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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짓밟힌 치욕의 역사

권력에 짓밟힌 치욕의 역사

▶1997년 제6차 한은법 개정 때 한국은행의 은행감독 기능이 금감원으로 이관되자 한은 노조원들이 이경식 총재 퇴진운동을 벌이고 있다.

1950년 5월 5일 최초의 한국은행법이 제정됐습니다. 금융 민주화와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되는 중앙은행제도의 기본이념이 충실히 반영된 법률이었습니다. 미국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고 독립성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1962년 5월 24일 제1차 한국은행법이 개정된 이후 한국은행에 대한 재무부의 영향력이 커지게 됐습니다.” 김영배 조사국 금융산업 팀장은 한국은행이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라는 불명예스러운 명칭으로 불리게 된 원인을 정부 주도의 성장정책에서 찾았다. 경제성장을 원하는 정부는 한국은행을 직접 관리하기 원했다.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서는 경제성장이 가장 중요한 모토였습니다. 한은을 재무부에서 관리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고 생각합니다.” 제1차 한국은행법 개정의 주요 내용에는 한은 기능에서 외환정책이 사라졌고 재무부 장관의 인가를 받은 외환 업무만을 하도록 했다. 금융통화운영위원회의 정책 결정 사항에 재무부 장관의 재의 요구권을 신설했다. 금통위원을 7명에서 9명으로 늘리고 정부 추천 위원 수를 2명에서 5명으로 늘렸다. 한은에 대한 재무부의 업무 심사권을 신설하고 예산과 결산을 금통위가 승인하기에 앞서 각의(閣議)가 먼저 의결하도록 했다. 한국은행 총재도 재무부 장관의 제청에 의해 각의에서 의결한 다음 내각수반이 임명하도록 했다. 금통위에서 임명하던 감사도 재무부 장관이 임명하도록 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6대 한은 총재였던 유창순 총재는 취임 1년 반 만에 사표를 제출했다. 7대 한은 총재로는 민병도씨가 임명됐다. 민 전 총재는 회고록에서 한은 총재 임명에 대해 자신의 마음을 밝혔다. “한은 총재가 된다는 것은 더없이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자리에 앉기가 죽기보다 싫다.” 민 전 총재는 실제로 재임기간 내내 허수아비 총재로서의 설움을 겪었다. 1962년 6월 10일 있었던 2차 통화개혁이 대표적 예다. 하루 전날 최고회의에 불려가 통고받았기 때문이다.

“난 이 자리 앉기가 죽기보다 싫다” 그는 “한 나라의 중앙은행장이 통화개혁에 대해 전날에 그저 통고만 받을 수 있는가?”라며 분개했다. 그리고 당시 재무부 장관이던 천병규씨를 찾아가 강하게 항의했다. “통화개혁에 대한 각종 발표문은 한국은행 총재의 이름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왜 저는 통화개혁 전날 그저 통고만 받아야 합니까?” 1963년 재무부는 한은법 제2차 개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주 목적은 한은 내에 있던 은행감독원을 재무부로 가져가기 위한 것. 민 전 총재는 5월 22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기자들에게 정부의 한은법 개정에 대해 공개했다. 그리고 자신이 한은을 떠날 것이라 밝히며 말했다. “금융의 정치적 중립 및 민주화를 정부가 신경 써 주시기 바랍니다.” 이날 오후 그는 재무부 장관에게 사표를 제출하고 한은을 떠났다. 후임 한은 총재들은 은행감독원 분리에 더욱 강경한 입장을 보이게 됐다. 그리고 직접적인 충돌은 적었지만 재무부와 한은 사이에서는 기나긴 냉전이 시작됐다. 1963년 12월 제2차 한은법 개정이 있었지만 내용은 ‘각의’를 ‘국무회의’로, ‘내각수반’을 ‘대통령’으로 개정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1968년의 제3차 개정과 1977년의 제4차 개정에서도 ‘예금지급준비율 적용’ ‘통화안정계정의 설치’ 등의 실무적인 움직임만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조용했지만 재무부와 한은의 이해관계는 첨예하게 맞붙어 있었다. 1977년에도 은행감독원을 한은에서 재무부로 이전하는 문제를 두고 양측은 치열한 로비를 벌였다. 처음에는 재무부가 성공할 것처럼 보였다. 은행감독원을 한국은행에서 재무부로 이관하는 한국은행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기 직전까지 이른 것이다. 한은 관계자들은 각계를 찾아다니며 이를 막고자 노력했고 결국 청와대에서 그냥 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한은은 은행감독원을 계속 유지시킬 수 있었다. 1982년 제5차 한은법 개정에서는 국무회의를 거쳐 금통위가 승인하도록 한 한은의 예산 및 결산을 금통위에서 독자적으로 승인하도록 변경했다. 1982년에는 정부 안팎의 금융 자율주의자들의 기세를 크게 올려준 사건이 발생했었다. 바로 장영자 사건이다. 이 사건은 그 자체가 전두환 정권의 정치적 정당성을 흔들 정도로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재무부는 이때 은행감독원을 한은에서 분리시키고자 했지만 여론은 중앙은행의 독립성 강화로 기울어졌다. 이러한 분위기에 크게 고무된 가운데 한국은행이 중앙은행의 독립성 확보를 위해 관계법체제 개정에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고 이는 예산 및 결산권 획득으로 나타났다.

이성태 총재 취임 후 목소리 높여 1987년 대선에서 ‘중앙은행 독립성 강화’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주요 후보들의 공약이었다. 한국은행 직원들은 100만 인 서명운동을 벌여 그 명단을 국회에 전달하기도 했다. 다음해인 1988년 총선에서도 많은 국회의원은 중앙은행의 독립을 선거 공약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정작 국회는 한은의 독립성 강화에 힘을 실어주지 못했다. 여소야대 국회가 형성되고 독립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3당합당으로 다시 유산됐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한은 독립성 강화는 정치 이슈로만 관심을 끌 수 있었을 뿐이었다. 1994년 경제학자 41인이 중앙은행의 독립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같은 해 12월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재정경제원으로 통합된 것을 계기로 독립 움직임은 다시 활발하게 전개됐다. 1995년 2월에는 1054명의 경제학자들이 중앙은행 독립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다시 발표했다. 1995년 2월 재경부도 한국은행 개정안을 국회에 전격적으로 제출했다. 한은으로부터 은행감독 기능을 떼어내는 것을 골자로 하는 내용이었다. 양측의 대립은 치열했고 결국 국회는 ‘양 기관이 알아서 잘 합의한 다음 다시 법안을 제출해 주기 바란다’고만 밝혀왔다. 한국은행법 개정안은 국회에 계류돼 있다가 해를 넘기며 자동적으로 폐기됐다. 오랜 기간 쌓여온 앙금은 드디어 1997년 제6차 한은법 개정에서 터졌다. 은행감독 기능이 한국은행에서 통합금융감독기구인 금감원으로 이관된 것이다. 강경식 부총리는 1997년 6월 16일 정부 과천청사에서 이경식 한은 총재와 박성용 금융개혁위원회 위원장이 배석한 가운데 합동기자회견을 열고 중앙은행 제도 및 금융감독체계 개편에 관한 정부안을 발표했다. 금융정책과 감독기구의 틀을 재경원, 한국은행, 금융감독위원회 등 3개 기관으로 개편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김인호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은 “많은 반발이 있겠지만 이는 50년 후를 내다보고 내린 결정”이라고 자부했다. 그러자 당장 한은이 발칵 뒤집혔다. 이경식 총재는 ‘중앙은행의 이완용’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노조는 한은법이 개정된다면 총파업을 시작하겠다며 반발했다. 그리고 중간간부, 심지어 임원들의 반발도 노조 못지 않았다. 중간간부들이 노조의 총재 퇴진 서명서에 사인하고 나섰다. 한은 47년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역대 한은 총재들도 모여 기자회견을 하며 정부를 비판하고 나섰다. 야당, 학계, 노동계 등 사회 각계각층은 정부의 한국은행법을 비판했다. 이에 정치권에서도 이대로는 곤란하다는 인식이 확산돼 국회 통과는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1997년 12월 발생한 외환위기는 한은법 개정안의 국회처리에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됐다. IMF 측에서 우리에게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국회에 있는 금융관계법률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킨다는 양해각서를 교환한 것이다. 2003년 3월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의원들이 최근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한은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것이다. 재경부는 국회에 처리 유보를 요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규복 재경부 기획관리실장은 “현재 북핵위기와 경기침체 등 어려운 상황에서 한은법 개정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국력 소모일 뿐”이라면서 “한은법 개정안 처리를 유보해주도록 의원들에게 양해를 구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박승 전 총재는 한은법 개정에 대해 일절 대응하지 말도록 내부 지시를 내렸다. 6월부터 7월까지 두 기관은 수차례의 논의 후에 합의했다. 한은은 모처럼 만족한다는 의사를 보였다. 한은 관계자는 “과거와 달리 한국은행의 독립성과 기능에 있어 진정한 개선이 이뤄졌다”고 표현했다. 한은 독립에 대해 자주 목소리를 세워온 이성태 총재가 2006년 3월 23대 한은 총재로 취임한 이후 한은의 독자적인 목소리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금통위에는 사상 최초로 한은 출신 금통위원이 3명 자리 잡았다. 자금결제제도에 대한 총괄적인 관리 및 감시 기능도 강화됐다. 과거 한국은행법상 한국은행의 모든 경비 예산은 재경부 장관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했지만 지금은 급여성 경비에 대해서만 승인을 받으면 된다. 이제는 자율성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목소리보다는 자율에 대한 책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을 정도다. 독립을 원하던 한국은행의 긴 행로가 어느 곳으로 향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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