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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을 넘어선 영원의 아름다움

유행을 넘어선 영원의 아름다움

미국 사진가 에드워드 스타이큰(1879∼1973)은 1927년 파리에서 뉴욕으로 오는 길에 기다랗고 우아한 청동상을 가져왔다. 그런데 미국 세관 직원이 막아서더니 부엌용품을 수입했으니 600달러를 내라고 했다. 하지만 문제의 물건은 콘스탄틴 브란쿠시의 조각품 ‘공간 속의 새’였다. “‘이봐, 이건 새라고, 새’라며 스타이큰은 분통을 터뜨렸다”고 빌 유잉은 말했다. 스위스 로잔의 뮤제 들렐리제에서 전시 큐레이터로 일하는 유잉은 스타이큰 전문가다. 현대예술 작품이니 면세라고 설득하려 했지만 세관원의 눈에는 깃털 하나 보이지 않았다. 결국 세금을 내야 했다. 하지만 스타이큰도 그리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1년 후 뉴욕 사교계의 명사인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의 도움으로 소송을 내 이겼다. 동시에 브란쿠시의 작품 가치도 정당한 인정을 받은 셈이었다(열여섯 작품으로 이뤄진 시리즈 중 하나. 이 시리즈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에 분산 소장돼 있다). “기념비적 판결이었다. 예술이 무엇이냐는 개념의 전환점이었다”고 유잉은 말했다. 전 생애를 걸쳐 예술의 통념에 맞서 싸운 스타이큰의 존재를 증명한 사건이기도 했다. 이제 파리의 줴 드 폼므가 나서서 전시 ‘스타이큰: 사진의 서사시’(12월 31일까지)로 그의 업적을 기린다. 프랑스를 사랑한 사진가이자 혁신가인 스타이큰에 바치는 유럽 최초의 유작 회고전이다. 예술 대작이 즐비한 이번 전시에는 작품이 약 450점에 달한다. 그중 콘데 나스트의 자료실에서 꺼내져 처음 공개되는 작품도 70점에 달한다. 1920년대 스타이큰은 출판그룹 콘데 나스트가 소유한 보그와 배너티 페어의 포토디렉터로 재직했다. 관람객들은 미국(새 삶을 찾아 룩셈부르크에서 이민 온 스타이큰의 부모에겐 기회의 땅이었다)과 프랑스(당시 예술의 메카였다)를 오간 한 예술가의 흥미진진한 발전 과정을 따라간다. “스타이큰은 당대의 선각자였다”고 사진전시재단(FEP)의 공동 큐레이터이자 예술감독인 토드 브랜도는 말했다. “제트기가 발명되기 전에 이미 제트족이었다.” 스타이큰의 카메라는 한계를 몰랐다. 밀워키의 10대 시절에 찍은 정교한 플래티넘, 그라비아 인화 사진과 로댕, 세잔, 마티스 같은 현대미술 대가들의 열렬한 팬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찍은 프랑스 사진도 전시된다. 스타이큰은 전장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고 뉴욕과 프랑스의 상류사회를 카메라에 담았으며 현대 패션사진을 발전시켰다. 세계 최대의 광고회사인 JW 톰슨의 광고사진에도 관여했다. 나중에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사진부에서 대쪽 같은 큐레이터로도 일했다. 이번 전시의 백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스타이큰이 기획해 수많은 상을 받았던 ‘인간 가족전’이다. 인간사에 대한 인상적 작품들로 1955년에 전 세계에서 약 900만 명의 관람객을 유치했다. 스타이큰의 작품도 포함돼 있다. “그는 예술가로서, 사진가로서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고 MoMA에서 스타이큰의 뒤를 이어 사진부를 담당하는 피터 갤러시는 말했다. “분야마다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는 구세계와 신세계를 이은 문화적 가교 역할을 한 스타이큰을 조명한다. 사진가이자 미술관 기획자이며 정신적 스승인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예술적 비밀을 이어받은 스타이큰은 피카소, 르누아르, 툴루즈-로트렉, 그리고 브란쿠시 같은 예술가들을 미국 미술시장에 소개했다. 지금은 없어진 뉴욕 갤러리 291에서 전시를 열면서 “미국에 현대예술을 소개하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갤러시는 말했다. 그러면서도 혁신은 계속됐다. 파리에서 발견한 스타일과 예술 관념, 새로운 기법을 빌려오고 정교하게 다듬어 새로운 상황에 맞게 변화시켰다. 스타이큰이 1907년 미국에 처음으로 컬러 사진을 소개하면서 사용했던 오토크롬 기술은 파리에서 뤼미에르 형제들이 개발한 방법이었다. 줴 드 폼므는 ‘꽃과 함께하는 샬롯 스폴딩 올브라이트의 얼굴, 1908’도 전시한다. 스타이큰의 학생이자 친구였던 여인의 빛나는 초상화로 거의 1세기 전에 유실됐는데 올해 뉴욕주 로체스터에 있는 한 차고에서 발견됐다. 또 스타이큰은 상류사회의 현대적 초상을 멋지게 담아냈다. 깔끔한 프레드 아스테어는 ‘모자’를 쓰고 있고,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양성적 매력을 발산하며, 윈스턴 처칠은 유쾌하게 거드름을 피운다. 1923년 뉴욕 출판계 거물 기업인 콘데 나스트가 사진감독을 찾았는데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었다.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프랑스 혈통의 귀족인 나스트는 어쨌건, 전후 상류문화만큼은 미국이 프랑스를 능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유잉은 말했다. 나스트는 스타이큰을 채용했다. 그래서 스타이큰은 1920년대와 30년대 패션의 황금기를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았다. 영화 기법으로 솜씨 좋게 구성된 사진을 통해 매리언 모어하우스와 리 밀러 같은 영화계 여신들의 자극적이고 현대적인 우아함, 그리고 부드러운 여성성도 담았다. 또 파리 멋쟁이들의 옷을 장롱에서 꺼내와 미국 무대에 올렸다. 스타이큰의 작품은 프랑스 스타일의 세련됨과 예리함에 초점을 맞췄다. 샤넬의 시폰, 스캬파렐리의 크렙드신(비단), 랑방의 새틴, 비요넷의 벨벳 드레스 등과 함께였다. 나스트 측은 “옷을 돋보이게 하라”는 메모를 보냈지만 스타이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콘데 나스트의 자료실 담당자인 숀 월드론은 말했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피사체와 사랑에 빠졌다. 물론 처음에는 옷감의 재단과 질감을 보지만 결국엔 그 아래에 있는 여성이 느껴진다.” 디자이너 를롱의 드레스를 입고 나스트의 아르데코풍 거실에서 포즈를 취한 리 밀러의 사진은 물 흐르듯 휘감기는 옷의 우아한 선을 포착한다. 하지만 고결한 모델의 광채, 품위, 그리고 상처받기 쉬운 품성까지 담아낸다. 사실상 스타이큰은 광고사진을 창안했고 오늘날의 시각 대중예술의 탄생을 알렸다. 수십 년이 흐른 후에도 수많은 현대 여성이 뛰어넘고자 갈망하는 최초의 패션 아이콘들도 창조해 냈다. “그의 사진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움은 정말 진짜다. 유행을 초월하는 무한성이 담겨 있다”고 할리우드의 촉망받는 배우였던 글로리아 스완슨의 1924년 사진을 보면서 브랜도는 말했다. 이 사진은 너무 현대적이라 당장 보그지에 실려도 무방할 정도다. 스타이큰이 단순히 대중문화의 전환기를 기록했는지 혹은 실제로 매개했는지는 누구도 말하기 힘들다. 그러나 무엇이 됐든, 그가 없었다면 사진예술은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 힘들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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