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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중견기업] 중국서 ‘최고가품’으로 승부

[파워중견기업] 중국서 ‘최고가품’으로 승부

“도자기 시장은 점점 양분화되고 있습니다. 고가의 고품질 자기를 생산하는 명품 생산업체와 저가의 대량생산을 위주로 하는 일반자기 생산업체입니다.” 김용주(65) 행남자기 회장은 이 중 전자가 행남자기의 ‘나아갈 길’이라고 한다. “이미 유럽 최정상급 제품 수준의 자기 제조 기술을 갖추고 있고, 현지 생산을 합하면 매출 가운데 50%를 수출에서 올리고 있습니다. 세계 정상의 시장에 도전할 여력이 충분하죠. 현재 일반 자기들은 중국산 저가품들로 인해 가격이 크게 떨어지고 있고 중국과 가격경쟁을 해서는 승산이 없습니다. 우리의 장점인 앞선 기술력을 내세워 고급품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할 겁니다.” 이를 위해 행남자기는 ‘디자이너스 컬렉션’이라는 제품을 준비했다. 일반 생활자기이지만 최정상급 디자이너들이 기획하고 예술적 가치를 더해 결국 ‘자기의 명품’을 만들겠다는 얘기다. 행남자기는 2년여의 심층마케팅 조사를 했다. 현재 최고급 도자기 시장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영국,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등지의 주요 제품에 대한 디자인 경향을 면밀히 검토했다.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는다면 한국 소비자들도 행남자기가 명품이라고 인정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행남자기는 지금 세계적인 디자이너와의 공동작업을 진행 중이다. 세계적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에릭 레비, 사진작가 김중만의 촬영 이미지를 접목시킨 컬렉션을 내놓은 것이다. 이 작품들은 이미 유럽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행남자기는 앞으로도 뛰어난 예술가들과 연계한 작품들을 계속 내놓으며 명품 자기로서의 이미지를 높여갈 계획이다.

9년 만에 만든 커피잔 “저희 제품이 인정받을 수 있던 것은 그동안 쌓아온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올해로 행남자기의 나이는 65세입니다. 헛되이 나이만 먹은 건 결코 아닙니다. 그동안 수많은 ‘최초’를 만들며 한국 자기의 역사를 만들어온 기술력이 있습니다. 또 자기 하면 우리나라 아닙니까? 조상님들께 부끄럽지 않게 세계적 회사로 거듭나겠습니다.” 1942년 설립된 이후 행남자기의 가장 큰 장점은 앞선 기술이었다. 초대 회장인 고 김창훈 회장은 과거 한국에서 기술을 배워갔던 일본 도자기들이 지금 한국보다 기술력이 앞서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당시 시중에서 사용되는 ‘좀 괜찮다’하는 자기는 전부 일제였기 때문이다.


행남자기의 신기록
1942년 설립, 국내 최초 자기 회사 1953년 커피잔 세트 국내 최초 개발 1957년 본차이나 기술 국내 최초 자체 개발 1963년 국내 최초 도자기 홍콩 수출 1974년 스톤웨어 미국 수출 개시
그는 일본 도자기가 한국에서 인정받고 있는 이유를 기술력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의 도기 공장에서 바닥부터 일을 시작했고 수많은 서러움을 겪었다. 마침내 일본 도자기 제조법의 핵심 기술들을 파악한 다음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자기 공장인 행남사를 설립한다. ‘우리 식기는 우리 힘으로 만들자’는 모토로 민족자본을 모았고 고향인 목포에 공장을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런 회사를 당시 일본 정부가 좋게 볼 리 없었다. 일본 통치 아래에서 한국인이 기업을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궁극적으로 한국에 수출하는 일본 업체들 입장에서 보면, 행남은 걸림돌이 될 수도 있어서였다. 그래서 일인들은 사업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일제는 사업허가를 요청하자 인근에 있던 소규모 옹기공장을 핑계로 동일 업종이라며 사업허가를 지연시켰다. 오랜 시간 동안 고생한 끝에 가까스로 사업허가를 취득하자 이번에는 공장 건축이 주변 환경오염의 원인을 제공할 수 있다며 시간을 끌었다. 천신만고 끝에 1942년 목포 외곽 지역에 위치한 공동묘지와 형무소 사이에 공장을 설립하게 됐다. 직원을 뽑을 때 위험한 곳이라며 많은 사람이 일하기를 거부했지만 한국 자기 산업을 일으켜 보자며 차츰차츰 사람들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의욕이 앞섰다. 어깨 너머로 배운 기술, 부족한 자금과 인적자원을 이끌고 기업을 하는 일은 어려웠다. 일반 시중에서 쓰이는 자기는 만들어 낼 수 있었지만 고급품인 커피잔 세트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매일 수십 번 넘게 제조에 실패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적으며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개선해 나갔다. 그리고 회사를 설립한 지 9년 만에 온전한 커피잔 세트를 만들어 냈다. 한국전쟁 와중에서는 피란 가서 연구를 계속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마자 커피잔 세트를 생산해 내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는 전후 복구기간 동안 많은 미국인 및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입국해 있었고 서양문화가 급속도로 진입하던 시기였다. 양식기를 중심으로 한 물건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했던 시기다. 행남의 자기들도 그 수요를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가정용 식기의 수요가 폭발적이었기 때문이다. 차보다는 커피를 마시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데 생활자기를 생산하는 회사는 행남자기 하나뿐이었다. 기업으로 자리를 잡은 행남자기는 이후 해외수출을 염두에 두고 기술 개발을 계속했다. 그리고 우연한 사건으로 행남자기의 본격적인 해외진출이 시작된다.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국내 경기는 최악이었다. 행남자기도 위축된 시장 돌파를 위해 해외시장을 개척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 미국 도자기회사 제프코르(JEPCOR)사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물론 행남자기는 1971년부터 미국의 ‘유나이티드 에어’와 ‘노스웨스트 에어’에 기내 식기를 수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량이었고 또 다른 거래처를 찾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에드워드 쿠퍼 제프코르 사장은 1972년 말 다른 사업 때문에 서울을 방문해 조선호텔에 묵고 있었다. 그때 그는 조선호텔에서 사용되고 있는 자기가 한국제인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세계 어느 호텔에 비해서도 품질이 뒤질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전 세계를 다니며 품질이 좋고 저렴하며 믿을 만한 공급업체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만들든가 아니면 망하든가’ 그는 당장 호텔 지배인을 불러 자기를 생산한 업체에 대해 물었다. 수소문 끝에 찾아온 쿠퍼 사장을 행남자기 사람들이 크게 환영했음은 물론이다. 마침 최신식 설비를 들여오기 위해 기초공사가 진행 중인 행남자기의 공사 현장을 보고서 그는 공장이 완공돼 생산된다면 전량 수입하기로 한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공장이 준공되자마자 행남자기는 국내 최초로 ‘롤러 머신’이라고 하는 최신 자동성형기를 들여와 대량생산의 기틀을 다졌다. 수출 계약으로 이미 판로를 확보해둔 상태였기 때문에 이제 제품을 생산해 납품하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신제품을 개발하는 길은 곧 난관에 부닥쳤다. 고급품에 속하는 스톤웨어 생산에 계속 실패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김용주 행남자기 회장은 당시의 기술적 문제점에 대해 설명했다. “스톤웨어는 깨알 같은 점들이 박혀 있는 자연스러운 외부 질감을 보여주기 위해 산화철이 함유된 유약을 발라 구워내야 했는데, 이 산화철들이 고르게 퍼지지 않고 한쪽으로 몰려 불량품이 쏟아졌습니다. 여기에다가 유약이 한쪽으로 몰리는 ‘부유 현상’까지 겹쳐 결국 생산을 중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게 된 것이지요.” 이미 신용장까지 받아 놓은 상태에서 행남자기는 위기에 봉착했다. 답답했던지 스톤웨어를 수입하기로 했던 미국 회사에서 두 명의 기술자를 파견했다. 하지만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행남자기의 요청으로 일본에서 온 기술자들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제 믿을 곳이라고는 우리 자신밖에 없더군요. 망하든지 만들어 내든지요. 모든 기술자가 밤을 새워가며 일에 매달렸습니다. 무더운 여름밤, 서로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하다가 집에 돌아가 땀에 절은 러닝셔츠를 벗어 쥐어짜면 물이 뚝뚝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실패했는지 모르지만, 결국 해결해냈습니다. 나오는 물건들을 보며 전 직원이 얼싸안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1974년 9월 30일 첫 출하를 시작으로 스톤웨어는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채 1년도 되지 않는 9개월 만에 수출 100만 달러를 돌파했다. 자신감이 생긴 행남자기는 1985년 4월에는 베네수엘라에 도자기 플랜트를 수출했다. 1989년에는 인도네시아에 공장을 설립해 해외 생산기지로 삼았다. 해외 수출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됐다.

자기가 ‘가장 친환경적’ 1990년대 말부터 행남자기는 새로운 도전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저가의 중국 상품이다. 빠르게 기술력을 키운 중국 업체들이 국내외 시장에서 행남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저가 상품의 핵심은 품질이 아니라 가격이다. 어느 정도만 품질이 받쳐주면 소비자들은 저렴한 제품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저가품 시장에서 행남의 점유율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2005년부터 중국 내 판매라인 구축을 위해 기존의 백화점 판매라인을 보유하고 있는 판매망에 접촉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중국 업체들 때문에 한국과 미국의 저가 시장은 잃었지만 ‘중국 고가품 시장’이란 새 시장이 생겼기에 진출한 것이다. 중국에는 본차이나 위주의 고가 제품으로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특히 최근 출시된 명품 브랜드 ‘디자이너스 컬렉션’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2월부터는 중국 내 대형 백화점에 단독매장을 개설, 시장 공략에 더욱 박차를 가할 생각이다. 현재 내수시장은 핵가족화와 저출산, 외식산업의 발달 등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이 때문에 가정 내 도자기 수요가 줄어들고 있다. 최근 혼수품 시장은 과거의 홈세트 및 반상기의 수요가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대신 소품, 단품 위주의 구입이 늘어가고 있다. 김 회장은 이에 대해 “홈세트에 대해서는 전체적인 수량보다는 실속있는 구성으로 전환할 생각이며, 과거에는 생각지 못했던 뚝배기가 포함되는 혼수시장의 변화도 적극 반영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뿐만 아니라 인기있는 무늬의 제품들은 단품 구성을 용이하게 하고, 기호에 맞는 맞춤 구성이 가능하도록 배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그는 최근 환경문제가 심화되는 것을 지적하며 자기야말로 음식을 담는 가장 친환경적인 도구라고 설명한다. 뜨거운 음식을 담았을 때 플라스틱 식기는 인체에 유해한 물질을 배출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는 모든 음식점이 자기 그릇만 사용하도록 법으로 규정해 놓기도 했다. 이 때문에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한국에서, 자기 사용이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그는 보고 있다. “저희 회사 노조는 1962년 설립됐지요.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번의 분규도 없습니다. 어려움을 함께 이겨냈고, 또 오랜 시간이 지나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들이 일하는 가족적인 회사가 됐기 때문입니다. 도자기는 흙과 불의 예술입니다. 정직하고 깨끗한 마음이 부족하면 나올 수 없지요. 모두 마음을 합쳐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전통을 계속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믿을 곳이라고는 우리 자신밖에 없더군요. 망하든지 만들어 내든지요. 모든 기술자가 밤을 새워가며 일에 매달렸습니다. 무더운 여름밤, 서로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하다가 집에 돌아가 땀에 절은 러닝셔츠를 벗어 쥐어짜면 물이 뚝뚝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실패했는지 모르지만, 결국 해결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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