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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함께 사라진 빈 라덴

바람과 함께 사라진 빈 라덴


미군이 6년간 샅샅이 뒤졌지만 오리무중… 첩보위성·정찰기에 특수부대까지 동원하고 거액 현상금 걸었지만 찾아내지 못해 미군은 목표물에 가까이 갔다. 2004~5년의 초겨울이었다. 오사마 빈 라덴 일행은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국경선을 따라 산악지대의 은신처에 숨었다. 몇 ㎞ 아래쪽에서 경계를 서던 보초가 미군 순찰대를 발견했다. 빈 라덴의 은신처로 곧장 다가오는 듯했다. 보초가 무전기로 경고하자 알카에다의 우두머리를 지키던 40명 남짓한 경호원은 ‘셰이크’(추종자들은 빈 라덴을 그렇게 부른다)를 피신시킬 준비에 바빠졌다. 알카에다의 고급 간부인 이집트인 셰이크 사이드가 나중에 전한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경호원들이 극도로 긴장한 나머지 하마터면 빈 라덴을 죽이고 자살하자는 암호를 사용할 뻔했다. 사이드에 따르면 빈 라덴은 절대로 사로잡히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셰이크는 생포될 확률이 99%일 경우 부하들에게 모두 죽음을 택하고 자신도 순교시키라는 말을 해뒀다”고 사이드는 오마르 파루키에게 말했다. 탈레반의 알카에다 연락장교인 파루키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뉴스위크 기자에게 그 이야기를 전했다. 그 암호는 사용되지 않았다. 알카에다 보초가 지켜보는 동안 미군 순찰대는 다른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중에 빈 라덴의 부하들은 미군이 우연히 그들의 은신처 근처를 지나갔다는 결론을 내렸다(미국의 한 전직 정보장교는 이 사건이 정식 보고된 사실을 안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6년 동안 그런 식이었다. 뉴스위크가 인터뷰한 미국 정보 관리들은 빈 라덴 수색작전이 좋은, 또는 “쓸 만한” 정보보다는 우연에 가까운 게임으로 진행돼 왔다고 동의하며 아쉬워했다. 빈 라덴이 2001년 12월 토라보라에서 빠져나간 뒤로 그의 소재에 관한 미국의 정보는 50대 50 이상의 정확성을 보인 적이 없다. “2002년 초 이래 오사마 빈 라덴의 행방을 알려주는 중대한 단서는 없었다”고 CIA의 동남아 전문가로 일하다 최근 은퇴한 브루스 라이델이 말했다. “현재 우리는 외계의 어둠 속에서 총질을 하는 셈이다. 무엇이든 맞힐 확률은 제로다.”어째서 그런가? 그 많은 첩보위성, 정찰기, 특공대, 수백만 달러의 현상금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강대국이 왜 중세시대의 마음가짐으로 살며 중병을 앓을 가능성까지 있는 중년의 광신도 하나를 찾지 못한단 말인가? 때때로 간과되는 그 간단한 해답은 어느 전쟁에서든 적의 동태에 관한 실시간의 좋은 정보는 입수하기가 어렵고, 사람을 추적하는 일은 늘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특히 그 도망자가 동정심을 품은 주민들이 있는 오지로 사라질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FBI가 애틀랜타 올림픽공원 폭발사고의 범인 에릭 루돌프를 노스캐롤라이나의 산속에서 찾아내기까지 무려 5년이 걸린 사실을 상기하라). 말 나온 김에, 미국 정부는 그 일을 필요 이상으로 어렵게 만들었다. 이라크 전쟁으로 수색작전에 동원될 자원이 줄었고, 관료들의 쓸데없는 걱정(텃세 부리기와 모험 기피)은 장애만 됐다. 미국이 파키스탄으로 밀고 들어가면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을 심란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의 몰락을 부를 가능성도 있다. 무샤라프는 현재 적들을 달랬다가 진압작전으로 골리는 등 오락가락한다. 미국의 정보요원과 군인들은 오사마 빈 라덴과, 어쩌면 그보다 더 무서울지도 모르는 그의 오른팔 아이만 알자와히리를 가리켜 HVT(고가치 목표물) 1호, 2호로 부른다. 그동안 진행된 이 두 사람의 수색과정을 되짚어보면 다 잡았다 놓친 기회, 해도 욕 먹고 안 해도 욕 먹는 작전의 선택, 터무니없는 실수가 많아 실망감을 느끼고 때로는 한숨이 나온다. 뉴스위크는 미국,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의 수많은 군·정보 관계자의 증언과 오마르 파루키 같은 소수의 알카에다 동조자들의 입을 통해 그 이야기를 들었다. 빈 라덴의 체포는 “여전히 최우선 현안”이라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대테러 담당 보좌관 프랜시스 프래고스 타운젠드가 말했다. 타운젠드가 지적하듯이 알카에다 지도부가 9·11 이전 아프가니스탄에 가졌던 스타일의 은닉처가 없다는 말은 사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알카에다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대에서 재정비를 해왔고, 더 많은 9·11 테러를 일으킬 각오가 돼 있으며, 어쩌면 그 실행이 임박했는지도 모른다는 점 역시 사실이다. “알카에다가 서구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고 실제로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는 강력한 징후가 있다. 거의 확신한다”고 퇴역 해군 중장 존 레드가 말했다. 그는 현재 소위 테러와의 세계 전쟁에서 미국의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국가테러대항센터(NCTC)의 책임자로 일한다. CIA 대테러센터의 부책임자로서 2001~2년 빈 라덴의 초기 수색작전을 지휘했으며 국무부 대테러 조정관으로 일하다 최근 은퇴한 행크 크럼튼은 “좋지 않다. 테러는 곧 일어난다”고 말했다. 9·11 전의 빈 라덴 수색작전은 마지못해 대충 하는 식이었다. 정치적 암살이라는 지저분한 일에 미국이 말려들거나 미군 병사가 죽는 일을 꺼렸기 때문이다. 9·11이 일어나자 곧 부시 대통령은 “산 채로든 죽은 채로든” 빈 라덴을 잡겠다고 공언했고, 당시 CIA의 대테러 담당 책임자 코퍼 블랙은 부하들에게 빈 라덴의 머리를 “상자”에 담아 오라고 지시했다(실제로 아프가니스탄의 CIA 요원들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상자와 드라이아이스를 요청했다). CIA 요원들은 옛날식 배짱으로 현금 수백만 달러를 들고 헬기를 타고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부족민들을 만나 알카에다와 탈레반을 내쫓는 일에 협조해 달라고 부탁했다. CIA가 민첩하게 움직이자 국방부가 불편해졌다. 밥 우드워드 기자의 저서 ‘전쟁 중인 부시(Bush at War)’에 따르면, 장군들이 파병에 앞서 날씨 문제로 고민하고 복잡한 지원과 구출 문제로 법석을 떨며 선뜻 결정을 못 내리자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화를 냈다. 럼즈펠드의 성화 덕분에 일은 잘 풀렸다. 10월 중순께는 CIA 요원들과 육·해·공 특수부대의 공조가 전례 없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첨단 공중지원을 활용하고, 한 시점에선 럼즈펠드가 희희낙락하며 “21세기 최초의 기병대 돌격’이라고 부른 작전을 실시해 성전 전사 수천 명을 죽이고 잡거나 쫓아버렸다. 탈레반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빈 라덴은 구석으로 몰린 듯했다. 실제로 12월 15일 노획한 성전 전사의 무전기를 엿듣던 CIA 요원들은 빈 라덴이 토라보라 근처의 동굴 속에 갇힌 부하들에게 “용서해 달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 빈 라덴 추적작전은 바로 그날부터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북부동맹과 협조하는 CIA 비밀팀(암호명은 조브레이커) 책임자인 게리 번첸의 회상에 따르면, 미군은 육군 레인저 특공대 800명을 보내 빈 라덴의 도주로를 차단해 달라는 그의 요구를 거절했다. 중부사령부가 파견한 특수작전 사령관 델 데일리 소장은 번첸에게 “일은 잘하지만” 지상군을 투입하면 아프간 동맹들의 심기를 건드릴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번첸이 2005년 출간한 책 ‘조브레이커(Jawbreaker)’에 따르면, 그는 “동맹의 심기를 건드리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고 소리질렀다. “내 관심은 오로지 알카에다를 제거하고 빈 라덴의 머리를 상자에 담아가는 일이다”(현재 국무부 테러대항 부서 책임자로 일하는 데일리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그 일을 거론하고 싶지 않다면서 번첸의 이야기는 “근거가 없다”는 말만 했다). 번첸은 CIA 시절 상관이었던 크럼튼을 찾아갔다. 크럼튼은 고위층을 설득하려고 무진 애를 썼노라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우선 중부사령부 사령관 토미 프랭크스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프랭크스는 병력을 동원하려면 “몇 주”가 걸린다고 대답했다. 거칠고 눈 내린 지형은 너무 험악하며, 빈 라덴을 잡을 가능성이 낮아 굳이 모험할 필요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실망한 크럼튼은 백악관에 가서 작은 회의용 테이블에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국경선 지도를 펼쳤다. 부시 대통령은 파키스탄이 반대쪽에서 알카에다를 몰아내는 일이 가능할지 알고 싶어 했다. “안 됩니다, 각하.” 크럼튼이 대답했다(딕 체니 부통령은 한마디도 안 했다고 크럼튼은 돌이켰다). 그 회의에서는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논평을 거부한 프랭크스는 회고록에서 산속에 병력을 투입했다가는 소련군의 실수를 재현하게 된다는 결론을 럼즈펠드와 함께 내렸다고 적었다. 1980년대 소련군은 산속에 갇힌 채 무자헤딘의 게릴라 공격에 궤멸됐다(그때 CIA가 제공한 스팅어 미사일이 도움이 됐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CIA는 빈 라덴을 체포하려고 부족민들에게 기댔는데 이들은 믿을 만한 존재가 못 됐다. 뉴스위크는 그 작전에 관여했던 세 족장 중 두 명인 하지 자히르와 하지 자만을 인터뷰했다. 그들은 CIA가 제3의 족장 하즈라트 알리에게 너무 의존했다고 주장했다. 또 알리는 빈 라덴이 도망치게 해주는 대가로 알카에다에게서 거금 600만 달러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알리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크럼튼은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구체적 증거는 없다고 인정하면서 뇌물 덕분에 알카에다가 도주에 성공했음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일부 부족민은 어느 쪽이 승자가 될지 모르는 상황인지라 양쪽에서 돈을 받는 양다리 작전을 쓴 듯하다. 빈 라덴은 피난처를 찾기보다 원래의 은신처로 귀환하던 도중 파키스탄 북서부 변경을 따라 험준한 산봉우리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평소 사냥과 말 타고 산을 오르내리기를 즐겼고, 토라보라 근처에 전망 좋은 엉성한 수영장까지 지어놓았다. 빈 라덴은 돈 많은 사우디인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땅바닥 가까이서 사는 방법을 익혔고, 추종자들에게도 상하수도나 에어컨 같은 현대적 편의시설 없이 생존하는 법을 익히도록 했다. 현상금이 2500만 달러나 됐어도 현지의 파슈툰족은 돈을 받고 빈 라덴을 팔아먹는 짓을 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파슈툰왈리라는 명예로운 오랜 전통의 일환으로 손님을 보호하는 엄격한 관습이 있어 알카에다가 덕을 보았다. 파키스탄 중앙정부도 그 사회제도를 깨뜨릴 힘은 없다. 연방정부가 다스리는 그 부족민 지역은 사실상 몇 세기 전부터 통치가 불가능했다. 인도 식민지의 영국 정부도 실패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진정으로 다스릴 생각을 한 적이 없으며 행정을 연방정부가 임명한 부족민 관리들에게 맡기고, 치안은 충성도가 의심스러운 현지 경찰의 손에 맡겼다. 아프가니스탄의 소련 강점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난 1980년대에 부족민 행정기구는 빈 라덴 같은 성전 전사들의 징검다리가 됐다. 사우디 자금으로 청소년을 급진파로 키우는 원리주의 종교학교 마드라스가 수백 개씩 세워지고 파키스탄 정보부는 소련이 후원하는 아프간 정권을 전복시키려고 성전 전사들과 손잡았다. 가서는 안 되는 지역까지 들어가 빈 라덴을 잡으려는 미국의 노력은 처음부터 절뚝거렸다. 이곳은 지형상 현지 지식과 소규모 부대가 필요하지만 미군 장교들은 오래전부터 그 임무에 적합한 특수부대의 투입을 경계해왔다. 정규군의 눈으로 보기에 그처럼 “뱀 잡아 먹는 군인”들은 말썽을 일으키고 규정을 무시하는 성향이 있으며 군기가 빠졌다. 군부는 특수부대를 파견해 산속의 동굴이나 흙벽 집을 쑤시고 다니게 하는 대신 기동력과 화력의 과시가 가능한 좀 더 거창한 전쟁을 치르고 싶어 했다. 국방부의 민간인 지도부와 그들의 환심을 사기에 바쁜 군 고위층에게는 이라크가 훨씬 더 좋은 표적이었다. 미국은 이라크 침공을 통해 이슬람주의자들과 세계인들에게 미국이 가진 힘을 인상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뉴트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이 럼즈펠드의 국방정책위원회에 있었으며, 당시에는 국방장관과 매우 친했다. 2001년 11월 깅그리치는 뉴스위크 기자에게 “뭔가 중요한 일을 해야 할 분위기인데 동굴 폭격은 그 중요한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육군 레인저 부대를 토라보라 산속에 투입하자는 제안을 거부했을 때 프랭크스 장군은 이미 다음 전쟁의 기획 초기단계에 돌입했다. 2002년 초가 되자 빈 라덴의 수색에 도움이 됐을 법한, 공장에서 새로 만드는 프레더터 정찰기들은 이라크용으로 돌려졌다. 미군의 최정예 부대인 델타 특공대는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이라크 침공 준비로 임무가 바뀌었다. 아랍어를 잘하는 병사들이 포함된 제5특수부대는 이라크 파병 준비차 귀국하고 대신 제7특수부대로 바뀌었다. 대부분 중남미 복무 경험이 있는 스페인어를 하는 병사들이었다. 부족민과의 접촉창구를 가진 현지 지식이 풍부한 CIA 요원들은 다른 요원으로 교대됐다. 아랍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지적이었던 CIA 지부장을 대신해 새로 온 사람은 회의를 제 시간(그의 시계는 항상 7분이 빨랐다)에 시작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성격이었으나 아프가니스탄 관련 서적은 한 권밖에 읽지 않았다고 시인했다. 신변 보호 차원에서 익명을 요구한 어느 CIA 요원은 씁쓸한 어조로 새 지부장을 소설 ‘케인호의 반란’에 나오는 퀴그 선장에 비유했다(폴 지밀리아노 CIA 대변인은 “지부장들은 적소에 쓰일 적절한 기능을 갖춘 지도자를 뽑도록 고안된 엄격한 다단계 선발과정을 거친다”고 주장했다). 뱀 잡아먹는 특공대원들의 실망은 애덤 라이스의 회상에 잘 드러난다. 라이스 상사는 2002년 칸다하르 인근의 한 안가(安家)를 중심으로 활동한 특수부대 A팀을 지휘했다. 안가 근처에서 노란 하와이 셔츠를 입고 다니는 그는 머리를 짧게 깎아 오렌지색으로 물들이고 턱수염을 길러 신병훈련소 사열 때 눈에 두드러지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친이 국제개발처 요원으로 일했다) 칸다하르에서 살았고, 특수부대에서 일한 경력이 20년이 넘는다. 2002년 7월 어느 CIA 요원이 라이스에게 물라 오마르(탈레반의 애꾸눈 우두머리)로 보이는 인물을 정찰기로 추적한 결과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샤히코트 계곡에서 발견됐다는 정보를 제공했다. 탈레반 우두머리와 부하들을 헬기로 공격하면 효과가 있겠지만 미군의 신속한 이동이 전제돼야 했다. 라이스는 시간 맞춰 승인 받기가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그와 팀원들이 안가 반경 5㎞ 이내에서 이동할 때마다 ‘5하 원칙’이라는 서류를 제출해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하는지 보고해야 했다. 본부의 승낙이 떨어지는 데 몇 시간이 걸렸고, 총을 쏠 일이라도 생기면 거부되기 일쑤였다. 5㎞를 벗어나려면 ‘CONOP(작전 개념)’이 필요한데, 이것은 절차가 훨씬 복잡하고 현장의 이중 승인이 있어야 했다. 최종적으로는 카불 인근의 바그람 공군기지에 있는 특수작전합동사령부의 결재가 필요하다. 총격전을 벌이려면 3성 장군이 승인해야 한다. “그 과정이 며칠씩 걸리기도 한다”고 라이스는 뉴스위크에 말했다. 그는 종종 부하들이 화장실 변기로 사용하려고 반을 잘라낸 200ℓ짜리 드럼통에 앉아 보고서를 타이핑했다. “이질에 걸려 ×을 싸대는 몸으로도 54도 폭염 속에서 타이핑을 했다. 그런데 칸다하르나 바그람의 수뇌부는 편안하게 앉아 철자가 틀렸느니, 보고서의 줄이 비뚤어졌느니 어쩌니 잔소리를 해댔다.” 어쨌든 라이스는 그 요청을 했다. 아무 대답 없이 날짜가 흘렀다. 기회는 사라졌다. 실제로 물라 오마르였든 아니든 목표물은 다른 데로 이동했다. 라이스는 직업군인들의 복지부동이 문제라고 말했다. 진급하려면 복무기록이 깨끗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수, 불운, “소동”은 허용되지 않는다. 9·11 이후 그런 소극적 태도가 바뀌었다가 이내 옛날로 되돌아갔다. 첨단 통신이 결정을 빠르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가 된다. 세계적인 위성통신 덕분에 기지나 워싱턴에 있는 사령관들이 사소한 결정조차 뒤집는 경우가 있다.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에 임하는 미국인 동맹에게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2002년 영국의 한 고위관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는 미국이 나를 버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미국은 늘 친구를 버린다.” 신분 공개를 거부한 이 관리에 따르면 무샤라프는 그 예로 1970년대의 베트남 철수, 1980년대의 레바논 철수, 1990년대의 소말리아 철수를 들었다. 그래도 그는 이내 미군이 파키스탄 영내에서 꽤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배려했다. 프레더터의 공격시 사전 승인을 거치지 않아도 되도록 했고, 미군이 승인 없이 파키스탄 영내로 5㎞ 이상 들어와 추적을 계속하도록 허용했다(한 미군 장교는 씁쓰레한 미소를 지으며 전사들이 국경선 너머 안전한 곳에 들어왔다고 생각해 걸음을 멈추는 장면을 프레더터의 비디오로 본 적이 있다고 돌이켰다. 그때 미군 특수부대 헬기 한 대가 떠서 기관총을 난사했다). 무샤라프는 파키스탄이 형식적인 비난성명을 발표하겠지만 고가치 목표물을 공격한 행위를 이해한다고 미군 측에 말했다. 파키스탄 지도자와 직접 면담한 미국 관리에 따르면 그는 단 하나, 빈 라덴을 생포해 파키스탄 법정에 세우는 일은 없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양국의 협조는 제법 눈에 두드러진 성과로 이어졌다. CIA와 FBI는 파키스탄 경찰과의 협력 덕분에 2003년 3월 1일 아프간 국경 근처의 도시인 퀘타의 한 민가에서 알카에다의 작전 책임자이자 9·11 사태의 기획자인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를 잡는 데 성공했다. 알카에다의 통신 전문가인 모하메드 나임 누르 칸은 2004년 카라치에서 체포됐다(그러나 지난주 파키스탄 정부가 정식 기소도 하지 않은 채 석방해 미국 관리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의 뒤를 이어 작전 책임자가 된 아부 파라즈 알립비는 2005년 5월 체포됐다. 전사들과 접촉하려고 산에서 내려온 알카에다 간부들은 노출 위험을 무릅썼다. 특히 별 생각 없이 추적이 가능한 휴대전화를 사용한 자들이 그랬다. 그러나 산악지대는 사실상 여전히 침투가 불가능한 상태다. 알카에다가 2003년 두 차례나 무샤라프를 암살하려고 기도하자 파키스탄 대통령은 전사들을 잡으러 소굴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다. 장군들은 빈 라덴을 “망치”(아프가니스탄 밖에서 활동하는 미군)와 “모루”(파키스탄 군대) 사이에 가뒀다고 큰소리쳤다. 파키스탄군 전차와 무장헬기들이 북서쪽으로 진격했다. 주기적으로 승리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지상전투 상황은 나쁘게 돌아갔다. 파키스탄군은 펀자브 평원에서 인도군을 상대로 싸우는 훈련을 받았다. 게릴라전 준비는 한 적이 없으며,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좀 더 폭넓게는 부족민 지역의 치안 책임을 맡은 준군사조직체인 국경경찰의 충성이 의심스러웠다.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국경 양쪽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한 서구 군 장교는 국경경찰이 종종 전사들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도 미군에게 알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경경찰의 한 병사는 심지어 2006년 5월 파키스탄에서 미군 병사를 총으로 쏴 죽이기까지 했다. 무샤라프가 파키스탄 정보부에 남은 탈레반과 알카에다 동조자들을 숙정했다고 주장해도 틀린 말이 아니겠지만 서구 관리들은 그 옛 요원들의 일부가 지금은 비공식적으로 자신이 옛날에 관리했던 사람을 돕는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라크전은 미국의 블랙홀로 판명되면서 미군 병사와 군수품을 빨아들이고 워싱턴 군 수뇌부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CIA는 2005년 부시 대통령에게 비밀 슬라이드쇼로 빈 라덴 수색작전 현황을 보고했다.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파견된 CIA 요원이 그 정도 인원밖에 안 되느냐며 깜짝 놀랐다. 익명을 요구한 어느 전직 정보관리에 따르면, 대통령은 “그게 다야?” 하고 물었다. CIA는 이미 “인원 증강”에 착수해 현장요원의 수를 배로 늘렸다. 그러나 상당수가 경험 없는 풋내기들이며 “쓸 만한” 정보를 캐내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CIA 본부 직원들은 열심히 사방을 경계했다. CIA가 쓸 만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는 데 짜증이 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특수부대를 비밀작전에 투입해 인적 정보를 수집하는 작전을 추진했다. 역시 신원공개를 꺼려 익명을 요구한 국방부의 고위관리에 따르면, 국방부는 2005년 부시 대통령이 승인한 “처형령”에 따라 전 세계의 알카에다 목표물 350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지도자급, 모집책, 자금책, 심부름꾼이 모두 포함됐다. CIA는 당연히 그 같은 텃밭 침입에 저항했다. 의회 의원과 대사들은 군대의 비밀작전에 관해 아무 정보도 없다고 불평했다. 국방부 관리들은 “아프리카 북동부에서 성과를 거둔 바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파키스탄 국경을 따라 알카에다 지도부를 잡으러 가는 일에 관한 한 미군은 여전히 정보가 형편없고 위험을 기피한다. 그 두 가지 만성 실패가 겹치면서 토라보라 피신 이래 알카에다의 일부 지도자를 죽이거나 체포하기에 어쩌면 가장 좋은 최선의 기회가 날아갔다. 2005년 후반 CIA와 국방부의 특수작전합동사령부는 빈 라덴의 오른팔인 자와히리나 혹은 또 다른 빈 라덴의 고위급 간부가 아프가니스탄 북부 국경을 따라 파키스탄의 한 작은 구역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한다는 “80% 정도 자신할 만한” 정보를 입수했다. 소위 고가치 목표물에 관해 “여태까지 본 최고의 정보 그림이었다”고 작전에 관여했던 한 전직 정보 관리가 말했다. CIA와 특수작전사령부는 제리 브룩하이머가 영화로 만들 만한 공중 특공대 기습을 계획했다. 야음을 틈타 해군 실스 (특수부대)요원 30명 정도를 C130 수송기에 실어 목표물에서 50~60여㎞쯤 떨어진 파키스탄 국경선의 아프간 쪽 공중 지점에 데려갈 생각이었다. 실스 요원들은 비행기에서 뛰어내린 뒤 패러세일(모터가 달린 행글라이더)을 이용해 밤하늘을 날아 산을 넘고 회의장소에 가까운 비밀지점에 내린다. 그 뒤 공격을 개시해 자와히리나 혹은 누가 됐든 현장에 있는 고가치 목표물을 생포하되 피치 못할 경우에만 사살한다. 그 뒤 실스 요원들은 포로들을 이끌고 대기 지점으로 이동한다. 그곳에선 CH53 헬기 두 대가 대기하다가 일행을 실어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온다. CIA 국장 포터 고스와 특수작전합동사령부 사령관 스탠리 매크리스털 당시 소장이 그 계획에 적극 찬성했다. 그러나 럼즈펠드와 그의 정보 보좌관인 스티브 캠본 차관을 포함한 민간인 지도부가 계획을 검토하면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임무가 실패할 경우 무샤라프에게 돌아갈 역풍이나 미군의 위험을 무릅써도 좋을 만큼 정확한 정보인가? 뉴스위크와 인터뷰한 전직 정보 관리들에 따르면, 국방부 관리들은 CIA측에 “정보 신뢰도를 100%로 높일 수는 없는가”라고 물어 말문이 막힌 그들의 눈이 휘둥그래지게 만들었다. 럼즈펠드와 가까운 전직 국방부 관리에 따르면, 국방부의 기획단계에서 흔히 말하는 금언이 실감나는 분위기였다. 정보가 불확실할수록 군대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다. 고위층은 실스 요원들을 철수시키기에 헬기 두 대만으로 충분한지 물었다. 한 대가 격추되거나 기계고장을 일으키면 어쩌나? 1980년의 이란 인질 구출 실패작전이 떠올랐다. 또는 ‘블랙호크 다운’으로 알려진 1993년의 소말리아 사태에서 레인저 부대원들이 갇힌 동료들을 구하려고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모가디슈 시내를 질주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합동사령부는 그 작전의 구출 부분을 보완할 생각으로 육군 레인저팀을 보내 경호를 강화하자고 제안했다. 논의가 계속되면서 레인저팀의 규모는 애초 특공대 규모의 다섯 배인 150명으로 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럼즈펠드는 자꾸 이 작전이 파키스탄 침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샤라프와 상의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통지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믿기 어려운 파키스탄 정보부가 계획을 알카에다에 누설하지 않을까? 럼즈펠드와 가까운 앞서의 그 관리는 장관이 잠재적 위협과 성공했을 경우 성과의 무게를 재는 동안 점점 더 신중해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간이 결정적이었다. C130기들이 국경선 상공을 선회하고 실스 요원들이 낙하 명령을 기다리는 동안 럼즈펠드는 수뇌들과 여전히 협의를 끝내지 못했다. 고스 CIA 국장이 국방부에 찾아와 작전을 개시하자고 간청했다. 럼즈펠드는 막판에 작전을 취소했다. “이 작전이 쉽고 확실성이 있다면 밀어붙였을 것”이라고 럼즈펠드의 그 전직 보좌관은 말했다. “확실성이 없었다.” 미국의 엄청난 기술우위에도 불구하고 이 수색작전에서 확실성이란 고통스러울 정도로 확보하기가 어렵다. 냉전시대에 소련을 상대로 설계된 미국의 첩보위성은 휴대전화나 손에 든 무전기를 감청할 정도로 민감한 안테나가 없다. 그래서 ‘오렌지 기동타격대’로 알려진 특수작전팀이 부족민 지역에 침입해 곳곳의 정상에 도청장비를 설치했다. 이것이 효과를 발휘해 알카에다 요원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소득을 몇 건 올렸다. 그러나 전사들도 사태에 적응했고, 추적자들이 필요한 쓸 만한 정보를 감추려고 암호를 쓴다. 정보요원과 특수작전 장교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나도는 말은 이제 악당들은 모조리 죽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똘똘한 놈들은 살아남았으며 전보다 더 똑똑해졌다. 프레더터가 올린 성과도 있다. 알립비의 후계자인 또 다른 알카에다 작전 책임자 아부 함자 라비아를 2005년 죽인 일도 포함된다(미국이 개입한 사실을 감추려고 파키스탄 정부는 라비아가 폭발물 실험을 하다가 잘못 터져 죽었다는 이야기를 날조했다). 그러나 전사들은 그 정찰기를 피하는 법을 터득했다. 장난감 비행기처럼 시끄러운 프레더터의 비행음이 파키스탄의 시골 산속에서는 이라크의 도시보다 쉽게 들리기 때문이다. 미군이 쏜 폭발물이 빗나가면 심각한 결과가 빚어지기도 한다. 2006년 1월 프레더터가 파키스탄 다마돌라의 한 민가를 향해 헬파이어 미사일을 발사했다. 자와히리가 회의 중이라는 첩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첩보는 또다시 엉터리로 밝혀졌다. 그곳에 자와히리는 없었다. 10여 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었고 생존자들은 분노했다. 2006년이 되자 무샤라프는 지쳤다. 아프가니스탄에 집중됐던 미국의 초점이 흩어졌다. 인명이나 대중 감정의 면에서 치르는 전쟁의 대가가 컸다. 성전 전사들이 도시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파키스탄 대통령은 손해를 차단하기로 결심했다. 2006년 9월 그의 지방 주지사가 부족 전사들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알카에다는 서슴없이 존재를 과시했다. 전사들은 와지리스탄에서 “범죄인들”을 거리로 끌고 다니면서 대담한 행진을 벌였다. 미국의 위성사진에는 곧 파키스탄 국경을 건너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는 외국인 전사들의 일렬종대 행군이 포착됐다. 일부는 신발이 눈에 젖지 않도록 비닐백으로 감싼 모습이었다. “폭탄 기술자”로 알려졌으며 이라크에서 단련된 베테랑인 한 알제리인은 전사들에게 급조폭발물 제조법을 가르쳤다. 현지 전사들은 암살과 협박을 동원해 통치했다. 뉴스위크가 인터뷰한, 경험 있는 서구 군 장교는 전사들이 현지 경찰에게 수박을 팔았다는 이유로 한 영세 상인과 온 가족을 죽였다고 말했다. “오사마를 배신하는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할지 상상해 보라”고 그는 말했다. 2006년 말과 2007년 초 딕 체니 부통령과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을 비롯해 걱정이 된 미국 정책입안자들은 파키스탄에 가서 무샤라프 대통령을 만나 전선의 군사작전을 재개하라고 설득했다. “평화조약이 파키스탄을 실망시키고 우리를 실망시켰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백악관의 대테러 담당 책임자 타운젠드가 말했다. 파키스탄 대통령은 전사들을 진압하든 안 하든 다 같이 인기 없고 불안한 정권의 명운을 걸어야 하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시지푸스는 또다시 바위를 밀며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무샤라프는 이미 8만 명이 파병된 국경 지역에 2만 명을 증파했다. 그러나 “파키스탄 군대가 진심으로 알카에다와 싸우려는 생각은 없다고 본다”고 정통한 파키스탄 군부 소식통이 뉴스위크에 전했다. “마음으로 임하지 않는 듯하다.” 일방적 행동을 주문하는 미국 정치인들의 거친 언사는 도움이 안 된다고 파키스탄의 퇴역 장성 탈라트 마수드가 말했다. 그는 명망 있는 온건파다. “민간인이나 군부나 모두 굴욕적으로 생각한다”고 그는 말했다(주미 파키스탄 대사인 마무드 알리 두라니는 파키스탄이 알카에다 공격에 미국보다 더 적극적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훨씬 더 큰 위협을 받는다”). 미군 특수작전부대는 이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들을 추적하는 경험을 꽤 쌓았다. 바그람에 있는 합동사령부 본부에는 첨단 감청장비와 추적장비가 가득해 마치 “영화 ‘스타워즈’를 연상케 한다”고 그곳을 보고 온 한 국방부 관리가 말했다. 캘리포니아 몬터레이에 있는 해군 대학원의 특수작전 전문가 존 아킬라는 최근 몇 달 새 미군의 살상비율이 100 대 1(미군 사망자 한 명당 게릴라 사망자 100명)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군은 공습 유도로 민간인도 많이 죽이며 그것이 더 많은 전사를 양성한다. 역시 해군 대학원에서 일하는 토머스 존슨에 따르면, 군이 계속 사망자 집계와 살상비율에 집착하는 짓은 쓸데없으며 비생산적이기도 하다. “한 사람을 죽이면 번식효과를 낳는다. 남은 남자 친척들이 싸움에 가담하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먼저 알카에다 지도부의 행방을 알지도 모르는 현지 부족민들의 마음을 사야지 그러지 않는 한 그들을 찾기 어렵다. 아프간 전문가인 존슨은 지난 2월 파키스탄 국경 인근의 살레르노 전진기지에서 사령관들에게 파슈툰왈리의 부족 관습을 설명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중 기지를 떠나는 사람은 약 5%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미군이 정보전쟁에서 고전하는 이유를 그 무엇보다 잘 설명해주는 통계라고 그는 믿는다.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한 대다수 미군 병사가 “정지” “출발” “손 들어” 따위의 간단한 현지어도 할 줄 모른다고 그는 말했다. 미군은 문화적 실수를 연발한다. 가택을 수색할 때 동원하는 군견 부대가 일례다(무슬림 문화에서 개는 불결한 존재다). 한편 탈레반은 시골 주민들의 신뢰와 신임을 얻으려고 애쓰거나 혹은 위협한다. “그들은 마을에 들어가 ‘미군은 시계가 있지만 우리는 시간이 있다. 우리가 일주일 뒤나 1년 뒤에 돌아오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확실히 돌아온다’고 이야기한다”고 존슨이 말했다. 미군이 “병력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는 점은 이해가 가지만 사실상 그러려면 장갑차나 막사 뒤에 머물러야 한다는 소리다. 칸다하르 인근의 안가에 처박힌 A팀의 라이스 상사는 바그람 기지의 고위층에서 메모를 받았을 때 짜증이 절정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병사들에게 총격전을 벌이지 말고 CONOPS에 “사망”이나 “파괴” 따위의 단어를 절대 쓰지 말라는 지시였다. 라이스의 병사들 사이에서 그 메모는 “축 늘어진 고추 메모”로 불린다(국방부는 라이스의 회고에 특별한 언급을 거절했다). 미군은 늘 딜레마에 갇힌다. 냉전시대 초기에 CIA를 운영한 옛 세대는 전투에서 숨은 적을 상대로 생존 싸움을 벌일 때는 학창시절 배운 공정한 놀이의 규칙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공산주의자가 치사하게 나오면 우리도 그래야지, 그러지 않으면 자유가 무너진다는 논리였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그 논리는 결국 실패한 멍청한 여러 암살 음모와, 워터게이트 사건 때 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CIA에 수모를 안기고 사기를 떨어뜨린 갖가지 흉계를 낳았다. 9·11 이후 부시 정부 관리들, 특히 체니 부통령은 알카에다와의 전면전을 다짐했다. 그러나 비밀 교도소에서 벌어진 고문 혐의의 여파로 특히 헌법의 권리를 남용한 데 분노한 행정부 변호사들 사이에서 강력한 반작용이 일어났다. 알 만한 소식통에 따르면, 럼즈펠드의 정보담당 차관 스티브 캠본은 미군 특수부대의 행위를 놓고 국방부 선임 변호사 윌리엄 헤인스와 격한 설전을 벌였다. 일부 정부 변호사와 의원들의 생각에 그 특수부대는 너무 작기는커녕 너무 많은 방종의 권한을 부여 받았다. 수뇌부의 실망은 이해할 만하다. 빈 라덴 수색작전에는 일종의 다급한 속성이 있다. 일부 전문가는 그가 항상 이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한곳에 처박혀 전자장비를 일절 사용하지 않아 감지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2004년의 위기일발 이후 “셰이크”는 경호원 수를 줄이고 오로지 충직한 아랍인만 쓴다고 오마르 파루키가 말했다. 아프간-파키스탄 국경 양쪽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한 서구 군 간부는 빈 라덴이 같은 “특징”을 지닌 소규모 경호원 집단을 국경선을 따라 배치했을지 모른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소규모 인원이 현지 주민들과 대화를 거의 하지 않으면서 비밀리에 늘 이동한다는 특징이다. 역(逆)정보 작전으로는 아주 그만이라고 그 간부는 말했다. 인근 주민들은 빈 라덴이 근처에 있음이 틀림없다고 수군대기 시작한다. “빈 라덴이 틀림없다는 말이 나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면 우리가 작전을 개시한다. 그들은 우리를 떼어내고 잘못된 단서를 따라 자산을 낭비하게 만든다. 돈도 안 들고 하기도 쉽다.” 정보원들이 빈 라덴의 행방에 관한 힌트라도 모을 능력이 되는 사람에게 손을 뻗는 현상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2001년 11월 초 네브래스카 대학의 지리학자 존 슈로더는 정보 관리들 앞에서 그해 10월 공개된 비디오에서 빈 라덴의 뒤에 나온 바위의 형성 과정을 분석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정보요원들에게 빈 라덴이 아프가니스탄 스핀가르 산맥의 서쪽에 있는 듯하다고 말하는 게 전부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고 당시 CIA 빈 라덴 담당부서 책임자의 특별보좌관이었던 마이클 슈어가 말했다. “우리는 지질학자들을 불렀다. 독일인들에게 조류학자도 부르게 했다. 비디오에서 어떤 새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기에 그 새가 동남아의 특정 지역에 사는 새인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CIA는 의사들도 불러 당시 빈 라덴이 앓는다는 소문이 난 신장 질환의 징후를 찾았다. 분석가들이 “수척한 테이프”라 이름 붙인 2001년 12월 27일 비디오에는 핼쑥한 얼굴의 빈 라덴이 나온다. 왼쪽 팔을 못 움직이는 듯하다. “그러나 의사들은 그의 건강 문제를 찍어내지 못했다”고 슈어는 말했다. CIA 분석가들은 빈 라덴을 “엘비스”로 부르기 시작했다.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다는 소문이 나돌지만 실은 아무 데도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죽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2004년 말 이후로 비디오를 발표하지 않았고, 녹음 테이프로 육성을 들려준 지도 1년이 넘었다. 질병으로 몸을 못 움직이는 상태가 됐을 가능성이 있다. 신장병 소문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빈 라덴이 신장암 말기에 쓰는 약을 찾았다는 소문도 있다. 그러나 “그가 죽었다고 생각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고 타운젠드가 말했다. 그는 대통령에게 올라가는 모든 정보를 본다. “그가 죽었는데도 우리가 그와 관련된 어떤 정보나 첩보를 입수하지 못하는 상황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가 살았다면 가능한 한 많은 미국인을 죽이려 들 것이 틀림없다. “셰이크의 바람은 서구의 궁전들에 또 한 방을 먹이는 일”이라고 알카에다의 이집트인 지도자 셰이크 사이드가 말했다. 2003년 빈 라덴은 심지어 사우디의 급진파 성직자에게서 “미국인 1000만 명 정도”는 핵무기나 생물 무기로 죽여도 좋다는 종교적 재가를 받았다고 슈어는 지적했다. 미국은 여전히 그의 원수다. 뉴스위크는 6년 동안 빈 라덴의 개인 경호원으로 일한 나세르 알바리를 인터뷰했다. 현재 예멘에서 매우 허술한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는 그는 여전히 “셰이크”를 존경했다. 알바리에 따르면 빈 라덴은 성전주의 시인이 쓴 긴 시의 일부분인 다음과 같은 엉터리 구절을 혼자 읊조리고는 했다. 나는 미국의 적이라네 생명이 다하고 종말이 오는 날까지. 그것이 파괴의 뿌리이고 가지라네, 그것이 나뭇가지에 걸린 악이라네. “그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미국 이야기뿐”이라고 알바리는 말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미국을 싫어했던 모양이다. 이유는 모르겠다. 펩시조차 마시지 않는다.” 빈 라덴의 2인자인 자와히리도 미국을 향한 악감정이 그 못지않다. 여러 정황에 따르면 9·11 사태가 일어나기 전 빈 라덴에게 테러의 야망을 “가까운 적”(사우디아라비아·요르단·이집트의 부패 정권)에서 “먼 적”(미국)으로 돌리게 만든 사람이 바로 교육 수준이 높은 그 이집트 의사다. 서구세계에는 빈 라덴보다 자와히리가 더 위협적일지도 모른다. 빈 라덴은 네트워크에서 사라지면서 더 이상 작전을 지휘할 입장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그의 체포는 실제 소득보다 상징적 의미가 더 크다. 한편 자와히리의 존재가 두드러진다. “그는 지난 2년 동안 30개 이상의 메시지를 발표했다”고 성전 전사들의 웹사이트를 감시하는 사이트 연구소의 창립자이자 소장인 리타 카츠가 말했다. 그는 파키스탄군이 붉은 사원을 무력 진압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자와히리의 반응이 인터넷에 올라왔다고 말했다. “그는 뉴스를 접하고 쟁점에 신속 대응할 목적으로 도시나 그 인근에 살지 않나 생각한다”고 카츠가 말했다. “2005년에는 배경으로 바람에 날리는 싸구려 옷감이 보이는 비디오들이 나왔다. 요즘에는 편집 과정에서 인공 배경을 만드는 등 좀 더 좋은 장비를 사용하는 듯하다.” 조지타운 대학의 테러 연구 전문가 브루스 호프먼은 “알카에다의 의식은 7세기 수준일지 몰라도 통신 안목은 21세기 수준”이라고 말했다. “알카에다는 세계적 브랜드가 됐으며 그런 인지도를 달성하는 데는 비디오가 원동력이었다.” 이제 포괄적인 의문은 알카에다가 또다시 미국에 9·11식의, 또는 그보다 더 심한 “엄청난” 공격을 감행할 능력이 있느냐의 여부다. 알카에다 지도부가 산속으로 쫓겨간 2001년에는 많은 간부 요원이 살해되거나 체포돼 성전운동이 현지 지망생들에 의해 유지됐다. 이들은 인도네시아와 영국 등지에서 폭탄을 터뜨려 지하철과 디스코텍을 폭파했다. 그러나 기술수준이 낮았고, 지난 6월 런던에서 두 대의 자동차폭탄을 터뜨리는 데 실패한 뒤 글래스고 공항에서 자살폭탄을 터뜨리려다가 실패한 두 얼간이처럼 멍청한 사람도 일부 있었다(한 명은 결국 화상으로 숨졌다. 그러나 그들의 자동차에 불이 붙었지만 폭발하지는 않았을 때 다친 민간인은 한 명도 없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 2001년 “알카에다 핵심 요원은 3000명 정도였다”고 해군 대학원의 아킬라가 말했다. “약 1000명을 죽이거나 생포했다. 약 1000명 이상은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약 1000명이 와리지스탄에 남았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 있던 큰 테러 대학은 사라졌다. 이들은 그 뒤로 인터넷에 의존한다. 실무 강의를 받지 못했고 훈련소의 결속력도 없다. 그것이 기술 저하를 초래했다. 테러 기술이 정말 형편없이 떨어졌다.” 앞으로의 위험은 이라크전이 장기화할수록 신세대 전사들이 숙달돼 간다는 점이라고 아킬라는 말했다. “그들은 재교육을 받는다. 알카에다 1세대는 아프간 훈련소에서 배출했다. 2세대는 이슬람주의 웹사이트에 접속하는 사람들이다. 차세대는 이라크라는 도가니를 겪은 사람이 된다. 결국 그들의 기술 수준이 1세대를 능가할 성싶다.” 미군이 알카에다 훈련소를 점령했을 때 화생방 무기를 논의하는 과학 자료가 발견됐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심란해진다(자와히리가 화생 무기에 각별한 관심이 있다고 한다). 진정한 대량살상무기는 획득하기가 매우 어렵다. 전사들이 핵무기나 또는 몇 사람 이상을 죽일 능력이 되는 세균무기를 만들거나, 훔치거나, 혹은 구입하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래식 폭발물과 병원 폐기물에서 발견되는 방사능 물질을 섞어 만드는 일명 ‘더러운 폭탄’(저급 핵무기)은 제조가 그처럼 어렵지 않다. 크럼튼은 자와히리가 2003년 뉴욕 지하철에서 청산가리 폭탄을 터뜨리려던 계획을 취소한 일이 있다고 돌이켰다. “그 이유는 모른다”고 크럼튼은 말했다. 알카에다가 그 테러를 저지르려고 뽑았으나 미국에 보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는 팀이 어떻게 됐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든다. 왜 취소했을까? 그들은 어디 있을까?” 유럽과 미국의 정보 관리들은 알카에다가 중대한 방식으로 서구에 타격을 가할 준비를 한다는 조짐들 때문에 불안한 여름을 보냈다. 국가테러대항센터의 레드 제독은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자세한 내용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로 판단하건대 테러 감시인들이 뭔가 보고 들은 게 있어 경계 수위를 높인 사실은 분명했다. 공격 대상이 유럽인가? 미국인가? 이 질문에 레드는 “그들은 서쪽으로 오고 싶어 한다. 가능한 한 서쪽 끝까지”라고만 말했다. 정보기관들은 테러리스트들의 이동에 관한 구체적 정보가 없다고 그가 말했다. “우리가 가진 정보라고는 매우 전술적인 면을 보여주는 두어 개의 실마리다. 이것저것 그 단편들이 보일 뿐이다. 그 이상은 말하기 곤란하다.” 한편 빈 라덴 수색작전은 계속된다. 최근에는 한 바퀴 빙 돌아 도로 원점으로 왔다. 토라보라 지역으로 말이다. 올여름 점점 구별하기가 힘들어지는 탈레반과 알카에다 전사 약 500명이 그 지역에 침투했다. 8월 초 급조폭발물에 의해 미군 특수부대 병사 세 명이 희생된 뒤 미군은 공중공격의 지원을 받으며 빈 라덴의 옛 근거지를 대대적으로 수색했다. 지난주 뉴스위크 기자는 안내원을 대동하고 전투현장을 방문하러 산에 올라갔다. 산을 오르던 도중 미군 험비와 아프간 정규군의 포드 레인저 픽업들로 이뤄진 작은 행렬을 추월했다. 산길에는 2001년 폭격으로 사망한 이름 없는 아랍인 무덤 수십 개 외에 폭발물 파편, 녹슨 총알, 부서진 장비 쪼가리 등이 보였다. 일부는 꽤 오래돼 보였다. 사방에 전단지가 날아다녔다. 미군이 테러범들을 숨겨주는 사람을 찾아내겠다고 현지인들에게 경고하는 내용이다. 전단지에는 하얀 눈동자를 번뜩이는 사악하게 생긴 복면인들의 조잡한 그림이 있었다. 한 눈에는 빨간 원 안에 오사마라는 글자가 적히고 대각선 사선을 그어 놓았다. 뉴스위크 기자와 안내원은 일련의 불에 탄 소련제 전차들을 지나쳤다. 의기양양한 아랍어 낙서가 적혀 있었다. 러시아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에 반대투쟁을 벌이던 시절의 유물이다. 우리는 마침내 말라와 계곡으로 알려진 골짜기 바로 위에 있는 빈 라덴의 옛 동굴 단지에 도착했다. 널찍한 암붕 위에는 빈 라덴의 옛 수영장이 있었다. 지금은 물이 말랐지만 풍경은 여전히 장관이었다. 셰이크와 그 일행을 보았다는 소문이 있다. 그러나 그저 소문이었다. With RON MOREAU and SAMI YOUSAFZAI on the Afghanistan-Pakistan border; ZAHID HUSSAIN in Islamabad; ROD NORDLAND in Tora Bora; MARK HOSENBALL, MICHAEL HIRSH, MICHAEL ISIKOFF, JOHN BARRY, DAN EPHRON and EVE CONANT in Washington; CHRISTOPHER DICKEY in Paris, and ROYA WOLVERSON in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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