 지금의 3배 수준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서균렬 교수는 도시바의 웨스팅하우스 인수를 “우리가 제대로 체감하지 못하는 큰 지각변동”에 비유했다. 비등수형원자로(BWR)만을 판매해온 도시바가 가압수형 경수로(PWR)를 가진 웨스팅하우스를 인수했다면 원자력업계의 천하통일에 버금간다는 사건이라는 뜻에서다. 따라서 원전 전문가들은 도시바의 웨스팅하우스 인수를 한국 원전산업의 미래를 좌우할 중대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부품 수출과 원천기술 확보 양쪽에서 판도 변화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우선 웨스팅하우스를 대신해 한국에 핵심 원전 기술을 공급하게 될 도시바가 기술 사용료를 올려받을 가능성이 있다. 한국이 생산하지 못하는 원자로 냉각제 펌프 가격이 벌써 들썩인다고 서 교수는 전했다. 자체 부품 생산 기지를 두지 않은 웨스팅하우스는 새 원전을 수주하면 두산 등 국내 기업들에 하청을 줘왔다. 원전 2기를 지으면 어림잡아 2억 달러 이상의 부품과 기자재를 웨스팅하우스가 공급하는데 이 중 상당액이 국내 기업을 통해 공급됐다. 도시바가 끼어들면서 사정은 변했다. 비록 노형은 다르지만 도시바는 부품 생산 경험과 시설을 갖추었다. 궁극적으로 부품과 기자재를 자체 공급하려 들 게 분명하다. 국내 기업들에 떨어지는 몫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실제로 도시바는 아시아지역 원전 수출에 상당한 야심이 있다. 웨스팅하우스 인수에 투자한 자본을 2015~2020년까지 회수한다는 방침이다. 원전 플랜트 수출 시장뿐 아니라 한국이 상대적으로 강한 부품·기자재, 인력까지도 도시바가 잠식하리라고 프랑스 원자력에너지 그룹 아레바 코리아의 이진우 부사장은 내다봤다. 도시바 때문에 원전 플랜트 수출(원자력 발전소를 통째로 건설해 납품하는 경우) 가능성은 지금보다 더 희박해졌다는 견해도 있다. 지난 30년간 한국과 거래해 온 웨스팅하우스는 기존의 신뢰관계에 기초해 몇몇 기술을 한국에 양보할 여지가 있었다. 새 주인이 된 도시바는 하나에서 열까지 일일이 챙기려 들지 모른다는 분석이다. 아레바 코리아 이진우 부사장은 “도시바 뒤에 있는 일본 정부가 한국의 원전 플랜트 시장 참여를 허용할 리 없다는 관측이 우세하다”고 업계의 시각을 전했다. 특히 요즘의 한·일 관계나 일본 정부의 일방적 행보를 보면 더욱 그렇다. 아시아권 원전 플랜트 시장 석권을 노리는 일본이 원천기술로 한국의 발목을 잡는다는 시나리오다. 한국수력원자력 이희용 사업전략팀장도 “중국, 베트남, 동남아 등 곳곳에서 한국과 일본이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느긋한 쪽은 정부다. 이인호 산자부 원자력산업팀장은 도시바의 웨스팅하우스 인수가 다소 우려를 낳지만 여건이 크게 바뀌진 않는다고 했다. 이 팀장은 “원전 수주는 기존 방식대로 하면 되고, 단지 기자재·부품을 공급하는 두산중공업 등 국내 업체들이 수출에 차질을 빚는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정부가 생각하듯이 파장은 간단치 않다. 서균렬 교수는 “문이 열리면 수출이 문제가 아니고 역수입이 우려된다”고 했다. 도시바가 저가의 물량공세를 펼칠 경우 한수원 등 원전업체들이 국내산을 두고 외국산 부품과 기자재를 구입할지 모른다는 말이다.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으로 원자력발전소 기자재 공급과 시공 분야는 1997년부터 개방됐다. 설계 엔지니어링과 원전 연료 부분은 머지않아 개방이 불가피하리라고 업계는 예상한다. 개방경제 하에서 시장의 논리는 예외없이 적용되는 법이다. 물론 정부나 한수원이 정책적으로 국내 산업 보호에 나서겠지만 한계는 있게 마련이다. 한국 원전산업의 대외 경쟁력 확보가 시급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타개책은 제한적이다. 우선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필요한 핵심 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 확보하는 방안이 하나다. 그러자면 지금까지 원자력 연구개발에 투자해온 비용과는 비교하기 힘든 천문학적 규모의 돈을 쏟아부을 각오를 해야 한다. 게다가 기술 선진국들이 한국의 독자개발을 순순히 도와주지는 않을 전망이다. 당장 기술 지원 중단 시사 등 유·무형의 압력이 가해질 수 있다. 다른 기술 지원 통로의 개척도 한 방법이지만 한·미 간 특수관계를 고려하면 상당한 위험부담이 따른다. 위험부담을 피하고 싶고, 엄청난 기술 투자가 버겁다면? 플랜트 수출을 포기하고, 현재 국내 가동 중인 원전과 앞으로 지을 원전을 관리할 기술 정도만 보유하면 된다. 그러나 지난 30년간 막대한 돈을 들여 육성해온 설계, 건설, 운영, 검사 기술과 인력은 오갈 데 없어진다. 2004년 말 원자력산업 종사자는 2만1200명에 이른다. 만약 국내 원전 건설이 중단되고 플랜트 수출의 길이 열리지 않으면 이들 인력이 궁극적으로 일자리를 잃게 된다. 사람을 잃으면 기술도 잃는다. 기술을 버리는 것은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라고 원자핵공학을 전공한 제주대 정범진 교수는 말했다. 한수원 해외사업처 윤용우 부장도 “원천기술의 독자 개발이 정부와 업계의 공감대”라고 강조했다. 플랜트 수출로 한국 원자력 산업의 규모를 계속 키워나가겠다는 얘기다. 그러나 한국의 원전 수출은 지금까지 민간이 아니라 정부 재투자기관이 주도해 왔다는 문제가 있다. 그만큼 수출의 추동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한국 원자력산업계는 한국전력 그룹을 중심으로 특화된 원전사업체들의 집합으로 연결돼 있다. 정부투자기관인 한국전력이 100% 출자해 만든 한국수력원자력㈜은 정부재투자기관으로서 국내 원전시장을 독점해 왔다. 그 주변에서 엔지니어링을 맡은 한전기술㈜ , 주요기기를 제작하는 두산중공업㈜, 유지보수를 맡은 한전기공㈜ 등이 분야별로 지원하는 체계다. 두산중공업, 현대건설, 동아건설, 대림산업 등이 원전 건설에 참여한다. 현재 한국 원전의 해외 홍보와 원전 플랜트 수출의 마케팅은 한수원이 도맡아 한다. “어설프게 엮인 데다 일부 업무는 상충하는 비효율적인 구조”라고 서울대 서균렬 교수는 지적했다. 경희대 황주호 교수팀이 ‘원자력 산업기술 개발사업 중·장기 추진방향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던 2003년 당시로 돌아가 보자. 황 교수팀은 당시 산업자원부, 학계, 업계의 원전 전문가 26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원전 핵심 관계자들은 직접 만나 인터뷰도 했다. 한전 계열사 관계자들을 접해본 황 교수팀은 “현재 차지하는 역할과 위치에 만족하고 배고프지 않은 듯했다. 수출 열의도 그리 뚜렷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피력했다. 공기업이다 보니 실적 부담이 많지 않아 악착같이 덤비는 맛이 덜했다는 지적이다. 두산중공업의 실무자들이 황 교수팀과의 면담 과정에서 밝힌 내용은 충격적이다. “한전 같은 정부 투자기관의 그런 모습은 일견 당연하다. 지배계층의 시각이다. 두산의 경우 당장 실적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먼 산 바라보듯 뒷전에서 여유를 부릴 순 없다. 배고픈 이리떼와 배부른 이리떼가 들판을 거니는 차이라 볼 수 있다”고 했다. 원전 수출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한전과 한수원을 바라보는 민간 기업의 시각이 차갑다 못해 냉소적이다. 학계의 시각도 별반 다르지 않다. 모 교수는 “한수원 입장에서는 수출이 되면 좋고 안 되어도 그만이다. 발전소만 돌리면 이익이 남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수원 중심의 원전 수출은 구조적으로 탄력을 받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어떤 방향으로 구조를 변경해야 하는지 업계는 이미 잘 안다. 원전 관련 장비 개발업체 한빛파워서비스의 전재풍 회장은 “한국도 원전을 플랜트 단위로 수출하려면 더 늦기 전에 수출전략을 재구축해야 한다”고 했다. 전 회장은 원전 수출에도 비즈니스 마인드를 도입하자고 했다. 그래서 원전 건설 경험이 있는 두산중공업 등 국내 민간 건설업체와 원자력 증기 계통 설계능력을 갖춘 한국전력기술이 결합해 수출을 주도하는 구조가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 미국의 웨스팅하우스나 프랑스의 아레바 등 해외 대표적인 원전 수출 업체들은 하나같이 엔지니어링 전문회사다. 이들은 한수원처럼 직접 원전을 운영해 전력을 생산해 파는 일이 주요 업무가 아니다. 원전 설계와 주요 부품 제조를 전문으로 하면서 플랜트 해외 수출에 주력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 한국 같으면 한국전력기술과 두산중공업이 합하면 이런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그래서 양사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수출 전담 기구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지난 3월 15일 서울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원자력계 조찬 간담회에서 김대중 두산중공업 부회장도 지금의 체제로는 경쟁력을 장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원자력 기술 도입 초기에는 지금처럼 사업기능을 여러 기관에서 분담토록 해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체계로 간다면 외국 기업에 견주어 경쟁력 확보가 어렵다고 김 부회장은 전망했다. 김 부회장은 “당장 원전산업 체제의 방향을 제시할 수 없지만 어떤 방향이든 규모의 경제를 이루는 체제, 의사결정이 일사불란한 체제,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체제를 논의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박창규 한국원자력연구소장은 “인식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이 원자력 기술 자립단계에서는 기관별로 업무를 분장했지만, 이제는 확실하게 선도적 역할(leading role)을 하는 구심점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회 산업자원위 소속 최철국(열린우리당) 의원도 “한전이 자회사로 분리된 이래 한전원자력연료, 한전전력기술과의 연계마저 약화됐다. 세계시장 진출도 설계회사, 운영회사, 연료회사, 시공회사가 각개약진하는 실정”이라며 변화를 다그쳤다. 학계에서도 변화의 필요성에 공감한다. 황주호 경희대 교수는 “기술이 부족하면 민간 기업의 투지로 시장을 뚫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기업의 해외시장 마케팅은 이미 한계에 왔다는 의미다. 제주대 정범진 교수는 “지금까지 배부르고 편안한 수출을 하려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자성을 촉구했다. 미국의 웨스팅하우스나 도시바는 민간 기업인데 반해 프랑스의 아레바는 국영기업이다. 결국 지배구조의 문제라기보다는 구성원들의 자세가 승부를 결정짓는 주요 요인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정부 반응은 시큰둥하다. 산자부 이인호 원자력산업 팀장은 “지금 같은 한수원 주도 수출 시스템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민간 비즈니스 마인드가 도입되면 지금보다는 나아지겠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이유를 댔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혼란도 무시하기 힘들다고 했다. 따라서 산자부는 “원전 수출 구조 개편에 관해 당장 특별한 계획이 없다”고 했다. 이런저런 부작용 때문에 못하겠다는 얘기다. 수출 시스템 변화가 힘든 이유를 정범진 교수는 “주도권 다툼의 측면도 있다”고 풀이했다. 한수원이 원전 수출을 표방하며 동분서주하는 모양새를 보이면 한국전력기술과 두산중공업은 자세를 낮춰야 한다. 한국전력기술은 한수원과 같이 한전의 자회사고, 두산중공업은 협력업체 격이기 때문이다. 따로 자기 몫을 챙겨오던 기관들이 통합하게 되면 불협화음이 생기게 마련이다. 국내 관련기관 간의 공조체제가 미흡하다는 지적은 원전업계에서는 오래된 얘기다. 획기적인 변화 없이는 한국이 우위를 가진 분야마저 해외 업체들에 내줄지도 모른다. 서균렬 교수는 “사람이나 기계를 떼어다가 한 울타리에 가둘 순 없겠지만 지금처럼 가서는 절대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한국이 강점을 지닌 원전 건설, 운전 분야도 위협받기 때문이다. 중국시장에 진출하게 되는 미국·일본이나 유럽 업체들이 원전 건설과 운전 노하우를 따라잡는 건 시간문제다. 결국 전문성과 규모의 경제를 가진 구심점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이는 최고권력자가 작심하고 밀어붙이지 않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고 서 교수는 덧붙였다. 정부의 무관심과 업계의 먹이사슬 구조가 수출구조 혁신의 발목을 잡는 셈이다. 누가 수출을 주도하느냐는 문제 못지않게 그렇다면 무엇을 수출할 것인가의 문제도 있다. 플랜트 수출을 하려면 기술이전을 해줄 만한 원천 기술이 확보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쉽지 않은 문제다. 한국의 원전 기술은 어느 수준일까? 원자력 발전의 출력면에서는 세계 6위의 강국이다. 2005년도 한국 원전의 평균 이용률(설비용량 대비 실제 발전량)은 95.5%로 세계 평균 79.3%를 훨씬 앞지른다. 2000년 이후 6년 연속 90% 이상의 이용률을 기록했다(2004년 원전 이용률은 세계 6위를 기록했다). 원전 가동률(365일 대비 실제 가동시간)도 1990년 이래 평균 80% 이상이다. 하지만 원자력계 내부의 평가는 냉담하다. 한수원 안전기술처와 서울대 기초전력연구원은 얼마 전 ‘원전 기술 고도화사업 종료 이후 원전 기술의 선진화 및 후속사업 기획 연구’ 보고서를 펴냈다. 이 보고서는 한국의 원전 기술을 원전 기자재, 원전 설계, 기계 설계, 원전 시공·건설, 원전 운영, 유지 보수, 인허가, 산업기술 기준 등 8개 요소로 분류했다. 8개 요소 모두 선진국 기술 수준(90~100%의 기술 획득)에 미치지 못했다. 특히 정부가 자랑하는 원전 운영과 시공·건설도 85%에 그쳐 선진국 수준과는 격차가 여전하다. 나머지 6개 요소는 아예 중진국 기술 수준이다. 독자적 원전 기술을 확보하려고 99년부터 2006년까지 3100여억원을 투자한 ‘원전기술 고도화 사업’도 기대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수출경쟁력 제고를 위한 기반 기술 확보와 기술 고도화 실적이 미흡하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보고서는 “세계시장을 무대로 기술 수출을 활성화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황주호 경희대 교수가 2003년 작성한 ‘원자력산업 기술 개발사업 중·장기 추진방향에 관한 보고서’도 마찬가지다. 조사에 응한 원전 전문가 260여 명 중 45%가 현재의 기술 수준으로도 당장 플랜트 수출이 가능하다고 응답한 반면 48%는 최소 3년에서 최장 5년 정도의 기술개발이 더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마저 기존 원전의 복제 건설이라는 제한된 가정 위에 이뤄진 조사다. 원전을 독자적으로 수출하는 데 필요한 원천기술의 개발은 적어도 앞으로 10년은 더 걸린다고 학계와 관련업계는 추산한다. 현재까지 확보된 원자력 기술은 대부분 국내 실시권(사용권)만 보유하고 있다. 원자력 기술 수출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기술진은 말한다. 정범진 제주대 교수는 “원전 기술 개발은 천재가 필요한 분야가 아니다”고 단언했다. 기술력은 투자된 돈과 시간에 비례한다는 말이다. 정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92년 과기부에서 원자력 기술 개발 중장기 계획을 세웠는데 지금까지 고작 수천억원이 투자됐다. 원전은 거대 과학이다. 그에 걸맞은 투자 없이 독립은 없다. 한국의 원자력 산업 기반도 옹색하기 그지없다.” 인력만 해도 그렇다. 원자력 공학과 6개 학과, 전공 교수 50여 명이며, 원자력·방사선 전공자는 1500여 명에 불과하다. 원전 기술 독립에 성공한 프랑스의 예를 보자. 원천 기술을 미국으로부터 들여왔지만 30년이 채 지나지 않아 독자 노선을 걷는다. 프랑스는 1950년대 후반 원천기술을 미국 웨스팅하우스에서 사왔다. 이후 정부의 강력한 지원 아래 연구개발을 추진, 독자적인 설계·운영 기술을 보유하게 됐다. 그들만의 설계 코드와 설계 언어를 개발하고 반복되는 실험으로 성능을 검증했다. 81년엔 미국 웨스팅하우스사와의 기술 협정을 폐지하고 결별을 선언했다. 이때부터 미국으로부터 기술적 지원을 일절 받지 않았다. 이런 게 기술 독립이다. 물론 한국과 프랑스는 출발 당시 기술 수준이 다를 뿐더러 원전 개발에 투자하는 예산 규모도 크게 차이가 난다. 이진우 아레바 코리아 부사장은 “기술개발비가 적어도 10배 이상은 차이가 날 것”이라고 했다. 한국은 70년대 미국에서 기술을 수입한 이래 지금도 기술 종속국이다. 10년 단위로 미국 측과 기술사용협정서를 맺어 원천 기술을 제공받아 왔다. 내년 6월이면 또 10년 단위의 기술사용협정 계약을 갱신한다(재계약이 성사될 전망이지만 확정적이지는 않다. 한수원의 실무 관계자는 “웨스팅하우스로부터 기술이전을 계속 받을지, 아니면 프랑스의 EPR노형으로 제휴선을 바꿀지 검토 중”이라고 했다). 재계약 쪽이 경제적이고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가면 기술 독립은 요원하다. 서균렬 교수는 지금이라도 확고한 국가전략으로 세워 왕창 몰아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외국 원전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한국 기술 독립에 대해 회의적이다. 어떤 기술을 개발하다가도 문제가 터지면 외국에 지원을 요청하기 일쑤다. 핵심 기술을 왜 외국에서 들여다 쓰는가. 일단 개발하는 것보다 값이 싸고 당장 활용이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플랜트 수출을 못한다. 지금이라도 누군가가 악연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 기술 독립에는 위험부담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그래도 확고한 목표를 세워 차근차근 밀고 나가야 한다. 정부가 확실하게 밀어주면 된다.” 그는 또 “인력이 지금의 10배는 돼야 승산이 있다”고 했다. 투자 규모도 지금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늘리겠다는 각오도 필요하다고 한다. 원전 1기를 수출하면 2조원이 굴러들어온다. 그런 원전을 독자 개발하자면 상상 이상의 돈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정범진 교수도 공감했다. 정부는 원전 건설과 운영 분야 핵심 기술 개발을 위해 원전기술고도화사업(1999~2006)을 시행 중이다. 총 179개 과제에 3128억원을 투자한다. 이 사업이 종료되는 대로 원전기술선진화사업(2007~2015·예산 6339억원)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이 같은 투자 규모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프랑스처럼 기술적으로 완전 독립하자면 원전 설계 코드 등 핵심 기술에 천문학적인 규모의 돈이 투자돼야 한다고 서균렬 교수는 말했다. 내년부터 시작되는 정부의 원전 선진화 사업으로는 불충분하며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제주대 정 교수도 “일단 우리 실력을 종합적으로 점검해 보고 부문별로 부족한 기술을 알아내야 한다. 자체적으로 확보할 기술과 돈 주고 사와야 하는 기술을 가려내자. 그러지 않을 바엔 원전 플랜트 수출이라는 말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현 단계에서 바로 플랜트 수출에 지나치게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은철 서울대 교수(원자핵 공학과)는 플랜트 수출이 원천기술만 확보한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56년 체결돼 올해로 50주년이 된 한·미 원자력협력협정에 의하면 우리는 핵물질, 장비를 변형 또는 이동하는 경우 미국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원자력 기술 이전에는 웨스팅하우스로부터의 동의와는 별개로 한·미 원자력협력협정에 따른 미국 정부의 동의도 필요하다”고 이 교수는 말했다. 박창규 한국원자력연구소장도 “민간 차원의 동의와 정부 차원의 동의를 병행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 정부나 기업과의 신뢰구축이나 사전정지 작업이 아직 충분치 않다는 얘기다. 더구나 최근 한·미 간의 미묘한 기류도 원전 분야의 협조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이은철 교수는 정부가 중국 플랜트 수출에만 집착해 정상회담 때마다 이를 중국에 거론해온 일을 빗대어 “정부의 행정력이 정작 필요한 곳에는 없다”고 했다. 이 교수는 또 “원전을 통째로 팔 능력을 갖춘 나라는 미국, 프랑스, 캐나다, 러시아 정도라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 교수가 보기에 한국의 원전산업은 능력보다 의욕이 앞선다. 그러다 보니 과욕을 부리게 된다. 수출도 좋지만 지금처럼 기술 사용료를 지급하면서까지 외국에 원전을 팔아서 뭐가 남느냐고 묻는다. 이 교수는 “공기업이 그런 욕심을 버리면 인력과 부품 수출에 더욱 힘을 보탤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정범진 교수도 플랜트 수출보다 인력, 부품 수출이 먼저라는 주장이다. 80년대 이후 원전을 건설하지 않은 미국에서는 원전기술 인력이 태부족이다. 캐나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인력이 풍부한 한국에 눈독을 들인다. 정범진 교수는 눈 뜬 채 인력을 빼앗기지 말고 체계적인 인력 수출과 관리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부가 주도하든, 민간이 주도하든 외국 현지에 법인을 만들어 인력 송출 업무를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경쟁력 있는 부품 수출도 병행해야 한다. 한국 인력의 우수성이 인정받고, 국내 원천기술이 확보되면 그때 가서 플랜트 수출도 해보자. 그런데 산자부는 인력관리에 관한 어떤 플랜도 없는 듯하다.” 원천기술 개발에 매달리자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도 없지 않다. 한국에 원천기술을 제공하는 웨스팅하우스(도시바)가 내세우는 주력 노형은 ‘AP 1000’이다. 한국이 보유한 ‘OPR1000’이나 ‘APR1400’과는 작동 방식이 다르다. 결국 한국이 보유한 ‘OPR 1000 ’이나 ‘APR1400’ 기술은 한국이 알아서 발전시켜야 한다. 미래 원전 시장은 웨스팅하우스의 ‘AP 1000’과 아레바의 ‘EPR’이 양분할 공산이 크다. 어렵게 원천기술을 확보한들 주력 기종이 아닌 ‘OPR 1000’이나 ‘APR1400’이 시장성을 갖겠느냐는 분석 때문이다. 한국 원전산업은 기로에 섰다. 그런데도 정부는 불가능한 일에 매달려 헛발질에만 열중이다. 업계와 학계는 발만 동동 구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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