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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이어 총리에 나와야”

“아버지 이어 총리에 나와야”

▶포항제철(포스코 전신)을 방문해 기념휘호를 쓰는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왼쪽)와 이를 지켜보는 박태준 명예회장.

“자네 지금 어디에 있나?” “지금 미국에 와 있습니다.” “그래∼, 그럼 동쪽에 있나, 서쪽에 있나?” “동쪽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어휴, 동쪽이야…그럼 됐네.” 1995년 7월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전 총리가 숨을 거두기 전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박 명예회장이 황급히 머물고 있던 뉴욕에서 일본으로 날아갔지만 때는 늦었다. 이미 후쿠다 전 총리가 숨을 거둔 뒤였다. 후쿠다 전 총리는 마지막 순간, 자신이 아끼던 박 명예회장의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은 죽음을 앞두고 가장 가까웠거나 보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마지막 길이라고 느낀 순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그리운 얼굴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서 있는 위치와 관계 없는 자연의 순리다. 후쿠다 전 총리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임종을 박 명예회장이 지켜줬으면 하는 마음을 간절히 담아 먼 이국 땅으로 전화를 건 것이다. 박 명예회장과 후쿠다가(家)의 인연은 아들인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신임 총리 대까지도 이어졌다. 지난해 9월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아베 신조(安倍晉三) 후보에 맞설 강력한 대항마로 부각됐던 인물이 바로 후쿠다였다. 그러나 후쿠다는 주저했다. 같은 파벌인 까마득한 후배인 아베와 맞서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베가 총리가 되면 일본의 사회 분위기가 오른쪽으로 확 쏠릴 것이란 예상이 일본 정치권에는 가득했다. 이때 박 명예회장이 나서 후쿠다의 부인인 기요코(貴代子·63) 여사를 만났다. 박 명예회장은 “야스오 상을 총리에 나오라고 해야 한다. 그것이 일본을 위한 것이다. 나도 돕겠다”고 독촉했다. 하지만 기요코의 답은 간단했다. “그 사람에게 아무리 하라고 해도 본인이 안 하겠대요. 어쩔 수 없어요.” 이처럼 박 명예회장과 후쿠다 신임총리 집안은 막역하다. 때로는 자문을 하고 조언을 받기도 한다. 후쿠다 총리와 박 명예회장 간에는 와세다대 동문이라는 학연으로도 엮여 있다.

후쿠다·박태준은 와세다 동문 후쿠다 새 총리는 1959년 와세다대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한국 내 인사 중 와세다대를 졸업한 이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65년 상과대 졸업),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이공학부 졸업),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59년 이공학부 졸업) 등이 대표적이다. 와세다대 동문이 우리나라 경제계에서도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현의 일야상사 회장, 신경식 경남진흥 사장, 정평섭 세방그룹 부회장, 김재범 지오문화 대표, 문덕영 아주산업 전무, 정덕원 제일사료 전무, 박경하 한국응용기술 대표 등이 와세다 인맥으로 활동 중이다. 특히 전경련 회장이기도 한 조석래 회장은 와세다 인맥을 통해 한일재계회의 회장으로도 활약 중이고, 2년 전 국내 기업인 중 처음으로 와세다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11월 12일부터는 한일재계회의에 참석차 일본을 방문할 예정이며, 이때 후쿠다 총리와의 회동이 추진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후쿠다 총리의 지한파 인맥은 와세다 인맥 외에는 주로 후쿠다 총리가 속한 파벌인 ‘모리파’ 네트워크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파벌의 수장 격인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총리는 한일의원연맹 일본 측 회장이다. 다방면에 걸쳐 한국 인사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는 모리 전 총리가 후쿠다 총리에게 가교 역할을 해주고 있다. 모리 전 총리가 올 초 신임 주일 한국대사로 취임한 유명환 대사를 위해 지난 4월 환영파티를 열었을 때도 후쿠다 총리를 불러 인사말을 하도록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소 낯을 가린다고 할까 사람을 가려 사귀는 후쿠다 총리의 스타일상 한국의 젊은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과의 교분의 폭이 그다지 넓지 않은 편이다. 그렇다면 한국과의 경제협력 등 후쿠다의 경제정책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 후쿠다 총리의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와의 경제협력 관계에 대한 비전은 그의 정치 스타일과 흡사하다. 상대방에 부담을 주는 것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그가 궁극적인 지향점으로 삼고 있는 것은 동아시아를 하나로 묶는 동아시아 공동체의 실현이다. 그러나 그걸 위해 너무 속도를 낼 경우 여러 분야에서 부작용이 크기 때문에 지금은 그 지향점을 위한 준비작업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 ‘일본 주도의 동아시아 공동체 구축’이나 ‘일본 주도의 아시아 단일통화 실현’ 같은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모두가 하나 돼 공감대를 얻어야만 그런 목표들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소위 버블의 시기였는데, 미국에 있는 빌딩들을 사들이고 ‘앞으로 10년 있으면 미국의 GDP를 따라잡는다’고 말했던 시대가 있었죠. 하지만 그건 환상이었고 지금은 2 대 1 정도로 차이가 벌어졌어요. 이런 상황에서 국제적인 통화를 갖겠다고 일본이 목청을 높일 수 있는 상황인지가 일단 의문이죠. 그걸 위해선 일본이 더 확실히 뻗어나갈 수 있는 나라라는 신뢰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심어줄 수 있어야 해요. 그리고 그걸 국제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모리파’ 네트워크 통해 인맥구축 즉 아시아 통화라고 해도 그건 하나의 신용이기 때문에 일본만 외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이 한국, 중국 등 이웃 나라들을 포함한 동남아 국가와 더불어 정치·외교적인 문제를 모두 잘 해결해 나가야만 그런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아시아 국가들과의 자유무역협정(FTA)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FTA나 경제연대협정(EPA) 등을 통해 동아시아가 일단 자유무역권이 되어야만 비로소 경제공동체의 기운도 조성될 수 있다는 것이 후쿠다 총리의 생각이다. 때문에 일본 경제산업성은 “아시아를 축으로 한 EPA를 추진하는 데 큰 동력이 생겼다”며 크게 반기는 분위기다. 선친인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가 총리 재임 때인 지난 77년 아시아 국가들과의 상호신뢰 구축을 위해 ‘후쿠다 독트린’을 발표한 것도 아들인 후쿠다 총리의 아시아 경제통합체 구상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일본 정부에서는 일단 현재 진행 중인 아세안과의 EPA 협상이 빠른 속도로 타결될 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런 흐름과 맞물려 2004년 11월 이후 중단 상태인 한국과 일본의 FTA 협상에도 변화의 조짐이 예상된다. 일본 정부 관계자는 “한국의 새 대통령이 12월에 결정되는 만큼 후쿠다 총리로서는 내년 2월의 한국 대통령 취임식에 맞춰 정상회담을 열고 조속한 협상 재개 합의에 나설 것”이라고 예상했다. 아마리 아키라(甘利明) 경제산업상에게도 같은 방침을 제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양국 간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농산물 문제에 대해서도 후쿠다 총리는 상당한 연구를 거듭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작년 4월 자민당 내의 농업정책에 정통한 의원들과 ‘신·농업재생 스터디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에서 후쿠다 총리는 “일본의 농업은 이대로 가면 FTA를 맺을 때마다 쪼그라들고 말 것”이라는 입장을 강조했다고 한다. 다만 농업개방을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라 “일단 일본 내 농지개혁이 시급하다”는 주장이다. 일본 내의 농업개혁을 먼저 이뤄낸 다음 농산물 개방으로 가는 수순을 택할 것이라는 것이 주변 인사들의 예상이다. 농지개혁은 당장 올가을부터 돌입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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