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은‘악의 축’에서 빠졌나
미국 부시 행정부 내의 강경파 대거 퇴진하며 외교협상으로 방향 전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집권 2기 들어 내린 결단 중 6자회담 합의 수용만큼 외교의 냉혹한 현실에 차츰 적응해 간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없다. 동시에 부시가 ‘불량 국가’의 정권교체에 열의가 식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북핵 폐기와 중유 제공을 연계한 이번 합의는 부시 자신이 지목한 ‘악의 축’ 의 구성원인 김정일 북한 지도자가 더 오래 권좌에 머물게 해줄지도 모를 거래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 합의로 세계가 더욱 안전해지겠지만 말이다. 지난주 발표된 6자회담 합의문은 북한 문제만이 아니라 다른 국제관계에서도 부시 행정부의 노선이 크게 달라졌음을 시사한다. 특히 ‘핵 협박’에 단호히 대응한다는 부시 행정부의 기본 원칙이 이번 합의로 완전히 뒤집혔다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 변화의 조짐이다. 합의에 따라 북한은 긴급히 필요한 중유 5만t을 즉시 제공받고 향후 거의 100만t을 더 받게 된다. 빌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의 ‘핵 협박’에 말려들었다고 비난하던 부시가 스스로 그 수순을 밟은 셈이다. 이번 합의 전까지만 해도 부시 행정부는 비밀무기 계획 같은 ‘나쁜 행동’을 보상하는 정책을 단호히 거부했다. 김정일 같은 독재자에게 핵포기의 대가로 ‘선물’을 제공하는 일은 상상도 못했다. “기존 정책을 어느 정도 번복한 감이 있다”고 1기 부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담당 국장을 지낸 마이클 그린이 지적했다. 정책의 변화를 예고하는 또 다른 조짐은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지난주 기자회견에서 한 답변에서 드러난다. 라이스 장관은 최근 사임한 존 볼턴 유엔 주재 미국대사의 발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 받았다. 볼턴은 CNN방송에 “이번 합의가 핵 확산을 꾀하는 세계 지도자들에게 완전히 잘못된 메시지를 보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래 버티면서 미 국무부 협상자들을 지치게 만들면 결국 보상을 얻어낸다’는 메시지다. ” 그러면서 볼턴은 부시 대통령에게 이번 합의의 거부를 촉구했다. 라이스는 “볼턴의 비판이 근거가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전혀 없다”고 잘라말했다. 한때 딕 체니 부통령을 위시한 매파의 총애를 받던 볼턴이 이젠 권력 핵심에서 너무 멀어져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번 합의의 세부 내용까지 속속들이 안다. ” 부시 행정부의 전직 고위 관리들은 이번 합의가 두 가지 큰 변화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본다. 하나는 매파 핵심의 여러 인사가 행정부를 떠났고, 체니를 비롯해 남아 있는 강경파의 영향력도 약해졌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부시가 지금 이라크, 이란, 중동 문제에 정신이 팔려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가려 했던 방향과는 정반대”라고 부시 행정부에서 핵 비확산 문제를 담당했던 한 전직 고위 관리가 말했다. 이제 와서 왜 노선을 변경했을까? 두 가지 이유가 가능하다. 우선 부시는 중동 정책의 완전한 실패로 다른 곳에서 업적을 남기려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게다가 북한 포용 정책에 반대했던 매파 중 볼턴, 밥 조셉 전 국무부 군축차관 등이 행정부를 떠났고, 남아 있는 강경 보수파도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다. 예컨대 체니 부통령은 위증 혐의로 기소된 스쿠터 리비 전 부통령 비서실장의 재판에 신경 쓰느라 한눈 팔 사이가 없다. 부시 행정부의 노선 변경을 예고한 또 다른 조짐은 6자회담 합의문 발표 전날 나타났다. 부시 대통령은 공영 케이블 TV C-SPAN의 인터뷰에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과소평가된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다. “따지자면 내 부친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도 그중 하나”라고 부시는 대답했다. “부친은 레이건 대통령의 후임이었다. 레이건이 워낙 카리스마가 강했기 때문에 그 그늘에 가려 부친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 관측통들은 현 대통령 부시가 레이건의 열렬한 옹호자로서 부친의 온건 노선에 반기를 든 대통령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런 사람들에게 부시의 발언은 충격적이었다. 부시 행정부는 지난 6년 동안 외교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을 지극히 꺼려 왔다. 가장 최근에는 부친의 국무장관이었던 제임스 베이커가 이란·시리아와의 협상을 건의했지만 부시는 거부했다. 그러던 부시가 이제 와서 “적과 대화한다”는 부친의 온건 노선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이번 6자회담 합의가 과연 이상적일까? 비판자들은 도처에 함정이 있다고 본다. 특히 북한이 보유를 주장하는 핵무기의 해체 문제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흠이다. 라이스 국무장관은 북한이 1단계 시한인 60일이 지난 이후에도 계속 보상을 받으려면 모든 핵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동합의문은 북한이 모든 핵 프로그램을 숨김없이 공개하고, 포기하고, 해체해야 한다는 사실을 포괄적으로 담았다. ‘모든’이라는 수식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 그 정도의 합의문이라면 북한이 핵실험을 하기 전인 6년 전에도 가능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부시 행정부에서 일한 일부 온건파 전직 관리들도 이번 합의가 다른 ‘불량 국가’들에 우려할 만한 메시지를 전한다는 볼턴의 견해에 동의했다. “북한은 두 가지를 원했다”고 앞서 인용된 전직 핵 비확산 고위 관리가 말했다. “형식적이 아닌 실질적 협상과 금융제재에 관한 별도의 회담이다. 북한이 지난해 10월 9일 핵실험을 하기 전까지 미국은 어떤 협박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게 문제다. 상대에게 나쁜 행동을 더 하도록 허용한 셈이다. ” 이번 합의에 따라 북한의 김정일 정권은 오랫동안 추구해 왔던 정통성을 인정받게 됐다. 라이스 국무장관과 중국·일본·러시아·한국 등 6자회담 당사국 외무장관들은 60일 기한인 1단계 조치가 끝나면 북한 외무상과 처음으로 만날 예정이다. 이 60일 동안 북한은 영변 핵시설을 폐쇄하고 핵 프로그램을 전부 공개해야 한다. 그럼에도 핵 전문가들은 이번 합의가 통제 불가능한 북한이 핵물질과 핵무기를 계속 생산하는 상황보다는 지역적으로나 세계적으로 훨씬 안정된 상황을 가져온다고 본다. 또 이번 합의는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에 비해 두 가지 큰 이점도 있다. 클린턴 행정부 때 타결된 제네바 합의는 북한이 플루토늄 프로그램을 동결하고 “궁극적으로” 해체하는 대가로 매년 50만t의 중유와 수십억 달러어치의 민수용 핵발전 설비를 제공받는다는 내용이었다. NSC 아시아담당 국장을 지낸 마이클 그린은 “이번 합의는 그보다 비용이 적게 든다”고 말했다. 게다가 이례적으로 협조적인 중국과 미국이 양쪽에서 동시에 압박을 가하면서 북한은 어느 때보다 큰 금융·경제적 부담을 느낀다. 그러나 라이스 국무장관도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며 경과를 더 지켜봐야 한다”고 인정했다. 그린은 “북한이 장난칠 여지가 많다”고 말했다. 예컨대 비밀 우라늄 계획의 존재 자체를 부인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로서는 이번 합의가 초유의 일이다. ‘악의 축’을 상대하는 새로운 접근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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