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업체서 빌린 채무는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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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부가 신용불량자 구제 대책의 일환으로 DJ정부 시절 이미 실패한 ‘국민연금 담보 대출’방안을 내놓자 각계에서는 반대 목소리가 높게 일고 있다. |
이명박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걸었던 금융채무불이행자(신용불량자) 구제 대책이 윤곽을 드러냈다. 신용불량자들이 자신이 낸 국민연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기존 금융권의 빚을 갚는 방식이다. 하지만 시행도 하기 전에 말이 많다. 국민연금 담보 대출이 법적으로 문제가 많은 데다 실효성도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방식은 1998년 이미 한 차례 시행됐다가 결국 대출자들이 국민연금을 포기해야 하는 파행으로 끝난 바 있다.
정부는 지난 3월 25일 국민연금을 활용한 신용불량자 구제 대책을 골자로 한 ‘뉴 스타트 2008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신용불량자는 본인이 납부한 국민연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기존 채무를 상환해 ‘신용불량’ 딱지를 뗄 수 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신용회복위원회를 설치해 신용불량자들의 채무를 조정할 방침이다. 국민연금 담보 대출 대상자는 국민연금에 가입한 신용불량자(142만 명) 중 지난해 말 기준 6개월 이상 빚을 갚지 못하는 채무자들이다. 또 신용회복위원회와 금융기관들이 조정한 채무액이 납부한 국민연금의 50%를 넘지 않아야 한다. 정부는 이 방식을 통해 29만여 명이 신용불량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대출한도는 국민연금 납부액의 최대 50%까지며, 대출조건은 2년 거치 3년 분할상환이다. 금리는 시중은행 정기예금 금리와 비슷한 연 3~4% 정도 될 예정이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는 “국민연금을 담보로 약 29만 명의 신용불량자가 최대 3885억원의 대출을 받아 기존 채무를 상환하고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국민연금 담보 대출이 신용불량자 구제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금융권이나 학계, 시민단체들은 실효성이 없다는 판단이다. 오히려 국민연금 도입 취지를 상실하고, 국민의 기초 노후대책마저 잃게 되는 악수가 될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참여연대는 “유일한 노후대책인 국민연금을 담보로 신용회복을 지원한다면 가뜩이나 넓은 국민연금의 사각지대를 더욱 확산시킬 수 있다”며 “1998년에도 국민연금 담보 대출을 시행했지만 결과적으로 국민연금의 사각지대만 커졌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1998년 5월 정부는 외환위기로 실직자가 대거 양산되자 이들을 위한 생계자금 지원 방안의 일환으로 국민연금 담보 대출을 그해 말까지 시행했다. 대출 대상자는 실직으로 소득이 없는 국민연금 가입자들이었고, 대출은 1000만원 한도에서 납부한 국민연금의 최고 80%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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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 조건은 1년 거치 2년 분할상환으로 이자는 연 11.4% 정도였다. 당시 23만7000여 명이 국민연금을 담보로 7854억원가량을 대출 받았다. 국민연금 담보 대출은 실직자들에게 일시적인 생계 지원은 됐지만 생활 형편이 나아지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대출 이자도 갚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연체율이 급증하기 시작한 것. 당시 대출 상환율은 9.5%에 그쳤다. 대다수가 빚을 갚지 못한 셈이다. 결국 정부는 2000년 국민연금법 시행령을 개정해 대출자들의 국민연금 납부액으로 빚을 갚도록 조치했다. 이 조치로 당시 대출을 받은 대다수가 국민연금 납부기간이 평균 7년이나 축소됐다. 그만큼 노후보장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당시 연체로 이자가 불어나 원리금(원금+이자)이 담보물인 국민연금 납부액을 초과하는 수준까지 갔다”며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관련법을 뜯어고쳤고 결과적으로 대출자들은 평균 7년 정도 국민연금 납부기간이 축소됐다”고 전했다.
신용불량자 딱지 떼기 힘들 듯 이처럼 부작용만 양산한 대책을 정부가 대상만 실직자에서 신용불량자로 바꿔 또다시 들고 나온 것이다. 문제는 이뿐만 아니다. 국민연금 담보 대출은 법적으로도 문제가 된다는 지적이다. 국민연금법 제58조(수급권 보호)에 의하면 “연금급여를 받을 권리는 양도 또는 압류하거나 담보로 제공할 수 없다”고 명시돼 있다. 이 때문에 1998년 당시에도 제도 시행을 놓고 반대 목소리가 높았다. ‘연금제도 정상화를 위한 연대회의’는 “국민연금을 담보로 빚을 갚도록 하는 정부의 조치는 법과 배치되는 불법”이라며 “부작용이 큰 데다 위법 사항을 강행하는 배경이 궁금하다”고 꼬집었다. 즉 총선을 겨냥한 포퓰리즘식 처방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부는 법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그 논리로 국민연금법 제46조(복지사업과 대여사업)를 들고 있다. 제46조는 “수급권자의 복지 증진을 위해 자금을 대여할 수 있다”고 돼 있다. 하지만 채무 상환이 복지 증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금융권과 시민단체들의 주장이다. 시중은행 고위관계자는 “1998년 당시는 외환위기라는 특수 상황 때문에 문제(제도 시행 부작용 및 위법 시비)를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이라며 “채무자의 빚을 갚는 것을 두고 복지 증진이라고 한다면 생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 모두가 필요할 때 국민연금을 찾으려 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조치로 신용불량자들이 신용불량 딱지를 떼기도 힘들 전망이다. 신용회복위원회의 채무조정 대상에서 대부업체 빚은 제외됐기 때문이다. 즉 국민연금 담보 대출로 제도권 금융기관 빚을 갚아도 대부업체에서 빌린 돈은 그대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가족부 관계자는 “신용불량자의 채무 정보는 은행연합회를 통해서 받는다”며 “따라서 대부업체 채무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신용불량자 중 상당수가 제도권 금융기관을 더 이상 이용하지 못해 대부업체로부터 대출을 받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반 쪽짜리 조치인 셈이다. 시중은행 여신담당자는 “신용불량자 중 상당수는 대부업체를 이용하고 있다”며 “국민연금 담보 대출로 채무 상환 부담이 어느 정도 해소될 수는 있지만 대부업체 빚을 갚아야 한다면 또다시 신용불량자로 전락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대부업체를 이용한 사람들은 저신용자로 평가 받는 것이 보통이다. 대부업체에 대출 가능 여부만 조회해도 신용등급이 하락하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국민연금 담보 대출로 기존 채무를 상환해도 대부업체 빚이 있는 사람들은 제도권 금융기관으로부터 금융서비스를 받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신용평가회사 관계자는 “사실상 신용불량자들이 가장 먼저 갚아야 할 채무는 살인적인 고금리가 적용되는 대부업체 빚”이라며 “국민연금 담보 대출을 이용해도 대부업체 빚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제도권 금융기관으로부터 제대로 된 금융서비스를 받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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