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4월 서울 중구 명동에서 처음으로 ‘아가방’이라는 점포가 문을 열었다. 그때만 해도 천기저귀가 대세였고, 아기 옷은 재래시장에서 사는 게 일상이었다. 하지만 아가방 창업자인 김욱 회장은 머지않아 아기 옷을 세심히 고르는 주부들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기와 관련된 모든 것을 원스톱(one-stop) 쇼핑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면 엄마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적중했다. 1970년대 들어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정부 정책이 효과를 내고 가계 소득도 지속적으로 높아졌다. 당연히 아기에 대한 투자가 늘었다. 김욱 회장의 예상대로 국내 최초로 탄생한 아기용품 전문 브랜드인 아가방은 80~90년대 꾸준히 성장했다. 하나나 둘뿐인 아이를 예쁘게 잘 키우겠다는 엄마들이 아가방을 ‘열심히’ 찾은 것이다. 확고한 브랜드 파워(2005년 자체조사에서 아가방 브랜드의 인지도는 99.7%를 기록했다고 회사 측은 밝혔다)와 선발 업체의 이점 덕에 아가방은 탄탄대로를 걸었다. 하지만 출산율 저하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고 가팔랐다. 2000년 대비 2005년 신생아 수는 3분의 2로 감소했다. 2000년 63만여 명이던 신생아 수가 2005년에는 43만 명으로 줄었다. 구본균 아가방 사장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출산율 저하 속도가 빨랐다”고 말했다. 갑자기 시장 규모가 줄어든 셈이다. 여기에 라이선스 브랜드들이 늘고 후발업체도 빠르게 치고 올라왔다. 고급 고객은 수입품 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가방은 창사 이래 처음으로 구조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우선 재고가 늘었다. ‘손님’은 줄었는데 사업을 확장하다 보니 생긴 결과다. 경쟁 업체도 많이 생겼다. 2002년도에는 재고자산이 246억원까지 올라갔다. 9개였던 브랜드 중 상당수가 적자에 허덕였다.
|
그 결과 2004년에는 당기순손실 1억9000만원을 기록했다. 매출도 2002년 1700억원에서 2004년에는 1400억원까지 줄었다. 늘어난 재고를 처리하기 위해 할인을 하다 보니 브랜드 가치가 떨어져 다시 재고가 늘어나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결과적으로 외형과 내실이 모두 나빠지는 상황이었다.
재고 줄이고 유통경로 재정비 구 사장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방법으로 우선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이런 상황에서 매출 드라이브로 회사를 몰고 나가다간 죽음을 자초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고자산을 줄였다. 가장 먼저 손댄 것이 물류창고였다. 서울·송탄·신갈로 분산돼 있던 물류센터를 신갈로 통합했다. 종이나 전화 대신 인터넷 주문제도를 시행했다. 이를 통해 일일 출고 시스템을 확대했다. 주문과 출고 기간이 길어지면 재고량이 늘어난다. 반면 당일 주문, 당일 출고 하면 공장과 판매점 사이에 떠다니는 재고를 줄일 수 있다. 부피가 큰 제품은 아예 공장에서 매장으로 직배송했다. 시스템을 고치자 재고량이 확 줄었다. 소비자와의 거리도 좁힐 수 있었다.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이 무엇인지 더 빨리 알 수 있게 됐다. 자연히 제품력이 좋아졌다. 이미 발생한 재고는 원가 이하 판매와 기증 등을 통해 해결했다. 그것도 안 되는 것은 태워 없앴다. 이런 노력 끝에 지난해 재고자산은 130억원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3년 만에 재고가 거의 반으로 줄었다. 내친김에 아가방은 올해부터 20억원 가량을 통합전산망에 투자했다. 소비자에게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다. 이를 통해 생산부터 유통, 판매까지 일괄 제품 관리와 정보 파악이 가능해졌다. 판매 시점의 정보를 생산 부문에서도 공유할 수 있게 됐다.
아가방은 성인복과 달리 계절마다 신제품을 내놓는다. 시즌별로도 200여 종류의 옷을 생산한다. 구 사장은 “성인복에 비해 5~6배는 많은 종류의 상품을 내놓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물류나 생산기획, 제품 생산이 복잡하고 다양하다. 옷뿐 아니라 용품 등을 합치면 컴퓨터에 올라와 있는 상품 가짓수가 1만 가지 정도 된다. 이렇게 제품이 많다 보니 막상 생산해 놓고도 어떤 제품, 어떤 색이 잘 팔리는지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통합물류시스템이 구축되면 매장에서 많이 팔리는 옷의 종류와 색상 등을 바로 생산 현장에 전달할 수 있게 된다. 구 사장은 “통합전산망이 완성되는 내년께면 아가방은 완전히 다른 회사가 된다”고 자신했다. 최근 2년 사이에 수익이 안 나는 브랜드의 구조조정도 있었다. 프랜차이즈 브랜드인 ‘맘스맘’과 아동복 브랜드인 ‘오즈’는 아예 브랜드를 접었다. 맘스맘은 수익보다 부실이 많았고, 오즈는 유아복이라는 핵심 역량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티니베이’는 유통경로를 오프라인 매장에서 온라인으로 돌렸다. 어차피 온라인이나 홈쇼핑용 브랜드가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다른 브랜드의 유통경로도 재정비했다. 백화점은 ‘에뜨와’와 ‘엘르뿌뽕’, 할인점 등 중가시장은 ‘디어베이비’와 ‘베이직엘르’, 인터넷과 홈쇼핑은 ‘티니베이’와 ‘지미트’가 각각 맡고 있다. 대표 브랜드인 아가방은 백화점에서 할인점까지 전체 유통망을 다 커버하고 있다. 유통경로별로 브랜드 전략을 정비하면서 각 브랜드들도 살아나고 있다. 전문디자이너와 공동으로 론칭한 에뜨와의 경우 아가방을 대신해 최고급 시장에서 자리를 굳히고 있다. 구 사장은 “매출액에서 우리가 1위는 아니지만 정상판매율 등 질적인 면에서는 우리가 최정상이라고 자부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지난해 홈쇼핑을 통해 재출시한 브랜드인 지미트와 티니베이는 판매율이 90%에 육박할 정도로 인기가 좋다. 이처럼 수익이 안 나는 브랜드는 없애고, 브랜드별로 각각의 타깃 고객을 재정비하면서 회사는 활기를 되찾고 있다. 구 사장은 “연말이면 모든 브랜드가 흑자를 달성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재고를 줄이고, 물류와 전산시스템을 개선하는 등의 체질개선과 브랜드 재정비로 아가방은 출산율 저하라는 구조적 문제를 극복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시장이 줄어드는 와중에도 변화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구 사장은 “지난 3~4년간은 우리에게도 힘든 시기였다”며 “내실강화와 체질개선 등 우리가 추진한 방향이 옳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3분기까지 영업이익 109억 내수와 달리 수출시장에서 아가방은 견실한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아가방은 일찍부터 해외에 눈을 돌렸다. 구 사장과 김욱 회장(창업자) 모두 대우실업 출신의 수출맨들이기 때문이다. 미국 수출은 20여 년 전부터 시작됐다.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제조업자생산설계(ODM)는 물론 자체 상표로도 수출한다. 할인점인 코스트코에는 아가방 브랜드로 들어가고, 최근 월마트에는 유기농 소재를 이용해 ODM방식으로 수출하고 있다. 특히 유기농 소재는 이익률이 높아 수익성 개선에도 큰 몫을 하고 있다. 중동 시장에도 수출하고 있다. 올해 물량은 700만 달러 정도. 내년에는 1000만 달러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아가방이 만든 국내 최초’의 역사 | · 국내 최초 아기 옷 아기용품 전문점 - 79년도 · 국내 최초 유아복 업계 프랜차이즈 소개 - 79년도 · 육아용품 Q 마크 최초 획득 - 83년 · 유아복 업계 최초 미국에 상표 출원 - 85년 · 유아복 업계 최초 ‘패밀리카드’ 도입 - 87년 · 유아복 업계 최초 해외 법인 설립 - 87년 · 유아복 업계 최초 해외 수출 시작 - 87년 | |
중동에서는 유럽 제품과 함께 고급시장에서 잘 팔리고 있다. 중국에는 90년대 중반 현지 생산공장을 설립했고, 98년부터는 프랜차이즈 사업도 시작했다. 전체 매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30% 정도. 구 사장은 “수출도 내수와 마찬가지로 수익이 나는 것만 한다. 명목상의 수출은 필요 없다”고 밝혔다. 현재 해외생산 비중은 전체 의류 생산량의 30% 정도다. 중국과 베트남이 주력 생산기지다. 분야별로 ‘닦고 조인’ 결과 경영 상황도 좋아지고 있다. 2004년 12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던 아가방은 2005년에 64억원 흑자로 돌아섰다. 올해는 3분기까지 109억원의 영업이익을 달성해 연간 예상치인 106억원을 이미 초과했다. 증권가에서도 아가방의 실적 개선에 ‘매수’ 의견을 내고 있다. 송준덕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는 보고서를 통해 아가방이 3분기 양호한 실적을 달성한 요인으로 이익률이 높은 오가닉 제품(organic product) 수출 증가, 수익성 낮은 점포 정리, 해외 아웃소싱 비율 증가로 원가율이 하락한 점 등을 꼽았다. 송 애널리스트는 최근 정체된 아가방의 매출에 대해 “경쟁업체들이 내수부진으로 할인판매 비중을 높인 것과 반대로 정상판매율을 증가시키고자 노력한 데 따른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가방 개요 | 1979년 창업 2개 해외공장 운영(중국·베트남) 2개 해외지사 운영(미국·중국) 미국·일본·중동·중국 등지에 수출 7개 브랜드 : 에뜨와, 엘르뿌뽕, 아가방, 디어베이비, 베이직엘르, 티니베이, 지미트 종업원 수 : 291명. 대리점 수: 613개 2005년 매출 1535억원, 순이익 43억원 | |
그는 “내년에도 육아휴직 급여 인상, 2008년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등이 전국적으로 시행될 것이고, 지자체별로도 다양한 출산 장려정책을 앞다퉈 도입하고 있다”며 “한·미 FTA 타결시 가장 큰 수혜업종이 섬유업종이 될 것으로 보인다는 점 역시 아가방에 긍정적인 영업 환경을 제공할 전망”이라고 덧붙였다. 온라인이 활성화되고 있는 유통환경에서 100만 명에 달하는 아가방 회원은 큰 무기가 될 수 있다. 이 중 상당수가 온라인 회원에 가입돼 있고, 40만 명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고객관계마케팅(CRM)을 벌이고 있다. 구본천 기획실장은 “온라인 쇼핑몰은 당장 수익을 내기보다 사이버상의 홍보와 고객들과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급하게 수익사업으로 몰아가기보다 오프라인 매장을 보완하면서 고객의 요구와 필요를 확인하는 마케팅 수단으로 사용하겠다는 전략이다. 아가방은 몇 년 사이 다시 태어나고 있다. 구 사장은 “우리 회사의 장래를 5년, 10년 보지 않는다. 50년, 100년을 본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정상판매율을 높이고, 내부 시스템을 혁신하는 등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아가방은 내부에 300억원에 가까운 유보금이 있다. 잠시 주춤했다고 27년간 쌓아온 공력이 무너진 것은 아니다. 구 사장은 인터뷰 내내 “이제 기초체력을 다졌으니 다양한 모색을 하고 있다”고 했다. “신사업을 말하는 거냐?”는 물음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이용해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면 뭐든지 대상”이라며 “꼭 유아복에 한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혹독한 겨울을 겪은 아가방은 이제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