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와인을 마시는 자리에선 ‘파리의 심판’과 ‘베를린 테이스팅’이 화제다. 이 두 사건이 전 세계 와인 비즈니스의 판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1976년 5월 24일, 파리에서 프랑스 와인 판매상인 영국인 스티븐 스퍼리어가 와인 테이스팅 자리를 열었다. 프랑스의 와인 전문가 9명이 라벨이 가려진 프랑스와 캘리포니아 와인들을 마신 뒤 점수를 매기는 자리였다. 당시만 해도 풋내기 캘리포니아 와인이 프랑스의 1등급 와인과 대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자리에서 한 와인 전문가는 와인을 마신 뒤 “바로 이게 프랑스 와인이지, 캘리포니아 와인에선 이런 향기를 맡을 수 없다”며 격찬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마신 건 캘리포니아산 와인이었다. 점수를 종합한 결과, 1위를 차지한 와인은 카베르네 쇼비뇽으로 만들어진 캘리포니아의 스태그스 립 와인 셀러즈 73년산이었다. 일부 심사위원은 자신이 캘리포니아 와인을 선택했다는 데 울분을 터뜨렸고, 세상에 알려지길 원치 않았다.
 | ▶신대륙 와인의 고급화를 선도한 캘리포니아의 '오퍼스 원'. | |
하지만 이 자리에 참석했던 미국 <타임> 지 기자가 이 ‘파리의 심판’을 전 세계에 전했다. 꼭 30년 만인 2006년 5월 24일 스퍼리어가 재대결 자리를 만들었다. 똑같은 와인이 등장한 이번 테이스팅 자리에선 설상가상 캘리포니아산이 1~5위를 전부 휩쓸었다. 보르드의 명품 샤토 무통 로쉴드는 6위에 올랐다. 스퍼리어는 “캘리포니아 와인의 완벽한 승리”라고 발표했다. 2004년 1월 23일, 독일 베를린에선 프랑스 와인과 이탈리아 와인, 그리고 칠레 와인 간 대결이 벌어졌다. 나라별로 최고의 와인을 전 세계 36명의 와인 전문가가 ‘파리의 심판’처럼 블라인드 테이스팅하는 방식이었다. 이번 테이스팅에선 1위와 2위, 5위를 칠레 와인이 차지하는 이변을 낳았다. 1위는 칠레 와인 회사 비냐 에라수리스의 비네도 차드윅, 2위와 5위 역시 에라수리스가 미국의 로버트 몬다비와 손잡고 만든 ‘세냐 2001년산’과 ‘세냐 2000년산’이었다. 3위는 프랑스 와인의 자랑인 ‘샤토 라피트 로쉴드 2000년산’, 4위는 프랑스의 자존심 ‘샤토 마고 2001년산’이었다. 지난 6월 14일 일본 도쿄(東京)에선 ‘베를린 테이스팅’ 재대결 자리가 만들어졌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1위는 프랑스 ‘샤토 라투르 2000년산’이 차지했지만, 2~5위 모두 칠레 와인이 휩쓸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에라수리스의 에드와르도 사장은 “칠레 와인의 품질을 여실히 증명한 사건”이라고 어깨를 으쓱했다. 도쿄 테이스팅에 참가한 신동와인의 이종훈 대표는 “좋은 신대륙 와인은 타닌 성분이 부드럽고 약간의 단맛을 내 높은 점수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세계 와인 시장에서 미국산이나 칠레산 같은 ‘신세계 와인’들이 와인 종주국 ‘프랑스 와인’을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다. ‘파리의 심판’과 ‘베를린 테이스팅’은 미국·칠레·호주·남아공 같은 ‘와인 신세계’에 큰 자극과 용기를 준 사건이었다. 그동안 신세계 와인 생산자들은 와인 산업을 키우고 품질을 높이는 데 주력해 왔다. 일례로 캘리포니아 내퍼밸리의 UC 데이비스는 미국 와인 생산자들의 정보 교류 센터가 되면서 와인 양조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문대가 됐다.
칠레는 세계 11위의 와인 생산국이지만, 일찍이 수출에 힘쓴 결과 세계 4위의 와인 수출 대국으로 성장했다. 신대륙 와인들이 대대적인 기술 혁신과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친 반면, 프랑스 와인업체들은 ‘전통’만을 외치며 안일한 대응에 나섰다. 와인 생산자에게 불리한 세제 정책, 자국의 와인 소비 저하 등이 프랑스 와인을 더욱 뒷걸음치게 했다. 최근 5년간 프랑스의 와인 수출은 매년 최고 5% 감소하거나 제자리걸음이었다. 반면 신대륙의 와인 수출은 매년 10% 이상 성장세를 지속하고 있다. 세계 최대 와인의 격전지라 불리는 미국에선 호주산 저가 와인 ‘옐로 테일’이 호주 와인 돌풍을 일으켰다. 반면 프랑스산 와인의 미국 내 매출액 및 판매량은 지난해 10% 이상 감소했다. 프랑스 여론조사기관인 BVA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프랑스 와인 생산업자 중 약 90%가 ‘현재 프랑스 와인 산업이 위기’라고 대답할 정도로 심각하다. 이런 상황은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2004년 전체 와인 수입의 47%를 차지하던 프랑스 와인이 지난해엔 39%로 추락한 반면, 칠레 와인은 꾸준히 점유율이 늘어 지난해 18%를 차지했다. 프랑스는 이제 ‘파리의 심판’과 ‘베를린 테이스팅’ 결과가 그들이 독주하고 있는 전 세계 고급 와인 시장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이 결과는 프랑스의 고급 와이너리들이 자초했다. 구대륙의 와인 명가들이 칠레·미국·아르헨티나 등을 넘나들며 현지 와인업체들과 손잡고 와인을 생산해 왔기 때문이다. 구대륙의 전통적인 제조방식이 신대륙에 스며들면서 신대륙에서도 명품 와인들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 예컨대 신대륙을 대표하는 명품 와인 ‘작품 1번’인 오퍼스 원(Opus 1)은 미국의 로버트 몬다비와 프랑스의 바롱 필립 로쉴드가 합작해 만들었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류(村上龍)는 “미국 최대의 업적은 할리우드 영화나 재즈, 팝이 아니라 바로 오퍼스 원”이라고 평가했다. 프랑스 ‘빈엑스포’의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5년 동안 국내 와인 시장 규모는 연평균 30% 가까운 신장세를 보이며 지난해 2,800억원 규모로 성장했다. 그만큼 ‘파리의 심판’, ‘베를린 테이스팅’을 바라보는 국내 와인 애호가들의 관심도 뜨겁다. 일각에선 이 사건들이 미국이나 칠레 와인의 홍보용 이벤트로 치우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대한항공의 기내 와인을 담당하고 있는 방진식 차장은 “월드컵에서 브라질과 한국이 맞선다면 한국이 이길 수도 있겠지만 한국이 브라질보다 축구를 잘한다고 할 순 없다”며 “프랑스 와인의 역사가 깊고 명품 와인이 많기 때문에 한두 번 대결로 평가를 내리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국내를 포함한 전 세계 최고급 와인 시장에선 프랑스 와인이 여전히 독보적이다. 더블U의 김혜주 사장은 “아무리 칠레가 좋은 와인을 만든다 하더라도 최종 모방 대상은 프랑스의 특급 와인들”이라고 말했다.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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