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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깊은 경험이 세상 밝게 한다

그 깊은 경험이 세상 밝게 한다

▶강선희씨는 대학시절 전공(이화여대 법대)을 살려 서울지법 민원실 법률도우미로 일하고 있다. 뒤늦게 뛰어든 일이지만 크게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늙기도 서러라커든 짐을 조차 지실까’. ‘60대 70대 노인 분들은 투표장에 가지 마시고 편히 쉬시라’. 앞의 것은 조선조 중기의 문인 송강 정철의 시조(초장 종장)이고, 뒤의 것은 2004년의 총선 때 여당 의장을 혼쭐나게 했던 발언 내용이다. 발상이야 사뭇 다르지만 노인들은 힘든 일 하지 말고 편안하게 쉬라는 취지는 같다. 하지만 지금은 수명이 40세 안팎이었던 정철의 시대도 아니고, 늙었으니까 편히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노인도 거의 없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직 활동할 수 있는 힘이 남아있다면 비록 노년기에 접어들었다 하더라도 누구나 무슨 일이든 하고 싶어 한다. 문제는 대부분의 일자리가 체력이나 정신력 그리고 새로운 지식과 뉴 트렌드를 갖춰야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노년층이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돼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노년층이 가장 선호하는 일이 젊었을 때 축적한 지식과 경험을 최대한 살려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봉사활동이다. 대표적인 예가 서울 서초구 서울지방법원 동관 민원실에서 법원을 찾는 민원인들에게 ‘법률 도우미’로 활동하고 있는 고희의 강선희(70)씨다. 강씨는 법조인을 꿈꾸고 이화여대 법대에 진학했으나 졸업 후 곧바로 결혼해 1남 4녀를 낳아 키우느라 법조인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자식들을 다 키우고 뭔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찾던 그는 62세였던 2000년 3월, 서울지방법원이 민원봉사자를 모집할 때 응모해 합격한 후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당시 53명이 함께 일을 시작했으나 지금은 강씨만 남아있다.
강선희씨의 법률 서비스
그동안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상담사 자격증도 취득한 강씨는 매일 오전 10시에 출근해 오후 4시까지 각급 법원을 찾는 민원인들에게 민원서류 작성에서부터 법률문제 상담에 이르기까지 친절함을 전하고 있다. 어린이들에게 숲 생태 해설을 해 주고 있는 춘천 시니어 클럽의 황명중(74)씨도 젊었을 때 쌓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봉사활동을 펴는 경우다. 황씨는 강원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36년간 교육공무원으로 일하다가 퇴직한 뒤 ‘숲의 고마움을 알리는 일이야말로 자신의 전공을 살리면서 어린 학생들과 대화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겨 숲 생태 해설가로 주저없이 뛰어들었다고 한다. 황씨를 단장으로 한 춘천 숲 생태 해설가 단원은 60세 이상의 노년층만 30명. 황씨는 임학이 전공이지만 그를 비롯한 단원 모두가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소정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400시간의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서울 금천구 독산동 중앙하이츠빌 경로당. 자신들도 보살핌을 받을 나이임에도 같은 연령대 노인들에게 발마사지를 하고 있다.(앞쪽부터 이수일·박옥순·김영순씨)

노년기에 접어들어 특정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지식을 체득한 뒤 봉사활동을 펴는 노년층도 적지 않다. 경주 시니어 클럽에서 신라문화유산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최상학(69)씨가 대표적이다. 4년 전까지만 해도 농사가 생업이었던 최씨는 농사가 힘들어 집에서 쉬면서 노년을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다가 경주 시니어 클럽에서 문화유산 해설사를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라와 경주에 대한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어느 정도 실력을 쌓은 뒤 3개월간의 해설사 과정을 이수하고 활동을 시작한 그는 지금은 경주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꼽히고 있다. 이웃을 돕고 사회에 봉사하겠다는 노년층의 관심은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과 후진국의 소외계층까지 폭넓게 뻗어 있다. 현재 1만 명 정도로 추산되며 점점 늘어나는 추세에 있는 외국인 며느리들을 한국 사회에 어떻게 빨리 적응시키느냐 하는 것도 시급한 문제 가운데 하나다. 이에 착안한 경주 시니어 클럽은 산하에 결혼 이주여성 프로그램을 만들어 ‘할머니’들로 하여금 외국 며느리들을 교육하게 하고 있다. 현재 이 프로그램에 참여해 봉사활동을 펴고 있는 할머니 교사는 20명이나 된다. 경주 지역에만 400명(9월 말 현재)에 달하는 외국인 며느리는 이들에게서 한국어는 물론 육아, 음식 만들기, 전통문화와 예절 등을 배우고 있다.
열정으로 외국에서 자원봉사
세계 각지의 저개발국들을 돕는 외교통상부 산하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봉사단원 모집에 노인층 지원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도 이웃사랑이 이제는 국경조차 초월하고 있다는 증거다. 생활습관이 생소하고 언어가 다른 이역만리 오지에서 가족과 떨어져 2년 임기를 마쳐야 한다는 것이 결코 수월한 일일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와는 여러모로 비교가 되지 않는 후진국에서 그들의 삶과 문화의 수준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땀 흘리는 시니어들의 하루하루는 보람과 성취욕으로 가득 차 있다. 현재 주로 아시아 지역인 방글라데시·네팔·필리핀·스리랑카 등지에서 봉사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60대 이후의 노년층은 100여 명. 전체 봉사자 1450여 명의 10%에 채 못 미치지만 시니어 지원자들의 숫자는 갈수록 늘고 있다는 게 KOICA 측의 설명이다. 노년층이라고 해서 선발에 어떤 혜택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젊은이들과 똑같이 영어, 인성면접, 그리고 전공 분야에 이르기까지 동등하게 시험을 치르고 합격해야 입단이 가능하다. 그래서 시니어 봉사단원의 경력은 대개 화려하다.

▶도봉시니어클럽 커플매니저 2년차인 신춘자(오른쪽)씨. 남녀를 맺어준다는 게 쉽지는 않지만 성사될 때 가장 보람이 크다고 말한다.

노년층의 봉사활동을 통한 사회참여의 자세는 생각보다 훨씬 적극적이었고, 유형 또한 매우 다양했다. 1999년 충북 음성 삼성초등학교에서 40년간의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마감한 오신애(71)씨는 지난해 70세의 나이에 가수로 데뷔해 도내 각지를 돌며 봉사활동을 겸한 위문공연을 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제천체육관에서 열린 노인 일자리 박람회에서 데뷔곡 ‘인생은 70부터야’를 불러 노인들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 갈채를 받기도 했다. 서울 도봉구의 도봉시니어클럽은 일자리를 찾는 노인들의 불같은 욕구에 부응하고자 보건복지부가 2004년부터 시작한 노인들의 일자리 지원사업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다. 이곳에서는 세탁장과 전통병과 만드는 팀 등을 운영해 노인들의 자활을 돕고 있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6070 커플매니저’ 팀이다. 남녀의 짝을 맺어주는 일, 쉽게 말해 ‘중매’가 커플매니저들의 역할이다. 커플매니저 2년차인 신춘자(70)씨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신씨는 이 일을 위해 결혼상담관리사 자격증까지 취득할 만큼 열성적이다. 출범 당시에는 이 일을 해보겠다는 지원자가 별로 없어 애를 먹었지만 지금 도봉시니어클럽에서 커플매니저로 활동하고 있는 60, 70대 노인은 60명에 이른다. 결혼하겠다고 신청한 회원 수도 차츰 늘어 현재 약 700명, 남자가 여자보다 100명쯤 많다.
노년의 일자리 더 늘려야
커플매니저는 특별한 지식과 경험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경로당 같은 곳에서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돕는 노인들이 하는 일은 말 그대로 몸으로 때우는 봉사활동이다. 이른바 ‘노-노(老-老) 케어’다. 서울 금천구 독산동 중앙하이츠빌 경로당에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강영예(71), 윤분연(72), 최옥윤(76)씨 등 세 할머니가 매일 찾아와 15명 안팎의 노인들에게 식사 대접을 하고 있다. 이수일(71)씨, 박옥순(67)·김영순(68) 할머니 등은 배워 익힌 솜씨로 노인들에게 발마사지를 해준다. 무슨 일이든 하고 싶어 하는 노인들은 갈수록 늘어나지만 노인들에게 맡길 수 있는 일자리는 극히 제한돼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하지만 앞에 든 여러 예처럼 열정과 의지만 있다면 전혀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젊었을 때의 경력과 지식, 그리고 현재의 적성을 고려해 일자리를 찾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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