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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맞출지 “기업은 괴로워”

어디에 맞출지 “기업은 괴로워”

▶지난 9일 오전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열린우리당 - 경제 5단체장 간담회’에 참석한 인사들이 손을 잡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희범 한국무역협회 회장, 원혜영 열린우리당 사무총장, 강봉균 정책위의장, 강신호 전경련 회장, 김근태 의장, 손경식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이수영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김용구 중소기협중앙회 회장.

오랜만에 여당에서 들려오던 경제계를 향한 훈풍이 점점 식어가고 있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뉴딜’정책을 청와대와 정부가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면을 넘어 제동을 걸기까지 한다. 김 의장은 지난 7월 31일 대한상공회의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경제계의 요구를 통 크게 받아들이겠다”며 “대신 재계도 몇 가지 현안이 풀리면 기업투자에 적극 나서 달라”고 주문했다. ‘뉴딜’이라고 불린 이 정책의 주요 내용은 ▶8·15 대규모 경제인 사면 건의 ▶출자총액제한제(이하 출총제) 개선 ▶경영권 보호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 ▶각종 규제완화 등 크게 네 가지다. 그간 재계의 요구와 거의 일치한다. 재계는 경제인 사면 등을 포함해 수도권 공장총량제 완화, 적대적 M&A에 대한 경영권 보호 등을 요구해 왔다. 김 의장 측은 “뉴딜정책은 5·31 지방선거 민심의 흐름을 읽고 내놓은 결단”이라고 강조한다. 당내 재야파 수장인 김 의장이 의외의 경제살리기 대책을 내놓자 재계도 환영의 뜻을 밝혔다. 전경련은 즉각 선물 보따리를 공개했다. 강신호 전경련 회장은 지난 9일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을 비롯한 서민경제회복추진위원회와의 간담회에서 “전경련 차원에서 출총제 대상 14개 그룹에 대해 긴급 조사를 한 결과, 이 가운데 8개 그룹에서 출총제가 폐지되면 약 14조원을 추가로 투자할 것이라고 응답했다”고 밝혔다. 전경련 쪽은 생명과학·에너지·정보통신 등 모두 10개 분야가 추가 투자 대상이라며 구체적인 분야까지 밝혔다.

“대통령과 조율 안돼 못믿겠다” 하지만 여당과 재계의 모처럼 만의 허니문은 얼마 가지 못했다. 김 의장이 뉴딜에서 강조한 8·15 대규모 경제인 사면에 대해 사면권자인 노무현 대통령이 화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사면에서 정치인들은 대거 포함된 반면 경제인들은 일부 전문경영인만 포함됐을 뿐 김 의장이 공언했던 재벌 총수들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애초 김 의장은 “총수들을 자유롭게 해야 투자가 일어날 수 있다”며 청와대에 재벌 총수 사면을 강력히 요청했다. 출총제 개선 문제도 마찬가지다. 김 의장은 대기업의 투자를 가로막는 출총제를 개선하겠다고 재계 회장단 앞에서 약속했다. 하지만 권오승 공정거래위원장은 “제대로 된 대안 마련을 전제로 출총제 폐지를 결정하겠다”고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공정위는 대안 중 하나로 ‘순환출자 금지’를 추진 중이다. 순환출자가 금지되면 주요 그룹은 계열사 지분을 처분해야 하기 때문에 지배구조가 무너질 수 있다. 재계에서는 출총제보다 강력한 규제로 인식하고 있다. 노 대통령도 김 의장의 이런 행보에 제동을 걸었다. 요지는 “출총제 폐지 같은 중요 정책을 정부와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하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청와대는 물론 당내 친노 직계에서도 김 의장의 이런 행보에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김 의장은 “그래도 뉴딜은 계속 추진할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지만 재계에서는 회의적인 기류가 흐르고 있다. “노 대통령과 조율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얘기를 그대로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8·15특사에서 기대가 무산됐던 재계는 그나마 출총제 개선 약속에 한줄기 희망을 걸고 있다. 하지만 주무부서인 공정위가 반대하고 있고, 대통령도 소극적이어서 현재로선 비관적이다. 사실 5·31 지방선거 패배 이후 여당은 꾸준히 경제살리기와 민생경제 회복을 위한 제안들을 내놓고 있다. 여기에는 DJ정부 시절 경제부총리를 지낸 강봉균 정책위의장이 앞장서 왔다. 5·31 지방선거 참패 원인을 경제에서 찾은 여당은 ▶세부담 완화를 명분으로 한 감세 ▶재정 확대 등을 통한 적극적인 경기부양 ▶기업투자 확대를 위한 출총제 폐지 ▶금리 인상 자제 등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강 의장은 “체감경기가 바닥인 만큼 경기부양으로 잠재성장률을 높여야 한다(7월 12일)” “경기변동 관리는 정부 책임, 건설 경기를 위해 재정이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7월 29일)”며 연일 정부와 한국은행을 압박했다. 한때 정부에서도 경기부양론이 나오면서 그의 주문이 먹혀들어가는 것처럼 보였고 비교적 가까운 권오규 청와대 정책실장이 경제부총리로 내정된 후 강 의장에게는 ‘여의도 경제부총리’라는 닉네임이 붙기도 했다. 하지만 강 의장의 이러한 주장을 정부는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권 부총리는 “확장적 거시정책은 나중에 부작용을 야기한다”며 일축했고, “양도세, 종부세 경감은 과세 형평성에 맞지 않다”고 반박했다. 금리 인상 자제를 요구했지만 이성태 한은 총재는 11일 금리 인상을 전격 단행했다. 출총제 폐지에 대해서는 권오승 공정위원장이 ‘대안없는 폐지 반대’를 고수하고 있다.

“정부가 불확실성 키우고 있다” 이처럼 당정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 기업들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몰라하는 눈치다. 한 기업인은 “정부가 불확실성을 제거해 줘도 시원치 않을 판에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는 것 아니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당정뿐 아니라 정부 내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다. 정세균 산자부 장관은 지난 9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부가 2003년 말 ‘시장개혁 3개년 로드맵’을 발표하면서 2006년까지 재벌기업의 공정경쟁, 지배구조 개선이 이뤄지면 출총제를 없앤다고 당정합의를 거쳐 대외적으로 약속했다. 연말까지 출총제를 폐지하든 완화하든 정부안과 조치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한은이 금리를 인상한 11일에는 기자브리핑에서 “금리 인상을 막아보려 했지만 안 됐다”고도 했다. 정 장관은 나름대로 기업의 애로사항을 정부 내에서 계속 얘기하고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하지만 재계 관계자는 “정부가 일부러 기업의 불만을 잠재우려 짜고치는 고스톱을 하는 것 아니냐”고 의심했다. 산자부 등 일부 장관을 통해 기업의 요구사항을 반영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실제 정책 결정에서는 소외시키는 형태로 기업들의 불만을 달래는 식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얘기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여당 의장이 기업인과 만나는 등 전례 없는 분위기로 8·15 사면에서 경제인들의 대규모 사면을 기대했었는데 아쉽다. 그분들이 사면됐더라면 경제인들이 의욕을 가지고 일할 수 있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한 기업인은 “최근에 투자가 안 되고 있는 것이 꼭 정부에 대한 불만 때문만은 아니지만 정부가 괜히 기대를 갖게 해놓고 실망시키는 일을 하게 되면 기업 하는 사람들은 힘이 빠지게 된다”고도 했다. 공식적인 입장 표명을 자제하고 있는 전경련은 “아쉽지만 좀 더 지켜보자”며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다. 특히 오너들의 사면을 기대했던 몇몇 그룹들은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경제단체들이 지난달 청와대에 제출한 탄원서에는 재판에 계류 중인 기업인 23인을 선처해 달라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손길승 전 SK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8·15 사면·복권에 재계의 호소가 반영되지 않은 것처럼 재판 과정에서도 사법 당국이 ‘경제’에 눈길을 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재계의 우려는 깊어가고 있다. 자칫 김 의장의 뉴딜 추진이 “당정의 엇박자만 키우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과거와 달리 정책 조율 기능이 약화돼 아이디어가 정책으로 구체화되지 못하고 있다”며 “당·정·청이 머리를 맞대고 경기에 대한 인식부터 공유해 정책의 방향과 우선 순위를 가려야 한다”는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본부장의 말은 새겨들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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