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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물들만 남은 쓰레기 매립장”

“퇴물들만 남은 쓰레기 매립장”

국내 주식시장의 막내 격인 프리보드(Freeboard)가 각종 규제로 시름하고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시장을 찾는 고객(상장기업 및 투자자)은 줄어들고, 곳간(시가총액 및 거래대금)도 거의 거덜난 상태다. 사실상 벤처 및 중소기업의 자금줄이라는 본래의 시장 기능을 잃은 지 오래다.
한국 증시가 우여곡절을 겪으며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한쪽에선 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놓인 주식시장이 있다. 바로 2005년 7월 제3시장에서 새롭게 출범한 프리보드다. 올 들어 거래소는 39%(10월 19일 기준), 코스닥은 30%가량 지수가 올랐지만 프리보드는 오히려 20%나 하락하는 부진을 보이고 있다. 한국 증시의 막내인 프리보드가 큰형(거래소)과 작은형(코스닥)의 그늘에 가려 점점 애물단지로 변해 가고 있는 것이다. 프리보드의 실상은 그야말로 참담하다. 제도권 주식시장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다. 프리보드의 10월 24일 현재 지정기업(일종의 상장기업) 수는 출범 직후보다 7개 줄어든 55개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12개사는 거래소 및 코스닥 시장에서 퇴출된 기업이다. 이 때문에 증시에서는 프리보드를 ‘퇴물들의 안식처’ 또는 ‘쓰레기 매립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프리보드는 2000년 제3시장이란 이름으로 시작했을 때만 해도 성장 가능성이 엿보이던 시장이었다. 출범 당시 지정기업 132개, 시가총액은 1조300억원에 달했다. 최전성기였던 2002년에는 지정기업 184개, 시가총액은 1조5000억원에 육박했다. 하지만 이후 정부의 제도적 외면과 기업들의 시장 이탈로 프리보드는 구멍가게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대장주인 한일합섬도 ‘철수’
시장이 쪼그라들면서 비상장 벤처 및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 공급 기능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프리보드의 시가총액 및 일평균 거래대금과 거래량은 각각 7833억원, 1억5400만원, 14만1000주로 거래소는 물론 코스닥시장의 웬만한 대형주 한 종목보다 못하다. 이뿐만 아니라 제이스톡 등 사설 장외주식 거래 사이트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현재 10여 개의 사설 장외주식 거래 사이트를 통해 거래되는 종목은 360여 개에 달하며, 시가총액은 80조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증권사 한 IPO 담당자는 “현재 프리보드의 시장 규모로는 자금 공급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며 “비상장 기업들의 주요 주주나 투자꾼들의 돈놀이 장터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에는 프리보드의 대장주인 한일합섬이 자진 탈퇴를 선언해 시장폐쇄 위기감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동양그룹 계열인 한일합섬은 2003년 코스피시장에서 상장 폐지된 후 프리보드 시장에서 거래돼 왔다. 한일합섬은 프리보드 시장 시가총액 1위 기업이다. 10월 24일 현재 한일합섬의 시가총액은 2211억원으로 전체 프리보드 시가총액에서 29%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한일합섬이 빠져나갈 경우 프리보드의 시장 규모는 현재의 4분의 3 수준으로 줄어드는 셈이다. 프리보드가 구멍가게 수준으로 전락한 이유는 뭘까. “제도적으로 시장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증시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즉 각종 규제에 발목이 묶여 있기 때문에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프리보드는 정부가 벤처 활성화를 위한 금융 및 세제 지원방안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라며 “하지만 기존 시장(거래소 및 코스닥)에 비해 여러모로 취약한 구조에도 규제는 더 많아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증시 전문가들은 프리보드의 발목을 잡고 있는 대표적 규제로 매매방식과 비용, 세제문제 등 세 가지를 꼽고 있다. 프리보드의 주식 매매방식은 거래소 및 코스닥과는 차이가 있다. 거래소나 코스닥은 여러 사람의 호가 경쟁을 통해 가격을 결정하는 경쟁매매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프리보드는 사는 쪽과 파는 쪽이 일 대 일로 가격을 합의해야 거래가 형성되는 상대매매 방식이다. 매수자와 매도자가 동일한 가격을 제시하지 못하면 거래가 성사되지 못하는 것. 이 때문에 거래소나 코스닥에 비해 매매체결률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프리보드의 일평균 거래량이 적은 것도 이 때문. 정석환 증권업협회 프리보드관리부 팀장은 “상대매매 방식으로 인해 투자자는 상대 호가를 지속적으로 탐색해야 하고 자신의 호가를 매번 수정해야만 한다”며 “프리보드의 거래부진은 거래방식이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매매방식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거래비용도 상대적으로 높다. 거래소나 코스닥에서 주식을 거래할 경우 거래금액의 0.3%를 거래세로 내지만 프리보드에서는 이보다 높은 0.5% 다. 세제혜택도 적다. 프리보드는 벤처기업 소액주주에 한해서만 주식 양도차익에 대한 양도소득세를 면제해 주고 있다. 일반 기업의 소액주주는 양도세(대기업 20%, 중소기업 10%)를 내야 한다. 이에 비해 거래소나 코스닥은 기업에 상관없이 모든 소액주주에 대해 비과세 혜택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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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간 시장 문 닫을 판”
또 프리보드는 1년 이상 장기보유 주식에 대한 배당소득세 감면 혜택도 없다. 거래소나 코스닥은 1년 이상 장기보유 주식에 대해서는 배당소득세를 감면해 주고 있지만, 프리보드의 경우 14%의 세금을 물어야 한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굳이 거래소나 코스닥 대신 프리보드를 이용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한국증권업협회는 이 같은 프리보드의 규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차례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위원회에 제도 개선안을 올렸다. 이달 초에도 ‘프리보드 역할 강화 방안’이라는 개선안을 제출했지만 사실상 ‘불가’라는 답만 들었다고 한다. 지난해 8월에는 신학용 열린우리당 의원 등 14명이 공동으로 프리보드 세제개선과 관련된 개정안을 입법 발의했지만 정부 당국의 반대로 아직까지도 계류 중에 있다. 재경부와 금감위가 프리보드 규제 개선에 소극적인 이유는 크게 투자자 보호와 세수감소 부담, 기존 시장과의 차별화 등 세 가지다. 감독 당국 관계자는 “업계의 지적은 이해하지만 투자자 보호 장치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프리보드에 경쟁매매를 도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며 “거래비용이나 세제혜택과 관련된 문제도 세법 개정 및 세수 부담으로 재경부에서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증시전문가들은 ‘무책임한 발언’이라며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시장도 활성화되기 전에 돈 걷는 문제를 고민하는 것이 말이나 되느냐”며 “정부 당국이 프리보드 시장 활성화 의지가 있기는 한 것인지 의문스럽다”고 꼬집었다. 그는 또 “당장 제도 개선이 힘들다면 대만의 그레타이(GTSM) 시장처럼 벤처기업이 코스닥 상장 전에 프리보드를 거치도록 하는 것도 시장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코스닥 시장과 비슷한 대만의 그레타이 시장은 제너럴 보드(General Board)와 이머징 보드(Emerging Board, 일종의 프리보드)로 나눠 운영되며, 제너럴 보드에 상장하기 전에 반드시 6개월간 이머징 보드를 거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이를 통해 기업은 상장 전에 미리 자본시장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기업가치도 검증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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