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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욱 기자의 사람 이야기] 자기 의지 충실한‘이과형 인간’

[김정욱 기자의 사람 이야기] 자기 의지 충실한‘이과형 인간’

얼마 전 빌 게이츠(52)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 올 6월 하버드대 중퇴 32년 만에 명예졸업장을 받게 됐다는 뉴스를 접하고 보니 새삼스레 옛일이 떠올랐다. 1994년 12월 나는 중앙일보 IT 담당 기자였다. ‘초짜’였음에도 나는 당시 방한한 빌 게이츠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행운을 누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공항 입국장 안에서의 단독 인터뷰,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대표와의 대담, 호암아트홀에서의 대중 강연, 그리고 이듬해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컴덱스(COMDEX) 행사의 기조연설 등 모두 네 차례에 걸쳐서였다. 그가 김포공항으로 입국하던 94년 12월 5일, 나는 혹시나 인터뷰 기회가 있을까 싶어 공항 내부로 들어갔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그가 입국장 밖으로 이동할 때까지의 5분여. 미리 준비한 예닐곱 개의 질문을 또박또박 외우면서 그를 기다렸다. 놀랍게도 요란을 떤 기자가 나 혼자였듯이, 빌 게이츠 역시 혼자였다. 일반인들과 뒤섞여 경호원이나 회사 직원도 없이, 양손에 가방을 들고, 요트가 큼지막하게 그려진 베이지색 셔츠를 입은 그가 걸어나왔다. 이런 첫 경험 때문인지 그는 지금도 나에게 컴퓨터 천재일 뿐 세계 최고의 부자라는 인상을 주지 못한다. 피곤한 표정이 역력한 그는 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퉁명스러웠다고까진 할 수 없지만 거듭된 질문에도 답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한마디만 해 달라”는 질문에 “이 세상은 흥미진진한 일들로 가득 차 있다”는 답변만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내가 그 질문을 끝으로 ‘고생한’ 빌 게이츠를 놔주었기 때문이다. 짧았지만 나는 그와 대화하면서 당시 ‘한국의 빌 게이츠’로 불리던 이찬진 한글과컴퓨터 사장을 떠올렸다. 관심 영역이 넓지 않고, 사람 앞에 나서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성품이 흡사하다고 느낀 까닭이었다. 기본적으로 외향적이지 않고 사교 범위가 넓지 않으며, 외부 환경보다 자기 내부의 의지에 충실한 인간형, 나는 이런 유형을 ‘이과형(理科型) 인간’이라고 부르는데, 빌 게이츠도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으로 느껴졌다(내가 만난 사람들 중 안철수연구소를 만든 안철수씨, 넥슨의 김정주 사장,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 등이 확실한 ‘이과형’이다. 이들이 모두 IT 업계에서 일하는 것을 우연이랄 수는 없을 것이다). 빌 게이츠는 한국에 온 다음날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중앙일보 주최 강연에서 “6년 이내에 무선PC 시대가 도래하고, 종이보다 싼 CD형 소프트웨어가 각광받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당시에는 믿기 어려웠는데, 지금은 그런 의구심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이듬해 컴덱스 행사장에서 수많은 세계 유수 언론 기자와 함께 지켜본 빌 게이츠는 말 그대로 ‘미래의 전도사’요, ‘청소년들의 꿈’이었다. 94년 방한 당시 빌 게이츠는 김영삼 대통령도 만났는데, 김 대통령이 그에게 “왜 그 좋다는 하버드대학을 중퇴했느냐”고 우스갯소리를 던져 화제가 됐다. 독자들에게 퀴즈를 하나 던지고 싶다. 그의 중퇴 이유를 정확히 알고 계신지. 고등학교 시절 이미 자신이 만든 수업시간 배정 프로그램의 명령어를 조작해 여학생반에 혼자 들어가는 수준이었던 그는 75년 1월 하버드스퀘어 신문가판대에서 한 잡지의 표지를 본다. 당시 그가 진짜 컴퓨터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던 ‘인텔 8080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장착한 토스터 크기의 컴퓨터 사진! 그는 그 길로 하버드 졸업장 대신 PC 혁명의 초기단계 참여라는 일생일대의 선택을 했다. 8080을 위한 소프트웨어 ‘베이식’ 작성과 마이크로소프트의 탄생, 모두 그해의 일이었다. 당시 빌 게이츠의 나이는 스무살, 패기와 도전 그리고 전진이라는 단어가 왜 젊은이에게 어울리는지 나는 그에게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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