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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ituary] ‘비밀의 입’ 끝내 안 열고 떠나

[Obituary] ‘비밀의 입’ 끝내 안 열고 떠나

▶은행감독원장 시절 재무장관 초청간담회 장면. 왼쪽부터 김준성 은행협회장, 박성상 한은총재, 정인용 재무장관과 고인.

5~6공 시절 ‘금융계의 황제’로 군림했던 이원조 전 국회의원이 2일 새벽 별세했다. 74세. 이씨는 지난달 27일 연희동 자택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뒤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그는 1980년 대통령비서관, 86년 은행감독원장 등을 지내며 10여 년간 금융계를 좌지우지해 금융계의 실질적 재무장관으로 불리기도 했다. 대구 출신인 고인은 경북대 사범대 화학과를 졸업한 후 1956년 제일은행에 입행하면서 뱅커의 길을 걸었다. 은행 간부 시절 윤필용 당시 보안사령관을 포함, 그의 주요 예금주들이 군인 출신이었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절친했고 경북고 32회 동기동창이던 전두환·노태우씨를 통해 하나회의 자금 관리를 맡으며 힘을 키웠다. 제일은행 상무로 있던 80년 전두환씨가 실권을 잡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자문위원으로 발탁됐으며, 이후 대통령 경제비서관에 오르면서 금융계에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나는 재무장관 재목 아니다” 이씨는 경제비서관이 된 지 한 달 만에 석유개발공사 사장으로 승진했고, 1986년에는 은행감독원장이 되는 등 최고 권력층과 계속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승승장구했다. 은행감독원장이 되기 전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재무장관 직을 제안받았다. 그러나 그는 “나는 재무장관 재목이 아니다”며 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재무장관 자리를 마다하는 사람도 있느냐”고 놀라워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같은 말이 세간에 회자되며 “이원조는 자기 분수를 아는 사람”이라는 말이 돌기도 했다. 재무장관 자리 대신 선택한 게 은행감독원장 자리였다. 그는 은행감독원장이 되면서부터 금융계 인사권을 좌지우지했다. 그에게 좋은 점수를 받으면 승진을 보장받는 것이었고, 반대로 그의 눈 밖에 나면 끝장이었다. 그는 힘이 막강했을 뿐 아니라 은행 출신이었으므로 실무에도 환했다. 당시 골치 아픈 현안이었던 부실기업 정리 문제에 있어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당시 정인용 재무장관은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은행 인사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으며 은행장이 임원 인사에 관한 봉투를 가져오면 열어보지도 않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는 막강 권력자였던 이원조 은행감독원장을 의식한 것이었다고 주변에서는 해석했다. 인사건 정책이건 정 재무장관은 독자적인 결정을 가급적 삼갔으며,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이씨의 영향력은 경제계 전반으로 확대됐다. “그는 정말 금융가의 황제였습니다. 취임한 지 얼마 안 된 은행장들도 그의 눈 밖에 나면 가차없이 목이 날아갔습니다. 상업은행 H행장의 경질이 대표적 케이스였습니다. H행장을 이 원장이 갈아치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정 장관도 어쩌질 못했어요. 이 원장이 대통령에게 보고하길, ‘H행장은 영부인을 헐뜯는 사람’이라고 못을 박아 놓았으니 정 장관인들 뭐라고 했겠어요. 이런 종류의 사실들이 하나 둘 확인되면서 금융가는 너도 나도 이 원장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던 겁니다.”(『경제는 당신이 大統領이야』·이장규 저) 그는 5공 권력의 암행어사로 불리기도 했다. 전두환이건 노태우건 간에 핵심 권력자에게 세간의 동정이나 정보를 제공하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민간인 친구’였다는 것이다. ‘금융계의 황제’라는 호칭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본인도 이 호칭을 의식했던지 생전 측근에게 “권력을 폭 넓게 행사한 건 사실이나 나는 한국 금융계의 발전을 위해 권력을 쓴 것이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세인의 평가는 냉정할 수밖에 없었다. 3공 때는 그래도 군인이 금융계에만은 적극적인 개입을 삼가는 분위기였는데 5공 들어서는 군의 영향력이 훨씬 노골화되어갔고 금융계 역시 보신을 위해 이들과의 유착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끌어나갔기 때문이다. 고인이 군사정권의 힘을 등에 업고 ‘관치 금융의 상징’으로 활동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인의 빈소가 차려진 강남구 일원동 삼성의료원에서 조문객들이 애도하고 있다.

5공 초기 정부가 내건 금융산업에 대한 발전 계획은 과거 어느 정권에서도 찾아 보기 힘든 이상적 구도였다. 70년대의 지나친 관치 금융에 대한 반성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또 군부 출신 실력자들은 은행이 뭐 하는 곳인지도 사실 잘 몰랐다. 이런 분위기 속에 군부정권은 형식적으로는 ‘자율화’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금융산업 근대화 작업을 추진해 나가려는 의욕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80년대 중반 무더기 부실기업 정리 과정에서 문제점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정부 보유 주식을 팔아 시중은행들을 민영화시켰다고 해봤자 헛일이었다. 겉으로는 민영화처럼 보였으나 정부는 은행을 더욱 철저히 장악했고, 은행 스스로도 정부의 처분을 기다릴 뿐이었다. 결국 금융 자유화는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경영 자율화의 핵심이랄 수 있는 ‘인사권’은 더 문제였다. 정부는 은행 인사권을 철저히 장악했다. 그 중심에 이씨가 있었다.

최규하 다음으로 입 무거워 그는 은행감독원장으로 있던 당시 퇴임 후를 대비한 전두환의 정치자금 조성에 관여했다. 87년 대선자금 조성에도 깊이 개입했다. 그 공로로 노태우 정권이 출범하면서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권력 무상’을 입증하듯 고인의 말년은 쓸쓸했다. 고인은 김영삼 정권이 출범한 93년에 재차 민자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됐으나, 김영삼 정권이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에 대한 숙정작업에 착수하면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88년부터 93년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으로 수사대상에 오르면서 위기를 맞은 것. 그러나 당시 이씨가 일본으로 출국한 뒤 내사가 흐지부지 종결됐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각종 사건과 연루 의혹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구속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법망을 계속 피해가던 이씨였지만 결국 97년 노태우 대통령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 비자금을 직접 모아 전달한 혐의(뇌물수수방조죄)로 대법원에서 징역 2년6개월의 확정판결을 받고 옥살이를 했다. 2000년 김대중 정부 들어 광복절 특사로 사면됐지만 수감 생활로 인한 건강 악화 탓에 이후에는 별다른 활동 없이 서울 연희동 자택에 칩거하며 노년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강남구 일원동 삼성의료원에 고인의 빈소가 차려진 첫날인 2일, 추적추적 봄비까지 내려 쓸쓸함을 더했다. 영안실에서 만난 고인의 둘째아들 동열(47)씨는 “아버님은 97년 징역을 살고 나온 후 건강이 악화되셨다”며 “자리에서 물러난 후 가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과 연락하는 것 외에 아무 활동을 안 하고 집에만 계셨다. 부친은 화려한 권력을 누리다 갑자기 모든 것을 잃고 구속·수감 등의 충격을 받으면서 극도로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에 고생해 왔다”고 말했다. 이어 동열씨는 “아버지는 가족에겐 한없이 엄하고 정도를 걸으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며 “아버지에 대한 세인의 그릇된 평가를 가족들은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최규하 전 대통령 다음으로 입이 무거운 사람이라는 평도 들었다. 수차례의 구속 수감 때도 아무에게도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혼자 다 감내한 후 결국 입을 열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5~6공 역사의 한 축을 떠안고 조용히 세상을 등진 셈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홍순례씨와 2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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