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시의 비극 어떻게 시작됐나
조지 W 부시가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고 집권 초반부터 이라크 공격을 계획했다는 세습왕조적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부시는 2002년 9월 휴스턴에서 열린 한 정치 모금행사에서 “어쨌든 이 친구는 언젠가 한 번 아버지를 죽이려 했던 인물”이라고 말했다. 그 후 부시가 언급한 사건을 두고 상당한 의혹이 제기됐다. 그 사건이란 1993년 아버지 부시의 쿠웨이트 방문 때 사담 후세인이 자동차 폭탄을 터뜨리려 음모했다는 주장을 말한다. 사건 직후 정보 당국자들은 후세인이 조지 W 부시의 아버지뿐 아니라 그와 함께 쿠웨이트를 방문한 어머니 바버라, 부인 로라, 두 동생 닐과 마빈 등 다른 가족까지 살해하려 계획했다고 부시 가족에게 말했는데 어쨌든 부시 자신은 그 말을 믿었다는 사실에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사건은 부시 가족에게 오랫동안 불안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측근들에 따르면 부시 가족은 후세인이 권좌에 있는 한 위험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행정부 고위 관계자 중 9월 11일 이전에 대(對) 이라크 군사행동을 직접적으로 주장한 사람은 폴 울포위츠뿐이었다. 부시 외교정책팀 전체적으로는 이라크가 큰 골칫거리지만 급하지 않은 문제로 분류했다. 클린턴이 후세인의 도발에 당한 만큼만 대응한 일을 본능적으로 비판하면서 장래 어느 시점에는 혼쭐을 내줘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북한과 파키스탄의 핵 프로그램, 러시아의 권위주의 확대, 대만을 향한 중국의 호전적 태도도 같은 항목으로 분류됐다. 2002년 9월까지 이라크 전쟁을 준비한다거나 본격적으로 계획하는 일은 없었으며 2003년 1월까지 돌이키지 못할 사태 진전은 없었다. 말하자면 조지 W 부시가 백악관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이미 이라크를 공격할 작정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 결국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가족의 원수를 갚고 아버지를 뛰어넘으려 애쓰다 보니 아버지가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완수하려는 의욕이 강해졌는지 모른다. 하지만 부시가 저지른 인생 최대의 실수는 결정적으로 더 원대한 차원에서 아버지와 다른 외교정책을 수립하려 시도하다가 나왔다. 부시 비극의 1막이 40세까지 아버지를 닮으려는 노력이었다면 2막은 그 후 15년 동안 홀로서기를 배우면서 거둔 성공의 확대다. 세계 문제를 명쾌하게 규정 짓는 독트린을 찾지 못하고 부시가 구세주 신앙에 점차 빠져드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이 결말부인 3막의 내용이다. 부시 독트린 1.0은 단극성 현실주의였다(1999년 3월 7일~2001년 9월 10일). 41대 아버지 부시의 외교적 현실주의보다 클린턴의 자유주의적 세계주의 반박에 더 매몰돼 아버지의 세계관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43대 부시는 제임스 베이커 전 국무장관,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전 국가안보 보좌관 등 아버지의 사람들을 피하고 대신 콜린 파월, 그리고 스코크로프트가 키운 콘돌리자 라이스의 조언을 들었다. 라이스는 부시와 마찬가지로 고전적인 ‘힘의 균형’ 현실주의에 기반을 뒀다. 부시는 중점과제가 아버지와 달랐으며 겉으로는 강하고 “외교적인 제스처”를 많이 구사하지 않는 현실주의자였다. 외교적 제스처가 얼마나 적은지는 취임 첫 8개월 사이에 드러났다. 탄도미사일(ABM) 감축 조약을 폐지하고 미사일 방어망 개발을 밀고 나가겠다고 공표했다. 아버지는 중국에 호감을 느낀 반면 아들은 군사위협의 확대를 느꼈다. 중국이 자국 영공을 침범한 미군 비행기를 강제 착륙시키고 승무원을 인질로 잡았을 때 강경하게 대처했다. 대만 문제와 관련해 오래 유지해 온 ‘전략적 모호성’ 정책의 지속에 찬성하는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다. 지구온난화를 저지하려는 교토협약을 거부했다. 이스라엘에서 야세르 아라파트를 퇴짜 놓고 아리엘 샤론 편에 섰다. 북한과의 협상을 중단했다. 단극성 현실주의는 초기의 현실을 이겨냈지만 9·11 사태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부시 대통령은 결국 막판에 새로운 방식을 내놓았다. 부시 독트린 2.0은 우리 편 아니면 적(With Us or Against Us, 2001년 9월 11일~2002년 5월 31일)이었다. 새로운 독트린은 첫 번째 독트린을 부정한다기보다 그것을 더 세밀하게 보완해 그때까지 외면했던 테러리즘 문제에 대처했다. 알카에다의 추적뿐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에 그들을 받아들인 탈레반 정권 타도의 근거를 제공했다. 라이스가 처음 ‘테러범이나 마찬가지(no distinction)’ 구상을 내놓았다면 그것을 처음 공개적으로 ‘부시 독트린’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사람은 딕 체니 부통령이었다. 2001년 11월 미국 상공회의소에서 연설하면서 체니는 이런 정의를 내놓았다. “우리는 테러범을 받아주는 자들, 테러범에게 숨을 곳을 제공하는 자들에게 그 책임을 묻겠다.” 그러나 체니가 그 말을 내뱉을 때는 이미 제2의 테러 물결이 독트린 2.0의 맹점을 노출시켰다. 뉴욕과 워싱턴에서 탄저균 공격이 발생했다. 이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세계무역센터와 국방부에서의 대형 살상보다 더 큰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10월의 그 생물테러 공격은 정부 내에 일반 인식보다 더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영향은 어느 모로 보나 9·11보다 더 컸다. 탄저균 공격이 없었다면 부시는 아마도 이라크를 침공하지 않았다. 그 시점에서 국가안보 관계자라면 거의 누구나 또 다른 테러 물결이 몰려온다고 가정했다. 일간 첩보 일지가 이런 공포를 뒷받침했다. ‘테러 용의자 간의 대화’ 도청 건수가 기록적인 수준으로 증가했다. 잠재적인 위협을 파악하고자 I 루이스 ‘스쿠터’ 리비 부통령 비서실장은 ‘어두운 겨울’이라는 전쟁 게임 브리핑을 지시했다. 미국의 한 도시에서 천연두가 발생할 경우를 가상한 내용이다. 1980년대 핵 재앙을 가상한 내용으로 체니가 참여했던 ‘정부의 연속성’ 연습과 흡사한 방식이다. 부시와 가까운 한 소식통에 따르면 체니는 곧바로 대통령에게 놀라운 메시지를 전달했다. 생물 공격의 가능성이 가장 높으며 미국은 기본적으로 그런 공격에 무방비 상태라는 내용이었다. “탄저균과, 그것이 어떻게 확산되고 우리가 얼마나 무방비 상태인지를 설명하는 브리핑을 끝까지 지켜봤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실시된 탄저균 관련 브리핑 중 가장 끔찍한 내용이었다”고 부시의 첫 번째 대변인 아리 플라이셔는 2007년 여름 내게 말했다. “딕 체니는 테러 공격의 가능성과 대책의 필요성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인물이었다.” 그러던 중 10월 4일, 백악관에서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국무부에서 아침 연설을 하면서 공직자들에게 사의를 표하던 중 부시가 갑자기 큰 동요를 보였다. “대통령이 그날 아침처럼 지치고 불안해 하는 모습은 그 전이나 그 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고 아리 플라이셔는 전한다. 백악관으로 돌아간 후 부시는 플라이셔를 집무실로 불러 이유를 설명했다. 플로리다주의 한 남자가 탄저균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부시는 그것이 그렇게 무서워하던 제2의 테러 물결이 아닐까 걱정했다. 또 다른 탄저균 편지가 백악관으로 우송된 듯했다(회수되거나 또는 적어도 공개되지 않았다). 10월 22일, 위치가 알려지지 않은 몇 km 떨어진 한 정보부 시설에서 편지를 개봉하는 데 사용하는 자동 커터기 위에서 탄저균이 발견됐다. 백악관이 생물 테러공격의 표적이라는 뜻이었다. “부시 정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탄저균 공격이었다고 본다”고 대통령의 한 측근이 내게 말했다. “그 때문에 전부 바뀌었다. 커다란 재앙이 임박한 듯했다.” 체니와 리비는 보건복지부(HHS)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탄저균 공격에 맞서 혼란스러운 대책을 주도하면서 더 심각한 상황의 가능성에 대비하는 부서였다. 당국자들은 천연두를 이용한 공격을 가장 두려워했다. 20세기에 천연두 바이러스로 약 3억 명이 숨졌다. 1년에 200만 명씩 목숨을 잃었다. 1967년이 돼서야 세계보건기구(WHO)에서 대대적인 퇴치운동에 착수해 10년 뒤에 뿌리를 뽑았다. 1977년 천연두가 박멸된 후 미국과 러시아만 그 바이러스의 연구 표본을 철저한 감시 아래 안전한 상황에서 보관하도록 허용됐다. 그러나 체니가 지시한 한 첩보평가에 따르면 이라크·북한·러시아 모두 비밀리에 그 바이러스를 보유할 가능성이 높았다. 체니와 리비는 이라크가 천연두 무기를 제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전 국민이 예방접종을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1972년 이후 미국에서는 없었던 일이다. 하지만 WHO의 천연두 퇴치 프로그램을 이끌고 훗날 41대 부시 대통령의 과학 보좌관을 지낸 영웅적인 역학자 도널드 헨더슨은 반대했다. 탄저균 공격 이후 HHS는 헨더슨을 고문으로 영입해 비상대책을 마련하려 했다. 볼티모어에 있는 생물보안 연구소 집무실을 찾아가 헨더슨을 만났다. 그는 2002년 7월 18일 체니, 리비와 함께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애틀랜타에 있는 질병통제센터를 불시에 찾아갔던 일을 돌이켰다. 헨더슨은 백악관 2호기에 올라타 함께 이동하면서 자신을 비롯한 역학자들이 왜 대대적인 예방접종 프로그램을 끔찍한 발상이라고 여기는지 부통령과 그의 비서실장에게 내내 설명했다. 의사나 간호사들도 흉측한 딱지, 병변, 농포 등 예방접종에 따르는 갖가지 정상 반응을 보면 몸서리를 쳤다. 헨더슨은 어떤 비정상적인 반응이 생기는지 홍보하려고 병원에 배포한 소책자를 내게 보여줬다. 시꺼멓게 멍든 갈비뼈, 마구 부풀어오른 부종, 그리고 진행성 우두라는 반응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멍이 들었다. 이런 반응이 불러올 공포심보다 앞으로 발생할 희생이 더 심각한 문제였다. 헨더슨에 따르면 백신의 부작용으로 접종자 100만 명당 한두 명이 사망한다고 추산됐다. 법적인 책임 문제는 분명 감당하기 어려운 악몽이었다. 체니와 리비는 그의 주장에 반대하지 않는 듯했다고 헨더슨은 전했다. 돌아오는 길에도 자신의 논지를 그들에게 다시 한 번 설명했다. 헨더슨은 이렇게 말했다. “천만 다행으로 마침내 내 말귀를 알아들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그들에게 이건 말도 안 되는 짓이라는 사실을 설득시켰다고.” 두 시간 후 볼티모어의 자택에 돌아갔을 때 아내가 긴급 메시지를 갖고 기다렸다. 사무실에 바로 전화하라는 전갈이었다. “다음 날 아침 기자회견을 열고 즉시 전 국민 대상 예방접종을 실시한다고 발표할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다”고 헨더슨은 말했다.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한바탕 싸움을 각오하고 새벽 다섯 시 기차에 올라타 HHS를 찾아갔다가 예방접종 계획이 결국 취소됐다는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체니의 안이 부시에게 퇴짜를 맞았기 때문이다. 부시는 결국 군인 50만 명의 의무접종, 그리고 의료보건 종사자 또는 ‘응급 구호요원’ 동수(同數)의 자발적 접종을 내용으로 하는 절충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2004년 초 백신이 모두 준비됐을 무렵 공포는 사라졌다. 알고 보니 후세인은 천연두 무기가 없었다. 부시는 백악관에서 접종을 받았지만 가족과 백악관 직원들은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체니도 접종을 받지 않기로 했다. 부통령이 그릇된 신념을 가졌다고, 전쟁을 합리화하려고 이라크 대량살상무기(WMD)의 증거를 조작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전 국민 천연두 예방접종에 그가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도 고려해 봐야 한다. 거의 어떤 식으로 추산하든 안전한 백신을 사용해도 수백 명의 미국인이 목숨을 잃고 수천 명이 중병에 걸리게 된다. 민간인 수백 명의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체니의 말을 들으면 영화 속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친 생각일지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온 광기다. 후세인이 생물무기를 보유하고 미국을 향해 그것을 사용하거나 그렇게 하도록 테러범들에게 넘겨줄 가능성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를 보여준다. 체니는 후세인이 “테러리즘의 국가 후원자”라는 주장을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리비와 폴 울포위츠 국무부장관은 친구 로리 밀로예가 내놓은 테러리즘의 통일장 이론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왔다. 밀로예는, 1990년대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모든 대형 테러 공격의 배후에 후세인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1993년의 세계무역센터 첫 번째 공격, 1995년의 오클라호마시티 폭탄테러 등이 거기에 포함된다. 밀로예의 저서 ‘보복의 연구(Study of Revenge: Saddam Hussein’s Unfinished War Against America)’는 그녀가 연구원으로 일했던 미국기업연구소에서 발행됐다. 뒤표지에는 리비, 울포위츠, 리처드 펄의 입에 발린 추천사가 실렸다. 체니는 그들을 따라 밀로예가 주장한 음모론의 가시밭길로 빨려들었다. 9·11 테러조직 지도자 모하메드 아타가 프라하에서 이라크 정보 당국자들을 만났다는 정보를 이용한 밀로예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다른 정부에서라면 이런 식의 집단적 망상은 다양한 견제를 받았다. 케네디, 닉슨, 클린턴, 조지 H W 부시 모두 어느 정도까지는 증거를 검토했으리라 보인다. 그러나 후세인이 생물무기와 핵무기를 개발 중이라고 한번 판단을 내린 후 부시는 다른 설명에 귀를 닫아버렸다. 증거를 면밀히 검토하는 일은 대통령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의 공보국장 댄 바틀렛이 익명의 배경 설명에서 표현한 대로 43대 부시 대통령의 백악관에서 “사실 확인은 미국 대통령의 일이 아니다.” 후세인의 WMD 보유 주장이 “분명한 사실”이라고 CIA 국장이 대통령에게 보고하면 부시는 더 이상 알아볼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초기 사고방식의 문제는 생물공학과 소형화기가 발달하고 연예인들이 국가에 얽매이지 않으며 국경 경비가 허술한 요즘 시대에 미국을 보호하는 어떤 전략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나라를 더 안전하게 만들려면 그런 위협을 뿌리 뽑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 원인을 제거할 뿐 아니라 WMD를 퍼뜨린다고 알려진 잠재적인 요소들을 차단해야 한다. 이것이 부시 독트린 3.0 선제공격이었다(2002년 6월 1일~2003년 11월 5일). 독트린 2.0이 알카에다에 은신처를 제공했던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합리화했다면 독트린 3.0은 장래 알카에다를 지원할지 모를 이라크 침공의 근거를 마련했다. 신보수파들에게는 이라크 침공의 다른 동기가 있었다. 후세인이 미국에 가할지 모르는 피해를 방지하기보다 그를 제거하면 미국에 어떤 득이 될지에 더 초점을 맞췄다. 그들은 백해무익한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면 아랍 중동의 비상식적인 정치문화에 변화가 일어나리라고 생각했다. 세속적인 이라크가 중동지역에서 세 번째 친서방 민주주의 국가로 변신하면 다른 권위적인 정권들도 붕괴되리라고 믿었다. 자유가 확산되면 중동도 테러리즘의 온상 역할을 중단하며 아랍인들도 이스라엘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생각이었다. 이스라엘 문제는 주로 유대계인 신보수파가 특히 많은 관심을 보였다. 울포위츠는 종종 이라크 전쟁의 ‘설계자’로 묘사됐다. 그 전쟁은 실제로 설계자가 필요했다. 점령 중 발생하는 일을 기획한 책임을 물을 만한 사람 말이다. 하지만 그는 이라크 전쟁의 신학 이론가에 더 가까웠다. 다양한 법칙, 주장, 그리고 아랍 세계의 정치적 속성을 외부에서 뜯어고칠 수 있다는 확고한 개인적인 신념의 근거를 내놓았다. 울포위츠와 그의 수제자이자 행정부 내 또 한 명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보수파인 스쿠터 리비는 중동의 비상식적인 정치문화를 혁신하는 방식에서 특정 이론을 추종했다. 그 이론의 가장 큰 사상적 바탕을 제공한 이는 프린스턴대 명예교수인 아랍학자 버나드 루이스였다. ‘문명의 충돌’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루이스는 무하마드 시대 이후부터 무슬림들이 “세계 지배를 향한 범우주적 투쟁”을 벌여왔다고 믿었다. 수세기에 걸쳐 패배·복종·실정이 쌓이면서 이슬람 테러리즘을 향한 길이 열렸다. 미국도 부패하고 무능한 독재자들을 지지해 거기에 일조했다. 체니는 국방장관 시절 루이스를 만나 친구가 된 후 9·11 테러 후 아랍 세계에서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설파한 루이스의 주장에 관심을 갖게 됐다. 2002년 부통령 관저에서 잇따라 점심식사를 함께 하면서 루이스는 미국의 군사력을 동원해 이라크 정권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를 늘어놓았다. “수년간의 ‘불안한 화해’ 때문에 무슬림 세계가 미국도 약점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 아랍인들은 힘을 숭배한다.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면 반대 방향의 변화을 일으키는 촉매제가 될 가능성이 있다.” 등등. 신보수파들은 역사적인 비유에 약하다. 그리고 특히 그들이 혹한 비유는 ‘불안한 화해’였다. 싸워야 할 적과의 타협, 유화를 가리키는 그럴싸한 이름이었다. 이 비유에서 후세인은, 서구가 맞대결을 미룰 동안 힘을 키운 히틀러였다. 한편 이라크는 나치 독일이 아니더라도, 미국의 윤리와 군사적 압력의 양면 공세에 취약한 소련식 전체주의 국가였다. 2002년 중반, 체니는 신보수파의 충실한 우군이 됐다. 그렇다고 어떤 민주주의 이상주의자가 됐다는 뜻은 아니다. 공개 석상에서 이라크전을 지지하면서 한 번도 버나드 루이스의 이론을 거론하지 않았다. 타고난 비관론자이기 때문에 중동의 정치문화를 뜯어고치는 일은 뜬구름 잡는 얘기에 불과하며 아주 가능성이 희박한 최상의 시나리오라고 여겼다. 그러나 새로운 아랍세계를 만든다는 신보수파의 거창한 미래상이 대통령의 공감을 얻으리라는 점만은 분명 인정했다. 부시는 언제나 대담한 구상에 이끌렸다. 이라크를 통해 중동을 쇄신한다는 계획은 바로 그가 추구하던, 일거에 판세를 뒤엎는 구상이었다. 이라크 침공 후 WMD의 신기루가 사라지자 과거에 기초한 부시의 전쟁론이 바뀌면서 그의 외교정책 이론도 함께 변했다. 부시 독트린 4.0은 중동의 민주주의였다(2003년 11월 6일~2005년 1월 19일). 부시는 2003년 11월 6일 ‘전국민주주의기금’에서의 연설에서 자신이 전쟁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방식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제관계 이론을 구축했다. 그는 미국이 “새로운 정책을 채택했다”고 선언하며 “중동에 자유를 불어넣으려는 전향적인 전략”이라고 묘사했다. 지난 6년 동안 독재를 용납하고 받아들인 결과 미국인들이 안전해지지 않았으며 이는 “장기적으로 자유를 희생하는 대가로 안정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안정은 스코크로프트가 강조하는 구호 중의 하나였다. 부시는 자유를 “순리에 따르는 역사의 방향”이라고 불렀다. 이제 마침내 부시가 찾던 원대한 구상이 등장했다. 아랍세계의 민주화는 명백하고 도덕적인 목표이자 대통령으로서 의미있고 야심적인 과업이었다. 온정적 보수주의와 같은 일종의 사회적 복음주의였다. 믿음에서 비롯됐지만 실행은 세속적인 과업이었다. 부시의 새로운 이론은 평가라는 용어의 정의를 확대하는 부가적인 이점이 있었다. 라이스가 말한 이른바 “새로운 중동의 산통”을 겪는 중이라면 첫 번째 성적표는 한참 후에야 나오게 된다. 하지만 부시의 감동적인 연설은 오히려 끊임없이 변하는 외교 정책이 어떤 어려움을 가져다주는지 잘 보여주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확대하려는 부시의 노력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상황만 달랐다면 자유주의 강경파나 온건파, 수많은 보수주의자를 하나로 묶어주는 목표가 됐을 테니 말이다. 진짜 문제는 목표가 비현실적이고 실행력은 전무하며 뻔히 눈에 보이는 모순을 계속 반복했다는 점이다. 만약 그가 실수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이라크 침공이라는 치명적 판단착오는 나중에 훌륭한 임기응변으로 어느 정도 무마할 만했다. 평상시 부시라면 어떤 식으로 반응했을까? 아마도 국방장관에게, 약탈자들이 정부건물을 앙상한 뼈대가 드러나도록 발가벗겨 버린 광경은 미국이 관용을 베풀 만한 그런 정도의 자유를 넘어섰다고 말했으리라. 국방부가 적당한 대응체제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국무부로 권한을 이동시키고 유엔에 일임했어도 됐다. 자꾸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말이다. 부시 대통령은 저항 활동을 인정하고 그에 대응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전략을 2007년 이전에 마련할 수 있었다. 폴 브레머가 처음 내렸던 최악의 명령 두 가지(이라크 군대 해산, 바트당과 연결된 사람을 정부조직에서 몰아낸 일)를 차단하거나 뒤집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 명령이 얼마만큼 중요한지 인식했어야 했다(부시는 나중에 작가 로버트 드레이퍼에게 군대 해산은 자신이 세운 정책이 아니며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모르겠다고 말했다). 아부 그라이브 형무소 포로 학대 사건 때 럼즈펠드를 해임할 만도 했다. 사실은 그마저도 늦은 조치였다. 자신을 둘러싼 보호막을 해체하는 조치도 가능했다. 하지만 오히려 절연체로 만들어진 차단막을 몇 개 더 추가했다. 물론 그런 조치가 훌륭한 결과를 낳았으리라 확신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애당초 저질렀던 실수 때문에 초래된 손해는 분명히 줄였다. 왜 부시는 재선 이후에도 보다 유연해지지 못했을까? 어떤 면에서 그의 조정 능력 부족은 경영자로서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는 MBA 교육을 받았음에도 행정과 경영을 배제해야 진정한 지도력과 의사결정력이라고 말한다. 부시는 과감하게 위임을 하지만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피드백을 청하지 않고 결과도 평가하지 않고 책임도 추궁하지 않는다. 아버지와는 달리 결론 없는 논쟁을 편안히 시켜보지도 못한다. 한번 내린 결론을 재고하거나 공개적으로 방침을 바꾸면 유약한 지도력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의 완강한 사고방식은 부모가 그를 못미더워해서 조언을 하지만 자신은 그 모두를 거부했다는 일종의 성취감에서 비롯됐다. 기질적 측면에서 그는 비난을 감내하거나 실수에서 배우는 그런 능력이 거의 없다. 비판자건 동맹자건 의견이 다르면 어머니의 잔소리나 아버지의 짜증 같은 식으로 치부해 버렸다. 그래서 비판과 반대는 의도와 전혀 다른 효과를 낳았다. 즉 자신은 마땅히 옳으며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는 부시의 의지를 더욱 강화시켰다. 그는 의지력 덕분에 자신의 현재가 가능했다고 믿는 사람이므로 누구한테도 허락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완고함은 정책뿐 아니라 인사에서도 명백히 드러났다. 언론이 부시를 향해 조지 테닛 CIA 국장, 럼즈펠드, 칼 로브, 알베르토 곤살레스 법무장관 등 여러 부서의 수장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면 할수록 그들이 자리를 지킬 확률은 더욱 높아졌다. 그의 경직성은 가족의 역사에서 비롯됐다. 아버지와 정반대의 성격을 갖게 됐을 뿐만 아니라 그가 생각하는 지도력 또한 아버지와 전혀 달랐다. 다분히 의식적으로 반대를 추구했다고 봐야 한다. 조지 H W 부시는 여러 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심했다면 아들 부시는 겉보기로 평가하고는 곧바로 결정을 내려버렸다. 아버지 부시는 회색지대에 주목했다면 아들은 도덕적 명확성을 추구했다. “아들은 자신이 앞을 향해 헤치고 나아가는 남자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우유부단하지 않고 과단성이 있다”고 브렌트 스코크로프트는 2007년 11월에 내게 말했다. “이런 미묘한 차이는 일면 경험부족에서 왔다. 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아버지도 배경은 같았지만, 우리가 기껏해야 49 대 51의 확률을 가지고 일한다는 사실, 그리고 49가 아니라 51을 내 쪽 확률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이해했다.” 부시는 기회 있을 때마다 전쟁에 관한 한 아버지에게 그 어떤 조언도 듣지 않노라고 힘줘 말했다. 이는 최대한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아버지의 성향으로 미뤄볼 때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앤드루 콕번은 저서 ‘럼즈펠드의 등장과 몰락, 그리고 재앙의 유산(Rumsfeld: His Rise, Fall, and Catastrophic Legacy)’에서, 아들 부시 대통령이 2004년 여름 케네벙크포트 가족 별장을 방문했던 일을 묘사한다. 아버지는 스코크로프트가 전해달라는 이라크 관련 메모를 아들에게 건넸다. 아들 부시는 그 메모를 슬쩍 보고는 옆으로 치워버리며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브렌트 스코크로프트가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가르치는 종이쪽지는 이제 지겹고 신물 나요. 다시는 안 볼 테니 그리 아세요.” 그러고는 화가 나서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테러리즘에 대량살상무기가 더해지면 견디기 힘든 위협을 초래하므로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던 논리의 근거가 무너지자 부시는 자신의 결정을 재고하기보다 더욱더 원대한 정당화에 매달렸다. 2004년 선거가 있기 직전 부시의 친구이자 텍사스 레인저스의 공동구단주였던 톰 번스타인은 부시에게 ‘민주주의를 말한다(The Case for Democracy)’의 교정쇄를 전달했다. 저자는 옛소련의 출국금지자였으나 이제는 이스라엘 우익정치인이 된 나탄 샤란스키였다. 이 책에서 부시는 영웅이었다. 테러와의 전쟁은 나치와 소련에 대항하는 투쟁에 비유됐다. 대조적으로 아버지 부시가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자살적 민족주의’를 멈추라고 했던 1991년의 연설은 “악명 높은”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명백한 재앙”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자유의제(Freedom Agenda)의 또 다른 이름이나 마찬가지였던 샤란스키주의는 부시 독트린 5.0, 즉 민주주의 확산(Freedom Everywhere, 2005년 1월 20일∼2006년 11월 7일)으로 다시 태어났다. 부시는 두 번째 취임연설에서 지구 전체에서 압제를 종식시키겠다는 최신 외교정책을 발표했다. “모든 나라와 모든 문화권에서, 미국은 민주운동과 민주제도의 성장을 꾀하고 지원하겠으며 전 세계 독재의 종식을 궁극의 목표로 삼겠다.” 민주주의는 신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며 미국은 그 은총의 확대를 돕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부시와 연설문 작성자(점차 대통령의 외교정책을 입안하는 주인공이 되는 듯했다)를 빼면 그 누구도 그런 얄팍한 몽상적 언설로 민주주의가 촉진되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부시의 취임연설은 종교색이 짙었지만, 사실 민주주의가 하나님이 선택한 정부형태라는 신학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구약성서는 사실상 독재에 가깝고 신약성서는 일종의 사회주의다. 그러나 부시는 자신이 벌이는 민주주의 십자군운동을 하나님의 뜻으로 간단히 치부해 버렸다. 그러나 부시 독트린 5.0은 이전의 어떤 이념보다 빨리 실패했다. 1년도 안 돼서 정부 내에 자유라는 의제를 언급하려는 사람은 라이스 외에 아무도 없었다. 말하자면 불가능을 추구하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딕 체니 부통령과 국무부 관료들은 모종의 합의를 봤다. 대통령의 정책은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꿈이라고 말이다. 시민적 자유를 주제로 한 메시지와 실천의 불일치는 과연 부시가 도덕의 전달자인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중동에서는 신이 내려주신 자유를 누리라고 압력을 행사하면서도, 관타나모 수용소를 운영하며 고문을 가하고 미국인들의 전화도 계속 도청하라는 딕 체니의 조언은 또 기꺼이 받아들였다. 따라서 부시 대통령이 촉구한 전 지구적 민주주의는 전혀 실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곳에서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러시아에서 베네수엘라까지 민주주의 인사들은 부시와 연결되는 순간 그 정당성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해야 했다. 이란에서 노벨평화상을 받은 인권변호사 시린 에바디는 괜히 부시가 지지를 보내는 바람에 자신의 정당성이 위축됐다고 불평했다. 그렇게 해서 다섯 번째 부시 독트린은 대통령이 두 번째 취임 연설에서 말했던 대로 “수 세대에 걸친 과업”으로 후퇴했다. 부시의 마지막 외교정책(2006년 11월 8일부터 현재까지)에서는 실질적 독트린을 찾아보기 힘들다. 상하 양원에서 공화당이 패배한 후 부시 행정부는 앞선 다섯 가지 정책의 실패를 기본으로 한층 약화된 잡탕정책을 만들었다. 일극중심주의 후퇴, 선제공격 유예(이란 폭격은 여전히 논의 중이지만), 자유라는 의제가 대통령의 과장법이라는 암묵적 합의 등이 그 내용이다. 그러나 부시와 연설문 작성자들은 마지막 독트린의 소멸을 인정하지 않는다. 부시는 민주주의 촉진을 집권 말기의 주요 프로젝트로 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댈러스 남부감리교대학에 짓는 대통령 도서관의 부속기관으로 자유연구소를 설립할 생각이라고도 했다. 부시 외교정책의 붕괴가 갖는 마지막 아이러니는 아버지의 정책들이 결국 옳았음을 입증한다는 사실이다. “과업을 종결”짓지 않고 이라크를 지배하지 않았던 1991년의 행동은 정말 지혜로운 행동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렸을 때 승자로서 연설하지 않은 일도 위험 상황에 대처하는 현명한 전략으로 보인다. 괜한 연설로 신경을 긁기보다는 자유를 누려야 하는 실질적 이유를 훨씬 더 잘 강조했다. 안정의 중시는 바로 성숙함을 의미한다. 불필요한 호전적 수사법의 배제는 사실 상식이다. 역사학자 티모시 나프탈리는 2007년에 저술해 훌륭한 작품으로 인정받는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의 전기문에 이런 글을 썼다. “아들 부시의 대통령 임기가 종반으로 치닫자 아버지 부시의 현실주의, 외교정책, 겸양의 정치, 그리고 조심성까지도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아들의 잘못이 부각되면 될수록 아버지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만 간다. [제이콥 와이스버그가 쓴 ‘부시의 비극(The Bush Tragedy)’에서 발췌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브랜드 미디어
브랜드 미디어
BTS 진에 ‘기습 입맞춤’…50대 日 여성, 검찰 송치
대한민국 스포츠·연예의 살아있는 역사 일간스포츠이데일리
일간스포츠
이데일리
호스트바 근무·레즈비언 연관? 에일리 남편 논란
대한민국 스포츠·연예의 살아있는 역사 일간스포츠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할인도 경품도 '역대급'…여기가 '여행천국'
세상을 올바르게,세상을 따뜻하게이데일리
이데일리
이데일리
[단독]한화그룹, 美 워싱턴에 글로벌 방산 '지휘본부' 세웠다
성공 투자의 동반자마켓인
마켓인
마켓인
임상 성공에 티움바이오 뛰고 바이오솔루션 날았다[바이오맥짚기]
바이오 성공 투자, 1%를 위한 길라잡이팜이데일리
팜이데일리
팜이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