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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후 상상하며 새 길 걸어”

“20년 후 상상하며 새 길 걸어”

지난달 미국계 제약회사인 한국릴리에 첫 번째 한국인 사장이 부임했다. 지난 1982년 일라이릴리가 한국에 진출한 후 25년 만의 일이다. 홍유석(43) 사장이 주인공이다. 일라이릴리는 일반인들에게 직접 약을 판매하지 않아 이름이 널리 알려진 편은 아니지만 우울증 치료제 ‘푸로작’과 발기부전 치료제 ‘시알리스’로 유명한 세계 10위권 다국적 제약회사다. 연매출이 157억 달러, 임직원이 42,000명에 이른다. 요즘 ‘글로벌’을 내세우지 않는 회사가 몇이나 되겠느냐만 흔히 ‘외국계’ 기업이라 부르는 다국적 기업은 한국인으로서 성공하기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다. 영어도 영어거니와 그야말로 다(多)국적 사람들과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10년, 20년 후를 상상하라 그에겐 두 번의 선택의 기로가 있었다. 홍 사장은 원래 증권맨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증권사관학교’로 통하던 동서증권에 들어갔다. 딱히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30년 뒤 모습을 생각하니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과감히 회사를 그만두고 유학길에 올랐다. 일라이릴리와 인연을 맺은 것은 미국에서였다. “친구따라 강남 가듯 아주 우연한 기회였습니다. 친구가 프레젠테이션하는 자리에 함께 들어갔는데 그때 일라이릴리 관계자를 만났어요. 회사에 들어와 보니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회사가 인재 육성에 쏟는 정성, 진정으로 회사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기존에 증권업계에서 느끼지 못한 보람이었습니다.” 두 번째 선택은 재정 담당에서 경영 업무로 옮긴 일이다. 릴리에 입사한 지 2년이 지났는데 상사가 영업을 해볼 것을 제안해왔다. “리스크가 큰일이었어요. 그러나 10년, 20년 후를 생각하니 책임이 큰 자리로 가려면 다른 업무를 해보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싫어서 피한 것은 끝까지 괴롭히는 법입니다. 저는 안전한 길보다 불확실하지만 가능성이 큰 길을 선택했습니다.”


홍유석 사장은…
1964년 서울생. 한국외국어대 포르투갈어과를 나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MBA)에서 경영학 석사를 땄다. 동서증권(88~90년)을 거쳐 92년부터 일라이릴리에 근무하고 있다. 95년부터 2003년까지 한국에서 일했으며, 최근까지 연간 1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골다공증 치료제 부문 마케팅을 총괄했다.


‘다국적’으로 생각하라 미국에서 외국인 사원들을 데리고 영업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 영어가 익숙해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어려움이 많았다. 홍 사장이 미국에서 영업소장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첫 영업회의를 주재했을 때 회의 시간 중에 두 사람의 영업사원이 농담을 주고받는 것을 보았다. 무슨 농담인지는 알아들었는데, 별다른 생각 없이 넘어갔다. 며칠 후 동석했던 다른 직원을 만났는데, 저에게 ‘지난 회의 중에 두 사람 사이가 아주 틀어진 것 같더라’고 귀띔해주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농담에 뼈가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문화적인 코드가 다른 것을 이해하기란 영어를 좀 한다는 것과는 다른 수준임을 절실히 깨달았다. 본의 아닌 오해를 산 일도 있다. 미국 생활 초반에 ‘참 차가운 사람’이라는 평을 들은 것. 업무 시간에 일 이야기만 한 것이 원인이었다. 보통 회의 시작 전 2~3분은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현지 문화였던 것. 한국 사람들은 업무 후에 의사소통할 기회가 있지만 미국에서는 업무 중간에도 잠깐의 대화로 긴장을 풀어왔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날 마침 저녁 모임이 있었는데, 한국 식당에서 밥 먹고 가라오케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그간의 오해를 싹 날려버렸다. 그 후 “가족은 잘 지내느냐, 애들은 잘 크느냐” 등 이야기를 업무 중에도 자연스레 하게 된 것은 물론이다. 이런 노력의 결과 지난해에는 릴리 내부에서 ‘2006 리더십 어워드’를 받기도 했다.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정말 중요합니다. 말할 기회를 놓친 적이 많아요. 중간에 끼어들기가 쉽지 않아서요. 저는 그래서 회의할 때 먼저 얘기하는 습관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대화나 회의를 주도하면 자연스럽게 의사소통 능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아웃풋은 인풋에 비례한다 홍 사장은 이동 중에는 항상 CD를 듣는다. 요즘 즐겨 듣는 것은 나이팅게일 코넌트의 경영 코칭 오디오 시리즈. “보수가 적다고 생각될 때는 불만부터 갖지 말고 자기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냉정하게 따져볼 것”이란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그도 그렇게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우선 릴리라는 회사 자체가 국적이나 학력, 배경 등 업무 외적인 요소들 때문에 제한된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이제 솔직히 ‘이 회사에서 올라갈 수 있는 자리에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 한계는 ‘능력의 한계’이지 릴리에서 저에게 주고자 하는 ‘기회의 한계’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인 능력을 더 개발해 큰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에서 성공을 이룰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해요.” 외부에선 한국인 최초의 한국지사장이 나왔다는 것에 관심을 보이지만 사실 릴리 내부적으로 보자면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어느 지사에서 어떤 부서에서 시작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한국지사에도 말레이시아인 임원이 있고, 인도 사람이 싱가포르·일본법인 사장으로 재직한 일도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지사의 임상 연구의 출신이 현재 릴리 전체 해외지사의 영업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고, 그의 상사는 필리핀 인사담당 임원으로 시작했다. 물론 어떤 회사에 들어가느냐도 중요하다. 회사에 따라서는 분명 국적이 어디냐, 본사에서 시작했느냐 지점에서 시작했느냐가 문제가 되는 곳도 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자신의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후배를 이끄는 ‘멘토’ 그는 사장으로 부임하면서 인재를 발굴해 키우는 것에 큰 책임을 느꼈다. 그의 잠재력을 보고 영업직과 마케팅직을 추천한 것도 바로 그의 상사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는 한국인만 있을 때에도 일부러 영어를 쓴다. 능력은 뛰어난데 영어 실력이 조금 부족한 직원도 있기 때문이다. 지시사항을 하나하나 전달하기보다는 각자의 역량에 맞는 비전을 제시하려고 한다. 릴리 전체의 목표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살면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습니다. 대학 시절 함께 AFKN 뉴스를 들어보자고 붙들어준 선배도 그렇고, 릴리의 상사들도 그렇습니다. 제 자신도 좋은 멘토가 돼 줄 생각입니다. 또 이것이 릴리의 힘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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