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만든 나라 코리아
꿈이 만든 나라 코리아
88올림픽 통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낸 한국, 한국인의 국민성 험준하고 산이 많은 한국에서 살아가려면(번영까지는 말할 필요도 없이)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 한국인의 특성으로 자주 거론되는 요소들(강인함·근면성·투쟁심·폐쇄성)은 그런 환경의 산물이라는 분석이 가장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은 인간과 자연 모두와 싸워 왔다. 혹한과 혹서, 전쟁의 위험, 빈곤의 고통, 국민을 우민화(愚民化)하는 외세의 지배, 지도자들의 독재 정치, 그리고 지난 40년에 걸친 남북한 간의 위태로운 휴전은 그들을 불안에 떨게 했다. 그런 역경 속에서 한국인은 눈부신 업적을 이뤘다. 모두가 알거나 또는 곧 알게 되겠지만 한국은 경제적으로 괄목상대할 발전을 이뤘다. 지난해 국민총생산은 12%나 증가했다. 정치적으로는 독재정치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의 불확실한 여정을 밟기 시작했다. 반가운 변화지만 그에 뒤따른 새로운 과제들이 한국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았다. 민주주의를 하려면 협상과 타협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 정통성과 파벌 싸움으로 얼룩진 한반도 역사에서는 그런 능력이 별로 배양되지 못했다. 한국인은 권력이란 독차지하기보다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간다. 한국전의 고통을 경험하지 않은 신세대 대학생들은 겁도 없이(무모하다는 시각도 있다) 공산 북한과의 조속한 통일을 주장하는 캠페인을 한다. 전에는 외국인을 피하던 많은 한국인이 이제는 그들과 얼굴을 마주하게 됐다. 그에 따라 고립주의 전통은 무너져간다. 한국경제의 성장 엔진인 무역 덕택이다. 한국의 경제성장이 반드시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경제성장이 낳은 빈부격차 확대 때문이다. 전에는 국민적 논의가 거의 전적으로 민주화에만 집중됐지만 지금은 더 광범위한 정치경제적 이슈를 포함한다. “독립 후 4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은 좌와 우로 갈려 있다”고 서울대 정치학자 안청시 교수는 말했다. 9월 17일 한국의 노태우 대통령이 서울 올림픽의 개막을 선포할 때 전 세계의 많은 사람이 한국인과 한국이라는 나라를 처음 접하게 된다. 한국인은 한국의 발전상을 세계에 알리려 이번 기회를 오랫동안 학수고대해 왔다. 그리고 아주 제멋대로인 사람들을 제외하면 이번 올림픽을 통해 좋은 인상을 주려 누구나 애쓰리라 봐도 좋다. 외국인 관광객, 스포츠 팬, 기자 수만 명이 한국을 방문하고 세계의 TV 카메라들이 한국의 이미지를 세계에 전한다. 그러나 그 모습은 이 무수한 김씨·이씨·박씨 나라의 다양성, 그리고 한국이라는 나라의 변화된 모습 중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일수(40)씨의 예를 들어 보자. 무뚝뚝하고 정중한 한국 사업가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아주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는 지난주 내내 서울에 있는 자신의 안경점에서 ‘노려보기 경연대회’를 후원했다. 눈을 깜박이지 않고 얼마나 오랫동안 거울을 들여다보는지를 겨루는 경기다. 승자는 상품으로 색안경을 받는다. 집중력을 높이려면 전 정부 시절의 비리 혐의자 중 한두 명을 노려본다 생각하라고 주최 측은 권한다. 그리고 그중 한 명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씨를 지목한다. 5공 시절 영향력 행사와 부패 추문에 연루된 인물이다. 그렇다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남한의 ‘국민성’이 어떻다고 일반화하는 데는 위험이 따른다. 하지만 한국처럼 작고 동질적인 나라에서는 몇몇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한국인은 무신경하고 감정적이며 논쟁적이고 친절하며 사교적인 동시에 의심까지 많은 국민이다. 그리고 외부 세계가 갖게 된 그런 진부한 인상 일부가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역동성: 소문은 사실이다. 한국인은 아주 열심히 일한다. 전에는 살아남으려 결단력을 보였지만 지금은 남들보다 앞서가려 치열한 경쟁을 한다. 서울의 번잡한 이태원 쇼핑가의 점원들은 보통 하루 13시간, 1주일 7일씩 근무한다. 그리고 한국의 ‘시험지옥(밤낮없이 집중적으로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몇 달간)’은 일본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다. 그런 가치관은 한국인이 세계 어디를 가든 달라지지 않는다. 뉴욕시에서 청과물을 팔든, 중동의 공장 건설현장에서 일하든 한결같다. 원래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한국인의 전통 사회는 다양하기는커녕 수세기 동안 극도로 정적인 사회였다. 100년 전 오랫동안 닫혀 있던 한국의 문호를 강제로 열어젖힌 서구인은 유럽과 북미에 변혁을 몰고온 산업혁명과는 완전히 별세계의 가난한 나라를 발견했다. 당시 한국의 지체 높은 양반들은 온갖 점잔을 빼며 걷고 말하고 행동했다. 열심히 일하며 영리를 추구하는 행동은 상민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경멸했다. 그런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미 국무부의 한국 전문가로 일했던 그레고리 헨더슨에 따르면 양반이라고 알려진 학자·관료·지주계급 등 상류층의 생활방식은 변화와 현대화에 대처하기에는 상극이었다. 19세기 말엽부터 상인과 공인계급이 점차 부상하며 양반계급은 서서히 밀려났다. 그 결과 전에는 상민들에나 속한다고 여겨지던 가치관이 오늘날의 한국을 지배한다고 헨더슨은 말했다. 그는 그것을 한두 세기 전의 미국과 비교한다. 당시 유럽의 귀족정치를 거부하고 미국으로 밀려든 이민자는 근면과 검약을 중시했다. 그리고 한국인도 미국인과 마찬가지로 평등주의의 이상을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경제번영의 와중에 약간의 긴장이 유발됐다. 경제기적의 혜택이 모든 한국인에게 공평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도시 빈민, 영세 농민 등은 성장의 과실이 자기들에게까지는 거의 미치지 않는다고 강하게 반발한다. 그들의 탄원은 더 많은 중상층 한국인의 공감을 얻는다(평등주의는 한국인의 국민 정서에 아주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서울 사람은 택시를 탈 때 자동적으로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기사의 말동무를 해준다). 노태우 대통령은 1992년까지 개인소득(현재 약 3000달러)을 배로 늘리겠다고 약속해 그런 불만을 달래려 했다. 거기에는 나름대로 위험이 따른다. 정부는 국민의 기대가 국가의 현실을 너무 앞서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조직화: 한국은 아직도 위계질서가 아주 분명하고 중앙집권적인 사회다(북한은 훨씬 더하다). 이를 포함한 그 밖의 아주 여러 가지 문제에 공자가 큰 영향을 미쳤다. 가족과 사회를 존중하고, 근면을 강조하며, 본분을 지키라고 가르치는 유교사상은 권위에의 복종을 설파한다. 일례로 최근 정부가 ‘중공’이라는 경멸적 용어로 중국인을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고 시사하자 언론과 대화 속에서 놀랍도록 빠르고 완벽하게 ‘중국’이라는 호칭으로 바뀌었다. 한국이 최근 받아들인 민주정신과는 대체로 어울리지 않는 특성들이다. 1968년의 고전적인 연구 ‘한국, 소용돌이의 정치(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에서 헨더슨은 인종적, 이념적으로 동질적인 나라를 묘사한다. 15세기 이후 한국인은 지도자에 도전하기보다 가능하면 권력자 쪽에 가담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한국 정치는 종종 정책보다 권력에 더 신경을 쓰는 듯하다. 정치인·정당·언론이 주도하는 정치게임에서는 누가 뜨고, 누가 지고, 누가 누구보다 우세한지가 최대의 관심사다(지난해 12월의 대선 이전 의외로 많은 유권자가 누가 이길지 확신이 들 때까지 결정을 미루는 경향을 보였다. 이왕이면 당선자 쪽에 표를 던지겠다는 계산에서다. 그에 따라 선두 후보들의 지지도를 평가하던 여론조사 기관들이 판세 분석에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전쟁과 북으로부터의 계속적인 위협에 한국의 독재권력만 나날이 강해졌다. 한국의 전후 정부들은 한국 역동성의 거칠고 때로는 잔혹한 이면을 드러내는 일이 너무 많았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경제계획 문제만큼이나 ‘국내 보안’에 심혈을 기울인다는 인상을 줄 때가 많았다. 헬멧·방패·전투복 차림의 한국 전투경찰은 비인간적인 면에서 지구상의 어떤 경찰에 뒤지지 않았다(최근 몇 달 사이 방패에 웃는 얼굴을 그려 넣는 등의 방법으로 이미지를 부드럽게 하려 애썼다). 한 세대의 반정부 인사들은 정부기관에 잡혀가 때때로 당했던 악몽을 증언할 수 있다. 그런 고문은 자유와 안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지만 정권의 권위 유지가 궁극적인 목표였다.
불안정: 때로는 한국인이 자부심을 드러낼 때도 있지만 다른 때는 대부분 차라리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하고 바라는 듯했다. 대국인 중국 옆에서 초라해지고,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고, 지난 40년간 미국의 보호를 받은 한국인은 소국 국민으로서 자신들의 약점을 뼈저리게 인식한다. 이들 3개 대국은 모두 한국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겼다. 불교·유교·기독교가 모두 외국에서 수입됐다. 서구 정치제도와 미·일의 경영기법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경우 한국인은 그런 사고를 통째로 받아들였다. 서구식 교육을 살펴보자. “한국 정부에는 미국 대학 출신의 경제학 박사가 미국 정부보다 많다”고 캔자스대의 인류학자 펠릭스 무스는 말했다. 그는 많은 시간을 한국에서 지내며 일한다. 실제로 한국인의 교육과 자기계발 욕구는 놀랍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90%가 자녀를 대학에 보내겠다고 답했으며 자녀의 대학교육을 위해 희생할 의사가 있다는 응답자는 80%에 달했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은 대졸자에게 줄 마땅한 취직 자리가 부족하다. 이상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한국인은 새로운 사고를 열광적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아이디어를 빌리면 돈을 빚진 사람처럼 집착한다”고 정부의 한 고위 관료는 설명했다. “유교의 경우가 그랬다. 우리는 중국인보다 더 순수하고 결벽적인 형태의 유교사상을 개발했다. 민주주의? 우리의 민주주의관은 너무 순수하고 완벽해 그것을 발명한 영국인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원칙 엄수는 한국의 상징일지 모르지만 순탄한 국정 운영에는 좋지 않은 변수다. 타협은 민주주의 통치의 본질이지만 한국인은 그것을 약점이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인다(그러니 김대중씨와 김영삼씨가 연합해 노태우씨에게 대적하지 못한 이유도 그리 놀랍지 않다). 한국의 젊은 세대도 다르지 않다. 대학 학생회는 무수한 구호로 철저히 무장했으며 대학은 비타협적인 독선의 아성이다.
고립주의: 한국인은 외래 사상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외국인을 향한 불신은 버리지 않았다. 한국이 한때 은둔의 나라로 불렸던 까닭은 분명히 있다. 한국은 수세기 동안 외세의 퇴폐적인 영향을 막으려 쇄국정책을 펼쳤다. 오늘날에도 많은 한국인은 자급자족론을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남한은 사실상 고립주의를 버렸다. 정치적으로는 미국과 동맹을 맺은 1948년, 경제적으로는 적극적인 무역입국 정책을 펼친 1960년 이후부터다. 그렇다면 한국 정치에서 반미주의 세력의 확대는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대다수 대학생이 반미주의에 공감하는 듯하다. 이뿐 아니라 많은 중장년의 정서에서도 그런 감정이 표출된다. 대학생들의 반미 데모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철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상징적인 계획이 마련되는 중이다. 서울 중심부의 알짜배기 골프장을 미군으로부터 양도받아 공원으로 활용한다는 구상이다. “한국의 현재 실상을 보면 표면적으로는 친미가 다수를 차지하고 대학생들로 이뤄진 반미주의자가 아주 소수를 이룬다”고 한국 정부의 한 고위 관리는 말했다. “좀 더 깊이 파고들면 의식적으로 동맹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마음속 아주 깊은 틈바구니에서 약간의 반미감정(더 나아가 외국인 혐오증)이 엿보인다. ” 하지만 그것은 복잡미묘한 문제다. 반미 시위를 하는 대다수 대학생은 “장학금을 준다면 주저 없이 미시간대 유학을 택하고 미국에 연줄이 있음을 자랑스러워 한다”고 그 관리는 말했다. 의심 많은 한국인의 눈에는 경제발전의 과실마저 한국인의 자립을 막으려는 외세의 음모로 보일 가능성도 있다. 야당 소속으로 서울 달동네 출신의 초선 의원인 이철용씨는 외세의 한국 개입에 극히 비판적이다. 그는 불교 경전을 인용해 자신의 고립주의를 설명한다. 여우가 원숭이에게 신발을 주고 닳으면 계속 새 걸로 바꿔준다. 원숭이가 신발 없이는 살지 못하게 되자 여우는 앞으로는 돈을 내고 신발을 사야 한다고 강요한다. 같은 식으로 미국이 원조 등의 수단을 통해 한국을 외국 기술에 의존하게 만든다고 이의원은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런 속성, 그리고 그로 인해 야기된 긴장이 앞으로 한국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갈지 예측하려 한다면 어리석은 짓이다. 전쟁 이후 주도면밀한 관찰이 가능하도록 한국이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던 때는 드물었다. 부분적으로 그것은 한국의 청년층과 깊은 관련이 있다. 놀랍게도 한국의 4200만 인구 중 20세 이하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세대차가 너무 커 은퇴연령 세대는 현재 대학연령 세대와 공통점이 거의 없다. 은퇴연령 세대는 가난하게 자라 거의 교육을 받지 못했다. 인류학자 무스는 이렇게 평한다. “너무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변화가 일어나도 오랫동안 변화가 없었던 만큼이나 나쁘다. ” 이미 많은 한국인은 “한국의 정신적 일체성이 붕괴되고 있다고 느낀다”고 그는 말했다. 문선명 목사의 통일교 같은 비전형적인 종교가 뿌리내렸으며 급진적인 학생들이 이끄는 통일 운동이 청년층뿐 아니라 중년층 사이에서도 민족주의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반면 한국인을 오래 지켜본 사람들은 언젠가 깨닫는다. 한국인이 실상은 때때로 보이는 모습처럼 그렇게 무모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국인에게서는 벼랑에 이르기 바로 직전에야 물러서는 경향이 종종 목격된다. 그래서 모두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전에 의견을 절충한다. 올 여름 급진주의 성향의 학생들이 조국통일 캠페인에 착수해 민족 정서를 자극하며 곳곳에서 분위기를 달궜을 때 서울의 한 중견 서방 외교관은 이렇게 말했다. “오래 지속될수록 감정보다 지성이 지배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된다고 보지 않는다. ” 3개월이 지난 지금 실제로 학생운동은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해 시들해지는 조짐을 보인다. 한국이 지난해의 정치위기를 무난히 벗어나자 분명 일종의 마법이 작용한다는 낙관적 정서가 고조됐다. 최근의 역사는 “정치인이나 지도자가 실패해도 국민이 상황을 수습할 줄 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안청시 교수는 말했다. 그 말에는 충분한 진실이 담겨 있다. 그것은 현재 정치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근본적인 현안 중 다수가 몇 년 후에는 해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어쩌면 그때 가면 한국인이 소비와 레저에 다시 관심을 집중하고 번영을 향유할지도 모른다. 신세대 대학생이 1980년대 선배들의 화염병과 최루탄 이야기에 염증을 내는 상황도 벌어질지 모른다.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다만 그들이 온건하고 얌전하리라 기대하지는 말라. 누가 뭐라든 그들은 한국인이니까.
민간 경제대사, 김우중 “이익보다 나라를 위해 일한다” 김우중씨는 지칠 줄 모른다. 12세 때 신문배달을 하며 남들보다 더 빨리 돌리는 법을 배웠다. 39년이 흘러 한국의 4위 규모 기업집단인 대우 그룹의 회장이 됐지만 변함없이 정력적이다. 바로 옆의 호텔 서울 힐튼(부인이 운영한다)으로 점심 식사를 하러 갈 때도 거의 조깅하듯 이동했다. 그는 단 하루도 쉰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전 세계를 종횡무진 누비며 산 정보를 수집할 동안 비행기 안에서 짬짬이 부족한 잠을 보충한다. 김우중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애국심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나는 이익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 ” 한국인이 외국 시장에 진출할 수 있음을 대우가 입증했을 때 “노동자까지 아주 기뻐했다”고 그는 돌이켰다. 그렇다 해도 대기업에는 일반 대중이 신뢰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사람들은 항상 대기업에 반감을 갖는다”고 김씨는 말했다. “일본과 미국에서도 똑같다. ” 여러 해 전 그는 그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 보기로 작정했다. 사재를 털어 여러 재단에 기부했다. 가족왕조를 구축할 욕심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재산 자랑을 좋아하는 기업가들을 싫어한다. “큰 집을 지어 으스대도 괜찮지만” 더 소중한 “신망”을 잃는다는 말이다. 김씨의 독특한 스타일도 근로자들의 파업을 막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직원들은 그를 존경하는 듯하다. 김씨의 일생은 유교적 가치와 현대적 가치의 간극을 메우려는 노력으로 이뤄졌다. 그의 아버지(전쟁 중 북한군에 잡혀가 소식이 끊어짐)는 저명한 학자며 제주도 주지사였다(옛날식 출세의 전형). 상인과 직공은 전통적으로 경시됐다. 1910~45년 일본 치하에서 세습 계급으로서의 양반은 사라졌지만 정부의 관료체제는 엘리트 집단의 출세 코스로 남았다. 김씨는 환경 때문에 사업을 선택했고 그 후 그것이 명예로운 선택이었음을 증명하려고 노력해 왔다. 실제로 그는 일종의 민간 외교관, 다시 말해 비공식 관료가 됐다. 김씨는 중국·소련, 그리고 동유럽 국가들을 향한 한국의 친교 노력에 앞장서 왔다. 이 국가들은 한국과 외교관계가 없는 북한의 우방이지만 한국 기업들에는 매력적인 신시장이다. 김씨는 개인적으로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했다. 북한과도 통상 문호가 개방되기를 바란다. 경제교류를 통해 남북 간 긴장이 완화된다고 그는 믿는다. 한편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협력도 “나날이” 향상된다고 김씨는 말했다. 한국인은 어떻게 옛 장벽을 그렇게 빨리 허무는가. “우리는 정치를 거론하지 않는다. 사업 얘기만 할 뿐이다. ”
시골서 상경한 노조위원장 “먹고 사는 일만으로도 벅찼다” 10년 전 김점숙씨는 13세 소녀였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 혼자 일곱 자식을 먹여 살리기가 막막했다. 김씨는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농촌을 떠나 공장 일자리를 찾아 상경했다. 당시에는 그런 청소년이 수십만 명에 달했다. 김씨는 그 후 자신이 번 돈으로 생활해 왔다. 2년 전 그는 서울 구로공단의 무선전화 제조업체인 나우정밀에 취업했다. 지난해 민주개혁으로 노조 결성이 가능해지자 회사 직공들은 그를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노조원 450명 거의 모두가 여성이다. 김씨를 비롯한 노조원들은 당분간 현 상태가 유지되기 바란다. 회사의 미숙련 직원 중에는 남자가 거의 없다. 그리고 반장급 이상 직원 중에는 여자가 없다. 한국의 작업장은 변함없이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다. 따라서 고위직 남성들이 노조를 장악해 주로 나이가 어린 저임직 여성들의 요구를 희석시킬까 노조원들은 우려한다. 학력차도 작업장에서 남녀 불평등의 고착을 조장한다. 고학력 여성은 조립공장 일자리를 거의 찾지 않는다. “대신 사무직 일자리를 찾아간다”고 김씨는 말했다. 어쨌든 공장 관리자들은 대체로 학력이 너무 높은 여성은 채용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배경이 좋은 지원자들은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판단 아래 솎아내려 한다. 여직공들은 교육도 받지 못하고 노사협상 경험도 없었지만 노조가 결정되자마자 12.5%의 임금인상을 받아냈다. 그러나 올 봄 노조가 일당 2000원의 인상을 요구했을 때 사용자 측이 거부했다. 노조가 파업을 결정하자 “회사가 비열해졌다”고 김씨는 말했다. 경영진이 남자 직공들을 공장 입구로 보내 시위자들을 위협했다고 한다. “몇몇 남성은 나이가 엄마뻘 되는 여성 근로자에게 ‘죽여 버리겠다’고 고함쳤다”고 김씨는 돌이켰다. “많은 남성이 그런 역할을 맡고 싶지 않았겠지만 노조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시를 따라야 했다. ” 9일 후 그 여직공들은 1200원의 인상을 받아들였다. 빠른 성과는 만족스러웠지만 언젠가 교사가 되겠다는 김씨의 꿈은 세월과 함께 사라져갔다. “서울에 올라올 때 나는 많은 희망과 꿈을 품었다”고 그는 말했다. “엄마가 정말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돈을 많이 벌어 돕고 싶었다. 공부도 해서 학력도 높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먹고사는 일만으로도 벅찼다. 그래도 어렸을 때보다 생활이 나아졌고 조금이라도 가족을 도울 수 있어 자랑스럽다. ”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 “평범하고 운 좋은 사람일 뿐” 중소기업 사장 딸인 21세의 최윤희씨는 ‘중상층’이라는 용어를 싫어한다. 자신들은 “평범하고 운 좋은 가족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대학생인 그는 현재 압구정동에서 부모와 함께 산다. 고층 아파트와 화려한 쇼핑가들로 이뤄진 서울 한강 이남의 부자 동네다. 물론 최씨 가족이 아주 평범하지는 않다. 우선, 윤희씨는 아시안 게임 수영 경기에서 금메달 다섯 개를 획득했다. 수영 선수인 그녀의 언니 윤정씨도 1982년 아시안 게임에서 은메달 세 개를 땄다. 그리고 윤희씨는 명문 사립대학인 연세대 체육교육학과 4학년이다. 그러나 다른 학생들처럼 아르바이트를 한다. 모델로 활동하고, 대담프로에 출연하고, 일본 ‘스포츠 음료’ 포카리 스웨트의 광고 모델을 한다. 졸업하면 방송 일이나 청소년에게 수영을 가르치는 일을 할 생각이다. 그는 대학교 시위의 폭력과 최루탄을 싫어해 가급적 피해 다닌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고 황급히 덧붙인다. 학교 친구 대부분이 같은 생각이라고 한다. “운동가들의 이념은 보통 학생들의 사고방식과 다르다. 완전히 다른 두 세계다.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로 나뉜다. ” 캠퍼스에서 가장 불만거리가 적은 사람들이 가장 극성스러운 과격파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어쨌든 이미 정상에 가까이 다가서지 않았는가. “열심히 노력한다면 사회의 큰 인물이 될 기회가 있다”는 얘기다. 걷거나 버스를 타고 다녀야 하는 덜 부유한 학생들 다수가 자기처럼 자동차로 통학하는 학생들에게 적대적인 점이 그로서는 영 불편하다. “그런 사고방식은 아주 이해하기 힘들다”며 미간을 찌푸렸다. 배영 선수인 최씨는 올 여름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을 계획이다. 1984년 LA 올림픽에서 실망스러운 성적을 낸 뒤 홈 경기장의 이점이 있다 해도 88올림픽에서는 가능성이 없으리라 판단했다. “세계 수준이 아시아보다 높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나이가 들어 출전하지 않는다. ” 서울 올림픽에서 한국의 수영 입상 전망은 “아주 아주 어렵다”고 평가한다. 그래도 남한의 전체 성적에 관해서는 낙관적이다. 다른 경기에서 한국이 6~7개의 금메달을 따내리라고 그는 전망했다.
가난한 학생 혁명가 “우리 목표는 국가해방” 차씨는 언제라도 경찰이 문을 박차고 들이닥쳐 그를 끌어내기라도 할 듯 소파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긴장된 표정으로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사진 촬영이나 이름 밝히기도 거부했다. 고려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는 23세의 차씨는 자칭 ‘학생 혁명가’다. 이들은 소규모지만 투쟁적인 그룹이다. 그렇다 해도 공산주의자는 아니라고 그는 주장한다. “정말로 자유체제를 신봉한다. ” 하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당국이 오해할지 모른다고 그는 설명했다. “극단적인 노선은 택하지 않으려 하지만 그래도 문제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 ” 그는 여름방학이 되면 전라남도의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일을 거든다고 한다. 부모는 아직도 약 2500평의 논을 스스로 경작한다. 거기서 나오는 돈으로 차씨를 포함한 여섯 자식을 모두 길렀다. 그처럼 어려운 형편에 여동생 한 명도 대학에 다닌다. 다른 동생들도 대입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학비를 어떻게 댈까. “한편으로 장학금을 받으면서 또 한편으로 아르바이트를 많이 해야 한다. ” 차씨는 1학년 말에 운동가가 됐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데 한 학생이 뛰어들어와 전단을 뿌렸다. 그의 양팔은 피투성이였고 전투경찰 몇 명이 그를 쫓았다… 전경들이 그를 붙잡아 끌고 갔다. 큰 충격이었다. 즉시 학생운동에 가담했다. ” 그는 교리문답을 하듯 ‘혁명’의 미래관을 묘사했다. “우리 목표는 국가해방이다. 가장 최근의 운동은 대중을 끊임없이 조직화해 집권단체의 모든 기만적인 실상을 파헤치고 알리는 일이다. ” 그는 자신의 말투가 북한 사람과 닮았다는 점을 인정한다. “북한 사람을 우리 동포라고 본다”고 그는 설명했다. 북한 사람의 생활방식을 좋아하는가. “정부는 북한에 관해 우리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북한의 실상을 조금도 모른다”고 차씨는 대답했다. “그래서 어떻다고 입장을 말하기 어렵다. ” 남한 경제의 고도성장은 부유층의 과소비 열풍을 조장했다. 하류층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생활수준의 불평등을 향한 적대감이 커졌다. 일류대학 졸업반인 차씨는 졸업만 하면 선택하기에 따라 특권층의 삶을 누리게 된다. 그렇다 해도 자신이 겪은 가난에 속은 기분이 든다. “반면에 가난한 노동자들의 환경, 노동자들이 공장주와 관리자들에게 얼마나 부당한 처우를 받는지 목격해 다행이다. 아직 내 앞날은 결정하지 않았지만 졸업 후에는 민주주의나 억업받는 사람들을 위해 싸우는 단체에 가입할 생각이다. 고통받는 많은 노동자를 도울 곳을 찾겠다. ”
극동의 음유시인 이남이 “울고 싶어라” 그의 외모는 시골 중년과 도시 젊은이를 묘하게 섞어 놓은 모습이다. 그의 음악도 마찬가지로 잡탕이다. 현대의 문제를 현대적인 언어로, 시골풍의 곡조에 맞춰 담배에 전 쉰 목소리로 부른다. 극동의 컨트리 음악이라고 할까. 곧잘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고 스스로 말하는 나라에서 그런 조합은 이남이(40)를 스타로 만들었다. 그는 한 주에 세 번이나 TV 쇼에 출연한다. 그의 대표곡인 ‘울고 싶어라’는 한국인 남녀노소 모두가 즐겨 따라 부르는 노래다. 몇 년 전만 해도 그는 전자기타를 든 평범한 젊은이에 불과했다. 고등학생 시절 내내 음악을 공부하며(호른·발성·베이스 기타) 로큰롤 스타를 꿈꾸었다. 그의 우상은 존 레넌과 밥 딜런이었다. 졸업 후 그레이프 바인, 차밍 가이즈 같은 영어 이름을 가진 밴드들을 전전했다. 그 밴드들은 미군기지의 클럽에서 공연할 기회가 많았다. 그때 이씨는 자신의 서방 우상들을 지나치게 따라 행동하다가 당국에 적발됐다. 마리화나 복용 혐의로 체포됐다. 이씨는 적어도 간접적으로는 한국의 엄격한 마약단속법의 덕을 봐 스타덤에 올랐다. 한국에서는 마약 복용으로 체포된 공연자들은 법으로 3년간 활동이 금지된다. 1980년 적발됐을 때 김씨는 서울 40km 남쪽 용인에서 예술가 공동체를 건설하던 매형을 찾아가 일했다. 일은 힘들었지만 시골 사람들은 친절하고 음악을 좋아했다. 해금된 뒤 그는 그들의 소리를 독자적으로 해석한 음악을 서울로 가져갔다. 젊은이들은 그 음악의 새로운 맛에 끌렸을지 모르지만 그들 부모 세대는 옛 시절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42세의 한 주부는 말했다. “더 이상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다. 약간의 향수를 즐길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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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성: 소문은 사실이다. 한국인은 아주 열심히 일한다. 전에는 살아남으려 결단력을 보였지만 지금은 남들보다 앞서가려 치열한 경쟁을 한다. 서울의 번잡한 이태원 쇼핑가의 점원들은 보통 하루 13시간, 1주일 7일씩 근무한다. 그리고 한국의 ‘시험지옥(밤낮없이 집중적으로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몇 달간)’은 일본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다. 그런 가치관은 한국인이 세계 어디를 가든 달라지지 않는다. 뉴욕시에서 청과물을 팔든, 중동의 공장 건설현장에서 일하든 한결같다. 원래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한국인의 전통 사회는 다양하기는커녕 수세기 동안 극도로 정적인 사회였다. 100년 전 오랫동안 닫혀 있던 한국의 문호를 강제로 열어젖힌 서구인은 유럽과 북미에 변혁을 몰고온 산업혁명과는 완전히 별세계의 가난한 나라를 발견했다. 당시 한국의 지체 높은 양반들은 온갖 점잔을 빼며 걷고 말하고 행동했다. 열심히 일하며 영리를 추구하는 행동은 상민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경멸했다. 그런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미 국무부의 한국 전문가로 일했던 그레고리 헨더슨에 따르면 양반이라고 알려진 학자·관료·지주계급 등 상류층의 생활방식은 변화와 현대화에 대처하기에는 상극이었다. 19세기 말엽부터 상인과 공인계급이 점차 부상하며 양반계급은 서서히 밀려났다. 그 결과 전에는 상민들에나 속한다고 여겨지던 가치관이 오늘날의 한국을 지배한다고 헨더슨은 말했다. 그는 그것을 한두 세기 전의 미국과 비교한다. 당시 유럽의 귀족정치를 거부하고 미국으로 밀려든 이민자는 근면과 검약을 중시했다. 그리고 한국인도 미국인과 마찬가지로 평등주의의 이상을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경제번영의 와중에 약간의 긴장이 유발됐다. 경제기적의 혜택이 모든 한국인에게 공평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도시 빈민, 영세 농민 등은 성장의 과실이 자기들에게까지는 거의 미치지 않는다고 강하게 반발한다. 그들의 탄원은 더 많은 중상층 한국인의 공감을 얻는다(평등주의는 한국인의 국민 정서에 아주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서울 사람은 택시를 탈 때 자동적으로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기사의 말동무를 해준다). 노태우 대통령은 1992년까지 개인소득(현재 약 3000달러)을 배로 늘리겠다고 약속해 그런 불만을 달래려 했다. 거기에는 나름대로 위험이 따른다. 정부는 국민의 기대가 국가의 현실을 너무 앞서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조직화: 한국은 아직도 위계질서가 아주 분명하고 중앙집권적인 사회다(북한은 훨씬 더하다). 이를 포함한 그 밖의 아주 여러 가지 문제에 공자가 큰 영향을 미쳤다. 가족과 사회를 존중하고, 근면을 강조하며, 본분을 지키라고 가르치는 유교사상은 권위에의 복종을 설파한다. 일례로 최근 정부가 ‘중공’이라는 경멸적 용어로 중국인을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고 시사하자 언론과 대화 속에서 놀랍도록 빠르고 완벽하게 ‘중국’이라는 호칭으로 바뀌었다. 한국이 최근 받아들인 민주정신과는 대체로 어울리지 않는 특성들이다. 1968년의 고전적인 연구 ‘한국, 소용돌이의 정치(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에서 헨더슨은 인종적, 이념적으로 동질적인 나라를 묘사한다. 15세기 이후 한국인은 지도자에 도전하기보다 가능하면 권력자 쪽에 가담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한국 정치는 종종 정책보다 권력에 더 신경을 쓰는 듯하다. 정치인·정당·언론이 주도하는 정치게임에서는 누가 뜨고, 누가 지고, 누가 누구보다 우세한지가 최대의 관심사다(지난해 12월의 대선 이전 의외로 많은 유권자가 누가 이길지 확신이 들 때까지 결정을 미루는 경향을 보였다. 이왕이면 당선자 쪽에 표를 던지겠다는 계산에서다. 그에 따라 선두 후보들의 지지도를 평가하던 여론조사 기관들이 판세 분석에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전쟁과 북으로부터의 계속적인 위협에 한국의 독재권력만 나날이 강해졌다. 한국의 전후 정부들은 한국 역동성의 거칠고 때로는 잔혹한 이면을 드러내는 일이 너무 많았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경제계획 문제만큼이나 ‘국내 보안’에 심혈을 기울인다는 인상을 줄 때가 많았다. 헬멧·방패·전투복 차림의 한국 전투경찰은 비인간적인 면에서 지구상의 어떤 경찰에 뒤지지 않았다(최근 몇 달 사이 방패에 웃는 얼굴을 그려 넣는 등의 방법으로 이미지를 부드럽게 하려 애썼다). 한 세대의 반정부 인사들은 정부기관에 잡혀가 때때로 당했던 악몽을 증언할 수 있다. 그런 고문은 자유와 안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지만 정권의 권위 유지가 궁극적인 목표였다.
불안정: 때로는 한국인이 자부심을 드러낼 때도 있지만 다른 때는 대부분 차라리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하고 바라는 듯했다. 대국인 중국 옆에서 초라해지고,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고, 지난 40년간 미국의 보호를 받은 한국인은 소국 국민으로서 자신들의 약점을 뼈저리게 인식한다. 이들 3개 대국은 모두 한국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겼다. 불교·유교·기독교가 모두 외국에서 수입됐다. 서구 정치제도와 미·일의 경영기법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경우 한국인은 그런 사고를 통째로 받아들였다. 서구식 교육을 살펴보자. “한국 정부에는 미국 대학 출신의 경제학 박사가 미국 정부보다 많다”고 캔자스대의 인류학자 펠릭스 무스는 말했다. 그는 많은 시간을 한국에서 지내며 일한다. 실제로 한국인의 교육과 자기계발 욕구는 놀랍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90%가 자녀를 대학에 보내겠다고 답했으며 자녀의 대학교육을 위해 희생할 의사가 있다는 응답자는 80%에 달했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은 대졸자에게 줄 마땅한 취직 자리가 부족하다. 이상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한국인은 새로운 사고를 열광적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아이디어를 빌리면 돈을 빚진 사람처럼 집착한다”고 정부의 한 고위 관료는 설명했다. “유교의 경우가 그랬다. 우리는 중국인보다 더 순수하고 결벽적인 형태의 유교사상을 개발했다. 민주주의? 우리의 민주주의관은 너무 순수하고 완벽해 그것을 발명한 영국인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원칙 엄수는 한국의 상징일지 모르지만 순탄한 국정 운영에는 좋지 않은 변수다. 타협은 민주주의 통치의 본질이지만 한국인은 그것을 약점이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인다(그러니 김대중씨와 김영삼씨가 연합해 노태우씨에게 대적하지 못한 이유도 그리 놀랍지 않다). 한국의 젊은 세대도 다르지 않다. 대학 학생회는 무수한 구호로 철저히 무장했으며 대학은 비타협적인 독선의 아성이다.
고립주의: 한국인은 외래 사상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외국인을 향한 불신은 버리지 않았다. 한국이 한때 은둔의 나라로 불렸던 까닭은 분명히 있다. 한국은 수세기 동안 외세의 퇴폐적인 영향을 막으려 쇄국정책을 펼쳤다. 오늘날에도 많은 한국인은 자급자족론을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남한은 사실상 고립주의를 버렸다. 정치적으로는 미국과 동맹을 맺은 1948년, 경제적으로는 적극적인 무역입국 정책을 펼친 1960년 이후부터다. 그렇다면 한국 정치에서 반미주의 세력의 확대는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대다수 대학생이 반미주의에 공감하는 듯하다. 이뿐 아니라 많은 중장년의 정서에서도 그런 감정이 표출된다. 대학생들의 반미 데모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철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상징적인 계획이 마련되는 중이다. 서울 중심부의 알짜배기 골프장을 미군으로부터 양도받아 공원으로 활용한다는 구상이다. “한국의 현재 실상을 보면 표면적으로는 친미가 다수를 차지하고 대학생들로 이뤄진 반미주의자가 아주 소수를 이룬다”고 한국 정부의 한 고위 관리는 말했다. “좀 더 깊이 파고들면 의식적으로 동맹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마음속 아주 깊은 틈바구니에서 약간의 반미감정(더 나아가 외국인 혐오증)이 엿보인다. ” 하지만 그것은 복잡미묘한 문제다. 반미 시위를 하는 대다수 대학생은 “장학금을 준다면 주저 없이 미시간대 유학을 택하고 미국에 연줄이 있음을 자랑스러워 한다”고 그 관리는 말했다. 의심 많은 한국인의 눈에는 경제발전의 과실마저 한국인의 자립을 막으려는 외세의 음모로 보일 가능성도 있다. 야당 소속으로 서울 달동네 출신의 초선 의원인 이철용씨는 외세의 한국 개입에 극히 비판적이다. 그는 불교 경전을 인용해 자신의 고립주의를 설명한다. 여우가 원숭이에게 신발을 주고 닳으면 계속 새 걸로 바꿔준다. 원숭이가 신발 없이는 살지 못하게 되자 여우는 앞으로는 돈을 내고 신발을 사야 한다고 강요한다. 같은 식으로 미국이 원조 등의 수단을 통해 한국을 외국 기술에 의존하게 만든다고 이의원은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런 속성, 그리고 그로 인해 야기된 긴장이 앞으로 한국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갈지 예측하려 한다면 어리석은 짓이다. 전쟁 이후 주도면밀한 관찰이 가능하도록 한국이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던 때는 드물었다. 부분적으로 그것은 한국의 청년층과 깊은 관련이 있다. 놀랍게도 한국의 4200만 인구 중 20세 이하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세대차가 너무 커 은퇴연령 세대는 현재 대학연령 세대와 공통점이 거의 없다. 은퇴연령 세대는 가난하게 자라 거의 교육을 받지 못했다. 인류학자 무스는 이렇게 평한다. “너무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변화가 일어나도 오랫동안 변화가 없었던 만큼이나 나쁘다. ” 이미 많은 한국인은 “한국의 정신적 일체성이 붕괴되고 있다고 느낀다”고 그는 말했다. 문선명 목사의 통일교 같은 비전형적인 종교가 뿌리내렸으며 급진적인 학생들이 이끄는 통일 운동이 청년층뿐 아니라 중년층 사이에서도 민족주의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반면 한국인을 오래 지켜본 사람들은 언젠가 깨닫는다. 한국인이 실상은 때때로 보이는 모습처럼 그렇게 무모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국인에게서는 벼랑에 이르기 바로 직전에야 물러서는 경향이 종종 목격된다. 그래서 모두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전에 의견을 절충한다. 올 여름 급진주의 성향의 학생들이 조국통일 캠페인에 착수해 민족 정서를 자극하며 곳곳에서 분위기를 달궜을 때 서울의 한 중견 서방 외교관은 이렇게 말했다. “오래 지속될수록 감정보다 지성이 지배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된다고 보지 않는다. ” 3개월이 지난 지금 실제로 학생운동은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해 시들해지는 조짐을 보인다. 한국이 지난해의 정치위기를 무난히 벗어나자 분명 일종의 마법이 작용한다는 낙관적 정서가 고조됐다. 최근의 역사는 “정치인이나 지도자가 실패해도 국민이 상황을 수습할 줄 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안청시 교수는 말했다. 그 말에는 충분한 진실이 담겨 있다. 그것은 현재 정치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근본적인 현안 중 다수가 몇 년 후에는 해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어쩌면 그때 가면 한국인이 소비와 레저에 다시 관심을 집중하고 번영을 향유할지도 모른다. 신세대 대학생이 1980년대 선배들의 화염병과 최루탄 이야기에 염증을 내는 상황도 벌어질지 모른다.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다만 그들이 온건하고 얌전하리라 기대하지는 말라. 누가 뭐라든 그들은 한국인이니까.
민간 경제대사, 김우중 “이익보다 나라를 위해 일한다” 김우중씨는 지칠 줄 모른다. 12세 때 신문배달을 하며 남들보다 더 빨리 돌리는 법을 배웠다. 39년이 흘러 한국의 4위 규모 기업집단인 대우 그룹의 회장이 됐지만 변함없이 정력적이다. 바로 옆의 호텔 서울 힐튼(부인이 운영한다)으로 점심 식사를 하러 갈 때도 거의 조깅하듯 이동했다. 그는 단 하루도 쉰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전 세계를 종횡무진 누비며 산 정보를 수집할 동안 비행기 안에서 짬짬이 부족한 잠을 보충한다. 김우중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애국심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나는 이익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 ” 한국인이 외국 시장에 진출할 수 있음을 대우가 입증했을 때 “노동자까지 아주 기뻐했다”고 그는 돌이켰다. 그렇다 해도 대기업에는 일반 대중이 신뢰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사람들은 항상 대기업에 반감을 갖는다”고 김씨는 말했다. “일본과 미국에서도 똑같다. ” 여러 해 전 그는 그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 보기로 작정했다. 사재를 털어 여러 재단에 기부했다. 가족왕조를 구축할 욕심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재산 자랑을 좋아하는 기업가들을 싫어한다. “큰 집을 지어 으스대도 괜찮지만” 더 소중한 “신망”을 잃는다는 말이다. 김씨의 독특한 스타일도 근로자들의 파업을 막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직원들은 그를 존경하는 듯하다. 김씨의 일생은 유교적 가치와 현대적 가치의 간극을 메우려는 노력으로 이뤄졌다. 그의 아버지(전쟁 중 북한군에 잡혀가 소식이 끊어짐)는 저명한 학자며 제주도 주지사였다(옛날식 출세의 전형). 상인과 직공은 전통적으로 경시됐다. 1910~45년 일본 치하에서 세습 계급으로서의 양반은 사라졌지만 정부의 관료체제는 엘리트 집단의 출세 코스로 남았다. 김씨는 환경 때문에 사업을 선택했고 그 후 그것이 명예로운 선택이었음을 증명하려고 노력해 왔다. 실제로 그는 일종의 민간 외교관, 다시 말해 비공식 관료가 됐다. 김씨는 중국·소련, 그리고 동유럽 국가들을 향한 한국의 친교 노력에 앞장서 왔다. 이 국가들은 한국과 외교관계가 없는 북한의 우방이지만 한국 기업들에는 매력적인 신시장이다. 김씨는 개인적으로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했다. 북한과도 통상 문호가 개방되기를 바란다. 경제교류를 통해 남북 간 긴장이 완화된다고 그는 믿는다. 한편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협력도 “나날이” 향상된다고 김씨는 말했다. 한국인은 어떻게 옛 장벽을 그렇게 빨리 허무는가. “우리는 정치를 거론하지 않는다. 사업 얘기만 할 뿐이다. ”
시골서 상경한 노조위원장 “먹고 사는 일만으로도 벅찼다” 10년 전 김점숙씨는 13세 소녀였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 혼자 일곱 자식을 먹여 살리기가 막막했다. 김씨는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농촌을 떠나 공장 일자리를 찾아 상경했다. 당시에는 그런 청소년이 수십만 명에 달했다. 김씨는 그 후 자신이 번 돈으로 생활해 왔다. 2년 전 그는 서울 구로공단의 무선전화 제조업체인 나우정밀에 취업했다. 지난해 민주개혁으로 노조 결성이 가능해지자 회사 직공들은 그를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노조원 450명 거의 모두가 여성이다. 김씨를 비롯한 노조원들은 당분간 현 상태가 유지되기 바란다. 회사의 미숙련 직원 중에는 남자가 거의 없다. 그리고 반장급 이상 직원 중에는 여자가 없다. 한국의 작업장은 변함없이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다. 따라서 고위직 남성들이 노조를 장악해 주로 나이가 어린 저임직 여성들의 요구를 희석시킬까 노조원들은 우려한다. 학력차도 작업장에서 남녀 불평등의 고착을 조장한다. 고학력 여성은 조립공장 일자리를 거의 찾지 않는다. “대신 사무직 일자리를 찾아간다”고 김씨는 말했다. 어쨌든 공장 관리자들은 대체로 학력이 너무 높은 여성은 채용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배경이 좋은 지원자들은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판단 아래 솎아내려 한다. 여직공들은 교육도 받지 못하고 노사협상 경험도 없었지만 노조가 결정되자마자 12.5%의 임금인상을 받아냈다. 그러나 올 봄 노조가 일당 2000원의 인상을 요구했을 때 사용자 측이 거부했다. 노조가 파업을 결정하자 “회사가 비열해졌다”고 김씨는 말했다. 경영진이 남자 직공들을 공장 입구로 보내 시위자들을 위협했다고 한다. “몇몇 남성은 나이가 엄마뻘 되는 여성 근로자에게 ‘죽여 버리겠다’고 고함쳤다”고 김씨는 돌이켰다. “많은 남성이 그런 역할을 맡고 싶지 않았겠지만 노조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시를 따라야 했다. ” 9일 후 그 여직공들은 1200원의 인상을 받아들였다. 빠른 성과는 만족스러웠지만 언젠가 교사가 되겠다는 김씨의 꿈은 세월과 함께 사라져갔다. “서울에 올라올 때 나는 많은 희망과 꿈을 품었다”고 그는 말했다. “엄마가 정말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돈을 많이 벌어 돕고 싶었다. 공부도 해서 학력도 높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먹고사는 일만으로도 벅찼다. 그래도 어렸을 때보다 생활이 나아졌고 조금이라도 가족을 도울 수 있어 자랑스럽다. ”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 “평범하고 운 좋은 사람일 뿐” 중소기업 사장 딸인 21세의 최윤희씨는 ‘중상층’이라는 용어를 싫어한다. 자신들은 “평범하고 운 좋은 가족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대학생인 그는 현재 압구정동에서 부모와 함께 산다. 고층 아파트와 화려한 쇼핑가들로 이뤄진 서울 한강 이남의 부자 동네다. 물론 최씨 가족이 아주 평범하지는 않다. 우선, 윤희씨는 아시안 게임 수영 경기에서 금메달 다섯 개를 획득했다. 수영 선수인 그녀의 언니 윤정씨도 1982년 아시안 게임에서 은메달 세 개를 땄다. 그리고 윤희씨는 명문 사립대학인 연세대 체육교육학과 4학년이다. 그러나 다른 학생들처럼 아르바이트를 한다. 모델로 활동하고, 대담프로에 출연하고, 일본 ‘스포츠 음료’ 포카리 스웨트의 광고 모델을 한다. 졸업하면 방송 일이나 청소년에게 수영을 가르치는 일을 할 생각이다. 그는 대학교 시위의 폭력과 최루탄을 싫어해 가급적 피해 다닌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고 황급히 덧붙인다. 학교 친구 대부분이 같은 생각이라고 한다. “운동가들의 이념은 보통 학생들의 사고방식과 다르다. 완전히 다른 두 세계다.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로 나뉜다. ” 캠퍼스에서 가장 불만거리가 적은 사람들이 가장 극성스러운 과격파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어쨌든 이미 정상에 가까이 다가서지 않았는가. “열심히 노력한다면 사회의 큰 인물이 될 기회가 있다”는 얘기다. 걷거나 버스를 타고 다녀야 하는 덜 부유한 학생들 다수가 자기처럼 자동차로 통학하는 학생들에게 적대적인 점이 그로서는 영 불편하다. “그런 사고방식은 아주 이해하기 힘들다”며 미간을 찌푸렸다. 배영 선수인 최씨는 올 여름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을 계획이다. 1984년 LA 올림픽에서 실망스러운 성적을 낸 뒤 홈 경기장의 이점이 있다 해도 88올림픽에서는 가능성이 없으리라 판단했다. “세계 수준이 아시아보다 높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나이가 들어 출전하지 않는다. ” 서울 올림픽에서 한국의 수영 입상 전망은 “아주 아주 어렵다”고 평가한다. 그래도 남한의 전체 성적에 관해서는 낙관적이다. 다른 경기에서 한국이 6~7개의 금메달을 따내리라고 그는 전망했다.
가난한 학생 혁명가 “우리 목표는 국가해방” 차씨는 언제라도 경찰이 문을 박차고 들이닥쳐 그를 끌어내기라도 할 듯 소파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긴장된 표정으로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사진 촬영이나 이름 밝히기도 거부했다. 고려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는 23세의 차씨는 자칭 ‘학생 혁명가’다. 이들은 소규모지만 투쟁적인 그룹이다. 그렇다 해도 공산주의자는 아니라고 그는 주장한다. “정말로 자유체제를 신봉한다. ” 하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당국이 오해할지 모른다고 그는 설명했다. “극단적인 노선은 택하지 않으려 하지만 그래도 문제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 ” 그는 여름방학이 되면 전라남도의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일을 거든다고 한다. 부모는 아직도 약 2500평의 논을 스스로 경작한다. 거기서 나오는 돈으로 차씨를 포함한 여섯 자식을 모두 길렀다. 그처럼 어려운 형편에 여동생 한 명도 대학에 다닌다. 다른 동생들도 대입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학비를 어떻게 댈까. “한편으로 장학금을 받으면서 또 한편으로 아르바이트를 많이 해야 한다. ” 차씨는 1학년 말에 운동가가 됐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데 한 학생이 뛰어들어와 전단을 뿌렸다. 그의 양팔은 피투성이였고 전투경찰 몇 명이 그를 쫓았다… 전경들이 그를 붙잡아 끌고 갔다. 큰 충격이었다. 즉시 학생운동에 가담했다. ” 그는 교리문답을 하듯 ‘혁명’의 미래관을 묘사했다. “우리 목표는 국가해방이다. 가장 최근의 운동은 대중을 끊임없이 조직화해 집권단체의 모든 기만적인 실상을 파헤치고 알리는 일이다. ” 그는 자신의 말투가 북한 사람과 닮았다는 점을 인정한다. “북한 사람을 우리 동포라고 본다”고 그는 설명했다. 북한 사람의 생활방식을 좋아하는가. “정부는 북한에 관해 우리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북한의 실상을 조금도 모른다”고 차씨는 대답했다. “그래서 어떻다고 입장을 말하기 어렵다. ” 남한 경제의 고도성장은 부유층의 과소비 열풍을 조장했다. 하류층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생활수준의 불평등을 향한 적대감이 커졌다. 일류대학 졸업반인 차씨는 졸업만 하면 선택하기에 따라 특권층의 삶을 누리게 된다. 그렇다 해도 자신이 겪은 가난에 속은 기분이 든다. “반면에 가난한 노동자들의 환경, 노동자들이 공장주와 관리자들에게 얼마나 부당한 처우를 받는지 목격해 다행이다. 아직 내 앞날은 결정하지 않았지만 졸업 후에는 민주주의나 억업받는 사람들을 위해 싸우는 단체에 가입할 생각이다. 고통받는 많은 노동자를 도울 곳을 찾겠다. ”
극동의 음유시인 이남이 “울고 싶어라” 그의 외모는 시골 중년과 도시 젊은이를 묘하게 섞어 놓은 모습이다. 그의 음악도 마찬가지로 잡탕이다. 현대의 문제를 현대적인 언어로, 시골풍의 곡조에 맞춰 담배에 전 쉰 목소리로 부른다. 극동의 컨트리 음악이라고 할까. 곧잘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고 스스로 말하는 나라에서 그런 조합은 이남이(40)를 스타로 만들었다. 그는 한 주에 세 번이나 TV 쇼에 출연한다. 그의 대표곡인 ‘울고 싶어라’는 한국인 남녀노소 모두가 즐겨 따라 부르는 노래다. 몇 년 전만 해도 그는 전자기타를 든 평범한 젊은이에 불과했다. 고등학생 시절 내내 음악을 공부하며(호른·발성·베이스 기타) 로큰롤 스타를 꿈꾸었다. 그의 우상은 존 레넌과 밥 딜런이었다. 졸업 후 그레이프 바인, 차밍 가이즈 같은 영어 이름을 가진 밴드들을 전전했다. 그 밴드들은 미군기지의 클럽에서 공연할 기회가 많았다. 그때 이씨는 자신의 서방 우상들을 지나치게 따라 행동하다가 당국에 적발됐다. 마리화나 복용 혐의로 체포됐다. 이씨는 적어도 간접적으로는 한국의 엄격한 마약단속법의 덕을 봐 스타덤에 올랐다. 한국에서는 마약 복용으로 체포된 공연자들은 법으로 3년간 활동이 금지된다. 1980년 적발됐을 때 김씨는 서울 40km 남쪽 용인에서 예술가 공동체를 건설하던 매형을 찾아가 일했다. 일은 힘들었지만 시골 사람들은 친절하고 음악을 좋아했다. 해금된 뒤 그는 그들의 소리를 독자적으로 해석한 음악을 서울로 가져갔다. 젊은이들은 그 음악의 새로운 맛에 끌렸을지 모르지만 그들 부모 세대는 옛 시절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42세의 한 주부는 말했다. “더 이상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다. 약간의 향수를 즐길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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