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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 현장 취재] 北, 현대 배제하려는 기색 역력

[개성공단 현장 취재] 北, 현대 배제하려는 기색 역력

지난 9월 26일 오전 개성공단 밖 2km 지점인 개성시 봉동리 탄동에선 최초의 남북합영회사인 ‘아리랑태림석재합영회사’ 준공식이 열렸다. 이 석재회사는 남측의 민경협과 북측의 민경련 합작으로 만들어진 남북합영공장 모델 1호다. 올 2월 전까지만 해도 북한·현대아산·태림산업 3자가 함께 개성공단 내에 석재회사를 만들기로 했었다. 그러나 북측은 현대가 아닌 태림과, 그것도 개성공단 바깥에 합영회사를 설립했다. 왜 현대를 배제한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북측은 지난 5월께부터 개성관광 사업자를 현대아산에서 롯데관광으로 바꿔달라는 요구를 해왔으며 이를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자 지난 7월 1일부터 남측 관광객들의 개성 시내 출입을 제한해왔다. 최근엔 개성 골프장 사업권을 현대가 아닌 남측의 다른 중견 부동산업체와 계약해 현대와 갈등을 빚고 있다. 때문에 이번 공장 준공식은 여러 가지 해석을 낳게 한다. 이코노미스트가 이날 합영회사 준공식에 동행해 밀착 취재했다.
“앞으로 공화국(북한)에 투자하려면 모든 회사는 현대를 창구로 삼아 현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군대에도 그렇게 지시했다. 현대가 (공화국의) 경제고문이 되어 개성관광, 금강산 육로관광도 맡아야 한다. 민간차원에서 대북 진출은 현대만 통해서 한다는 것을 남측 당국에 분명히 전달해 주기 바란다.” 지난 2000년 8월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이 북한 원산에서 현대 정몽헌 회장과의 네 번째 면담에서 쏟아낸 발언이다. 현대에 대북사업과 관련한 명실상부한 독점권을 준다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지난 9월 26일 개성에서 열린 ‘아리랑태림석재합영회사’ 준공식은 이 말을 무색하게 했다. 이 회사는 현대를 배제하고 남측 민간지원단체인 민경협(민간남북경제교류협의회)과 북측의 민간단체인 민경련(민족경제협력연합회)의 합의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태림산업과 북측이 50대 50으로 합작해 설립했다. 태림산업은 지난해 9월 북측 개선총회사와 화강석 사업계약을 체결한 뒤 지난 4월 개선총회사 및 아리랑 회사와 석재공장 설립에 합의, 미화 295만 달러를 투자해 1만5000평 부지에 건평 1000평 규모의 공장을 건설했다. 태림산업은 평안남도 남포의 룡강석산과 황해남도 해주의 수양석산 등에서 화강석과 대리석 등을 채취해 석재공장에서 가공할 예정이다. 연간 14만여t의 원석을 가공해 8만여t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공장 준공 지역도 개성공단에서 2㎞ 남짓 떨어진 공단 외곽 지역이다. 개성공업지구법의 적용을 받지 않으며 전력과 수도 등도 자체 조달한다. 개성공단 바깥 지역에 공장을 짓는다는 건 의미가 크다. 개성공업지구 2000만 평은 현대가 50년 동안 북측으로부터 빌려 토지개발 사업권을 가지고 있지만 그 바깥 지역은 순수한 북한 땅이기 때문이다. 이날 준공식 참석자들을 실은 버스가 개성공단 경계선을 벗어날 때 북측은 이례적으로 버스가 경계 구역을 넘는 모습을 사진 찍도록 허락했다. 개성공단 안에 공장을 짓는 게 아니라는 점을 은연중 알린 것으로 보인다. 태림산업 정양근 회장은 “개성공단은 남측인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에서 관리하지만 이번 공장은 북측 지역에 있기 때문에 다르다”며 “북한이 여러 좋은 조건을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북-현대 석재회사 위치 놓고 갈등 태림산업 박경식 이사도 “이번 공장 설립으로 현재 국내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산보다 훨씬 질 좋은 북한산 원석을 저렴하게 공급받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개성공단 밖에 공장을 설립한 이유에 대해서는 “공단에 우선 입주한 업종이 섬유·봉제 등이며 석재공장이 장치산업으로 소음이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취재과정 중 이 합영회사는 원래 개성공단 내에 짓기로 논의됐던 사실이 밝혀졌다. 북측과 현대아산·태림산업 3자가 합영회사 건립을 추진했던 것. 지난해 태림산업은 현대아산 측에 투자확약서를 내고 합영회사 추진을 시도했다. 그러나 현대는 올해 초부터 돌연 태림산업을 배제하고 다른 사업체를 물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이유에 대해 현대아산 관계자는 “개성공단 안에 석재 공장을 지으려고 태림산업과 협의한 적이 있었으나 태림산업에서 공단이 아닌 평안남도 룡강 쪽에 공장을 짓겠다고 해서 지리적 여건 등이 안 맞아 파트너십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태림 측은 다른 주장이다. 현대아산은 개성지원단이 공단 내 석재 가공공장을 짓도록 사업허가서를 내주었고, 태림은 별도로 지난해 12월 통일부 경협 1팀으로부터 룡강석산과 개성에 북측의 개선총회사와 석재공장을 할 수 있도록 협력사업 승인서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현대가 공단 내 석재공장 건립에 투자자를 물색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태림이 25억원 규모의 투자 확약서를 현대아산 측에 제출했는데 묵묵부답이었고, 다른 파트너를 구한다는 소문까지 들리자 태림은 단독으로 민경련과 석재합영 공장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태림과 북측의 합영공장 추진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자 현대아산의 석재공장 추진은 흐지부지돼 버렸다고 주장했다. 정양근 태림산업 회장이자 민족경제연합회 위원장은 남북경협 사업이 시작됐던 90년대 초부터 북한 농산물을 수입하는 등 북한과 오랜 인연을 맺어온 기업인이다. 중국·북한 등을 수시로 다니며 북측의 민경련 사람들과 친분을 돈독히 했었다. 태림이 합작한 아리랑회사는 개선총회사가 추천한 회사다. 개선총회사는 민경련 산하 7개 총회사 중 주로 농업 부문에서의 남한 기업들과 합작 사업을 맡고 있는 곳으로 정 회장이 북측 사업을 할 때부터 10년 넘게 인연을 맺은 회사였다. 이번 북측과의 단독 계약도 정 회장과 북측의 오랜 친분이 힘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北, 골프장 건설도 딴 회사에 맡겨 태림산업과 합작한 아리랑회사는 석산을 가지고 있는 북측에선 꽤 큰 석재 회사다. 이 밖에 평양 순안공항에 면세점이 있고 개성공단 내 유일한 식당인 봉동관 식당도 운영한다. 남측 개성공업지구 내 건설 자재·식자재·호텔·식당·물류센터 사업권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인연으로 현대와는 공단 설립 때부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터라 태림과의 합작에 현대가 서운함이 없을 리 없다. 북한의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현대아산은 애초에 아리랑 회사와 공단 내에 석재 공장 건립을 추진하려고 했으나 북한 측이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또한 이 합영회사 부지는 현재 1만5000평이지만 향후 5만 평까지 늘리도록 북측과 합의한 상태다. 공장 부지에서 1.5㎞만 더 가면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가 있다. 북측은 개성공단과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 중간 지점인 요지에 자리를 내어 준 것이다. 일부에선 북측이 개성공단 토지사용권을 가진 현대를 견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5만 평 확장을 허락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조심스러운 분석도 나오고 있다. 북측은 지난해부터 개성 관광을 현대가 아닌 롯데관광과 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를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자 지난 7월 1일부터 개성시내 관광을 금지시켰다. 최근엔 남측 대구지역 부동산개발업체인 유니코 종합건설과 개성 지역에 골프장 등 대규모 리조트 개발 사업을 위한 장기 토지사용 계약을 했다. 북측은 유니코가 50년간 토지 140만 평을 이용하는 조건으로 4000만 달러(약 380억원)를 지급하는 내용의 토지사용계약을 올해 초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를 통해 체결했다. 주무부처인 통일부는 유니코의 개성공단 내 골프장 사업은 현대아산이 북한 아태평화위원회와 계약한 개성공단 2, 3단계 사업과 중복되고 충돌할 여지가 있어 유니코와 현대아산 간 협의가 끝나지 않으면 사업이 추진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대북 관계에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북측이 대북사업에서 현대를 배제하기 시작한 것은 김윤규 부회장의 퇴진이 촉발됐지만 개성 관광을 현대아산에 줘봤자 돈벌이가 시원치 않을 것이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북측은 관광 대가로 1인당 150달러를 요구했지만 현대아산은 수지를 맞출 수 없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아 이를 계기로 북측이 개성 관광을 현대와 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굳혔다는 것이다. 북측의 이런 행동에 대해 현대는 예의 주시하고 있는 추세다. 현정은 회장의 최근 행보도 주목된다. 현 회장은 준공식 날 하루 전인 25일 개성공단을 찾았다. 현대 측은 현 회장의 방북이 “현장 직원들 격려 차원”이었다고 말했지만 요즘 현대와 북측이 골프장 사업권을 놓고 첨예한 갈등 시점인 것을 감안하면 현 회장의 방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준공식에 평양 여성 200명 동원 민경협 주최로 열린 이날 준공식 행사엔 남쪽 중소기업인들과 기자들, 남북경협 관련 단체 회원 250여 명이 참석했다. 북측에서도 남측 인원에 버금가는 300여 명의 사람이 준공식장을 가득 메웠다. 특히 남측 버스가 준공식장에 도착했을 때 평양에서 동원된 무지개색 한복을 입은 200여 명의 북한 여성들이 일제히 의자에서 일어나 ‘반갑습니다’ 노래를 손뼉 치며 부르기 시작했다. 개성 시내 관광 금지도 풀지 않은 상황에서 북측의 이런 환대는 이례적이다. 지난 8월 4~6일 현대그룹 고 정몽헌 회장 3주기 때 금강산에서 열렸던 외금강 호텔 개관식에 북측 관계자가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은 것과 대조를 이루는 모습이다. 이날 행사에 북측 최고위급 대표로 참석한 김춘근 민경련 부회장은 “오늘의 남북합영회사는 6·15 남북공동선언의 정당성을 확보한 것”이라고 말했다. 오찬식장에서 북측 관계자 중 한 명은 “남측에서 개성에 투자하면 망한다는 말 사라지고, 떼돈 벌었다는 말 좀 듣고 싶다. 아리랑태림 같은 회사가 많이 생기길 바란다”고도 말했다. 이 역시 요즘 현대를 대하는 북측의 태도와 대조되는 장면이다. 대북사업은 현대그룹의 정통성을 보장해주는 간판 사업이다. 하지만 북측은 현대를 자꾸 밀쳐내려 하고 있다. 현대건설 인수로 갈 길이 바쁜 현대가 실타래처럼 엉킨 대북사업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지켜 볼 일이다.

정양근 태림산업 회장 겸 민경협 위원장

“남북경협 탈출구 없다면 대안 찾아야”

▶1949년생. 87년 ㈜성흥식품 회장, 94년 중소기업 남북경제교류협의회 위원, 2003년 민경협 집행분과위원회 위원장, 2005년~현재 ㈜태림산업 회장 겸 민경협 위원장.

“남쪽의 석재가공 사업은 사양길입니다. 가격 경쟁력에서 중국산 석재에 밀리기 때문이죠. 아리랑태림석재합영회사가 북한의 질 좋은 석재를 가공해 공급한다면 남쪽의 죽어가는 석재사업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겁니다. 벌써 준공식 다음날 석재조합 이사장에게 전화가 왔어요. 150명이 북한에 가게 해달라고요.” 정양근(57) 태림산업 회장 겸 민경협 위원장. 그는 이번 합영회사 준공식은 개성공단을 넘어 남북이 진정으로 하나 되는 경협 사업의 모델이라고 강조했다. “남북경협 사무소가 있지만 장소만 제공했을 뿐 실질적으로 남북 사업을 연결시켜 주는 건 한계가 있었습니다. 북측에 투자하고 싶어도 뭐가 뭔지 몰라 아무것도 못했던 거죠. 그 역할을 앞으로 남측의 민경협과 북측의 민경련이 하겠다는 겁니다.” 민간단체가 나서서 정부가 하는 남북 경협사업을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의지다. 그는 “남북경협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선 정치 논리에 휘둘리기보다 순수한 경제 논리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만과 중국 교역량이 지난해 1000억 달러를 넘어선 것에 반해 남북 교역량이 10억 달러 수준에서 머무는 것은 기업들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정부 눈치, 미국 눈치를 보느라 움츠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경제 협력이 잘 이루어지면 자연스럽게 북핵 문제나 미사일 문제도 해결되지 않겠느냐는 논리다. 그는 “북측 사람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번 합영회사 추진도 10여 년간 북측과 무역을 하며 쌓은 우정이 바탕이 됐다”며 “개성 관광과 골프장, 백두산 관광에 대해 현대가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만약 탈출구가 없다면 무조건 밀어붙이는 것보다 북한을 설득할 다른 대안을 찾아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뼈 있는 말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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