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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르포] 보르도 포도 수확 현장을 가다

[현지르포] 보르도 포도 수확 현장을 가다

▶ 샤토 무통 로쉴드 포도 수확 행사

해마다 10월이 되면 프랑스와 이탈리아 와인 산지는 포도 익는 냄새가 진동한다. 올해는 과연 어떤 와인이 만들어질지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현장이기도 하다. 유럽 최고의 와인 산지라 불리는 프랑스 보르도와 이탈리아 토스카나를 찾았다.
“글쎄요. 지난주에 비가 내렸지만 아직까진 견딜 만해요. 내일 저녁에 비 소식이 있는데 제발 폭우가 쏟아지진 말아야 될 텐데요.” 10월 2일 포도 수확이 한창이던 샤토 무통 로쉴드(Ch. Mouton Rothschild)의 양조장. 오전 포도 수확을 끝내고 점심시간에 만난 샤토 무통 로쉴드의 프레더릭 드 겔로에(Frederic de Geloes) 사장은 초조한 듯 말문을 열었다. 그는 “포도의 가장 큰 적은 비(雨)”라며 “수확 직전에 내리는 폭우는 한 해 포도농사를 순식간에 망쳐 버린다”고 토로했다. 샤토 무통 로쉴드는 보르도 메독 지방의 1등급 와인이다. 메독의 포이약 마을에 펼쳐진 24만 평 포도밭에서 해마다 30만 병가량의 무통 로쉴드 와인이 생산된다. 세컨드 와인(Le Petit Mouton Rothschild)과 화이트 와인(Aile D’argent) 생산량을 다 합쳐도 1평에 한 병 반 정도 생산하는 데 그친다. 하지만 이렇게 생산된 무통 로쉴드 와인은 한 병에 최하 100유로에 팔려 나간다. 단위당 생산 가치를 따진다면 세계 최고의 농산물인 셈이다. 하지만 이‘황금밭’도 비켜가지 못하는 것이 바로 기후다. 그해 기후에 따라 포도 작황과 품질이 달라지고, 이는 그대로 가격에 영향을 미친다. 최근 메독에서 포도 농사가 가장 잘됐다는 2000년산 무통 로쉴드는 현지에서 한 병에 450유로 정도에 팔리지만, 이듬해인 2001년산은 150유로에 팔리는 게 현실이다.

‘2006년산 와인, 2005년보다는 못할 듯’ 샤토 무통 로쉴드는 해마다 포도 수확 시기가 되면 전 세계 고객들을 초청해 직접 포도밭에서 포도를 따게 한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하루 종일 포도를 수확하면서 와인의 기초인‘포도’를 배우고 일과가 끝나면 포도를 땄다는 수료증도 받는다. 10월 2일 오전 8시에 포도 수확 행사가 시작됐다. 포도밭에 도착하자 ‘작업반장’으로 보이는 무통 로쉴드 직원이 트럭 위에 올라서서 몇 가지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먼저 ‘곰팡이가 피거나 벌레 먹은 포도는 바구니에 담지 말고 땅바닥에 떨어트려라’. 전문가들이 다시 포도밭을 돌면서 세컨드 와인을 만들 때 사용할지 그대로 버릴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다음엔 ‘덜 익은 포도는 따지 말고 그대로 둬라’. 좀더 시간이 지난 후 따겠다는 설명이다. 무통 로쉴드의 경우 모든 포도 수확 과정은 사람의 손에 의해서만 진행된다.

▶ 1. 무통 로쉴드의 수유주 필리핀느 로쉴드 여사의 전 남편 자크 세레스(왼쪽)와 이자기르 사장
2. 2005년산 무통 로쉴드 시음회
3. 무통 로쉴드 저녁 만찬

수확된 포도는 다시 한 번 전문가의 손을 거친다. 인공적인 것을 철저히 배제하기 위해 펌프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작업반장이 시작을 알리자 사람들은 일제히 한 손에 가위를 쥐고 바구니가 담긴 수레를 끌어가며 포도를 따기 시작했다. 포도 품종은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한국에서 보는 포도에 비해 알이 작았다. 하지만 입안에 넣자 단내가 물씬 풍길 정도로 당도는 높았다. 포도의 일부는 지난주 내린 비 때문인지 상태가 좋지 않았다. 포도나무와 한창 씨름하던 중, 무통 로쉴드의 수출담당 매니저인 앤서니 구르멜(Anthony Gourmel)이 잘 익은 듯 윤기가 흐르는 포도 송이를 들고 왔다. 그는 “지난해만 해도 모든 포도들이 이렇게 잘 익었다”며 “올해는 2004년보다는 좋은 것 같은데 지난해보다는 못한 것 같다”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프랑스는 2000년 이후로 포도 풍년이 잦았다. 덕분에 무통 로쉴드같이 최고급 와인들은 가격이 올라가는 반면, 일반 와인들은 가격이 폭락하는 추세다. 구르멜은 “영세 포도주업자들은 팔리지 않은 재고를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있다”며 “근처 소규모 와인 생산자들의 경우 속속 문을 닫고 있는 형편”이라고 전했다. 보르도 지방은 프랑스 최대 와인 산지로 7,500여 곳에서 3만 종이 넘는 와인이 생산되고 있다. 프랑스는 몇 년 전부터 국내외 와인 수요가 급격히 줄면서 보르도 지역에서 생산된 레드 와인 10%, 화이트 와인 33%를 공업용 알코올로 재생시켰다. 정부는 포도 생산 자체를 줄이기 위해 3,000만 평이 넘는 포도밭을 갈아엎겠다는 목표까지 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런 처방에도 불구하고 자국 내 와인 수요의 급격한 감소로 와인 가격은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포도 수확 중간 새참 시간엔 와인과 샌드위치가 등장했다. 한낮의 태양이 작열하는 보르도의 포도밭에서,전 세계에서 날아온 다양한 인종들이 작업복을 입은 채 포도주와 샌드위치를 즐기는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사람들의 만면엔 미소가 가득했다. 이날 점심은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물론, 관광객·현장 인부 등 700여 명이 한꺼번에 모여 즐겼다. 겔로에 사장은 “수확철이 되면 하루 평균 와이너리 방문객만 700여 명”이라며 “수확이 끝나면 나는 2주 동안 파리·뉴욕·도쿄(東京)·서울·방콕 등지의 VIP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행사가 끝난 저녁엔 무통 로쉴드 저택에서 만찬이 벌어졌다. 만찬엔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독일·네덜란드·스웨덴 등지에서 온 무통 로쉴드의 고객 50여 명이 참석했다. 만찬에는 보르도 명물인 송로버섯 요리가 전채 요리로 등장했고, 7시간 동안 쪄서 냄새를 없앴다는 양고기가 메인 요리로 나왔다. 메인에 맞는 와인으로는 1988년산 무통 로쉴드가 등장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겔로에 사장이 무통 로쉴드 1988년산에 숨겨진 일화를 전했다. 무통 로쉴드 와인은 해마다 라벨의 그림을 유명한 화가에게 맡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1973년산 라벨은 피카소, 1975년산은 앤디 워홀이 그렸다. 이들이 라벨을 그려 주고 받는 대가는 와인이다. 자신이 그려 준 해의 와인 다섯 상자와 자신이 선택한 해에 생산된 와인 다섯 상자를 받는다. 1988년산 와인을 그린 사람은 키스 하링(Keith Haring). 그는 라벨을 만들고서 한 달 만에 에이즈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 후 1988년산 와인은 맛과 별도로 라벨만으로도 가치가 급상승했다. 최근 프랑스 와인 산업도 화제에 올랐다. 네덜란드에서 왔다는 한 와인 도매상은 “이제 와인업계에서‘메이드 인 프랑스’란 프리미엄은 사라졌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와인도 국가보다는 브랜드로 승부를 걸어야 팔리는 시대”라며 “우리 소비자들은 어떻게 하면 싸면서도 품질이 좋은 와인을 마실지만 생각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독일에서 와인숍 프랜차이즈를 운영하는 세드릭 뒤페레이는 “아직 독일에선 프랑스 와인과 독일 와인이 대세지만 최근 남아공과 칠레산 와인이 조금씩 인기를 끌고 있다”며 “5~10년 후엔 판도가 바뀔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다음날 오전 ‘무통 카데’의 와이너리를 찾았다. 무통 카데는 무통 로쉴드가 생산하고 있는 대중적인 브랜드 와인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프리미엄 와인 중 하나다. 무통 카데의 생산시설은 모두 컴퓨터로 관리되고 있었다. 무통 카데 관계자는 “이곳에선 연간 2,400만 병이 생산되고, 시간당 1만2,000병씩 병입된다”며 “컴퓨터를 통해 블렌딩에 들어가는 와인 양을 1ℓ 이하 단위까지 맞출 수 있다”고 밝혔다. 와이너리 한 켠에는 연구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에서 연구원들은 하루 종일 포도에 담긴 타닌이나 당도, 그리고 코르크 마개 등을 연구한다. 오후엔 2005년산 무통 로쉴드 와인의 테이스팅이 이뤄졌다. 무통 로쉴드는 포도가 발효된 후에도 18개월 동안 오크통에서 숙성을 거친다. 따라서 오크통 속에서 완전히 숙성되지 않은 2005년산을 임의로 꺼내 테이스팅했다. 현재 보르도 2005년산은 전 세계적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대부분의 와인 전문가들은 90년대 이후 최고라는 2000년산보다 더 뛰어난 와인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전문가들의 극찬에 와인을 선점하려는 투자자들이 몰려들며 와인의 선물 가격도 수직상승한 상태다. 시음회에 등장한 와인은 ‘숙성되지 않은 포도 주스가 아닐까’라는 예상을 깨고 빼어난 맛을 보여줬다. 올해 초 프랑스 소펙(농식품 진흥공사)사가 주최한 한국 소믈리에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한 전현모 소믈리에는 “2005년산임에도 놀랍도록 안정되고 균형된 맛을 나타낸다”며 “현지 전문가들이 극찬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고 말했다.

“이탈리아는 2006년산이 최고” 프랑스 보르도로 가기 전 들른 곳은 이탈리아 토스카나. 르네상스의 발상지이자 토스카나 주도인 피렌체를 빠져나가면 차장 밖은 어느새 포도밭 물결이다. 구릉과 구릉이 연결되는 토스카나의 지형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원 풍경으로 손꼽힌다. 피렌체에서 남동쪽으로 구릉 사이를 헤쳐 가다 보면 유명한 와인 산지 키안티 클라시코가 등장한다. 이곳에서 700년간 26대째 와인 생산을 이어오고 있는 회사 안티노리의 티냐넬로 와이너리를 찾았다. 티냐넬로는 기존 토스카나의 와인 양조 방식과 배합 품종을 획기적으로 바꾸며 이탈리아 와인의 고급화를 이끈 주인공이다.

▶ 1. 티냐넬로 포도밭
2. 700년 된 안티노리의 와인 저장고

9월 30일 새벽 6시 티냐넬로가 생산되는 포도밭을 한 바퀴 돌았다.‘공기를 밟듯이 산책하라’는 토스카나 도보 여행의 원칙을 따르며 사뿐사뿐 포도밭을 밟아 나갔다. 자욱한 안개 사이에 펼쳐진 포도밭엔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 외엔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포도밭 중 일부는 완전히 땅이 개간된 채 새로운 포도 나무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부 포도밭엔 황토색 토양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 하얀색 자갈들이 깔려 있었다. 포도밭에서 자갈은 한낮의 열기를 머금고, 한밤에 열을 내뿜으며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특급 와이너리들의 토양에는 유난히 자갈이 많다. 안티노리의 필리포 풀리시 수출담당 매니저은 “티냐넬로 생산량이 늘면서 포도밭 개간 공사가 한창”이라며 “하얀 자갈은 포도밭을 개간할 때 그 지하에 묻혀 있는 바위들을 캐서 깬 것들”이라고 말했다. 인위적인 대리석을 까는 것보다 훨씬 자연 친화적이란 판단 때문이다. 그는 “올해 포도 농사는 상당히 괜찮은 편”이라며 “사상 최고였다는 97년까진 아니더라도 2001년과는 필적할 정도”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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