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의 글로컬리제이션
패션의 글로컬리제이션
디자이너 다이앤 폰 퍼스텐버그는 랩 드레스의 창시자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원조 랩 드레스는 인도의 의복 혁신으로 불리는 사리다. 사리는 출현한 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뭄바이 최고급 호텔의 대리석 깔린 무도회장부터 잡초 무성한 시골 마을까지 인도 전역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눈에 띈다. 실크로 됐든, 면으로 됐든, 염색을 했든, 구슬 장식을 달았든, 수를 놓았든 이 단순한 의상은 현대 소매업자들이 꿈에 그리는 꾸준한 인기를 누린다.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하게 변형을 거듭하면서 고객을 끌어 모은다. 하지만 최근 인도 패션업계에 낯선 얼굴이 등장했다. 정교하게 장식된 사리 대신 첨단 유행의 시폰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사교계 명사다. 샤넬, 루이뷔통, 구치, 디오르, 모스키노, 버버리, 펜디, 베르사체, 아르마니 등. 서방의 명품 브랜드 선단이 신흥시장의 마지막 목적지인 인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인도 전통의상인 사리의 시장점유율을 빼앗고자 노력한다. 뭄바이의 무덥고 습한 거리에서 그 가능성이 느껴진다. 조사에 따르면 인도의 명품시장 규모는 총 35억 달러에 이르며, 2016년에는 300억 달러가 넘으리라고 전망된다. 그러니 당연히 명품 재벌 그룹들이 이 시장에 합류하려 든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다. 이윤 폭과 성장 가능성을 두고 떠들썩한 입소문이 자자하지만 인도 소비자들의 비위 맞추기 등 어려운 문제들은 묻혀버렸다. 높은 수입관세는 차치하더라도 대다수 지역에 겨울다운 겨울이 없는 나라에서 겹겹이 울로 된 겨울 상품을 어떻게 판단 말인가? 명품 사업의 관건은 소비자의 구매욕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다. 하지만 3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에 여성들에게 캐시미어 외투를 사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또 밝은 색상과 몸매가 드러나는 실루엣을 좋아하는 인도 여성들에게 어떻게 단순한 라인에 덤덤한 색상의 앙상블을 입도록 설득한단 말인가? 인도에서 유행을 선도하는 대표적 인물들은 영화계의 스타들이다. 하지만 인기 여배우 아시와리야 라이는 영화에서 질 샌더의 베이지색 크레이프 바지 정장보다 피부가 드러나는 매혹적인 시폰 사리를 입고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한 가지 해결책은 구두와 가방 등 패션 소품에 초점을 맞추는 방법이다. 패션 소품은 전 세계 명품 산업의 고정수입원이다. 어떤 나라에서든 멋진 하이힐과 ‘잇(it)’ 백(누구나 갖고 싶어 할 만한 최신 유행의 가방)을 갖고 싶어 하는 여성들의 욕구는 비슷한 듯하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샤넬의 뉴델리 매장에서는 1270~7630달러에 이르는 표준 스타일의 백(‘C’자가 겹쳐진 샤넬의 로고가 들어있다)이 불티나게 팔린다. 정교한 솜씨를 강조하기로 유명한 루이뷔통은 인도에서 일반 컬렉션만 판매하지 않는다. 각 상점의 특별 주문 코너에는 루이뷔통 상표가 찍힌 생일 케이크 상자와 왕실의 문장이 그려진 거대한 트렁크, 독특한 터번 케이스 등 주문제작 상품들이 자리 잡았다. 특별하게 장식된 걸프스트림 제트기를 타고 세계를 누비며 인도의 새 대왕으로 불리는 재계 거물들은 최고 73만 달러를 웃도는 루이뷔통의 주문제작 손목시계 투르비용을 애호한다. 이런 고관세의 수입은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위험신호가 될지도 모른다. 인도의 전통을 무너뜨리는 문화식민주의자들을 그들이 경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 여성들이 조만간 사리를 포기할 듯하지는 않다.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고급 패션 업체, 앙상블에서는 고객들이 한꺼번에 여러 벌의 사리를 구입한다. 유명 디자이너가 제작한 사리는 한 벌에 2000달러 정도, 결혼식에 주로 입는 보석 장식의 맞춤 사리는 6350달러에 이른다. 사실 인도의 새 경제는 누구에게나 충분한 기회를 준다. 또 전문가들은 이런 좋은 시절이 앞으로 적어도 10~20년 동안 지속되리라고 전망한다. 그래서 주요 명품 기업들이 앞다투어 인도시장에 진출한다. 국내 명품과 수입 명품이 인도 신흥 갑부들의 강력한 구매력을 발판으로 함께 성장해 나간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사리를 멸종위기에 처한 의상 목록에 올려도 무방할 듯하다. 세계화는 본질적으로 일방적인 거래가 아니라 쌍방이 주고받는 공평한 거래이기 때문이다. 최근 에르메스의 기성복 컬렉션과 아르마니 프리베의 맞춤복 라인에 보인 인도인들의 열띤 반응은 명품 업체들이 인도 소비자의 취향에 맞춰 성공하는 방법을 잘 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서구 업체들은 브랜드 인지도와 고객 충성도 구축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인도 업체들은 품질과 일관성을 향상시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한다. 사회적 지위가 점점 향상돼 가는 인도 여성은 윈-윈 국면을 맞이했다.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사회적 기대에 도전할 만한 위치에 이르렀다. 어떤 날 밤에는 비단 사리를 입고, 다음 날 밤에는 에나멜 가죽 미니 스커트를 입는다 한들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러니 다음에 인도에 갔을 때 날씬하고 멋진 여성이 10cm짜리 지미 추 하이힐을 신고, 한정 생산된 보테가 베네타 클러치 백을 들고, 연푸른색 시폰 사리를 휘날리며 기사가 딸린 메르세데스 벤츠에서 내려도 놀라지 마시라. 지금 인도에선 복합문화적 스타일이 유행이다. [필자는 뭄바이에서 활동하는 미술가로 보그 인도판의 편집자문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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