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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하고 우아한 신현대주의 건축

평온하고 우아한 신현대주의 건축


복잡한 세부장식을 대폭 줄이고 절제미를 핵심으로 강조 네오모던주의 급부상…너무 단순하고 밋밋한 느낌이 흠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인 칼 라거펠드는 6월 초 베니스 비엔날레에 보기 드문 액세서리를 출품했다. 연한 색깔에 굴곡이 있는 부드러운 모습이어서 사진으로만 보면 멋진 여성용 핸드백인지, 아니면 매력적인 새로운 모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이 액세서리는 실은 독일이 낳은 천재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최근 설계한 놀라운 디자인의 건물 모형이다. 바로 샤넬이 내년에 세계 주요 도시에서 선보일, 이동·해체가 가능한 예술 전시관이다. 하디드는 일찍이 그 누구도 보지 못한 구조물을 또다시 창조했다. 그녀를 세계 최고의 건축가들은 만든 대담하고도 앞을 멀리 내다보는 건축물이다. 그러나 하디드를 비롯해 프랭크 게리, 장 누벨 같은 유명 건축가들이 설계 관련 기사의 머리기사를 장식하는 동안 전 세계 재능 있는 수많은 건축가가 너무도 다른 길을 묵묵히 걷고 있다. 21세기의 유행에 등을 돌린 이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과는 상관없이 건축의 가장 영원하고 본질적 요소인 빛·크기·비율에 초점을 둔 평온한 공간을 창조한다. 멋있거나 수수하기도 하고, 뚜렷한 연고가 없거나 특정 지역에 정확히 뿌리를 둔 공간일 때도 있다. 하지만 공통점은 이들의 건축물이 요란하지 않으며 친근감을 준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건축물이 발하는 우아미(그 진정한 가치에 주목하는 사람은 아직 그리 많지 않다)는 진지한 고객들의 관심을 끈다. 자신만의 독특한 뭔가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기성 건축가가 지은 판에 박힌 집과 사무실·미술관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들은 건축물 자체의 의미를 축소하는, 다시 말해 건물의 실재성보다 공간성의 경험을 중시하는 건축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전위미술 분야의 비평가들은 그 같은 설계자와 그들의 설계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소심하다고 폄하할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론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미묘한 뭔가를 갈구하는 자신의 욕망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과시용이 아닌 독특한 분위기를 원하기 때문에 우릴 찾아 온다”고 뉴욕의 건축가 캘빈 차오는 말했다. “기능적이면서도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공간, 다시 말해 평온한 느낌을 그들은 원한다.” 멋지고 네오모던한 외양이 엄청난 인기다. 스위스 같은 곳에 있는 멋진 소규모 고급 호텔과 수퍼마켓이 좋은 예다. 이런 설계의 최대 강점은 스타일보다는 일종의 ‘에토스(정신)’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뉴욕에서 활동하며 미니멀리즘에 기초해 지은 아름다운 박물관과 갤러리 공간 설계자로 유명한 리처드 글러크먼은 자신은 “새로운 건물보다 필요한 건물을 짓는다”는 원칙을 강조하는 러시아 구성주의파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같은 ‘절제미의 건축’은 오래전부터 유행했지만 갑자기 크게 주목받게 된 이유는 최첨단을 지향하는 현대적 설계와 크게 대조되기 때문이다. 미국 미시간주에 있는 그랜브루크 아카데미의 신임 소장 리드 크롤로프는 “미니멀리즘에 입각해 매혹적인 단순화를 지향하는 건축은 주변 환경이 시끄러울 때 가장 빛을 발한다”며 “그런 건축물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주변의 너무도 많은 요소가 너무도 소란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주류 건축계의 거장들에 조용히 반기를 드는 이들 건축가에게도 나름의 영웅은 있다. 바로 그들보다 나이가 많은 거장 건축가들이다. 이탈리아의 렌조 피아노는 건축물의 깨끗한 선과 결점이 없는 장인정신, 그리고 자연광을 끌어들이는 능력으로 사랑받는다. 포르투갈의 알바로 시자는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건축의 귀재로 밝은 햇빛과 어두운 그림자를 능숙하게 활용한다. 일본의 다니구치 요시오(谷口吉生)는 건축물의 세부적 정교성과 신선한 단순성으로 칭송받는다. 스위스의 건축가 피터 줌소르는 자연 그대로의 형태와 재료의 표현을 지극히 중시하기 때문에 존경받는다. 최근 독일 쾰른 부근의 한 농가 들판 끝에 클라우스 신부를 기리며 지은 놀라운 모습의 예배당이 그 좋은 예다. 이처럼 절제미에 기초한 요즘 건축가들은 그 뿌리가 20세기 초 모더니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줌소르가 그렇듯 최고의 건축가들은 건물을 짓는 곳의 특성을 반영한다. 캐나다 노바스 코샤주의 건축가 브라이언 매케이-리용은 “특정 지역의 기후·문화·경치·건축자재를 이용하는 일이 매우 파격적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세계화가 문화를 획일화하기 때문”이라며 “그 같은 특성은 건축의 진정한 특징의 원천이며 우리에게 골똘히 생각할 과제를 안긴다”고 말했다. 현장의 강력한 표현은 매케이-리용이 추구하는 “순수하게 현대적인” 미학에 두루 나타난다. 그가 설계한 집은 헛간·오두막·선박 등 노바스 코샤 현지의 건축 전통을 중시하며 험한 지형과 바다의 경관을 이용한다. 일례로 ‘힐 하우스’는 훌륭한 전망뿐 아니라 해안에서 부는 거친 폭풍으로부터의 보호를 동시에 고려해 설계됐다. 북대서양 건너편 스칸디나비아 최고의 건축가들도 마찬가지로 기후와 경치를 중시한다. 핀란드의 유명 건축가 알바 알토를 예술적으로 계승한 건축 설계회사 하이키넨-코모넨은 건축 현장의 특징에 따라 보다 단순한 목재나 벽돌뿐 아니라 세련된 건축 자재와 형태를 이용하기로 유명하다. 더블린의 건축가 오도넬과 투메이는 아일랜드의 하우스 언덕에 세운 집의 설계를 안에서부터 밖으로 해나갔다. 따라서 실내 공간도 북쪽의 햇빛과 항구나 섬의 경관을 향하게끔 했다. 바위가 많고 뜨거운 햇빛이 내려 쬐는 스페인 중부에선 헤수스 아파리시오가 현지의 돌들을 콘크리트로 이어 호리존테 성의 거대한 성벽을 지었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건축가 릭 조이는 강철판으로 된 박스 3개를 이용해 ‘사막 유목민 하우스’를 지었다. 각각의 박스는 거친 애리조나 사막에서도 훼손되지 않을 각도로 배치됐다. 극히 미묘하긴 하지만 역사적 환경도 네오모던한 설계에 영향을 미친다. 갤러리 내부를 설계할 때 소재의 특성을 매우 강조하는 글러크먼은 샌디에이고 현대미술관을 증축할 때는 주름 잡히고 탁한 붉은색을 띤 금속판을 건물 앞면에 설치했다. 현지에서 널리 사용되는 스페인식 기왓장을 고려한 결정이다. 그리고 예일대에서 건축가이자 교수로 일하는 뉴욕의 데보라 버크는 네오모던한 건축의 간결성에서 어릴적 다녔던 전형적인 뉴잉글랜드식 교회의 특징을 읽어낸다. “하얗고 드높은 공간은 건축 자재의 질감과 햇빛이 충분히 느껴지게 한다”고 그녀는 말했다. 20세기 최고의 건축가로 추앙받는 루이스 칸은 “건축은 공간을 창조하는 사려 깊은 작업”이라고 말했다. 얼핏 당연한 말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 기본적인 임무를 건축가들이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네오모더니즘을 신봉하는 건축가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짓는 요소는 공간의 창조와 자연광과 인공광의 효율적인 배치다. 건축가 자신이 미니멀리스트라면 특별히 고려해야 할 요소는 별로 없다. 예컨대 사람의 시선을 끌고, 공간 배치가 나쁜 방에서 주의를 딴 곳으로 분산하려는 멋진 장식재나 건축자재도 필요 없다. 따라서 이런 건축이 제대로 구현되면 공간도 조화를 이룬다. 미국 시애틀에서 활동하는 건축가 톰 쿤딕이 설계한 개인별장 ‘더 브레인(The Brain)’은 극적인 느낌을 준다. 네모난 콘크리트 건물이 주는 경직된 느낌을 벽 양쪽의 대형 유리창이 상쇄한다. 아니면 일본 교토에서 활동하는 건축가 기시 와로의 주거용 건물처럼 실내에서 정원까지 공간이 물 흐르듯 잔잔히 흐르기도 한다. 기시는 공간이 미끄러지듯 유려하게 바뀌는 일본 전통 가옥 양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그것도 아니면 마이클 가벨리니의 실내 설계처럼 매력적이고 화려한 공간이 탄생하기도 한다. 가벨리니는 미술 갤러리나 패션매장, 그리고 뉴욕 맨해튼 록펠러 센터의 전망대(Top of Rock) 재단장 작업을 특유의 부드럽고 우아한 느낌이 들게 해냈다. “공간감이 느껴지고 빛과 공간의 매혹적인 상호작용이 일어나도록 공간의 유동성을 강조하는 일”이 목표라고 그는 말했다. 그를 포함한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건축가들은 모두 그런 느낌을 자아낼 비장의 무기가 있다. 자연광이 들어오도록 창문 높이를 세심하게 조정하거나 천장 근처에 작은 창을 내서 시선을 끄는 기술 말이다. “이들은 최고의 경지에 오른 건축가들”이라고 뉴욕건축연맹의 로잘리 제네브로 사무국장은 말했다. “건축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이들은 잔기술을 부리지 않고, 건축의 기본 요소들을 섬세하게 결합한다. 이들의 설계는 투철한 장인정신을 필요로 한다. 세부 장식이 줄어들면 전체적 형태는 간결해지고 규모도 아담해진다. 따라서 시공이 완벽에 가깝게 이뤄져야 한다. 건축자재가 꼭 값비쌀 필요는 없다. 아름다움은 만들기 여하에 달렸기 때문이다. “장인의 기술과 양질의 결과물을 얻으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버크는 말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시간은 돈보다 값지다.” 시(市) 차원의 수려한 건축사업으로 유명한 인디애나주 콜럼버스에 버크가 설계한 한 은행은 평범한 벽돌을 사용했지만 세심한 배열을 통해 건물 모서리를 인위적으로 깎지 않고 자연스럽게 마무리했다. 은행 중앙 홀 바닥은 윤이 나는 콘크리트 소재를 써 수수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천장이 높은 데다 유리로 된 기다란 사각 지붕 덕분에 자연광이 실내로 풍부하게 들어온다. 소박하기 그지없는 지방은행도 놀랄 정도로 멋진 곳으로 변한다. 절제미를 강조한 건축은 변화무쌍한 적응력을 자랑한다. 북극의 눈밭이나 아프리카의 사막에도 전혀 위화감 없이 어울린다. 호화스러운 고급 장식으로 치장해도 좋지만(물론 고상하게) 실용적으로 꾸며 공공건물로 만들기도 한다. 건축가 하이키넨 코모넨이 아프리카 기니에 지은 카헤레 엘리아 양계농업학교가 좋은 예다. 건축상을 수상한 이 학교 건물의 섬세한 정제미는 탁월한 심미안을 가진 소수만이 제대로 감상할지 모른다. 그러나 누구나 볼 수 있고 접근 가능한 건축물이다. 그렇다고 이 새로운 건축양식에 찬사만 주어지지는 않는다. 회의(懷疑)를 드러내는 건축 애호가도 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모더니즘의 부활을 보노라면 ‘시대를 초월한 건축양식이란 뭔가? 혁신이란 무엇인가?’라고 자문하게 된다”고 건축 비평가 아론 베츠키는 말했다. 네덜란드 건축협회장이었던 그는 현재 미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미술관 관장으로 일한다. “물론 절제된 건축양식도 우아미를 풍긴다. 간결하고 기본적인 형태에는 명료성과 직설적인 솔직함이 배어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밋밋한 느낌도 지우기 어렵다.” 정적이고 평온한 ‘절제의 건축’은 해체주의의 거장 프랭크 게리 추종자들의 파격적인 건축물에 지친 우리에게 안식처를 제공하지만 약간 지루해질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결국 다양한 양식의 공존이야말로 다원적 사회를 향한 최선의 희망이 아닐까? 프랭크 게리와 렌조 피아노를 동시에 존경하긴 힘들지만 한 도시가 한 가지 건축양식으로 뒤덮이길 바라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사는 대도시에 속속 들어서는 초고층 빌딩들을 유심히 보라. 꼬이고, 굽이치고, 파괴적인 그 건축물들 사이로 조용하고 평온한 공간에 앉아 왜 인생에 완벽함은 존재하지 않는지, 왜 건축의 정수만을 살린 설계조차 불완전한지 한 번 생각해볼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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