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2.0의 아이들
교실 2.0의 아이들
지난주 서울 구일초등학교의 5학년 영어수업 시간. “Open your book(책을 펴세요)!” 선생님의 지시에 아이들이 책상 위에 놓인 태블릿 PC(펜으로 쓰는 소형 PC)의 전원을 켠 다음 디지털 교과서를 클릭한다. 먼저 단어 맞히기 게임.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문제를 내고 터치 스크린 형식의 전자칠판에 손가락을 대자 정답이 화면에 뜬다. 옆 교실에서는 6학년들의 수학 수업이 한창이다. 도형 넓이를 구하는 문제를 내자 아이들은 PC 화면에 펜으로 답을 써 내려간다. 담당 교사인 이재현(31)씨가 전자교탁에서 원격으로 연결돼 있는 학생들의 PC 화면을 일일이 점검한다. 아이들이 문제를 제대로 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누구 걸 볼까? 지웅이가 푼 걸 보자.” 이씨가 한 학생의 문제 풀이 화면을 클릭하자 전자칠판에 학생이 쓴 답안이 고스란히 뜬다. 수업을 끝낸 뒤 교사는 “학생들이 언제 자신의 화면이 칠판에 뜰지 몰라 더 열심인 것 같다”고 했다. 6학년 학생인 안정우군은 “멀티미디어 기능이 많아 보통 수업보다 재미있다”고 말했다. “신기하기도 하고 필통이나 준비물이 필요 없어 편해요.” 학교 수업 풍경이 달라진다. 태블릿 PC와 전자칠판, 무선인터넷 같은 첨단기술이 교육현장에 응용되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학습이 가능한 유비쿼터스 학습(U-러닝)도 더는 미래의 꿈이 아니다. 이미 학교 담장 안에서 인터넷 가상공간이 수업에 활용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세계적인 추세다. 캐나다 전자칠판 업체인 스마트 테크놀로지스는 영국에서 이미 2005년에 초등 교사의 69%, 중·고교 교사의 42%가 전자칠판을 사용했다고 보고했다. 호주, 싱가포르, 멕시코, 미국에서도 학교에서 디지털 기술의 도입과 실험이 활발한 편이다. 한국도 디지털 교육을 위한 채비에 나섰다. 교육부가 작년 U-러닝 연구학교와 디지털 교과서 연구학교 30여 곳을 시·도별로 선정해 본격적인 시범운영에 들어간 것이다. “교육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일이다. 4~5년간은 연구학교를 통해 학습 효과와 부작용 등을 차근히 검증할 것이다”고 교육과학기술부 e-러닝지원과 전우홍 과장이 말했다. 지난 5월 9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시아 정부지도자 포럼에서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 한국의 U-러닝 사례를 소개해 화제가 됐다. 이 자리에는 충남 천안시의 입장초등학교 이건모 교사와 6학년 학생 박영웅군이 직접 나와 U-러닝 수업을 시연하기도 있다. 박군은 은행 이용법을 배웠던 얼마 전 수업시간을 예로 들었다. “영호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은행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 태블릿 PC에 필기하고, 찬양이와 하영이는 PC를 들고 은행을 찾아가 직접 이용해 본 뒤 바로 교실에 있는 저와 화상 미팅을 통해 의견을 나눴습니다. 저는 자료를 모아 파워포인트로 발표한 뒤 은행원과 실시간으로 화상 연결해 반 친구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학교 수업이 끝난 뒤엔 집에 가서 사이버 스쿨에 접속해 선생님께서 내준 문제를 풀어 보았습니다. 사이버 스쿨은 내 점수에 맞는 학습자료를 제공해 줬습니다.” U-러닝이 실현되려면 전자칠판과 센서, 무선인터넷 등 하드웨어도 갖춰져야 하지만 유비쿼터스 환경에 맞는 교육 콘텐트가 필요하다. 그 기본 뼈대가 되는 것이 바로 디지털 교과서인 셈이다. 단순히 교과서 내용을 컴퓨터 화면으로 옮긴 게 아니라 참고서, 문제집, 동영상, 게임 등 멀티미디어 자료를 포괄하는 새로운 창작물이다.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이 디지털 교과 개발을 맡아 현재 5학년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음악과 6학년 수학 과목 1학기 과정을 마쳤다. 디지털 교과서 연구학교가 콘텐트 활용에 중점을 둔다면 U-러닝 연구학교는 유비쿼터스 환경을 이용한 다양한 학습모델 개발을 목표로 한다. “학생들이 교실을 벗어나 자유롭게 탐구활동을 하고 그 결과를 실시간으로 교사, 친구들과 공유하도록 한다”고 이건모 선생은 말했다. U-러닝이나 디지털 교과서가 첫째로 내세우는 장점은 ‘자기주도적 학습’이다. 학생들이 직접 디지털 기기나 콘텐트를 사용해 개별학습, 더 나아가 수준별 맞춤학습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어학 수업이 단적인 예다. “영어 선생님이 카세트 플레이어를 틀어주던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KERIS의 이은환 연구원은 말했다. 학생 각자가 헤드셋을 끼고 자유롭게 연습이 가능하다. “선생님이 들려줄 때는 들리니까 듣는 거지만, 본인이 직접 버튼을 눌렀을 때는 능동적으로 배움에 참여하게 된다”고 디지털 교과서 연구학교인 대전 탄방초등학교의 안치순 연구부장은 말했다. “기존의 서책형 생물시간이 해저 사진을 보여주는 거라면, 디지털 교육은 학생이 직접 잠수를 해서 바닷속을 누비면서 깨달음을 얻는 식이다.” 하지만 아직 효과를 단언하기는 이른 감이 있다. 외국에서는 디지털 교실의 학습효과를 검증한 연구 결과들이 있지만(80쪽 인터뷰 기사 참조), 국내에서는 지난해 연구학교가 시작됐고 그나마 본격적인 비용편익 분석이나 인체에 미치는 영향 연구는 올해부터 시작됐다. 뉴스위크 한국판이 만난 연구학교 학생과 교사들은 대체로 디지털 수업에 흥미를 느끼고 정식 도입에 찬성했지만 일부에서는 전자파로 인한 어지럼 증세나 기계 고장, PC 속도 같은 기술적 문제를 지적하기도 한다. 비용도 큰 걸림돌이다. 강명제 구일초등학교 교감은 연구사업 첫해 2억8000만원의 비용이 들고 매년 2000만원의 유지비(교사 연수, 시설 정비 등)가 별도로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다. 보통 한 연구사업의 전체 예산이 2000만원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다(현재는 5, 6학년 중 일부 학급만 시범운영 중이므로 학교 전체로 확대되면 비용은 더 증가한다). 강명제 교감은 “첫해는 교육부의 지원으로 예산을 충당했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구청이나 교육청에 추가 예산을 요청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연구사업 기간에만 예산을 지원할 계획이다. 연구가 끝난 뒤 정식 도입은 각 학교의 자율에 맡긴다는 방침이다. “국가가 일괄적인 도입을 강제할 수는 없다. 지식정보화 시대 흐름에 뒤처지지 않게 기본 인프라를 제공하고 효과를 검증하는 일은 정부의 몫이지만 그 이상은 학교 결정에 맡겨야 한다”고 전 과장은 말했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지금처럼 재정 부담이 크진 않을 전망이다. 교육부의 이재복 연구사는 하드웨어의 경우 가격 하락폭이 커서 현재 150만원이 넘는 태블릿 PC 가격이 4~5년 뒤엔 30만원 밑으로 떨어질 걸로 예상했다. 하지만 민간 차원에만 맡겨둘 수도 없다. 디지털 교실을 도입했을 때 가장 큰 수혜층이 산간 벽지, 저소득층 학생과 특수학생들이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정보 접근성이 낮은 이들이 공교육 환경에서 첨단기술을 접하게 되면 교육격차 해소에 도움이 된다. KERIS 미래학습표준화팀의 고범석 팀장은 “디지털 기술의 개발과 도입을 교육복지 차원에서 본다”며 “산간 벽지 학교에 디지털 교실을 우선 적용하면 보편적인 교육 서비스의 질이 올라갈 것이다”고 설명했다. 특히 디지털 기술은 장애학생들의 학습의 질을 개선할 수도 있다. 서울맹학교에서는 저시력 학생들이 책을 스캔 받아 확대해 볼 수 있는 확대독서기를 기증받아 사용 중인데 조작에 불편함이 따른다. 이런 경우 전자칠판과 디지털 교과서를 설치하면 스캔 할 필요 없이 클릭 한 번으로 글자를 확대해 읽을 수 있게 된다. 실제로 홍콩의 JFK센터는 특수아동 교육을 위해 스마트 보드라는 전자칠판을 사용한다. 시력이 낮은 학생들은 글자의 색깔과 크기를 쉽게 바꿔 읽을 수 있고, 근육장애로 펜을 쥘 수 없는 학생은 터치 스크린에 손으로 글씨를 쓸 수 있다. “학생들의 집중력이 개선됐고 이젠 너도나도 전자칠판 앞으로 나와 한자 연습에 한창이다”고 윙이웡 중국어 교사가 말했다. 한국 정부도 부산맹학교를 디지털 교과서 연구학교에 포함하는 등 특수아동을고려했다. 하지만 저시력 학생뿐 아니라 여러 장애아동의 요구를 아우를 수 있는 신기술 개발과 적용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물론 디지털 교실이 도입된다고 해서 기존의 칠판과 분필, 공책과 연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교육부는 본격적인 디지털 교실의 도입은 각 학교의 자율에 맡기되 기존의 서책형 수업을 보완하는 형태를 장려할 생각이다. 우리 정부의 이러한 방침은 멕시코 사례에 비춰봐서도 꽤나 일리 있어 보인다. 2005년 멕시코 정부는 ‘인사이클로미디어(Enciclomedia)’로 불리는 범국가적 프로젝트를 통해 전국 5만여 개 교육기관에 개당 5500달러 규모의 학습용 PC와 전자칠판, 빔 프로젝터 등을 구축했다. 멕시코 초등학교 5∼6학년 가운데 95% 학생이 디지털 교실의 혜택을 누리게 됐다. 인사이클로미디어는 유례없는 규모와 추진력으로 세계 교육계와 언론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지만, 1년 만에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과도한 비용 투입과 검증되지 않은 효과 탓에 예산이 절반으로 깎인 것이다. 한국의 디지털 교실은 조심스럽게 첫발을 내디뎠다. 사실 태블릿 PC 보급의 의미는 교육 패러다임의 변화나 유비쿼터스 환경 구축 같은 거창한 목표보다 훨씬 간단할지 모른다. 탄방초등학교 안치순 연구부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아이들은 컴퓨터를 게임이나 오락의 도구로 보는 경향이 강했어요. 하지만 디지털 교과서를 만나면서 컴퓨터를 학습도구로 여기는 것 같아 반가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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