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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스포츠는 아이들의 PC게임이 아니다

e스포츠는 아이들의 PC게임이 아니다


스타크래프트 편중화 벗어나 정식 체육종목으로 등록해야 한국이 종주국 위상 다질 수 있어 현란한 조명이 중앙무대를 비추고 웅장한 스타크래프트 배경음이 귓등을 때린다. 정면에는 150인치 대형 스크린 가득히 맵(게임의 배경공간)이 펼쳐지고, 현장 해설진의 고조된 목소리가 보는 이의 심장을 뛰게 한다. MBC게임 ‘히어로’ 대 SKT ‘T1’의 경기가 열린 지난달 중순 용산 e스포츠 주경기장은 평일 낮 시간대였지만 관객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간간이 “히어로 짱!” “T1 파이팅!” 같은 응원 소리가 터져 나왔다. MBC게임이 2대 1(5전 3선승제)로 승기를 잡았다. 4세트에 접어들자 중앙무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기자실에서는 거친 탄성이 쏟아졌다. “끝났네, 경기 끝났어.” “저건 옛날에 요환이가 쓰던 수법 아냐?” “완전히 당했네.” MBC게임의 염보성 선수가 야구로 치면 도루 같은 기습공격으로 경기 시작 5분 만에 승패를 결정지어 버렸다. 기자들 옆에서 초조하게 경기를 지켜보던 MBC게임의 프런트(운영 총괄직) 이상원 차장은 벌떡 일어나 선수들에게 달려갔다. 경기 직후 만나본 ‘패장’ 주훈 SKT 감독은 굳은 표정이었다. 원래 진 팀의 선수와 감독은 인터뷰나 사진촬영 없이 바로 각자의 키보드와 마우스(말하자면 운동기구)를 챙겨 경기장을 빠져나간다. 그만큼 한 경기 한 경기의 중압감이 ‘장난이 아니다’. 스타크래프트 게임이라고 해서 PC방에서 벌이는 아마추어 대결을 생각하면 안 된다. 90년대 후반부터 젊은 층을 중심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이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은 10년 만에 ‘e스포츠’라는 산업의 근간이 됐다. e스포츠는 게임을 소재로 공정한 경쟁조건과 정신적, 신체적 협응을 통해 이뤄지는 관전형 또는 참여형 스포츠다. 스포츠라고 부를 근거는 무엇인가? 일단 체계를 갖췄다. 올해 4회째를 맞는 프로리그는 SK텔레콤, KTF, 르까프, 대한민국 공군 등 12개 구단이 자웅을 가린다. 신한은행이 3년간 50억원의 후원 계약을 맺었다. 2000년 출범한 한국e스포츠협회(문화관광부 산하 사단법인)에 등록된 프로 게이머만 현재 400여 명이다. 모든 경기는 전문 케이블 채널(온게임넷, MBC게임)과 인터넷 미디어 등 11개 매체에 중계되고 주요 경기의 경우 시청자가 80만 명을 넘는다. ‘황제’ 임요환 등 베테랑 선수들의 팬카페 규모는 이효리 저리 가라다. 주훈 감독은 물었다. “이게 스포츠가 아니면 뭐가 스포츠인가?” e스포츠의 대중화는 한국이기에 가능했다. 90년대 후반 PC방이 대거 들어서면서 다른 나라보다 쉽게 온라인 게임을 즐기게 됐고, 세계적인 실력을 갖춘 ‘고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9년 한국통신 TV 광고에 출연했던 ‘쌈장’ 이기석이 대표적이다. PC방들은 앞 다퉈 고수를 영입해 자체 대회를 열었다. 고수를 관리하는 매니저도 생겼다. e스포츠협회 김철학 사업기획국 과장은 임요환 선수를 키운 매니저 출신이다. “그들의 상품성을 예감했기 때문에 백방으로 후원을 받거나 자비를 털어 대회를 열었다.” 2001년 게임채널 온게임넷이 개국하면서 저변이 크게 확대됐다. 스타크래프트는 이미 해볼 만큼 해 본 사람들이 ‘보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임요환 같은 선구자들이 게임 개발자조차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전략을 선보이며 선수들 간의 경쟁 구도가 형성된 덕분이다. 대학생 이성원(21)씨는 “축구 팬들이 축구 경기를 보듯 나와 친구들은 소파에서 맥주를 마시며 e스포츠 경기를 본다”고 말했다. “차원이 다른 고수들의 경기를 보는 게 재미있다.” 지금은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직접 즐기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지만 관객층은 꾸준히 늘어난다. 부산 광안리에서 매년 두 차례 열리는 프로리그 결승전은 지난 3년간 28만여 명이 관전했다. 한국의 e스포츠 발전 모델은 외국에서도 인정한다. ‘Teamliquid’나 ‘야오위엔(Yao Yuan)’ 같은 외국 웹사이트가 국내 프로리그 소식을 발 빠르게 전하고 중국·미국·프랑스 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국내 선수들에 열광한다. 해설진까지 덩달아 인기다. 국내 방송이 개척한 중계 방식도 벤치마킹 대상이다. “WCG(World Cyber Games) 같은 국제대회에 가 보면 각국 중계진의 카메라 움직임이나 해설 방식이 한국과 거의 흡사하다”고 온게임넷을 홍보하는 한응수씨는 말했다. 많은 업계 관계자와 팬들은 한국이 e스포츠의 종주국으로서 세계화의 거점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 e스포츠협회는 올 1월 중국 중화체육총국과 양해각서(MOU) 체결을 시작으로 e스포츠 국제교류전과 심포지엄 등을 개최했다. 심포지엄에서 결성된 세계e스포츠발전포럼을 통해 공인된 국제기구와 통합리그 창설, 경기 규칙의 표준화 작업도 논의 중이다. 하지만 세계화는 물론이고 국내 e스포츠가 지금의 성장세를 지속하려면 꼭 넘어야 할 산이 있다. 바로 종목 다양화와 정식 체육종목 등록이다. 우선 스타크래프트의 우물을 벗어나야 한다. 사실 국내 스타크래프트의 인기는 유별나다고 할 정도로 외국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들다. 오죽하면 미국 블리자드사가 ‘스타크래프트 2’의 세계 출시 행사를 서울에서 열었겠는가. 워크래프트, 카트라이더, 프리스타일 등 새로운 게임들이 PC방에서 인기를 얻었지만 e스포츠로 확산되지는 못했다. 혹자는 “임요환 같은 선구적인 스타 선수의 부재”를, 혹자는 “경우의 수가 무한한 스타크래프트의 보는 재미”를 원인으로 꼽는다. 문제는 이 현상이 우리나라에 국한된다는 점이다. 그나마 중국이나 동남아는 스타크래프트 인기가 꾸준해 한국 e스포츠의 영향권에 있지만, 미국이나 유럽은 선호하는 게임부터 다르다. 온라인 게임보다 비디오 게임을, 전략 시뮬레이션(RTS)보다 1인칭 사격(FPS) 게임을 선호한다. 주훈 감독은 “게임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은 PC방에서 하는 컴퓨터 게임이 대세지만, 외국의 게임 인구는 주로 집에서 플레이스테이션, X박스 같은 게임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선호 종목이 다를 수밖에 없다.” 국내에서는 당장 스타크래프트 인기가 식으면 e스포츠도 같이 좌초하지 않겠느냐는 불안감이 있다. 전문가부터 일반 팬들까지 지나친 편중화 현상을 걱정한다. 최근 e스포츠의 열기가 예전만 못하다는 일부의 지적도 같은 맥락이다. 온게임넷의 한응수씨는 “주5일 프로리그 경기와 지방자치단체의 자체 대회, 개인리그 등 경기가 워낙 많다 보니 예전만큼 관중이 밀집하지는 못한다”고 밝혔다. 그래서 게임단 관계자들은 일단 스타크래프트 2로의 성공적인 이관을 필수 과제로 꼽는다. 전작의 뒤를 잘 잇는다면 다음 10년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국산 게임을 e스포츠 종목으로 개발해야 한다. 종목 다양화와 종주국으로서 위상 제고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계기다. 최근 문화관광부가 추진하는 국산 게임 글로벌 리그(KGGL)가 그 물꼬를 틀지 모른다. 게임산업팀의 신종필 사무관은 KGGL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국내 e스포츠의 균형 발전과 국산 게임의 해외 진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철학 과장은 국산 게임 중 스페셜 포스, 카트라이더, 프리스타일, 피파온라인 등이 후보의 자격을 갖췄다고 조심스레 평했다. 특정 게임 종목을 선정하고 개발사 선정 입찰을 해야 하는 협회로서는 신중할 수밖에 없다. 현재 스타크래프트 외 10여 개 게임 리그를 방송하는 온게임넷 측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낙관했다. “원래 ‘하는’ 게임을 ‘보는’ 게임으로 만들려면 시간이 걸린다. 아직 방송 편성에서 스타크래프트의 비중이 절대적이지만, 게임사들과 계속 협의하며 종목 다양화에 힘쓰겠다.” 또 하나 넘어야 할 산은 정식 체육종목 등록이다. 이건 마치 성장촉진제 같은 역할을 한다. 체육종목으로 등록되면 우선 케이블 방송권에서 벗어나 지상파 중계가 수월해진다. 또 특기생 제도가 적용돼 학원스포츠가 가능하다. 따라서 재능 있는 선수의 조기 발굴에 도움이 된다. 정부 지원도 더 커진다. 하지만 e스포츠가 신체 활동이 거의 없다는 이유로 기존 체육계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우리보다 늦게 발을 들인 중국은 2004년 e스포츠를 정식 체육종목으로 인정했고 정부의 파격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선수들이 이미 여러 종목에서 세계 수위를 다툰다. 따라서 등록 지연이 우리 선수들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 일례로 지난 10월 국내 e스포츠 동호회가 마카오실내아시아경기대회에 국가대표 참가 신청을 냈지만 대한체육회는 아직 정식 종목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결국 한국 선수단은 에어로빅, 볼링, X스포츠 등 10개 종목만 참가했다. e스포츠협회는 우선 전국 지부를 구성하고 국제경기연맹의 승인을 받아 대한체육회의 심사 요건을 충족할 계획이다. 두뇌 스포츠에 속하는 바둑이 이미 체육종목으로 인정된 선례가 있어 긍정적으로 전망한다. 하지만 대한체육회 측은 아직 정식 논의 전이며, “바둑이나 브릿지 게임과 달리 e스포츠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문광부도 체육보다 문화 콘텐트로 다룬다”며 신중한 자세다. e스포츠협회는 시간이 오래 소요되거나 합의가 어려울 경우 디지털 체육회를 새로 결성해 새로운 차원의 체육종목 등록을 추진할 계획도 밝혔다. 주훈 감독은 e스포츠를 체육종목으로 보지 않는 일부 견해에 “e스포츠의 개념을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잘라 말했다. 서울대 체육교육대학원에서 스포츠심리학을 전공한 주 감독은 모든 게임이 e스포츠가 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전략 시뮬레이션이나 1인칭 사격 게임처럼 단발성 경쟁과 승부로 스포츠의 성격에 부합하는 장르만 자격이 있다. e스포츠가 신체활동이 아니라는 주장에도 반박한다. 스타크래프트 같은 게임은 기습공격을 몰아칠 때 선수의 손가락이 1분에 400번가량 움직여야 할 정도로 고도의 집중력과 체력을 요구한다(프로 게이머의 수명이 잘해야 20대 중후반인 이유다). “가상스포츠까지 등장한 시대에 언제까지 스포츠의 정의를 대근육 운동으로만 제한할 건가?”라고 김철학 과장은 반문했다. 또 흔히들 청소년 게임중독 같은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역할수행게임(RPG)은 e스포츠와는 거리가 있다. 한 경기로 승부가 결정되는 e스포츠와 달리, 역할수행게임은 연속성이 있어 오래 할수록 고수의 위치에 올라가고 소유하는 아이템(돈으로 거래된다)도 늘어난다. 자연히 밤을 새우며 며칠씩 게임을 계속하는 ‘폐인’이 양산되고 돈 거래가 이뤄지니 폭행사건도 일어난다. 김정운 명지대 여가경영학과 교수는 “윔블던이라는 런던 교외 지역이 테니스의 거점이 됐고, 다보스라는 스위스의 시골마을이 세계 경제의 미래를 논하는 거점이 됐듯이 한국도 e스포츠로 디지털 문화의 새로운 거점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e스포츠 중장기 발전 포럼에 참여해 온 김 교수는 e스포츠가 단순한 게임산업이 아닌 “여가 문화의 하나로서 생활밀착형 스포츠”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말한 문제 외에도 스타크래프트 2의 저작권 문제, 수익 다변화 등 아직 한국 e스포츠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더미 같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길을 잘 닦아 놓는다면, 10~20년 뒤의 가족은 훨씬 화목해질지 모른다. 바둑이냐, 만화냐 하는 리모컨 싸움 대신, 아버지와 자녀가 사이 좋게 e스포츠를 시청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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